산이 보약이다...청파 윤도균의 回甲紀念 지리산 종주 (대원사 ~ 화엄사) 1박 2일

2021. 8. 6. 19:25☎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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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k0pdH64V-k

[50-1] 청파 윤도균 回甲記念 智異山 "대원사~화엄사" 종주 산행

 

옛날 부모님 시절 같았으면 환갑(回甲)이면 성대한 잔치상을 받아 주위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아도 됐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마을에서 환갑 노인을 뵙기가 쉽지 않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큼 인간의 수명이 짧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현대는 회갑을 맞이한 사람이 회갑연을 열면, 흉보는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그 만큼 인간의 수명이 장수해졌기 때문이다. 2004528일은 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回甲날이다. 그런데 그 일생에 한번뿐인 회갑날을 가까운 가족들을 초대해 떠들썩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회갑을 맞아 무언가 내 일생에, 기억에 남는 뜻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다. 그 계획으로 먼저 가족들과 상의 없이 나홀로 지리산 종주 산행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미 교통편, 대피소 예약까지 다 마쳤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나에 뜻을 전했다. 그러자 웬만해선 내가 하는일에 평생을 반대하거나 토를 달지않던 아내가 벌컥 성을낸다. 그러면서 생일날(回甲)날 집도 절도 없는 사람처럼, 혼자 그 힘든 지리산 종주 산행을 떠나려 하냐며 반대를 한다. 그러자 두 아들 아이들도 엄마와 함께 거든다.

 

그렇치만 이미 작정하고 예약해 놓은 모든 스켓쥴을, 변경하는 내 생각에는 불가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은 인정 하는데, 내 생각은 일생에 한번뿐인 그날을 나를 위해, 가장 뜻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결정이라 말하며 내 뜻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아내도 아이들도 하나같이 이구동성 그날은 안되니, 회갑날 지나 당신 원하는 날짜에 말리지 않을테니 맘편히 다녀오라고 간청을 한다. 그 바람에 더 이상 내 고집을 밀고 나갈 수 가 없다. 그래서 결국 회갑날은 가까운 가족들 초대해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다. 내 마음은 다시 어머니의 품지리산에 가있다. 이번에는 이미 가족들에게 사전 동의를 받았겠다. 꺼릴것이 없다. 그래서 일사철리로 2004612~13(12일간) 지리산 대피소 및 교통편 예약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다. 나에 군시절 절친 김봉묵(戰友)과 통화중 지리산 종주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한다. 형 그럼 이번에 형과 함께 자기도 아내, 처재를 동반하고 지리산 종주 한번 했으면 하는데 괜찮겠냐고 묻는다. 친구의 뜻밖에 제안을 들은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기쁘기 짝이 없다. 산이좋아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어머니의 품"이라 불릴 정도로 동경하는 명산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일이면 떠난다. 출산(出山)을 하루 앞둔 기분이 묘하다. 그러면서 그 옛날 나 어린 시절 고향 생각을 떠올린다. 그 시절에는 마을에서 회갑이면 장수하셨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축하를 했다.

 

그런데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새 내가 회갑을 맞았다. 감개무량하다. 그시절 같으면 사랑방에 장죽물고 헛기침 하며 어르신 대접 받을 나이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란 사람은아직 자신이 이팔청춘인줄 알고 감히 지리산 종주를 하겠다고 거리고 있으니, 혹시 내가 너무 나대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겐 그만한 용기와 자신,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지리산 종주 산행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나친 과욕은 금물이다. 예를 들어 나를 기계적 측면에서 효용가치로 따질 것 같으면, 이미 노후되어 폐기처분 일보직전의 기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기계도 사용하는 사람의 관리여하에 따라 같은 기계도 남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내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기계와 또 다른 취급을 받게되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고, 감정이있고, 추진력을 갖었 때문에 가능하다.’ 비슷한 내 또래 중에서도 어떤이들은 세상을 이미 다 산것처럼 늙은이 연습에 익숙져 그자리에 안주하며 꼰대이로 남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했을 때, 나는 자칭물과 기름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과 기름은 제 아무리 휘저어도, 물은 물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따로 논다. 나는 아직은 새로운 인생이모작시대를 만나 내 분수에 맞게 조율하며 개척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2일 지리산 종주 산행 서론이 푼수대가리 없이 늘어졌다. 나에 지리산 종주꿈은 하루, 이틀에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이미 몇 년전부터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수년전부터 산악회 활동을 하며 나름 상당한 횟수의 산행 이력을 쌓았다.

