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327] 제3장 서론과 결론 ~ ▶ 비논리적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

2020. 5. 5. 18:34☎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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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327] 제3장 서론과 결론 ~ ▶ 비논리적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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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머리가 하얗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전권을 타자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제3장 서론과 결론

 

글이란 그 성격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식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일반적인 글의 형식을 들라고 하면 바로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는 삼단구성의 형식을 들 수 있다. 삼단 구성의 형식이란 서론을 도입부로 삼아 일단 과제를 제시하고 그 다음 본론을 전개부로 삼아 과제를 구체적으로 해명한 뒤 마지막으로 결론을 정리부로 삼아 주장이나 대의를 집약하는 형식을 말한다. 흔이 말하는 사단구성이니 오단구성이니 하는 형식 역시 결국은 특수한 효과를 노리고 이러한 삼단구성의 형식을 조금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구성이나 오단 구성 등이 삼단구성을 변형한 것이라는 것을 젠제한다면 삼단 구성은 설명이나 논증과 같은 놀리적인 글에는 거의 빠짐이 없이 채택되는 글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표현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비논리적인 글들 역시 삼단구성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는 경우를 적잖이 볼 수 있다. 삼단구성의 형식이 이처럼 일반적인 글의 형식인 만큼 그 구체적 모습을 자세히 알아두는 것은 앞으로 글을 쓰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삼단구성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본론은 과제의 구체적 해명을 담당하는 부부니므로 화제의 성격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론과 결론은 화제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대부분 일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본론의 모습에 대한 설명은 피하고 서론과 결론의 모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1. 서론에 대하여

 

1) 서론의 성격

 

사람도 그러하듯이 역시 호감을 주는 것이 되려면 첫인상을 좋게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서론은 바로 글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설명하는 서론의 성격과 좋은 서론의 요건등을 잘 공부하여 자신의 글이 바람직한 첫인사을 남기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서론은 한마디로 무엇을 왜 어떻게 쓰는가를 밝히는 부분이다. 즉 서론에는 쓰고자 하는 화제, 이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그리고 이를 쓰는 방식 등이 담겨야 한다. 그러나 학술적인 논문과 같이 엄격한 양식의 글이 아닌 이상 굳이 이러한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쓰는 글의 성격에 맞는 서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성격의 글이건 서론에는 반드시 담겨야 할 내용들이 있다. 주의환기란 독자가 그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독자의 주의를 끄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글의 첫부분을 조금 읽어보고는 그 글을 끝까지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글의 첫부분은 독자가 그 글을 긑가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이것이 서론에 주의환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도한 글의 전반적인 내용과 성격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 글을 읽으려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글의 첫부분은 반드시 그 글이 이제부터 다루게 될 화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함으로써 독자가 내용의 대강을 추측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서론에서 화제제시가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대체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서양식으로 꾸미고 있다. "목은 잘라도 머리털은 못 자른다'고 하던 구한말의 비분강개를 잊은지 오래다. 외양뿐 아니라 우리가 신봉하는 종교, 우리가 따르는 사상, 우리가 즐기는 예술, 이 모든 것이 대체로 서양적인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이 또한 예외가 아니다. 피와 뼈와 살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았을 뿐, 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서양에서 받아들인 것들인 듯싶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놓고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찾고 이를 계승하자고 한다면,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나 국수주의로 오인되기 알맞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러면 민족문화의 전통을 말하는 것은 반드시 보수적이라는 멍에를 매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문제(問題)에 대한 올바를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전통이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기백,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 중에서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의 서론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서구문화가 판을 치는 오늘날의 상황을 진술함으로써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를 환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 글의 화제, 즉 전통이란 무엇이며 전통은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아주 짜임새 있는 서론이라 하겠다.

 

2) 서론의 요건

 

▶ 가벼운 내용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괜히 무거운 내용을 끌어안고는 골머리를 썩이고 싶은 독자는 없다. 전문적인 학자이거나 절실한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독자는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잇는 가벼운 내용의 글을 선호한다. 다라서 글의 서두는 되도록이면 가벼운 내용이어야 한다.

어려운 개념이나 난해한 표현으로 글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 쓸데없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어서이다. 이런 서둘를 보면 독자는 절망한다. 혹은 비웃는다. 서론이 이 정도니 그 뒤의 내용은 보나마나라고 생각하고 글을 집어던지게 될 것이다.

가벼운 내용을 쓸데없이 무거운 내용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거운 내용이라 하여도 가벼운 내용을 바꾸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학자와 같이 생각하고 대중과 같이 말하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깊이 하되 표현은 쉽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론은 무엇보다도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을 미리 말해서는 안된다

결론에 해당하는 주장이나 견해를 미리부터 명확하게 제시해서는 안 된다. 결론을 뻔히 알고 있는 글에서 독자가 흥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또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주장을 밝히는 것은 그 주장이 감정적이거나 성급하다는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주장에 대한 인상이 너무도 강하여 나머지 내용이 그 주장을 위해 억지로 메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풍길 수도 있다. 주장은 어디까지나 근거의 제시를 통해 자연스럽게 펼쳐저 나와야 하는 것이다.

