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242] 제4부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2) 조사를 정확하게 써야 한다

2020. 4. 23. 06:44☎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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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2) 조사를 정확하게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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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사를 정확하게 써야 한다

 

▶ 보조사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국어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조사를 통해 단어의 문법적 의미나 실질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사는 국어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조사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격조가이다. 격조사는 단어의 격을 지정하는 문법적 역할을 한다. 즉 어떤 단어에 붙어 그것이 문장 안에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등의 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격, 목적격, 보격, 서술격, 부사격, 관형격 등의 격조사가 잇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격조사는 격의 지정이라는 문법적 여할만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접속조사가 있다. 접속조사는 문장 안의 두 요소를 동일한 자격으로 이어주는 문법적 역할을 한다. 접속조사 또한 두 요소의 대등적 접속이라는 문법적 열할만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⑴ 나의 동생이 선생님이 되었다.

⑵ 나에게 사과를 준 사람이 철수이다.

⑶ 사과와 배, 귤이며 딸기, 수박이랑 감 등을 마음껏 먹었다.

 

⑴과 ⑵는 조사 중에서 격조사만이 사용된 문장이다. ⑴의 '~의'는 관형겨, 첫 번째 '~이'는 주격, 두 번째'~이'는 보격, ⑵의 '~에게'부사격, '~를······'은 목적격, '~이다'는 서술격에 각각 해당하는 격조사이다. ⑶은 다양한 접속조사를 보여주고 있는 문장이다. 두 단어를 연결하고 있는 '~와', '~이랑', '~이며' 등이 모두 접속조사잉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격조사와 접속조사는 문법적 역할만을 지니고 있을 분 어떤 실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⑴, ⑵, ⑶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이외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 무미건조한 문장이다.

마지막으로 보조사가 있다. 보조사는 어떤 문법적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섬세한 의미를 전달하는 조사이다. 즉 보조사는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섬세한 뉘앙스를 아주 간단하고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는 구실을 한다. 또한 보조사는 아무 단어에나 자유로이 붙을 수 잇으며 다른 보조사와의 결합을 통해 보다 넓고 섬세한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국어가 다른 외국어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있는것은 많은 부분 이러한 보조사의 역할에 기대고 있는 바가 크다.

 

⑴ 내가 너를 믿는다.

⑵ 나는 너를 믿는다.

 

두 문장의 차이는 단지 조사 하나의 차이이다. 그러나 두 문장의 의미는 크게 다르다. ⑴의 문장은 겉으로 드러난 대로 단지 내가 너를 믿는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⑵의 문장은 이 사실과 함게 '다른 사람은 너를 못 믿을지 몰라도'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조사'는' 때문이다. 즉 이 조사는 이것과 결학하고 있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다른 것과 대조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조사는 반드시 어떤 특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냥 격조사처럼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쓰다가는 스스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크게 왜곡시키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조사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다른 표현을 통해서도 전달하기 어려운 아주 섬세한 의미를 참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자주 쓰이는 몇몇 보조사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았다.

 

⑴ 그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인격자다(확신).

⑵ 후보선수치고는 운동을 아주 잘한다(예외).

⑶ 산이든지 강이든지 아무데든 떠나자(선택-'던'이 아님).

⑷ 그럴수 없는 일이다(당위).

난들 뽀족한 수가 있겠느냐(보편)?

 

▶ 조사를 어법에 맞게 써야 한다

조사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에는 보조사를 잘못 사용해 의미를 왜곡시키는 경우 이외에도 어법에 맞지 않게 조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⑴ 미국에게 항의했다.

⑵ 꽃에게 물을 주었다.

⑶ 사슴 먹이를 주었다.

 

우선 '예게'와 '에'를 혼동하는 일이 잦다. '~에게'는 유정물, 즉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고 감정이 있는 대상에만 쓰이는 조사이며, '~에'는 무정물, 즉 무생물이나 식물처럼 움직일 수 없고 감정이 없는 대상에만 쓰이는 조사이다. 따라서 위의 예문은 모두 조사를 잘못 쓴 비문이다. 각각 '미국에', '곷에', '사슴에게' 등으로 고쳐야 올. 무정물에 '에게'를 붙이는 버릇은 아마도 문학적인 글들의 영향인 것 같다. 문학적인 글들을 흔히 무정물에 감정을 불어넣어 의인화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글에는 결코 그렇게 써서는 안 된다.