 

그리고 새벽녘이면 기상과 동시 집근처 부평공원에 나가, 매일 15000(10km) 이상을 걸어왔다. 말이 10km지 산으로 따지면 웬만한 산 하나 산행보다 훨씬 더 길고 긴 운동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하체 근육이 웬만한 젊은이들 못지 않게 발달이 되어있다.

 

뿐만 아니다. 새벽 걷기 운동에 이어, 핼스장에 나가 벌써 몇 년째 근력운동 이력도 쌓았다. 그런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특별한 꼰대이가 분명하다.

 

나에겐 스로건이 있다.

걸으면 건강하다. 걸어서 하늘까지다.

산이 보약이다. 나는 산으로 보약 먹으러 간다

꼭 하나의 취미 활동을 하자다.

이것은 나에겐 신앙같은 내 생활의 신조다.

 

2004612일밤 11시다.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4시간여 달려 진주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배낭멘 여행객은 나 뿐이다. 역 주변은 사방이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데, 나홀로 댕그마니 남어 고속버스편으로 도착하게될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지나는 택시 기사들마다 나를 보더니, 귀찮을 정도로 지리산 가실거면 자기차를 타고 가자고 흥정을 청한다. 친구일행이 도착 하려면 아직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택시기사 한분이 다가오더니, 친구가 올때까지 기다릴테니 나더러 자기차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기다리자고 한다.

 

이곳 택시 기사님들에겐 성삼재나 대원사까지의 택시비는 5만원으로 정해진 듯 하다. 그렇지만 탑승을 할 때 흥정을 하면 얼마라도 가격을 내려 목적지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친구가 올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기사님의 친절이 고마워 일단 탑승을 한다.

 

그리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면서 말한다. 기사님 같은분들의 친절도가 이 지방을 찾는 고객들에게 큰 홍보가 될것이라 말을 하니, 운전기사(염성길 : 011~9533~9527)님께서는 오히려 손님에게 좋은 말씀 듣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하며 거의 반시간여 기다려 친구네 일행들이 도착하자 배낭을 받어 차에 싫어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그러다 보니 인적이 드문 객지 타향에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던지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이때 시간이 새벽 2시인데, 얼마전에 열반하신 이 고장 출신 성철스님의 생가와, 남명 조식 선생님의 사당이 모셔진곳을 일부러 애돌아 주며 설명을 해주신다. 기사님의 분에 넘치는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밤 유평에서 천왕봉, 치밭목 이정목에서부터 본격적인 대원사 ~ 화엄사 구간 지리산 종주 들머리를 들어선다. 머리에는 헤드랜턴을 켜고, 철망 울타리에 열려있는 철문을 들어선다. 그 기분은 마치 수십년전 현역시절에 DMZ 매복 근무를 위해 철책문을 들어서는 수색중대원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곳 등산로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지, 진행 방향 구분이 없을 정도로 숲이 우거졌다.

 

이날 산행길에 나는 명색이 대장이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산행을 경험 했지만, 언제나 대장이 리드하는 그늘 아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찍는일에만 신경 쓰며 산행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사실은 지리산 종주 경험이 있어도 지리에 해박하지 못하다. 그런 내가 이날 산행에 책임을 진 대장이라 생각을 하니, 그 어깨가 사뭇 무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겁부터 난다. 마치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뒤로 한발 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 가슴에 스스로 새긴 작전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정신을 가다듬어 조심조심 한발 한발 약진 앞으로다.

 

일행들 너도나도 무언의 산행이 이어지는데, 헤드랜턴 불빛에 새벽잠을 깬 각종곤충 그중에서도 손바닥 크기만한 불나방들이 렌턴을 향해 날아들어, 나방가루 세례를 퍼붇는다. 그런가 하면 그 옛날 고향 마을에서 밤이면 바깥마당에 모깃불 펴놓고, 무더운 여름밤을 보낼 때 하늘에 수도없이 많은 은하수 별을 보며, 별하나, 나 하나, 별둘, 나둘 하며 별을 세던밤에 보았던, 반딧불 무리가 동에번쩍, 서에번쩍 날아다니며 우리 일행 가는길을 밝혀주며 길동무가 되어준다.