흔히 서론의 화제제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글의 화제를 간략히 언급하여야 한다는 말을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말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화제제시는 화제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통해 독자가 글의 전반적인 성격과 방향을 추측하게 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자신이 지닌 주장의 전모를 본격적으로 서술한다면 그것은 결론이지 서론이 아니다. 결론을 이미 읽었는데 다시 본론을 읽고자 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글읽는 이에게 글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사람도 가끔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쟁점에 대해 찬반의 의견을 밝히라는 과제가 주어진 논술문을 쓰면서 서론에 찬성한다 또는 반대한다 등의 결론적 주장을 딱 부러지게 말해놓고 글을 쓰는 학생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그렇한 방식이 글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줄지는 모르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단점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한번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

본론에서 할 이야기들을 서론에 요약하여 길게 늘어놓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 역시 서론의 화제제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이다. 즉 화제제시를 내용의 요약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요약이라 하더라도 본론에서 할 이야기를 서론에서 다 해버리면 본론은 다만 지루한 동어반복이 될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서론을 쓰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거의 대부분이 결론에서 또 본론을 요약하여 길게 늘어놓곤 한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역시 결론의 요약이 지니는 성격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결국 그 글은 서론에서 대충 한 말을 본론에서 조금 늘여 반복하고 결론에서 다시 이를 요약하여 반복한 글이 되고 만다. 그 글을 보는 느낌이 어떠하게는가. 할말이 없이 증언부언하는 인상밖에 풍기지 못할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도 피해야 한다. 서론의 첫부분을 하나마나한 상식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람도 참으로 많다. 이런 식의 서론은 독자에게 지루한 느낌만 줄 뿐 아무런 흥미와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서론이 지니는 주의환기의 효과를 오히려 갉아먹고 있으니 제 스르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일반적인 짧은 글의 경우에는 서론에 굳이 서술의 동기·목적, 방법·범위 따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것들은 이에 대한 정보가 없이는 글의 올바른 이해가 곤란해지는 전문적인 글들에서나 요구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짧은 글의 경우 서술의 동기·목적 등은 보통 서론의 내용을 통해, 그리고 방법·범위 등은 보통본론의 내용을 통해 쉽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러한 것들을 밝히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산만하고 장황한 느낌, 그리고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인 듯한 딱딱한 느낌을 주게 될 따름이다. 더욱이 자연 서론이 지나치게 길어져 전체적인 글의 모양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볼썽사나운 모양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서론의 분량은 물론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예기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나치게 길어져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전체 글의 5분의 1정도가 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글의 분량에 비추어보아 서론의 분량이 지나치게 길 때에는 앞에서 설명한 내용들에 대해 한번쯤 자기점검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 자신의 글에 대해 변명하거나 화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화제가주어지는 글의 경우)

요즈음 각급 학교에서는 학력평가의 한 방식으로 논술문시험을 채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논술문시험은 대게 어떤 화제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라는 식으로 출제된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논술문시험을 치는데 그 답은들을 주욱 검토하면서 몇 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첫째, 학생들의 글 속에서 출제자 또는 채점자를 의식하고 쓴 것 같은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뛴다는 사실이다. 주로 주어진 화제에 대해 또는 이에 대해 쓰고 있는 자신의 글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 내용들을 말하는 것이다.

화제가 주어지는 글의 경우 글쓰는 이는 화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된다. 그 이외의 내용은 일체 써서는 안 된다. 화제나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학생들이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출제자나 채점자가 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자신의 글에 자신이 없는 학생들이 스스로를 변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명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호소형이다. 화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나 사고가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의 글에 미숙함이 있더라도 용서해달라는 식의 말을 한다. 다음으로는 불평형이다. 화제가 자신의 수준에는 지나치게 어려우므로 자신의 글이 미숙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투의 말을 한다. 앞의 경우에는 그래도 겸손의 미덕이라도 있지만 이런 태도는 참으로 거만하게 보인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히 많다. 너무 생소한 화제에 부딪치게 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격앙되어 나오는 태도일 것이다.

이 두가지 외에도 많은 유형이 있다. 달리 공부하거나 생가해본바가 없어서,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 경험이 부족하여, 나의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 내가 건방지게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문제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몰라서 등등 이유야 가지가지이지만 한결같이 자신의 글이 무숙한 것을 너그러게 용서해달라는 요지의 말들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말들은 쓸데없을 분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가져온다. 출제자는 수험생이 이정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출제를 한다. 따라서 글이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괜찮으면 괜찮은 대로,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평가할 ㄸ름이지 이러한 말들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말들은 논수르이 내용과는 무관한 것들을 얘기한 것이어서 감점의 요인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들이 글읽는 이의 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글쓴이가 스스로 미숙하다고 고백한 이상 글읽는 이는 무의식적으로 이 글은 아마 미숙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글을 읽으면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특히 불평형과 같은 거만한 태도가 글읽는 이에게 불러 일으킬 반감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생소한 화제가 출제되었다 해서 절대 자신의 글에 대해 변명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지식과 사고가 부족하더라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신에게 어려운 화제라면 아마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운 화제일 것이다.

