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258] 제4부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5) 부적절한 명사형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14구어적 표현을 피해야 한다

2020. 4. 25. 18:46☎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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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258] 제4부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5) 부적절한 명사형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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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멍멍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 전권을 타자를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5) 부적절한 명사형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

 

국어에서는 동사나 형용사에 '(으)ㅁ'이나 '기' 등을 붙여 이를 마치 명사처럼 쓰는일이 많다. 이 '(으)ㅁ/기'를 가리켜 명사형어미 또는 명사파생접미사라 한다. 그런에 이 '(의)ㅁ/기'가 어떤 경우에 명사형어미라 불리고 어떤 경우에 명사파생접미사로 불리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으)ㅁ/기'가 붙어 동사나 형용사가 완전히 명사로 바뀌면 이를 명사파생접미라라 부르고, 동사나 형용사의 성질은 그대로 지닌 채 명사처럼 쓰이면 이를 명사형어미라 부른다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⑴ 김 선생님의 가르침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⑵ 김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침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이었다

 

두 문장이 모두 '가르치다'라는 동사에 'ㅁ'을 붙여 이를 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⑴의 '가르침'은 동사가 완전히 명사로 바뀐 경우이다. '김선생님의 '라는 관형어에 의해 수식되고 '을'이 라는 조사가 부어 있는 등 완전히 명사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ㅁ'은 명사파생접미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⑵의 '가르침은 '은'이라는 조사가 붙어 명사처럼 쓰이고 있지만 여전히 동사이다. 왜냐하면 '김 선생님이'는 주어의 서술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ㅁ'은 명사형어미라 할 수 있다. 한 번 더 예를 들어 이를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자.

 

⑶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⑷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⑸ 수많은 역경을 극복함으로써 그는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⑹ 그의 말에서 나는 많은 서운함을 느꼈다.

 

⑶ 의 '흐름'은 '흐르다'라는 동사가 명사로 바뀐 것이다. '세월의'라는 관형어에 의해 수식되고 '에'라는 조사가 붙어 있는 등 완전히 명사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⑷의 '흐름'은 '에'라는 조사가 붙어 명사처럼 쓰이고 있지만 여전히 동사이다. '세월이'라는 주어의 서술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⑶의 'ㅁ'은 명사파생접미사이고 ⑷의 'ㅁ'은 명사형어미이다. ⑸의 '극복함'은 '역경을'이라는 목적어의 서술어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동사이며 여기에 쓰인'ㅁ'은 명사형어미이다. 그리고 ⑹의 '수운함'은 '서운하다'라는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경우이다. 따라서 여기에 붙은'ㅁ'은 명사파생접미사가 된다.

명사형어미와 명사파생접미사에 대한 설명을 이처럼 길게 늘어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즉 서술형으로 표현하여야 할 것을 이러한 명사형의 표현으로 바꾸어놓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우선 명사형어미를 사용한 표현은 되도록이면 서술형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좋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명사형어미는 서술어로 쓰이고 있는 동사나 형용사를 억지로 명사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문장이 어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예문들에서 명사형어미를 사용한 표현을 서술형으로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다.

 

⑵ 김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신 것은 우리에게는 좋은 추억이었다.

⑷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⑸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여 그는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이 한결 줄어들어 문장이 자연스러워졌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나햐면 서술어는 서술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사파생접미사를 사용한 표현은 반드시 서술형으로 바꾸어주어야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서술어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술어로 쓰이고 있지도 않은 것을 굳이 서술형으로 바꾸어줄 필요는 없다. 사실 위에서 인용한 ⑴, ⑶, ⑹의 문장에서 우리는 그다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가르침', '흐름', '서운함' 등은 서술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냥 명사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명사형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어색해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사파생접미사를 사용한 표현 역시 어색함이 있을 때에는 서술형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⑺ 이층의 창문에서는 사람들의 오고감이 잘 보인다.

⑻ 할머니의 부르심을 듣고 뛰어왔다.

⑼ 이층의 창문에서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이 잘 보인다.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뛰어왔다.