 

⑷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말했다.

⑸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

⑹ 죽으로서 적들을 막아냈다.

⑺ 학생으로써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인용조사도 자주 틀린다. '~고"는 따음표를 쓰지 않는 간접인용에, '~라고'는 따옴표를 쓰는 직접인용에 쓰인다. 따라서 ⑷ 와 ⑸는 모두 틀린 문장이다. '~로써'는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내는 조사이며, '~로서'는 자격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따라서 ⑹과 ⑺ 역시 모두 틀린 문장이다.

 

⑻ 누구던지 나와서 이 문제를 풀어보아라.

⑻ 선생님에게 의논해보십시오.

⑽ 나는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서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⑻ 의 '~던'은 조사가 아니라 과거를 나타내는 어미이다. 선택을 나타내는 조사 '~든'으로 고쳐야 옳다. 동일한 이유로 '가던지 말던지'는 ㄱ'가든지 말든지'로 고쳐야 한다. 과거의 의미가 아니라 선택의 의미를 나타내는 어구이기 때문이다. ⑼의 '~에게"는 '~과'로 고쳐야 한다. '의논하다'는 의논이라는 똑같은 행위에 관련되어 있는 여러 사름을 전제하는 동사이다. ㄷ라서 상광(相關)을 의미하는 조사 '~과'를 써야 한다. ⑼와 같은 잘못은 흔히 발견되는데 이는 '선생님에게 물어보십시오'와 같은 문장에서 잘못 배운 것이다. '물어보다'는 읜논하다'처럼 여러 사람이 같은 행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같은 행위에 관련되어 이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를 의미하는 조사 '~에게'를 쓰게 되는 것이다. ⑽ 의 '~에'는 당연히 '~의'로 고쳐야 한다. 이런 실수를 보고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실제로 이런 실수는 상당히 많다. '~의' 발음이 '~에'로 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에 알면서도 혼동을 일으켜 저지르는 실수인 것이다.

조사를 잘못 쓰는 경우는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금낒 살펴본 것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잘못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정된 지면에 이 모두를 다 살펴볼 수는 없는 것이고 또 다 살펴보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틀리게 쓰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된 자세이다.

 

▶ 관형격 조사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이해가 필요하다.

불신의 극복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모자가 어디 있는냐?

⑷이 시는 세태풍자의 주제를 지니고 있다.

 

⑴의 '~의'는 행태는 관혁격이지만 사실상 주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밑줄친 부분의 실제 의미는 '국민이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의'의 실제 의미를 살펴보면 ⑵는 목적격, ⑶은 소유격, ⑷는 동격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잇다. 이처럼 관행격조사 '~의'는 상당히 쓰임새가 많다. 그러므로 '~의'가 쓰인 문장은 곰공이 살펴 그 정확한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가령 '나의 그림'이라는 어구만 해도 '내가 그린 그림'에서부터 '나를 그린 그림', '내가 가진 그림', 그리고 심지어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나라는 그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의'가 이처럼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보니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부적절한 남용만은 피해야 한다. '~의'가 남용되는 현상은 주로 명사가 연속되어 나타나는 문장에서 발견된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⑸ 국민의 권리의 보장의 방안은 무엇인가.

⑹ 국민의 권리의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⑺ 국민의 권리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⑻ 국민 권리의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⑼ 국 권리 보장의 방안은 무엇인가.