둘째로 주어진 화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주어진 화제와는 거의 무관한 얘기들로 내용의 대부분을 채우는 경우이다. 이들이 화제를 회피하는 이유는 물론 거기에 대해 좋은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변명하는 대신 아주 교묘한 논리로 화제를 회피한다. 즉 주어진 화제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서 일단 말꼬리를 자신이 있는 다른 화제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는 스스로 선택한 화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면서 간간이 주어진 화제에 대한 내용으로 양념을 친다.

이런 학생들은 물론 주어진 화제에 대해 그를 쓸 때보다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자신이 있는 화제를 스스로 선택해서 쓰는 만큼 상당히 좋은 글을 써내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내용, 타당한 주장일지라도 주어진 화제와 무관한 내용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어진 화제와 무관한 내용은 오히려 감점의 요인이 될 뿐이다. 따라서 주어진 화제를 회피하는 태도는 가장 경계하여야 한다.

자신의 글에 대해 변명하려는 태도 그리고 주어진 화제를 회피하려는 태도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 바로 글의 서론부분이다. 서론은 글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부분인 만큼 이런 태도로 글의 첫인상을 흐려버리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되겠다.

 

▶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

글의 서론부분은 대개 주의환기와 화제제시로 그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론부분에만 쓰이는 상투어구들이 생겨나게 되엇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화제제시에 쓰이는 어구이다. '~에 대해 살펴보겠다. 알아보겠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찰해보자'등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지만 이외에도 화제제시에 쓰이는 상투어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상투어구는 진부한 느낌을 준다. 서론에서 받은 이러한 인상은 본론을 읽을 때에도 지속되게 마련이되 되도록이면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고 화제제시와 본론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3) 주의환기의 방법

 

이제부터는 서론의 주의환기를 위해 많이 스이는 방법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 시사적인 상황에 대해 언급한다

 

주의환기를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 바로 상황진술이다. 시사적인 상황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말머리를 여는 방식이다. 주로 근래에 일어난 사건이나 화제가 된 문제가 그 내용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상황의 진술이 극적인 효과를 가져와 흥미를 고조시킬 수 있다.

상황진술의 이러한 효과는 언급되는 사건이나 문제가 보다 최근의것, 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 보다 충격적인 것일수록 높아진다. 사람들은 이러한 본능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일반화된 문제나 사건은 오히려 통속적인 인상을 주어 신선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도한 지나치게 충격적이거나 새로운것은 거기서 보편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진술의 방식은 우선 생활주변에서 이야깃거리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분명한 근거가 될 수 있어 글쓴이의 주장에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시사적인 상황에 대해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상황의 의미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적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장군 마에다>의 상영을 계기로 일본 대중문화 수이개방 문제에 대한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얼마 전 일본은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한국정부에 대해 공식적인 항의를 전달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대일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전래의 논법으로 이 항의를 묵살살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을 중심으로 심지어는 정부 내에서조차 일본문화 수입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수입 불가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일본문화 과연 수입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최근의 시사적인 상황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의환기의 내용을 통해 글의 화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시사상황만이 상황진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일반적인 상황의 진술 역시 주의화기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디를 가나 우리는 제복 입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의사, 안내원, 기술자, 경찰관, 법관, 장성 등에서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맘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고 요구되는 이때에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지는 이 제복은 왜 입는 것일까?

 

제복을 입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아주 일반적인 상황을 진숨함으로써 말머리를 열고 있다. 이러한 상환 자체는 물론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러나 독자는 궁금증이 많은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책을 읽으려 할 리가 없다. 일반적인 상황의 진술을 통해서도 독자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대문이다. 즉 독자는 글쓴이가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진술에 뒤따라 나온 화제를 읽는 순간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어 이글을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평법한 듯하면서도 아주 괜찮은 서론이다.

 

▶ 중요한 개념을 정의한다

상황진술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주의환기의 방법이 바로 개념정의이다. 주제 또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제재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말러리를 여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대 정의란 엄격한 형식과 원리에 따른 사전 사전적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상의 개념에 대한 평이하고 개력적인 설명이나 풀이를 의미하는 것일 따름이다. 다라서 그것은 반드시 개념의 전모를 면밀히 밝히는 포괄적인 차원의 정의가 될 필요는 없다.

개념정의에 있어 가중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념의 정의가 반드시 글쓴이의 주장을 뒷ㅂ닫침해줄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서는 대상의 개념을 특정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즉 대상의 개념이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내포 가운데서 자신의 주장과 관련이 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이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정의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개념의 정의는 대부분 새롭고 독특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정의여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던 대상의 한 측면을 새롭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일 분 어디까지나 모두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보편타당성한 정의여야 한다.