 

그리고 저만큼 올려다 보이는 머리위 수목에선 일명 쪽박새가 우리 일행 야간 산행길을 따르며 구성지게 설게 울어댄다. ‘쪽빡 바꿔줘, 쪽빡 바꿔줘하면서......,

 

내가 언제인가 지리산 종주할 때다. 그때도 지금처럼 노고단을 향해 올라가는데 쪽박새가 설게 울었다. 그때 들은 일행의 쪽박새 전설 소개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어머니를 일찍 여읜 딸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새 엄마를 맞을 때, 새엄마가 자신의 딸을 데리고 들어와 밥을 지을 때 마다, 자신 데리고 온 딸에게는 큰 박아지 밥을 가득 퍼 주고, 남편의 딸에겐 아주 작은 박아지에 너무 조금씩 밥을 조금씩 주어, 나중에 전실딸이 배가고파 굶어죽었다. 그리고 그 딸이 언제부터인가 쪽빡새가 되어 매일 자신이 살던 집근처에 날아와 서모만 보면 쪽박 바꿔줘, 쪽박 바꿔줘하면서 울었다는 전설의 새가 울어댄다.

 

그것도 새벽 3시경부터 먼동이 트기까지 줄기차게 우리를 따르며 울어댄다. 적막강산(寂寞江山) 꼭두 새벽에 쪽박새 전설을 새기노라니 왜 그렇게 짠하고 가슴이 아프던지......, 가슴이 먹먹하다.

 

우와! 드디어 산행시작 4시간 반만에 치밭목산장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동안 한 사람의 등산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대피소를 거치지 않고 하산을 하는 등산객 한분이 지나가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오늘 대청봉에서 일출을 만나셨나요.’ 하니 날씨가 흐려 일출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상하다. 우리가 본 치밭목산장 인근에서 본 밤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인 하늘에, 눈썹처럼 예쁜 그믐달을 보았다. 그래서 천왕봉 일출이 장관일것이라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아니라니, 실망이다.

 

그리고 잠시후 다시 하산하는 등산객을 만나 다시 천왕봉 일출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이분들은 난생처음 장관 천왕봉 일출을 보았다고 자랑을 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냥 지나치는 만남이라해도 두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상이하다.

 

사람들 이야기가 지리 종주는 화엄사 ~ 대원사 구간 종주가 정통 지리 종주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것은 주장 하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어떤 공원을 한바퀴 도는데, 우로 돌던 좌로 돌던 운동장 한 바퀴는 다 똑 같은 거리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전자의 이야기는 저혀 팩트(fact)가 아닌 근거없는 개인의 주장에 불과 한 것이다.

 

아닌 밤중 유평에서 종주를 시작해,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눈에 들어오는 지리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이던지 그 표현을 글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된다.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좋은 절친(切親) 가족과 함께 지리종주를 하고 있으니, 이날본 지리 풍경은 내 생애 본 지리 풍경중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추우강남(追友江南)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공감을 한다.

 

이어지는 코스가 발길을 달리 할때마다 바뀐다.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수직에 가까운 철고가사다리 구간을 올라야 하는가 하면, 그 위에 올라 먼발치로 바라보는 지리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꿈에서 본 금수강산 방불케 걸판지다.

산행 이력이 나름 꽤 된다는 내가 힘들어 할 정도의 산행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런데 나와 동행 한 친구와 일행들 힘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지리의 빼어난 풍경에 빠져들었나 보다. 얼굴이 수수팥떡 해먹다 불낸사람처럼 시뻘겋다.

 

그런데도 우리 산행 코스 잘 결정한 것 같다고 흐뭇해한다. 그 모습을 보니 이번 지리종주 산행을 선택한 입장에서 조금은 마음이 한결 가볍다.

 

여기가 바로 그동안 오르고 싶었던 지리산 써리봉 구간이다. 오름길은 대부분 데크목 계단으로 가팔르게 천국의 계단 오르듯 한 계단 한계단 오른다. 그동안 내 생각에 써레봉은 봉우리가 여러개로 형성되어 있을것이라 짐작을 했었다.

 

! 그런데 내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러나 앞으로 갈길이 구만리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예약해 놓은 연하천 대피소까지 가려면 더 이상 느림보 산행을 해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50분을 걷고, 10분 쉬는 작전으로 천왕봉을 향해 간다.

 

고생끝에 낙이온다란 말이 실감난다. 유평에서 산행시작 7시간 40여분 200461210:35, 그동안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품, 지리산 천왕봉(1915m)에 올랐다. 천왕봉엔 벌써 많은 등산객들이 올라 인산인해를 이루며, 천왕봉 정상석을 배경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우리 일행도 순서를 기다려 몇 컷의 인증샷을 남기고, 정상을 비켜 자리를 잡고 친구와 함께 오른 지리산 천왕봉에서 가볍게 정상주를 따라 건배를 나눈다. 이때다. 갑자기 산행을 떠나기 전날 할아버지가 지리산 종주 떠난다는 할머니 말을 듣고, 놀이방 등원 가방을 메고 할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던 4살 손자아이 도영이 생각이 난다.