⑽ 국민 권리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⑾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 문장들은 국민, 권리 보장, 방안이라는 네 개의 명사가 연속되어 나타나는 문장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켜본 것이다. ⑸는 '~의'를 지나치게 많이 써서 어색해진 문장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의'를 남용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하지만 ⑹, ⑺, ⑻, ⑼, ⑽ 등의 문장은 실제로도 많이 쓰는 문장이다. 즉 본래 의미와는 달리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의미로 해석되기가 더욱 쉬운 것이다. 앞서 설명한 거처럼 '~의'가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문장이다. ⑼는 '국민 권리 보장'과 같이 명사의 나열이 계속되어 또한 어색한 느낌을 주는 문장이다. 즉 글이 매끄러운 연결의 느낌을 주지 못하고 마디마디 토막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⑽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 더욱 나쁜 문장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가팅 관형격 조사'~의'가 지나치게 연속되거나 또는 이를 생략한 명사만의 나열이 지나치게 연속되는 것은 모두 좋은 문장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무난한 것이 ⑻의 문장이다. 의미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의'의 연속이나 명사의 나열을 적절히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⑻역시 아주 좋은 문장은 아니다. 가장 좋은 문장은 바로 ⑾과 같은 문장이다. ⑾은 '국민 권리 보장 방안'이라는 명사의 나열을 하나의 문장처럼 생각하여 후반부를 서술형으로 풀어쓰고 있다. 즉 명사가 연속되어 나타나는 문장은 이를 되도록이면 서술형으로 풀어쓰는 것이 의미의 명료성과 표현의 세련성을 함께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⑿ 국민 권리의 보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⒀ 어머니의 외침을 듣고 달려갔다.

⒁ 전쟁의 주장은 범죄이다.

⒂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16) 어머니께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17) 전쟁을 주장하는 것은 범죄이다.

 

⑿ , ⒀, ⒁는 모두 명사의 연속을 '~의'를 붙여 해결한 경우이다. 그리고 (15), (16,),(17)은 모두 이를 서술형으로 풀어써서 해결한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가 한층 명료한 의미, 세련된 표현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의'를 적절한 다른 조사로 바꾸어주는 것도 명료한 의미, 세련된 표현에 이르는 좋은 방법이다.

 

(18) 바닷가의 바람은 차가웠다.

(19) 두 채의 집이 서 있었다.

(20) 바닷가에는 바람이 차가웠다.

(21) 집 두채가 서 있었다.

 

역시 (18)과 (19)보다는 (20)과 (21)이 한결 좋은 표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국어는 일반적으로 (19)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한 필의 말, 한 채의 집, 한 명의 일꾼 등과 단위를 가리키는 명사에 '~의'를 붙여 쓰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표현을 구어에서는 결코 쓰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쓰는 사람은 별로 의식을 못하겠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다. 말 한 필, 집 한 채, 일군 한 명등이 더욱 좋은 표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명사가 연속되어 나타나는 경우 이를 '~의'를 붙여 간단히 해결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서술형으로 풀어쓰고 '~의' 이외의 적절한 다른 조사로 바꾸어준다면 한결 좋은 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외국어 번역투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

 

▶ 외국어투의 지시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⑴ 우리나라이ㅡ 인구는 일본의 그것보다 적다.

⑵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전자의 사랑은 정열이지만 후자의 사랑은 신앙이다.

⑶ 의지는 젊음의 표상이다. 이것을 잃고서는 젊은이도 젊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지니고 있다면 늙은이도 젊은이라 할 수 있다.

⑷ 우리나라의 인구는 일본보다 적다.

⑸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여자의 사랑은 정열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신앙이다.

⑹ 의지는 젊음의 표상이다. 의지를 잃고서는 젊은이도 젊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늙은이도 젊은이라 할 수 있다

 

구미어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지시어의 용법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즉 구미어에서는 앞에서 나온 내용이 뒤에서 다시 반복될 때 표현상의 특수한 효과를 노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를 반드시 지시어로 바꾸어 표현한다. 반복되는 내용이 어휘이든 어구이든 혹은 문장 자체이든 이는 마찬가지이다. 논리적 엄격성을 추구하는 서구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특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구미어를 읽는 데 애를 먹는 것은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

국어에서도 물론 지시어가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국어에서는 지시어의 용법을 그다디 엄격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 표현상의 특수한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아니라도 반복되는 내용을 굳이 지시어로 바꾸어 표현해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시어를 생략해도 문맥이 통하는 데 지장이 엇는 경우 심지어는 지시어를 없애버릭기도 한다. 이는 논리적 엄격성보다는 정서적 포용성을 추구하는 우리라라 사함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특징이다.