개념정의의 장점은 삼단논법의 장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는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따라ㅏ서 이러한 전제하에서는 누가 죽는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이를 의심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글쓴이의 개념정의는 바로 이러한 대전제의 구실을 한다. 글쓴이의 정의가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믿는 이상 독자는 글쓴이가 그 정의를 근거로 어떤 주장을 해도 이를 의심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개념정의의 방식은 삼ㅈ단논법의 단점 역시 지니고 있다. 대전제에 해당하는 글쓴이의 정의를 독자가 보편타당한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를 근거로 한 글쓴이의 주장은 독자에게 아무런 설득력도 지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개념정의의 방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글쓴이의 정의가 얼마나 타당한 것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과 길은 관련이 없는 하나마마한 정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정의, 어렵고 모호한 정의 등은 모두 그 글을 실패로 일끌 것이다.

 

문화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의 총화이다. 모든 인간은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려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 그들의 문화를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이란 효용가치의 차원에서는 선악과 우열을 따질 수 있어도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는 선악과 우열을 따질 수 없다. 환경이란 의식을 지닌 존재가 아니가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인 이상 문화 역시 도덕과 유리의 차원에서는 결코 선악과 우열을 따질 수 없다. 아프리키의 미개문화가 서구문화보다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시탕문화에 대해 그 비율리성을 비난하는 서구인들은 이 점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 같다.

 

서구인들이 우리나라의 보신탕문화를 야만적이라 하여 비난한 일이 있었다. 위의 인용문은 이러한 서구인들의 시각을 반박하는 글의 서론이다. 문화의 개념의 정의하면서 글의 첫머리를 열고 있다.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타당한 정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정의를 통해 여러 문화 사이에는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우열이 존재할 수 없다는 자신의주장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주장 도한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타당한 주장이 된다. 전체가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상 이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려나온 주장을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결국 우리의 보신탕문화가 비윤리적인 문화라는 서구인의 시각은 부당하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독특하면서도 누구나 수긍하는 정의를 통해 독자의 주의를 끌어모드고 동시에 이를 전제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이끌어가는 말솜씨가 아주 돋보이는 글이다.

 

계층화란 불균등한 분배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한쪽에선 모피코트를 색깔대로 사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라면을 종류대로 먹게 되는 일이 일상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계층화현상의 사회주의의 자멸로 판정승를 거두고 불패의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 자본주의체제에 있어 암과 같은 존재이다. 이 암을 조기에 치료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미래가 다만 밝은 것만은 아니다. 계층화현상의 극복 방안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출해보고자 한다.

 

역시 개념정의를 통해 말머리를 열고 있다. 이 글의 개념정의는 일반화된 것이어서 그리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정의를 통해 화제에 대해 논의해야 할 당위성이 쉽게 이끌려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재치 있는 말솜씨와 함께 역시 짜임새가 돋보이는 서론이다.

 

▶ 좋은 글을 인용한다

글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동서고금의 좋은 글들을 인용하면서 말머리를 여는 방식이다. 주로 속담이나 격언, 유명한 책이나 유명한 인물의 명언 또는 의견 등이 그 내용이 된다.

인용의 장점은 우선 인용되는 글들의 권위를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좋은 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권위를 지니는 말들이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개진되는 글쓴이의 의견은 그 권위에 기대 글의 설득력을 상당한 수준까지 높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글들이 지닌 여러 가지 미덕이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은 대개 심오한 통찰의 내용을 지닌 동시에 표현 또한 아주 재치가 있고 예술적이다. 따라서 주의환기에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되는 글이 지나치게 진부하거나 독자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인용은 오히려 주의환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히 속담을 인용할 경우에는 이 점에 각별히 주의 하여야 한다. 우선 지나치게 많이 알려진 속담은 진부한 느낌을 준다. 진부한 속담으로 진부한 내용을 펼치고 있는 글을 보면 독자는 맥이 빠질 것이다. 너무나 고리타분해서 곰팡이내가 나는 거 같을 것이다. 따라서 그 두ㅢ에 이어지는 내용이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되도록이면 이러한 속담의 인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속담이 담고 있는 내용은 지극히 상대적인 진리인 경우가 많다. 다음의 속담들을 한번 살펴보자.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이 두 속담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곧 어디까지나 속담이 상대적인 차원의 진리만을 담고 있다는 것을 으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훌륭한 진리처럼 들리는 속담이 상황에 따라서는 진리는커녕 아주 형편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그 권위에 의존하려는 글은 좋지 않다. 그 권의를 인정하지 않는 독자를 만나는 경우 이러한 글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속담처럼 아주 형편없이 보일 것이다. 더욱이 속담은 도한 세속적인 처세와 관련된 이기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함부로 그 권위에 의존하려 하다가는 글의 토대 자체를 모래 위에 세우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그 권위에 의존하려는 글은 좋지 않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독자를 만나는 경우 이러한 글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속담처럼 아주 형편없이 보일 것이다. 더욱 속담은 또한 세속적인 처세와 관련된 이기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함부로 그 권위에 의존하려 하다가는 글의 토대 자체를 모래 위에 세우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한 철학 교수가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사공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철학을 아느냐"고, 사공은 "웬걸입쇼" 하고 머리를 저었다. 교수는 "당신은 인생의 3분의 1을 헛살았구려, 그러면 문학은 좀 아오?" 하고 다시 물었다. "아니오, 전혀 모르는뎁쇼" 하고 사공이 대답하자 "당신은 인생의 3분의 2를 헛산 거요"라고 교수는 말했다. 때마침 배가 바위에 부딪혀 가라앉게 되었다. "선생님 수영할줄 아십니까?" 사공이 다급하게 묻자 교수는 "아니오, 전연 못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럼 선생님의 인생은 몽땅 헛수고로 예서 끝나게 되었습니다그려." 사공이 말했다. 이론과 실제간의 괴리와, 거창한 것과 사소한 것과의 이질성을 느끼게 하는 예다.