 

녀석은 할아버지가 늘 산행을 다녀와 찍은 사진을 카페, 블로그, 한국의 산하에 올리는 것을 볼때마다 할아버지 저도 할아버지 따라 산에 가고 싶어요.’하던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녀석이 조금만 컸으면 남들처럼 손자녀석 손잡고 산행하는 것이 나에 바램이다. 도영아!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이번 지리산 종주 하며 많이 찍은 사진, 집에가서 보여줄게 기다려라.

 

서둘러 통천문을 내려서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단 아침겸 점심식사를 준비한다. 나는 산행 떠나기전 집에서 아내에게 부탁해 검정콩을 많이 넣고 밥을해, 이 밥을 다시 누릉지를 눌려 넉넉히 챙겨왔다.

 

대개의 산꾼들은 대피소에서 간편하다고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코펠에 누룽지 넣고 몇 분정도 끌이니, 깊은 산중에서 마치 어머님 생존하셨을 때, 만들어 주셨던 누룽지 맛처럼 구수한 누룽지를 먹는다.

 

반찬도 여러 가지 필요없다. 많으면 좋겠지만 장거리 산행에는 모두 짐이다. 나는 찬류로 (맛소금, 참기름, 참깨)를 챙겨왔다. 맛소금에 참기름, 참께 듬뿍넣어 잘 섞어, 누룽지 한 술에 참기름 소금 찍어 먹으면 누른밥이 술술 넘어간다. 아마 그 맛을 모르는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힘든 산행에 찬이 너무 허술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거리 산행은 원래 힘이 드는데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적당량의 염분을 보강해줄 필요가 있다. 대신 체력을 보강할 수 있는 간식류를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출발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때다. 한국의 산하를 통해 알게된 풍악(豊岳) 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선배님 저는 벽소령에서 출발을 하는데 지금어디쯤 계셔요.’ 하고,지리산에선 대부분의 구간에서 휴대전화가 터지질 않는데, 이때 휴대폰을 열고 반경 100m 범위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의외로 휴대폰 통화가 되는곳이 있다.

 

풍악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장터목에서 세석으로 풍악님은 세석에서 장터목 산장으로 오며, 가는길에 만나기로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복장 색을 알려주고 우리는 다시 촛대봉을 향해 간다. 그런데 이 구간은 등산로가 완만해, 나는 선두에서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다 보니 뒤를 따르던 친구와 가족들이 말한다. 형님 영락없이 북한군 124군 부대 속보행국 같다고 하며 약간만 서행하자고 한다. 그러나 장거리 산행은 언제 어느 시간에 체력이 소진되어 진행이 힘들어 질때가 있기 때문에,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약간 스피드를 느춰 앞서간다.

 

그러다 보니 천왕봉에서 부터 우리 일행 뒤를 따르던, 젊은 회사직원들이 촛대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말한다. ‘어르신들 정말 대단하세요. 특히 아주머님들이 더 대단하시다라고 격려를 한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과 업치락 뒤치락 그들이 한번 선두로 나서는가 하면, 얼마 모가 또 우리가 젊은이들을 앞지르며 산행이 이어진다.

 

세석대피소를 저만큼 아래로 내려다보며 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세석에서 벽소령 구간이 6.3km로 알고있는데, 이곳 이정표에는 세석~벽소령 구간 거리가 9.3km로 되어있다. 맥이 빠진다.

 

혹시 국립공원관리공단측에서 실수로 6자를 9자로 새긴 것 아닐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은 아닐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혼돈스럽게 세워진 이정표 때문에,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혼돈을 했을까 생각하니,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무성의한 운영실태에 대해 화가난다.

 

유평에서 산행을 시작해 화엄사까지 가는 일정은, 세석과 벽소령 구간이 나에겐 가장 마의 구간 같은 생각이 든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백개의 고가 사다리처럼 오르는 계단 구간을 오를 때,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지리산 종주를 완주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과 같은 페이스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예약된 뱀사골 대피소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진도만 주장하다 자칫, 일행들이 오버페이스 하면 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순간 순간 속보 산행을 하다, 느리게 걷기를 반복하며 간다.