 

⑺ 과 ⑻의 밑줄친 부분은 본디 서술어로 쓰여야 할 것을 억지로 명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본래의 서술형으로 바구어주어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⑼와 ⑽의 표현으로 고쳐야 옳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처럼 본디 서술형으로 쓰여야 할 것을 억지로 명사형으로 바꾸어놓은 표현은 문장을 딱딱하고 어색하게 만든다. 따라서 명사형의 표현을 할 대에는 이를 서술형의 표현으로 고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지 항상 확인하고 넘어가는 습관을 길러야 할것이다. 다음에 부적절한 명사형의 표현을 서술형으로 옳게 고친 예를 좀더 들어보았다.

 

⑾ 더 이상 북한의 도발을 좌시할 수 없음이다(없다).

⑿ 친구를 무시함은 좋지 않은 버릇이다(무시한는 것은).

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듦과 함께 농촌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모여들면서).

⒁ 그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절개를 지킨 의로운 사람이다(버려서).

⒂ 나는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마침내 그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계속하여).

(16) 물가가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대책이 없다(치솟는데도).

 

6) 의미의 중복이 없어야 한다

 

⑴ 유도 경기를 관전했다(경기를 보았다).

⑵ 남성의 담배 흡연율이 매우 높아졌다(흡연율이).

과반수를 넘는 사람들이 찬성했다(과반수의).

⑷ 대략 30여 명 가량이 왔다(30명 가량).

⑸ 개미는 무리를 지어 군집을 이루며 살아간다(무리를 지어).

 

위의 예문들은 모두 의미를 중복하여 쓴 표현을 지니고 있다. ⑴ 의 '관전'은 경기를 본다는 뜻이며, ⑵의 '흡연'은 담배를 피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⑶의 '과반수'는 반수를 넘는다는 듯이며, ⑷의 '가량'은 대략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⑸의 '군집'은 무리를 이룬다는 듯이다. 따라서 의미가 중복된 부분을 없애야 옳은 표현이 된다.

 

의미의 중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한마디로 어휘실력이 부족하거나 어휘의 명확한 의미를 살펴보지 않아서이다. 의미가 중복된 표현의 대표적인 유형은 바로 한자어의 의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다시 우리말로 반복해주는 경우이다. 위의 예문들은 모두 이 유형에 속하는 의미중2복의 표현들이다. 이는 물론 한자어의 정확한 뜻을 잘 살펴보지 않고 문장을 쓰기 때문이다. 이미중복의 표현을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은 어휘실력을 기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한자어가 나타날때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만 해도 이러한 실수는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7) 단어를 함부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엄연히 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리하여 마치 두 단어인 것처럼 쓰는 일이 흔히 있다.

 

⑴ 우리 사회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유지하기)

⑵ 우리가 이와 같은 신념을 유지를 하기 위해서는(유지되기).

⑶ 그와 같은 신념이 더 이상 유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유지되기)

⑷우리 사회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⑴에서 '발전하다'는 발전'이라는 단어에 '하다'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만들어진 파생어로서 새로인 독립한 완전한 하나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를 독립된 하나의 단어로 인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즉 '발전'이라는 말이 있고 또 '하다'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이를 '발전을 하다'라는 말의 준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위 예무의 밑줄친 부분은 '발전하기'로 고쳐야 옳다. 그냥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지 우리 사회가 발전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⑷의 문장은 옳다. '발전을 이루ㄱ하기'는 '발전'과 '이룩하다ㅏ'라는 두 단어를 서로 연관시킨 것일 따름이다.

나머지 문장들도 ⑴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유지하다'와 '유지되다'가 하나의 독립된 단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두 개의 단어가 연관된 형태로만 인식하여 이를 불리해서 스고 있다.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8) 주적절한 명사문을 쓰지 말아야 한다.

 

명사문이란 명사와 서술격 조사 '이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 서술어가 되고 있는 문장을 말한다. 어법상 부적절한 명사문 또한 많이 쓰이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⑴ 국가공뭉원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⑵ 잘못된 교통신호체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⑶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위의 문장들은 모두 명사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어법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술어인 '지적이다', '여론이다', '바판이다'에 호응하는 주어가 없다. 올바로 고치자면 이를 '지적이 일고 있다', 또는 '지적이 있다'라는 식은 표현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어법상 분명히 틀린 이러한 명사문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쓰는 말투를 배운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는 말에 무게를 싣기 위해 흔히 이런 표현을 쓴다. 지금 당장이라도 신문의 아무 페이지나 펼처보라. 이런 표현을 숱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슨다고 해서, 또는 멋있게 보인다고 해서 어법에 맞지 않는 이런 표현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9) 복수접미사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복수의 의미를 지니는 말마다. 꼼꼼하게 복수접미사를 챙겨넣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국어에서는 복수접미사를 붙이지 않아도 문맥을 통해 복수임이 드러날 수 있는 경우는 복수접미사를 생략할 수 잇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복수접미사를 꼼꼼하게 챙겨넣는 것은 국어의 어법이 아니다. 이 또한 구미어를 보고 배운 버릇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⑴ 그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사람이).