 

이 글은 잘 알려진 일화를 제시함으로써 말머리를 열고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얘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눈의 빛내면서 이 글을 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인용이란 아주 좋은 주의환기의 한 방법이다. 일화를 제시한 후 이를 화제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솜씨도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일화의 인용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 얘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잘 알려진 일화는 주의한기의 방법으로 함부로 쓸게 못 된다. 그러나 잘 알려진 일화라도 일화의 의미를 독특하게 해석할 수만 있다면 주의환기의 효과를 두배로 증대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논술문과 같이 분량과 시간이 정해진 글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얘기라도 상당한 분량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대문이다. 또한 길게 일화를 늘어놓고는 이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몇 마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싱거운 느낌을 주게 된다. 따라서 그런 글에서는 일화의 인용을 되도록이면 삼가는게 좋다.

 

'필요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20세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도구를 발명해왔다. 어떠한 도구라도 그 도구가 출현하기까지는 그것을 꼭 필요로 하는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의 출현도 예외는 아니다.

 

격언을 인용하여 말머리를 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화제를 매끄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인용을 통해 효과적으로 서론을 구성한 좋은 글이다.

 

▶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말머리를 여는 방식이다. 독자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곧 독자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왠지 모르게 글쓴이와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즉 독자를 자신이 제기한 문제의 해명에 참여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글쓴이와 독자를 공감과 친화의 영역으로 이끄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방식은 또한 글쓴이가 해명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바로 자문자자답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자신이 해명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질문을 던지면 된다. 일단 질문이 던져지면 독자의 관심은 자연 그 질문의 해명에만 집중되게 된다. 따라서 그 문제가 해명되면 독자는 만족하게 되고 더 이상의 의문은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글쓴이의 질문이 지녀야 할 몇 가지 요건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그 질문은 주제를 대표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즉 해명하고자 하는 문제점을 적절히 드러낼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와 거의 무관한 질문을 뜬금 없이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한다면 이것을 참으로 경박한 짓이다. 또한 그 질문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을 고려하지 않은 황당무계한 질문을 던져놓고 주의환기를 노리는 것은 가당찮은 짓이다.

다음으로 그 질문은 글쓴이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자신이 대답할 수도 없는 거창한 질문을 던져서 일단 독자의 호기심을 끈 다음 이를 적절히 해명하지 않는다면 글쓴이를 믿고 따라온 독자는 아마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질문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추상적인 질문이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따위를 중심적인 질문으로 던졌다고 생각해 보자. 글쓴이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자 역시 이 사실을 안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겠군 하는 생각과 함께 독자는 그 글에서 말끔히 관심을 거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너무 많이 던져서는 안 된다. 논의의 초점이 흐려져 산만하고 장황한 느낌을 주게 되낟. 또한 독자는 ㄱ르쓴이가 그 많은 질문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질문들이 단지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사랑이란 뭘까? 어떤 마음을 사라랑이라고 하는 걸까?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진정한 사랑은 뭘까? 철이 나고 세상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서부터 우리 마음에는 이런 물음이 자리잡는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의 서두이다. 독자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그런데 글쓴이의 질문을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먼저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보편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질문으로 시작했다. 누구나 제세를 고쳐앉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질문 뒤에 곧바로 싱거운 이야기로 들어갔다면 곧 관심이 식을 것이다. 대답은 주지 않고 곧바로 말머리를 돌리니 그런 거창한 주제에 관해서는 역시 이 사람도 별달리 할말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눈에 확 띄는 멋있는 대답을 할 재주도 없다.