 

그런데 이때다. 100m 전방에서 나를 본 풍악(豊岳)님게서 윤선배님 아니시냐는 소리에 돌아보니, 세상에~~~ 그동안 한국의산하에 산행기를 쓰며 서로 댓글, 답글로 친하게 지냈던 풍악님을 오프라인 상에서 만났다. 그것도 둘이다 지리산 종주를 하던 도중에......,

 

그러나 만남의 반가운 시간도 잠시다. 서로는 갈길이 반대 방향으로 지리 종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음기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각자의 갈길을 간다. 풍악님 가는길에 무탈안전 산행 이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드린다.

 

세상 참 넓고도 좁은 것 같다. 그동안 한국의 산하에 산행기를 쓰며 지난번 의상봉 산행때 딱 한번 만난, 부산의 이우원님 부부님를 연하천 산장에서 아침을 먹다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이우원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 보신다. 그런데 이우원님은 이미 내 이름까지 알고 인사를 하신다.

 

그런데 나는 안면은 있는데 성함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결례를 무릅쓰고 필명(닉네임)을 물으니 이우원이라고 하시며, 부산의 새한솔 산악회 서디카님과 이두영 회장님 말씀을 하신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아쉬움을 뒤로하며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우리는 또 다시, 각자의 산행지를 향해 갈길을 간다.

 

이번 지리산 종주에서 우연히 만난 풍악님, 그리고 이우원님과 사모님 힘든 산행에서 만나 너무 반가웠고 기뻤습니다.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산악인들에게 어머니의 품이라 칭하는 힘든 지리에서 만나게 되어 더욱 뜻있고 기뻤습니다.

 

우리는 무려 15시간 산행끝에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 하니 오후 4시다. 이곳 대피소 추가 예약은 오후 7시에 마감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예약한 하여놓은 뱀사골 대피소까지 가려면 3시간이내에 도착을 하여야 하는데 일행중 여자분들이 더 이상은 못가겠다고 주저 앉으신다.

 

대책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벽소령 대피소측에 우리 입장 사정이야기를 하며, 혹시 예약하고 안온 사람들 자리가 있으면 자리를 달라고 사정을 한다. 그러자 벽소령 대피소 답변은 한마디로 칼이다. 안된다고 딱 자른다.

 

이미 예약자들이 모두 입실키로 되어있어 더 이상 추가 인원을 받을 수 없다며, 더 시간 늦어지기 전에 다른 대피소를 가보라는 식으로 일언지하에 말을 자른다. 어쩔 수 없이 뱀사골 대피소에 전화해, 우리일행이 지쳐서 밤10시 넘어 도착을 할것 같은데 자리좀 남겨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자 물론 그렇게 해드릴 수 는 있는데, 지금 시간에 벽소령에서 뱀사골까지 도착 하려면 밤 12시 되어도 쉽지 않을것이니, 야간산행중 만약 발생할지 모르는 안전사고가 염려되니 가능하면 벽소령 대피소에 사정 이야기 하고 그곳에서 일박 하시라고 친절히 안내를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벽소령 대피소에, 여자분들과 그리고 나이 먹은 나의 체력으론 야간 산행은 불가하니 좀 봐달라고 사정을 한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NO. 그러면서 다른 대피소를 가다 문제가 발생을 하거나, 벽소령 대피소에서 노숙을 하다 문제가 발생을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일언지하에 대화를 끈어버린다.

 

소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에게 무책임한 냉대를 당하고 보니, 속으로 참고있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우선 저녁부터 지어 먹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대피소에 이야기 해보아 만약, 또 다시 말도 못부치게 하면 일단 노숙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꼭 살어서 귀가하여, 지리산 국립공원관리공단 벽소령 대피소 직원들의 고압적인 근무 자세에 대해, 어떤 루트를 통하던 꼭 시정하여 다시는 등산객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공단직원들의 근무 기강을 바로잡고 말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이때다. 갑자기 대피소에서 안내 방송을 한다. 현재 이곳 대피소에 머물며 예약을 안한 등산객들은 안내소에 와서 어린이, 장애인, 여자, 년장자 순에 의거 방 배정을 하겠으니 와서 예약을 하라고......, 이상하다. 조금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사정을 하여도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다른 대피소를 찾으라던 직원들의 입에서 방 배정이라니......,

 

이유야 어찌되었던, 순서를 기다려 방 배정을 받았다. 다행히 네 사람중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방배정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순간적으로 대피소 직원들에게 야속했던 마음이 눈녹듯 녹아 내린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 그렇게 자리 없다던 예약 자리가 오히려 남는 것을 보았다.