⑵ 한용운의 시들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다(시에는, 표현이).

⑶오늘은 하루 종일 노래들을 부르고 싶다(노래를).

 

밑줄친 명사들이 복수라는 것은 문맥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경우 여기에 복수접미사를 굳이 붙여주면 오히려 어색한 표현이 된다. 괄호 안의 표현처럼 고쳐주는 것이 좋다.

 

10) 수를 나타내는 표현에 유의하여여 한다

 

숫자를 가리키는 말에는 고유어와 한자어 두 가지가 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등은 고유어이고 일, 이, 삼, 십, 이십 등은 한자어이다. 백, 천, 만 등과 같이 단위가 큰 수자는 고유어를 쓰지 않고 한자어만을 슨다. 이전에는 온, 즈믄과 같은 고유어를 쓰기도 햇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다. 숫자를 세는 단위 역시 고유어와 한자어 두가지가 있다. 사람의 숫자를 셀 때 쓰이는 단위를 살펴보면 '라람'은 고유어이고 '명'은 한자어이다.

 

⑴ 연필 5자루, 집 5채, 5달 5해

⑵ 1명 /한명, 1개/한 개, 1장/한 장

 

아라비아 숫자는 한자어로 읽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1, 2, 3등은 일, 이, 삼 등으로 읽는 것이지 하나, 둘, 셋 등으로 읽지 않는다. 또 이의 관형형인 한, 두, 세 등으로도 읽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2시라는 표현은 아라비아 숫자를 썼지만 두시라고 읽는 것이다.

그리고 숫자와 숫자를 세는 단위가 혈합될 대는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결합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도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⑴의 표현은 모두 틀린 것이다. 고유어로 된 단위는 고유어로 된 숫ㄱ자와 결합하려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표현이다. 다섯 자루, 다섯 채, 다섯 살, 다섯 달, 다섯 해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다섯 달은 5개월로, 다섯 해는 5년으로 바꾸어 표현해도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물론 예외가 있다. ⑵ 는 고우어이나 한자어아냐에 관계없이 숫자와 단위가 아물렇게나 결합할 수 잇는 예를 든 것이다.

이처럼 수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으므로 이를 지켜 써야 한다.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는 따로 알아두는 수밖에 없다.

 

11) 존대를 나타내는 표현에 유의하여야 한다

 

⑴ 여기에 대해서는 홍길동 교수의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⑵ 이순 장군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셨다. 그분의 ~

이순신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

 

글 속에서 어떤 사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존대를 나타내는 표현을 쓰는 일이 흔히 있다. 존칭접미사 '님', 존칭어미 '시', 존칭조사 '께서', 종칭지시어 '그분'등을 쓰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물론 글쓰는 이가 사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잇다는 의사의 표시이다. 사적으로 누구를 존경하는 것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성격이 강한 글에서는 이러한 존대의 표현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이 강한 글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글이 사적인 감정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에 이른 느낌을 주게 되면 글의 신뢰성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다음으로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는 이가 존견한다고 해서 독자 또한 그를 존경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존대의 표현을 쓰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 그를 존경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⑴은 내용으로 보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이 분명하다. 따라서 존칭접미사 '님'을 써서는 안 된다. ⑵에서는 충무공에 대한 글쓴이의 존경의 감정이 뚜렷하게 드런는 표현을 쓰고 있다.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이라면 이러한 표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이라면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존칭 조사와 존칭어미, 그리고 존치지시어를 모두 일반적인 표현으로 고쳐야 한다. ⑶과 같은 표현이 적절하다.

 

12) 완결된 문장을 써야 한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이면 제대로 완결된 문장을 쓰는 것이 좋다.