그러나 글쓴이는 조금씩 변형된 질문을 계속 던진다. 두 번째, 세번째 질문을 거쳐 네 번째 질문에까지 이르는 사이에 독자의 호기심은 더욱 강렬해진다. 질문이 갈수록 가슴에 돠닿는 내용으로 구체화 되어 가고 있기 대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질문에 이르러서 독자는 이 질문의 대답을 반드시 듣고 말겠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즉 글쓴이는 점차 구체화되어 나가는 방향으로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붙잡아두는 한편 자신이 대답할 수 있고 얘기하고 싶은 방향으로 화제를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몇 마디 하지 않고 서론의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휼륭한 말솜씨이다. 다음에 예문 역시 독자에게 질문을 던져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집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이 집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현재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계속 찾고 있다. 그것은 집을 만들기 시작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집에서 살아왔고, 또 미래에도 집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집을 지어왔는가?

 

▶ 개인적인 체험을 언급한다.

개인적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말머리를 여는 방식은 우선 독자의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다는 점이 장점이다. 다른 이의 사생활은 사람들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 대문이다. 그리고 아주 쉽게 제제를 찾을 수 있다는 점과 독자에게 글쓴이의 진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 또한 장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또한 그대로 이 방식의 위험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개인적 체험의 진술이 주의환기의 효과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체험이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일반인의 체험에 그렇게 특별한 것이 있기는 어렵다. 여기서 흔히 자신의 체험을 어느 정도 과장하는 일이 생기는데 이것은 절대 금물이다. 체험하지 않은 것을 체험한 듯이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독자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된다.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는 프로그램에는 재미있는 체험을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것들이 많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들이 시청자으 흥미를 끌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과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한 번이라도 시청한 사람이라면 출연자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기억들을 다들 지니고 있을 것이다. 글 또한 이러한 프로그램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체험이 과자오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독자는 더 이상 그 글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같이 더욱 재미난 거짓말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그런 한심한 거짓말을 읽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남드로가 다를 바 없는 일상적 체험을 굳이 쓸 필요가 잇는가. 물론 그러한 체험을 쓸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체험의 진술이란 방식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도움이 안 되는 방식이 아닌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서 체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아아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체험에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체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체험도 있다. 남들과 똑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거기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이 남다르다면 그것은 곧 독특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체험에는 또한 직접적인 체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간접적인 체험도 있다. 들은 이야기, 읽은 이야기 속에 있는 독특한 체험들 역시 스스로 공감할 수만 있었다면 모두가 자신의 간접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체험의 진술이라는 방식이 그 얼마나 풍성한 소재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을 누구나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체험의 진술에 있어 주의하여야 할 것은 우선 체험과 이를 통해 끌려나온 내용 사이에 지나친 거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험의 의미를 비약하여 무리한 결론에 이르는 것은 글쓴이의 사고가 유치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 지나치게 독특한 체험의 진술은 오히려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당한 체험을 통해 황당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는 있어도 정서적 공감을 얻기란 어려운 법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체험진술의 방식은 수필과 같이 비교적 자유로운 그르이 주의환기에만 주로 사용된다는 것 또한 알아두어야 한다. 체험의 진술이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체험의 내용과 그 의미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이것은 비교적 짧은 글의 서론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긴 내용이다. 또한 체험의 진술은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객관성과 논리성을 중시하는 글의 서론으로는 접합하지 않다. 이 점에 잘 유의하여 논솔문과 같은 글에 충분한 고려 없이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것이다.

 

얼마 전 같은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다. 7층이나 낮은 곳이었는데도 물건이 깨어지는 소리,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이 옆방에서 들리는 것 처럼 생생했다. 나는 서둘러 창문의 문고리를 확인했고 애기 아빠는 안절부전못하면서도 방에 불을 켜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들은 얘기로는 집주인은 몹시 다쳤고 강도는 달아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강도가 잡히지 않은 것이 의아해서 물어보았더니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경비 아저씨마져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가'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날 밤 나의 행동을 돌이켜보곤 얼굴이 붉어져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었었다. 현대인의 타인에 대한 무관시믄 실상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그런 일을 당했을때 내가 뛰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남 역시 뛰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체험의 진술을 통해 현대인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란 화제를 효과적을 끌어내고 있는 글이다. 체험 자체가 독특한 것이니 만큼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데 아주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체험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우선 글쓴이의 체험과 의식의 각성 사이에는 논리적 비약이 없어 질실감을 느끼게 하낟. 그리고 체험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 역시 아주 솔직하고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좋은 글이다.

 

2. 결론에 대하여

 

1)결론의 성격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말의 인용이 무색학지 않을 만큼 결론은 중요하다. 결론에서 매끄러운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앞부분의 내용이 어느 정도 지지부진하다 하더라도 글의 전반적인 모습이 비교적 명쾌한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반면에 결론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앞부분의 내용이 말끔하다 하더라도 글의 전반적인 모습이 아주 지리멸렬한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이 주어진 논술문 같은 경우 시간 배분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시간에 쫓겨 결론을 대충대충 마무리해 서는 결코 좋은 글이라는 일상을 줄 수 없다.

서론과 결론은 글에서 자주 특별한 격할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들이 있다. 서론이 글문을 역기 귀해 주의 환기와 화제제시의 내뇽을 반드시 담아야 하듯이 결론도 글문을 닫기 위해 반드시 담아야 할 내용이 있다. 주제요약과 부언이 바로 그것이다.