 

잠들기전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벽소령 대피소 직원들이 나에게 취했던 행동에 대하여, 아무래도 무조건 이해로 덮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들 말대로라면 예를들어 대기자 명단을 받았다가 예약자가 100% 참석 하게되면, 그동안 기다렸던 대기자들이 항의를 하는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대기자 명단을 못받고 다른곳으로 가라는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예약자들이 다 차지 않었을 때, 입실을 시켜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리가 나지 않으면 이의제기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등산객 안전을 외면한체, 야간 산행이던 노숙이던 마음대로 하다 사고가 나는 것은 책임이 아니라는 식이다.

 

대피소란 곳은 원래 등산객의 안전 산행과 사고 예방에 대비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줄도 모르고 내가 정말 벽소령대피소 직원들 말대로, 다른 대피소를 찾기위해 야간산행을 하다, 만약의 경우 사고라도 발생했다면, 우리는 무모하게 야간 산행을 하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로 도매금으로 매도 당했을 일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분명 벽소령 대피소 직원들의 고압적자세는 등산객 안전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고를 유발케하는 하는 행동으로, 이런식 국립공원관리공단 운영을 위하여 국민의 혈세가 낭비하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측은 대피소 요원들의 고압적인 근무 기강을 반듯이 바로 잡어 등산객 안전을 최우선을 목표로 운영 되어야 할 것이다. (대피소 추가예약 입실정 있었던, 나와 공단 직원들과의 주고받은 언쟁 이야기는 생략키로 한다.)

 

[50-2] 청파 윤도균 回甲記念 智異山 "대원사~화엄사" 종주 산행

 

1편에서 계속

 

장거리 산행에 지친 상태다. 그런데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숙박 문제로 신경을 쓰다 보니,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잠을 이룰 수 없다. 아마 평소의 잠자는 시간이 매일 2시 반경인데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들어 그런것 같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다.

 

마음 같아선 일어나 산행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장거리 산행에 곤히 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폐해를 줄까봐, 멀뚱멀뚱 눈을 뜨고 시간을 보내자니 죽을 맛이다. 하지만 모처럼 함께한 친구 가족들과의 지리산종주를 무사안전 완주를 위해, 마음을 달랜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병아리 오줌만큼 잠이들어 약 1시간 정도 잤다.

 

잠결에 깜짝놀래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3:30분이다. 옆에서 곤히자는 친구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니, 친구도 아마 깊은잠이 들지 않었었던지 서둘러 기상해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온다. 벽소령의 새벽 공기가 상큼하다. 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의 속삭임이 재잘재잘 들리는 것 같다.

 

그 별들을 보노라니 어린시절 고향 마을에서, 하늘에 별을 헤이며 걷다. 뚝방 아래 논으로 고꾸라져 물에빠진 생쥐꼴이 되었던 어린시절 추억이 아련하다. 그동안 도심에 찌들어 살다, 어머니품처럼 푸근한 지리의 자연속에서, 선명한 별을 보니, 새벽 정기를 받은 듯 근력이 꿈틀거린다.

 

그 사이 친구는 아내와 처제를 깨워, 새벽 산행을 위한 배낭점검을 마치고 04:00시 정각, 우리들은 벽소령 ~ 연하천 산장 방향으로 새벽산행 발길 내딛는다. 그런데 이구간은 집터미만한 돌덩이들로 너덜 구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혹시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 아닌가 염려가 된다. 무턱대고 갔다가 나중에 알바가 확인되면 후회막급이다. 나는 일행들을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고, 왔던길 뒤돌아가 진로 확인을 하니, 다행히 알바가 아닌 정상 코스를 가고 있는 것이 맞다.

 

왼쪽 나무사이로 보이는 흰점 같은것이 그믐달이다. 그런데 이시간 동녘 하늘은 일출이 솟으려는지 온통 시뻘겋다. 옳지. 잘됐다. 잘 하면 그믐달과 일출, 두 장면을 함께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을 것 같다. 이 모두 꼭두새벽 일찍암치 산행을 서두른 덕이다.

 

선답자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리산 일출을 보려면 삼대를 빌어야 운좋게 볼수 있다.’라고......, 그 일출을 보기 위해, 나는 일행들을 독촉하지 않고 나홀로 속보로 앞서 간다. 형제봉 암릉에 올라 지리의 일출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자 친구와 가족들도 어느결에 내 뒤를 따라, 우리는 운좋게 4명이 나란히 동녘하늘에 떠오르는 지리의 일출을, 형제봉 암릉에 올라 조망하는 행운을 얻었다.

 

연하천 산장에서 누릉지를 끓여 아침 식사를 푸짐하게 했다. 이어 이날 진행할 산행 계획을 점검해 보니 빨라야, 정오에 노고단에 닿을것 같다. 그런데 다행히 연하천부터는 등산로가 예상외로 완만하다. 그러나 긴장을 느추어선 안된다.