 

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⑵ 핵무기의 위협,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환경의 오염, 오늘날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⑶ 그는 한국사의 연구에 나섰다.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했던 것. 찬란했던 역사의 복원을 통해 고난의 현실을 극볼할 수 잇는 힘을 얻어야 했던 것.

⑷ 한시라도 느추어서는 안 되낟. 통일 조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위의 예문들은 제대로 완결되지 않는 문장의 대표적인 유형들을 보인것이다. ⑴은 말줄밈표로 끝낸 문장이고, ⑵는 어구고 끝낸 문장이다. ⑶은 명사로 끝낸 문장이며, ⑷는 주술이 도치된 문장이다.

이 문장들이 환결된 문장의 형식을 가추지 않은 것은 물론 글쓴이의 미숙한 때문이 아니다. 모두 그 나름의 특수한 효과를 ㄴ리고 수사학적으로 기교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상당히 술련된 기교여서 의도한 효과를 십분 달성하고 있다. 즉 내용만으로는 드러내기 어려운 글쓴이의 주관적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줌으로써 글에는 힘을 실어주고 독자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문장은 자기표현의 목적을 지닌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이나 웅변과 같이 특수한 목적을 지닌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이나 웅변과 같이 특수한 목적을 지닌 실용적인 글에는 아주 좋은 표현이다. 그러나 논술문과 같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에서는 되도록이면 피해야 한다. 가정에 호소하는 듯한 인상, 겉멋을 부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글이란 항상 성격과 목적에 어울리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표현이 다른 글에서는 경박함과 유치함의 인상을 풍겨줄 수도 있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에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제대로 완결된 문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른다.

⑵ 핵무기의 위협,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환경의 오염 등 오늘날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⑶그는 한국사의 연구에 나섰다.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팰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찬란했던 역사의 복원을 통해 고난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잇는 힘을 얻어야 했던 것이다.

⑷ 통일조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한시라로 느추어서는 안된다.

 

13) '~것이다'의 사용에 유의하여야 한다

 

⑴ 전통은 재창조되어야 한다. 전해내려오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 적한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⑵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⑶ 인내와 노력만이 영관된 내일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⑷ 증거가 있는데도 그는 한사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것이다'라는 표현은 어떤 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가끔 이 '~것이다'라는 표현을 아주 습관적으로, 상투적으로 쓰고 있는 글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져 스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것이다'라는 표현을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앞에서 한 말을 다시 부연해서 설명할 때 쓴다. ⑴ 은 뒤문장이 앞문장을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때는 '~것이다'를 쓸 수 있다. 둘째, 주술의 호응을 지키기 위해 피료한 경우에 쓴다. ⑵의 문장의 주어인 '중요한 것은'은 반드시 '것이다', 또는 '점이다와 같은 형태의 서술어와 호응해야 한다. 따라서 이때는 '~것이다'를 쓸 수밖에 없다. 셋째, 문장에 힘을 주고 으미를 강조하려 할때 쓴다. ⑶의 문장의 서술어는 사실 그냥 '있다'라고만 표현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문장에 힘이 실리지 않기 때문에 이를 '있는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준 것이다. 넷째,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입장에 섰을 때 쓴다. ⑷에서 글쓴이는 다른 이의 얘기를 전달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것이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이처럼 '~거이다'를 쓰기 위해서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것이다'라는 표현이 많아지는 이유는 대부분 자신의 글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에 자신이 없다보니 표현을 통해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다. 독자가 아무래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또는 중요한 것인데도그냥 지나칠 것 같아서 '~것이다'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본디 자신의 말이란 다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게 마련이고 또 그 중요성을 남들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라 하여 모두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독자가 중요한 것을 그냥 지나칠 난츰 어리석다고 믿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잘 헤아려보아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만 '~것이다'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실제 문장의 내용이 이를 쓸 만한 이유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일때 독자는 허탈감을 느끼거나 유치함을 느끼게 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글이 읽을 만한 것이 되도록 하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 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이 써야 할 것이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위의 글은 말끝마다 '~것이다'를 쓰고 있다. 겉보기에는 문장에 힘이 들어가 글의 내용이 강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읽다보면 우스운 생각이 든다. '~것이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경박해보이기도 한다. 밑줄 친 부분은 '~것이다'를 써야 할 필연성이 거의 없는 곳이다. 이를 모두 평범한 종결형으로 바꾸고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것이다'를 쓴 곳에는 적절하게 힘이 실리고 전체적으로는 보다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어 휠씬 강한 인상을 주는 글이 될 것이다.