⑵는 전형적인 구미어의 표현이다. 반복되는 어휘인 여자와 어머니를 전자와 후자라는 지시어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상당히 어색하게 보인다. ⑶ 또한 굳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표현은 아니다. 어색하긴 마찬가지이다. 우리말은 ⑵와 ⑶처럼 스지 않는다. 지시어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⑸와 ⑹처럼 표현해주는 것이 좋다. ⑴ 역시 전형적인 구미어의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인구와 비교되는 대상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의 인구이므로 이를 정확히 밝혀 '일본의 그것'이라고 써주고 잇다. 문법적, 논리적으로는 저오학한 표현이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색한 표현이다. 우리말은 이렇게 쓰지 않는다. 지시어를 밝혀주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고 또 이를 생략해도 문맥이 통할 경우 과감하게 이를 생략한다. ⑷처럼 쓰는 것이 올바른 우리말의 표현이다.

지식과 교양수준이 높은 사람에게서 외국어투의 지시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구미어의 해독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 더욱 많이 발견된다. 우리말은 이렇게 쓰지 않는다. 어색한 느낌을 무릅쓰고 논리를 고수하기보단 마음 편하게 사는 쪽을 택한다. 논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 외국어투의 시제표현에 주의하여야 한다

구미어는 시제의 용법 또한 아주 엄격하게 지켜 쓴다. 현재, 과거, 미래 등의 기본시제에다 완료형의 시제를 덧붙이고 여기에 또 진행형의 시제까지 덧붙어 모든 시제를 꼼꼼하게 세분화해놓고 이를 문법적으로 엄밀히 표현하도록 한다. 그러나 국어에서의 시제표현은 그렇게 완고한 문법적 원칙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문맥이 통할 경우 현재, 과거, 미래의 기본시제만으로 모든 시제를 표현하는 것이 허융된다. 문맥이 통하기만 하면 심지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표현을 서로 섞어쓸 수도 잇다. 다음의 예를 보자.

 

⑴ 어제 내가 학교에 가는데 누가 내게 길을 물었다.

⑶ 지금 나는 학교에 간다.

⑶내일 나는 학교에 간다.

 

위의 세 문장은 모두 현재형의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시제가 모두 현재인 것은 아니다. ⑴은 과거진행의 시제, ⑵는 현재진행의 시제, ⑶은 미래의 시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구미어식으로 엄격하게 표현한다면 ⑴은 '가고 있었는데', ⑵는 '가고 있다', ⑶은 '갈 것이다'로 바꾸어주어야 옳은 것이 된다. 그러나 위 문장들의 표현을 틀렸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기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부사어를 갖고 있어 문맥을 통해 본래의 시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어는 문맥상 본래의 시제를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시제 표현의 자유를 거의 무한정으로 허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국어에서는 시제를 엄밀히 따져 억지로 이를 문법적으로 표현해내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문장이 어색해질 따름이다. 시제 표현을 엄밀이 하여 문장을 어색하게 만들기보다는 어색하지 않은 시제표현을 하고 본래의 시제는 문맥을 통해 유추하도록 하는 것이 보다 세련된 문장이 된다. 시제를 나타내는 부사어를 적절히 쓰면 본래의 시제를 나타내는 데에는 그리 어루운 것이 없을 것이다.

 

⑷ 우리는 학회에 참석했었었는데 바로 거기서 철수를 만났다.

⑸ 그는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⑹ 그는 법학을 공부했었습니다.

⑷는 구미어식의 시제표현으로 문장을 어색하게 만들고 있다. 철수를 만난 것이 과거의 일인데 학회에 참석한 것은 그보다 더욱 거거의 일이니 이를 엄밀히 표현하기 위해 거거완료의 표현을 쓴 것이다. 이 표현은 그냥 과거시제로 표현해주어도 시제 표현상의 잘못이 없다. 그렇게 하여도 철수를 만난 것보다 학회에 참석한 것이 먼저라는 사실이 문맥을 통해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참석했는데, 또는 '참석했었는데'라고 써주면 된다. 그러면 문장은 훨씬 부드러워 진다.