주제요약은 본론의 내용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이끌어낸 글 전체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에서 제시되는 주제는 본론의 내용을 단순히 줄여놓은 것이 아니다. 본론이 각 내용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밝혀진 새로운 차원의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결론에서 제시되는 주제는 본론의 소주제들을 단순히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 소주제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이끌어낸 새로운 차원의 주제인 것이다.

부언이란 그 글에서 꼭 필요하지만 글의 다른 부분에서는 말할 기회가 없었던 내용들을 덧붙이는 것이다. 본론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중요한 내용이나 남은 문제점, 그리고 글쓴이의 제언, 전망 등이 부언의 대상이 되는 내용들이다.

논술문과 같이 일정한 분량이 주어지는 글의 경우 괜히 쓸데없는 말을 넣어 결론을 진질 늘여쓰는 사람이 많다. 본론에서 적당량을 채우지 못해 전체적으로 글의 분량이 모자라게 될 때 결론에서 이를 보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꼭 필요한 내용 이외의 것은 절대 담아서는 안 된다. 서론도 그러하지만 결론에서 이 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론은 글을 마무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글을 제대로 긑맺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론에서 본론의 내용을 반복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한 본론의 내용과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는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시시콜콜히 얘기하거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을 의미 없이 덧붙여서도 안 된다. 명쾌한 끝맺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결론의 분량을 미리 정해놓는 것이 좋다. 결론의 분량 역시 명확하게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전체 글의 5분의 1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이렇게 결론의 분량을 미리 정해놓고 나머지 분량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본론에서 모두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결론을 진질 늘려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론을 늘려쓰는 것이 나기 때문이다. 결론에서 깔끔하고 명쾌한 끝맺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본론의 허물은 어느 정도 덮어지는 법이다.

 

경제성장의 참된 목적은 국민대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소득분배는 성장을 다 이룬 다음에 이룰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나면 적절한 분배가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한 과제는 대단히 많지만 사회복지의 확충, 지역간 균형개발, 농어업을 비롯한 산업부문간 균형발전이 핵심적이라 할ㄹ 만하다. 그 위에 성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온 성장 제일주의를 극복하고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는 '바람직하고 균형적인 성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성장과 분배의 관계에 대한 보다 균형적 시간이 요구되는 시기라 하겠다.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바람직한 관계설정에 대해 논의하고 잇는 글의 결론이다. 앞부분에서 글 전체의 주제를 매끄럽게 요약하고 있다. 본론의 내뇽을 복사해서 그대로 요약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본론의 내용을 종합하여 이끌어낸 새로운 요약이다. 그리고 중간부분에서 소득분배의 구체적 방안에 대해 제언의 형식으로 부언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부분에서 성장과 분배에 대한 균형적 시간이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결론의 내용 자체를 다시 요약적으로 제시, 무난한 마무리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주 짜임새 있는 결론이다.

 

2) 좋은 결론의 요건

 

▶ 본론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주제 요약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즉 이 말을 본론의 내용을 그대로 압측해서 다시 한 번 진술ㅎ라는 말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론의 요약이지 주제의 요약이 아니다. 다음은 정보화사회의 장단점에 대한 글인데 결론부분에에서 바로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세상에서 우리는 정보화사회의 장단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보와 사회의 장점으로는 첫째 정치적 측면에서 양 방향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한 대중의 정치참여 확대, 둘째, 경제적 측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방식의 확대로 인한 자원절약과 환경보호의 강화, 세째,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개성의 신장으로 인한 탈규격화 등을들 수 있다. 그리고 단점으로는 첫째, 정치적 측면에서 정보통제로 인한 전체주의의 출현 가능성, 둘째 경ㅈ적 측면에서 정보 불평등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셋째, 개인주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장담점을명확이 인식하고 다가오는 정보화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야 할것이다.

 

결론에서 본론의 내용을 잘 정리하여 아주 명쾌하게 요약해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상을 줄 만한 일이 못 된다. 바로 위에서 언급된 내용의 동어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의 논술문을 검토해보면 이런 식으로 결론을 처리한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서 나는 학생들이 결론의 주제요약에 대해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론에서 제시되는 주제는 본론의 소주제들을 단순히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 소주제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이끌어낸 새로운 차원의 주제인 것이다. 다라서 결론의 주제요약을 먼저 무엇을 말했고 다음으로는 무엇을 말했고 또 다음으로는 무엇을 말 햇다는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지루한 동어반복이 될 따름이다. 특히 분량에 견주어볼 때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결론에 다른 말을 쓸 수 없거나 아니면 결론 전체의 분량이 턱없이 길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윗글의 주제요약 부분을 올바르게 고쳐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정보화사회는 장밋빛 미래도 아니고 암울한 페허도 아니다. 또한 장밋빛 미래이기도 하고 암울한 페어이기도 하다. 그것은 장점과 잔점을 돈전의 양면처럼 공유하고 있는 이중적인 사회인 것이다. 정보화사회의 도래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그 단점을 최소화하고 그 장점을 최대화 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에 당당히 맛서는 것이다.