 

14) 구어적 표현을 피해야 한다.

 

대화할 때나 쓰이는 구어투의 표현을 쓰는 일이 많다. 구어와 문어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여 구어투의 표현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⑴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그러니까 하루바삐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⑵ 지금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성은 뭘랄까 지옥의 정경을 연상하게 한다.

 

구어적 표현의 대표적인 유형은 바로 불필요한 투어의 사용이다. 투어란 상투어라고도 하는데 버릇이 되어버려 예사로 쓰이는 말을 의미한다. 대화에서는 이러한 불필요한 투어가 많이 사용된다. 대화 하면서 '음~, 에~, 저기 있잖아, 그러니까' 등의 투어를 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화에서 이러한 투어의 사용은 사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대화 도중에 생각을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거나, 마땅한 생각이나 표현이 떠오르지 않거나, 호흡을 잠시 유지 하려 하거나, 의미의 단위를 끓어서 표현하고 싶을 대에는 투어를 사용하여 잠시 말을 끊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어에서는 이러한 투어의 사용이 용납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투어 사용의 필요성들은 문어에서는 일어나지 않거나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투어는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어 문장의 독창성과 신선미를 떨어뜨린다. 또한 어법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문맥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투어는 문장에서 완전히 없애야 한다. ⑴의 '그러니까'와 ⑵의 '뭐랄까'는 구어에서 만힝 쓰이는 투어를 문어에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없애야 한다.

 

⑶ 그렇게 생각하기보담은 좀더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좋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어쩜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이거나 그거나 다를 바가 없다.

 

구어적 표현의두 번째 유형은 어휘를 함부로 변형하는 것이다. 구어에서는 음운의 생략이나 축약, 변형을 통해 어휘의 형태를 바꾸는 경우가 많다. 좀더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의 어휘, 좀더 발음하기 편리한 어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어휘의 변형을 통해 구어는 대화 상대와의 친밀감을 좀더 확대하고 대화의 분위기를 좀더 부드럽게 이끈다.

그러나 문어에서는 함부로 어휘를 변형해서는 안 된다. 어법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문들은 모두 구어식으로 어휘를 변형하여 쓴 표현들을 지니고 잇다. 정상적인 어법으로 고쳐주어야 한다. ⑶의 '보담은'은 '보다는'으로, ⑷의 '근데', '어쩜', '거다'는 각각 '그런데', '어쩌면', '것이다'로, 그리고 ⑸의 '이거나 그거나'는 '이것이나 그것이나'로 고쳐야 한다.

 

미국이랑/하고 일본이 항상 우리 편이란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그래놓고는 다른 사람더러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요번 기회를 안 놓쳐야 한다.

⑼ 미국과 일본이 항상 우리를 도와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⑽ 자신이 한 짓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⑾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구어적 표현의 세 번째 유형은 구어에서만 주로 통용되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위의 ⑹, ⑺, ⑻은 모두 구어에서나 통용되는 표현을 쓰고 있다. 문장이 아주 경박해보인다. ⑼, ⑽과 같이 고쳐야 한다. 특히 문어에서는 '요번', '요렇게', '조렇게' 등의 표현은 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⑿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환경의 오염과 핵무기의 개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전 인류의 일치된 노력이 필요한 것인데 각국이 모두 말로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다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만 챙길 따름이지 거의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잇는 상황이라서 나의 생각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⒀ 오늘날 환경의 오염과 핵무기의 개발 등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의 일치된 노력으로만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국은 모두 말로만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할 따름이지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만 챙기면서 거의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나 나름대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구어적 표현의 네 번째 유형은 문장을 적절히 맥고 끊지 않는 경우이다. 구어에서는 종결형을 써서 문장을 확실히 끝맺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여도 의미전달에는 별반 무리가 없다. 발화상황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중간중간 상세한 설명을 끼워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어를 이런 식으로 쓰면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는 아주 지리멸렬한 글이 되고 만다. ⑿의 예문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장을 적절히 맺고 끊고, 문장 사이의 접속관계를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⒀처럼 고치면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