위에서 '했었는데'와 '했는데'의 두 표현을 다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두 표현은 차이가 없는 것일까? 그렇치 않다. 과거시제를 나타내는 형태소 '았/었'을 두 번 반복하여 쓴 표현 '았었/었었'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그 행위를 과거의일해적 행위로 한정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켜 과거에 한번 그런 적이 있었다거나 과거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⑸와 ⑹은 의미가 다른 문장이다. ⑸에서 우리는 그가 과거에 법학을 공부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잇을 뿐 그 이외의 어떤 사실도 알 수 없다. 그러나 ⑹에서 우리는 이 사실 이외에데 그가 지금은 법학을 공부하지 않고 잇다는 ㅅ실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 물주구문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갑작스레 내린 비가 우리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이런 좋은 사업이 계속 행해져야 한다.

⑶ 갑작스레 내린 비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⑷ 이런 좋은 사업을 (우리는) 계속하여야 한다.

불법 건물이 녹지를 훼손하고 있다.

⑹ 불법 건물 때문에 녹지가 훼손되고 있다.

(사람들이) 불법 건물을 지어 녹지를 훼손하고 있다.

 

물주구문이란 무생물을 주어로 하는 문장을 말한다. 우리말에서는 인간과 무생물이 서로 관련되는 어떤 내용을 표현하려 할 때 이를 물주구문으로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다. 거의가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인주구문으로 이를 표현한다. 이는 아마도 인본주의적 전통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구미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특수한 이유로 무생물을 강조하여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물주구문으로 이를 표현한다. 위의 예문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자.

⑴~⑷는 모두 인간과 무생물이 서로 관련된 어떤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다. 우리말은 이를 ⑶과 ⑷처럼 인주구문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구미어에서는 ⑴과 ⑵처럼 이를 무생물을 주어로 하는 사동문이나 피동문의 형태로 표현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구미어의 물주구문은 무생물을 가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은 무생물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경우라도 물주구문의 표현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쓴다. ⑶과 ⑷에서 볼 수 있듯이 무생물을 문장의 첫머리로 도착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요즘 ⑴과 ⑵와 같은 물주구문을 쓰는 일이 많아졌다. 번역서에서 우리말 표현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 없이 외국의 문장을 지격한 것을 보고 배운 탓이다. 물론 물주구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내용은 무생물을 주어로 하여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 ⑸와 같은 문장이 그 예이다. 이 문장은 무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관련된 어떤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물주구문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 이를 ⑹처럼 표현해도 물주구문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⑹은 ⑸보다 더 좋을 것도 더 나쁠 것도 없는 문장이다.

이처럼 무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관련된 어떤 내용을 표현할 때는 물주구문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를 굳이 인주구문으로 만들어 ⑺처럼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어색하다.

그러나 인간과 무생물이 관련된 어떤 내용을 표현하려 할 대에는 반드시 인주구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우리말 표현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이중사동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

 

⑴ 그분에게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⑵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⑶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타동사에서 다시 '시키다'라는 말을 붙여 이중사동의 표현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위의 예문들에서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소개하다', '혹사하다', '실현하다'는 타동사이다. 여기에 다시 '시키다'를 붙여 이중사동의 표현이 되고 말았다. 이중사동은 명백히 문법에 어긋난 표현이다. 따라서 이중사동의 표현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하여야 한다. '시키다'를 붙일 대에는 그 어휘가 자동사인지 타동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이중사동의 표현 역시 외국어에서 잘못 배운 것이다. 구미어의 사역동사에 대한 인상이 강하다보니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 자동사의 피동형 또는 이중피동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

 

⑴ 열차가 도착되고 있습니다.

⑵ 그는 당황된 표정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자동사는 결코 피동형의 표현으로 쓰일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피동형의 표현으로 쓰는 일이 많다. ⑴과 ⑵에서 '도착하다'와 '당황하다'는 자동사이다. 그런데도 이를 피동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문장에 나타나지 않는 그 어떤 다른 행위자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나타 생겨난 잘못이다. 즉 ⑴에서는 열차를 도착하게 한 기관사를, 그리고 ⑵에서는 그를 당황하게 한 그 무엇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이러한 행위자가 문장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기관사가 열차를 도착하게 했으니 그는 무엇에 의해 당황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실를 범하지 않으려면 피동형을 쓸 때마다. 그것이 혹시 자동사는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⑶ 그의 연구로 마침내의 의문은 풀려졌다.

⑷ 그는 국문학계의 큰 스승으로 불려진다.