 

▶ 지나치게 상식적인 내용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

결론의 끝부분을 얘기하나마나한 상식적 내용으로 처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다 함께 노력하여 건강하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다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참으로 밝을 것이다' 하는 식의 언급들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불특정한 대상을 향하여 '~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에 앞장서야 한다'는 등등의 언급으로 결론을 끝맺는 것도 다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앞부분까지의 내용만으로 그냥 끝을 맺기에 무언가 찜찜하고 그렇해서 멋있는 끝맺음이 될 만한 내용이 특별히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결론의 끝부분을 붙잡고 고민해본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무언가 그럴듯한 일반적이고도 상식적인 내용을 아무거나 찾아내어 이를 끝맺음으로 처리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많다보니 위에서 예로 든 식의 언급들은 아예 결론을 끝맺는 상투어구가 되다시피 하였다.

결론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보아 언급될 만한 이유가 있는 내용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앞부분의 내용에서 필연적으로 이끌려나올 만한 내용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식의 말들은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말들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내용으로부터 이끌려나와야 할 필연성은 없는 말이다. 너무나 당연하여 하나마나한 이런 식의 말들을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을 향하여 훈게조, 또는 웅변조로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습기 그지없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들든 길거리에 나붙은 표어나 대통령의 담화문 같은 데서나 나올만한 말이지 특정한 주제를 지닌 개인의 글에서는 나올 필요가 없는 말이다.

 

▶ 부언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결론을 쓸 때쯤 되어 본론의 내용과 연관된 좋은 생각이 한두 가지 또오르는 수가 있다. 또는 본론을 쓰는 도중에 좋은 생각이 났는데도 글 전체의 문맥상 이를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들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결론에 몽땅 끼워넣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것도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라는 식으로 결론의 이곳 저곳에 그런 생각들을 끼워넣는 거이다. 물론 결론은 부언의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론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중요한 내용들을 여기에 덧붙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론에서 부언을 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결론은 글을 마무리하는 부분인 만큼 글 전체의 내용을 포괄한 만한 일반적 진술들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주변의 일반적 진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담지 않는 것이 좋다. 또한 결론에도 그 나름대로의 문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논리상 연결되기 어려운 내용을 무리하게 끼워넣는 것도 좋지 않다.

결론은 그 나름대로의 기능과 문맥을 지닌 중요한 부분이다. 마땅히 써보지 못한 잡동사니들을 모아놓는 휴지통이 아니다. 따라서 결론에서 부언을 할 대에는 그 내용이 반드시 언급될 만한 중요성을 지닌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며 또한 주변의 문맥을 고려하여 논리의 흐름을 단절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 새로운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

결론에는 본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나와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본론에서 한 말 이외에는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진지하고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내용이 새로이 담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위에서 인용한 정보화사회의 장단점에 대한 글의 결론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보자.

 

정보화사회는 장밋빛 미래도 아니고 암울한 폐허도 아니다. 또한 장밋빛 미래이기도 하고 암울한 페허이기도 하다. 그것은 장점과 단점을 동전의 양면처럼 공유하고 있는 이중적인 사회인 것이다. 정보화사회의 도래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우선 정보활에 있어서의 윤리성을 확립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정보수용에 있어서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둘 대 비로서 정보화사회는 우리의 장밋빛 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부분에 정보화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ㅗㅂㄴ론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다. 본론에서는 정보화사회의 장단점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지하고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봉보활용에 있어서의 윤리성이니 정보수용에 있어서의 주체성이니 하는 말들이 구체적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글이 더 계속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글은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독자로서는 명쾌한 마루리란 인상을 받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구체적 논의가 필요한 새로운 내용을 내놓고서 이를 소상히 논의하지 않고 글을 끝맺는 것은 글을 쓰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화제를 제시했으면 그 화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화제제시만으로 결론이 끝났으니 이것은 결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서론이 되고 만 셈이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본론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배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새로운 화제로 발전할 수 있는지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든지, 단점을 최소화하고 장점을 최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든지 하는 개괄적인 내용 정도로 끝맺는 것이 좋다. 굳이 위의 내용처럼 쓰고 싶다면 이 부분은 마땅히 본론으로 옮겨져 좀더 구체적인 논의로 발전시켜야만 한다.

 

비논리적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

여하튼, 어째든, 아무튼 등과 같은 표현이 결론에는 아주 자주 나온다. 어떻게든 끝을 맺어야 하는데 바로 앞부분과 이 끝부분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스스로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부르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결론은 물론 글 전체를 일관하여 이런 말은 있어서는 안 된다.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도 이를 해명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논술문 같은 글의 경우 출제자나 채점자를 의식한 말이나 논술내용과 관게없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즉 끝이라든가 수고하에요 등의 말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