 

나는 일행들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 속보 산행으로 간다. 그러자 친구와 일행들도 나의 의도를 간파한 듯 일언반구(一言半句)없이 묵묵히 내뒤를 따른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때다. 사진찍는 나를 비껴, 여성 두분이 나를 앞질러 선두로 나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밀고, 당기며 산행이 이어진다.

 

이런 우리를 따돌릴 욕심인지. 어제 천왕봉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 뒤를 바짝 추격을 하던, 현대중공업 젊은 친구들이 슬그머니 우리 일행을 추월해 앞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우리 더러는 새마을호고, 자신들은 KTX 고속철이되어, 먼저 추월 한다며 천천히 오시라고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전날부터 이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반 산행을 했다. 그들을 볼 때 마다, 젊음이 좋다는 것을 부러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우리를 새마을호로 한자락 낱춰 불러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웬 새마을호까지, 느림보 거북이 아니길 다행이지......,

 

그렇게 연하천 대피소에서 젊은 ktx 현대중공업 직원들에게 추월을 당한후, 이제 다시는 젊은이들을 따라 잡을 수는 없겠구나 생각을 한다. 그들을 그렇게 보내고 우리는 철저히 50분 걷고, 10분 휴식을 취하는 주법(走法)으로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산행을 이어 간다.

 

그러다 보니 땀이 주체할 수 없이 흥건히 젖어들어, 영락없이 옷 입은채로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다. 땀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이 난다. 나 어린 시절이다. 뜨거운 대낮에 낫으로 보리를 벨 때다. 덥기는 하죠. 땀은 주체할 수 없지요. 여치는 찌르르, 찌르르 울어 대지요. 그런데다 보리 특유의 깔깔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요. 이때 흐르는 땀을 씻을 수건도 귀한지라. 보리대를 양손에 잡고 흐르는 땀을 훑어 내렸었다.

 

그렇게 똥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촌부의 아들인 내가, 좋은 시절 잘만나 회갑(回甲)이라고 팔자좋게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선, 내 인생도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닌 것 같다.

 

보릿고개 생각 하니 생각난다. 우리 부모님 당신들 평생 6남매 자식 새끼 뒷바라지로 고생만 죽도로 하시다, 호강한번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계셨으면 늦게 철난 못난 아들놈 효도도 받아 보실 수 있었을텐데......,

 

두 분 부모님 생각하니 갑자기 왈칵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며칠후면 아버님 기일이다. 산행 끝나고 귀가하면, 아버님과 조상님들 모신 가족묘 참배를 다녀와야 겠다.

 

산행하며 쓸때없이 이런저런 잡념을 갖었다. 그런데 이때다. 갑자기 우리 가는길을 비스듬이 누운채로 막고있는 나무에, 꽝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얼마나 쎄게 부딪쳤으면 머리가 띵할 정도다. 그 바람에 가던길을 멈추고 이마를 살피는데, 세상에 맙소사. 금방 이마에 밤톨만한 혹이 생겼다. 불헹증 다행인 것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제어하기 위해, 머리에 두른 스카프 덕을 봐, 그만하다.

 

친구와 나는 35년전 25사단 사령부 본부중대 근무할 때, 친구는 법무부, 나는 민사참모부 요원으로 만난 사이다. 그런데 그때 맺은 전우애가 평생을 함께하는 인생의 동반자로 남아, 이렇게 가족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다. 친구는 나보다 네 살인가 손 아래다.

 

청년 시절 친구는 인물, 성격, 재치등등, 군바리 세계 남자들이 보아도 부러운 꽃 미남이었다. 그런데 흐르는 세월 앞에는 삼천갑자 동방삭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영원히 불변할 것 같던 친구의 머리에도 언제 부터인가 하얀 백발이 휘날린다.

 

그러나 비록 몸은 백발이지만, 그동안 걷기 운동과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은 한 체력을 한다. 1년 전이다. 그때도 친구와 나는 성삼재에서 천왕봉, 중산리로 하산하는 지리종주를 같이 했었었다. 그때 친구는 발톱이 뽑혀 나가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종주를 완주했다.

 

친구는 그때 종주를 마치고 귀가해, 두 아들앞에 지리 종주를 했다고 자랑삼아 말했더니, 두 아들중 한 아들이 지리종주는 화엄사~대원사, 대원사~화엄사 종주가 아니면 정상 종주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대원사 ~ 화엄사 종주를 아내와 처제까지 동반하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한다. 이번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종주 마치고, 두 아들 앞에 당당하게 설것이라며 웃는다. 그래서 내가 거든다. 그렇게 아들의 인정이 중요하면 내가 화엄사 주지스님 인증 싸인 받아준다고 하니, 형님 그건 좀......, 하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마냥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모습 그대로다.

 

200461203:00에 지리산 등정 후, 물이귀해 세수도 못하고 이도 가글로 대충 했다. 그런데 노고단 대피소 공동 취사장에 도착하니 수돗물이 콸콸 쏫아져 나오고, 통나무 의자까지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누릉지를 끓여 나누어 먹는다. 물론 친구와 나는 건배도 한잔씩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정리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섬세한 산행 준비을 했는지 지리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 나니, 배낭에 남는 것은 소지지 몇알 뿐이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식사를 끝내고 다시 걸망을 멘다. 이제부터 우리가 갈길은 화엄사를 향해 하산하는 코스다. 그런데 지리산 종주 한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화엄사 노고단 구간이 지리 종주중 가장 힘이 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화엄사에서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등산이 아닌 하산이니, 걱정은 내려놔도 된다. 노고단을 뒤로하고 화엄사 구간(눈썹바위)을 내려선다. 그런데 생각보다 예상외로 이곳 등산로는 편하고 안전하다. 한가지 흠이라면 특별히 선경의 풍경들이 없다.

 

한가지 있다면 우리가 이 구간 지나는 시간이 오후 3시경인데, 웬놈의 새까만 산 모기떼가 편대를 지어 달려든다. 아마 우리 몸에서 나오는 땀 냄새를 맡고 그러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흐르는 땀 닦으랴, 모기떼 쫓으랴 첩첩산중을 걷는 고통처럼 생고생길이 이어진다.

 

바람한점 불지 않는 길고 지루한 화엄사 하산길이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지는데, 마침 참샘터 푯말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 물소리가 난다. 확인하니, 이 무더운 날씨에 제법 줄기찬 물살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이다.

 

그러다 보니 떡본김에 제사지낸다.’란 말처럼, 잠시 발이라도 물에 담그고 휴식을 취할량으로 참샘터에 내려서니,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란 말처럼 인적이 드문 계곡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 바람에 여자 들은 저 만큼 아래로 내려가 바위 뒤에서 발을 담그고, 친구와 나는 견우직녀의 직녀들처럼 훌훌 옷을 벗어 나무에 걸쳐놓고, 달랑 팬티 한모금 걸친체 한길이 넘는 회오리 물결속으로 첨벙 빠져든다.

 

그런데 계곡물이 얼마나 차던지 영락없이 어린시절 살얼음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렇지만 애써 참아본다. 명색이 사나이가 요정도 냉수에 인내를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단 2분을 버티지 못하고 물에서 나와 오들오들 그늘에 몸을 말린다.

 

얼떨결에 지리 종주길에 계곡물에 미역 감는 행운을 얻었다. 이번 우리의 지리 종주는 알먹고 꿩도 먹는 행운의 산행이었다. 내 평생 언제 또 다시, 화엄사 계곡에 몸 담가 미역 감는 행운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오래오래 남는 멋진 추억이 될 것 같다.

 

시원하게 미역도 감았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이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드디어 이번 화엄사 ~ 대원사 지리종주 구간의 마침표를 찍는 화엄사 연기암 가는 아스발트 포장도로를 만났다. 그런데 주변을 자세히 보니 화엄사 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았다.

 

좋았다 망한 기분이다. 서둘러 연기암 사진 몇 컷찍고, 다시 아래로 화엄사로 서둘러 간다.

 

걸어도 걸어도 끝 없이 이어지던 아스발트길을 버리고, 내려서니 비로서 화엄사 가는 돌 징검 다리가 보인다. 깡충깡충 돌다리를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건너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감싸며 땀을 씻어준다. 그 바람을 맞으니 어릴적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뭇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땀을 씾어준데요.

 

그 사이 철옹성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화엄사 담장길이다. 집더미 보다 큰 자연석으로 사찰담을 쌓았다. 담장만 보아도 그 위용에 내가 작아진다. 그럼 화엄사는 얼마나 큰 사찰일까.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화엄사 경내로 스며들어 사찰을 돌아보는 것으로 대원사 ~ 화엄사 구간 지리종주를 모두 마친다.

 

화엄사 사찰 소개글 하단에 쓴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지리산은 말이없고, 칠불도 또한 설함도 없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도 없으니,

무심이랴야 백운과 함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