⑸ 음주운전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졌다.

 

국어에서는 피동형을 만들기 위해 피동을 나타내는 접미사나 보조용언 등을 붙인다. '이/히/리기'와 같은 접미사나 '아지다/어지다', '받다/당하다' 등의 보조용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풀다'는 '풀리다'로, '부르다'는 '불리다'로, '강화하다'는 '강화되다'로 피동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예문들을 살펴보면 피동을 나타내는 형태소들이 겹쳐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⑶의 경우 '풀다'를 피동형으로 만들기 위해 '리'와 '어지다'가 겹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중피동의 표현 역시 명백히 문법에 어긋난다. 피동을 나타내는 형태소들을 명확히 인식하여 이러한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위의예문에서 나타난 이중피동의 표현은 각각 '풀렸다', '불린다', '강화되었다'로 고쳐야 옳다.

 

4) 연관되는 어휘를 서로 가까이 놓아야 한다

 

▶주술관계가 여러번 나타나는 겹문장의 경우 전체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의 거리가 아주 멀어지기 쉽다.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많은 절이 안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어와 서술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호응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주술의 호응관계는 글쓴이가 문법적으로 맞추어주기만 하면 독자가 알아서 파악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이를 쉽게 파악하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깔끔한 글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 호응하는 주어와 서술어는 되도록이면 가까이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위치가 가까울수록 그 호응관계를 파악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⑴ 우리는 전과자가 지난날의 과오에서 벗어나 밝은 새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할 것이다.

⑵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지금의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때문에 가볍기만 하다.

⑶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위의 문장들은 전체 문장의 주어와 섯굴어 사이에 많은 내용이 끼여들어 둘 사이의 거리를 아주 멀리 떨어뜨리고 있다. 따라서 주술의 호응관계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졌다.이럴때는 주어와 서술어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술의 호응관계가 명확해져 문장의 모호성을 줄일 수 잇다. 우리말에서 서술어의 위치는 문장의 맨 끝으로 전해져 잇다. 따라서 주어와 서술어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는 주어를 서술어 가까이로 옮기는 수밖에 없다.

⑴에서 '우리는'을 '그들에게'의 앞으로 옮겨주면 이것이 '주어야 할 것이다'의 주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⑵에서는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을 '가볍기만 하다'의 앞으로 옮겨주면 역시 주술의 호응관계가 보다 분명해진다. ⑶은 주어의 위치를 반드시 옮겨주어야 하는 경우이다. 그렇치 않으면 '일본은'이 '개입하지 않고'의 주어로 오일될 수도 있다. '일본은'을 '대규모'의 앞으로 옮겨주어야 주술의 호응관계가 분명해진다.

앞부분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문장은 주술의 호응관게가 분명한 문장이다. 한 문장의 의미는 주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주술의 호응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안은 문장 형태의 겹문장을 피하여야 한다. 이를 피할 수 없다면 주어와 서술어 사이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깝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 수시어와 피수식어를 가까이 놓아야 한다.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의 수식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또한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지게 된다. 이러한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되도록이면 가까운 곳에 위치시켜 수식관계를 분명하게 해주어야 한다.

 

온통 사회가 범죄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⑵ 절대 외상 사절

 

부사어는 동사, 형용사 등을 수식하고 관형어는 명사, 대명사, 수사 등을 수식한다. ⑴과 ⑵의 '온통'과 '절대'는 부사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사어들과 피수석어인 '가득 차 있는', '사절' 등과의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문장이 어색하게 되었다. '온통'은 '사회가'나 '범죄로'의 뒤로, 그리고 '절대'는 '사절'의 앞으로 옮겨주어야 한다. 하나의 수식어가 둘 이상의 피수식어를 꾸미거나 둘 이상의 수식어가 하나의 피수식어를 꾸미거나 둘 이상의 수식어가 하나의 피수식어를 꾸미는 경우에도 의미의 모호성이 생겨나기 쉽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⑶ 언제나 놁하는 그가 사랑하는 친구.

⑷ 엄천난 시간과 돈의 낭비.

⑸ 언제나 노력하는, 그가 사랑하는 친구.

⑹ 시간과 돈의 엄청난 낭비.

 

⑶은 '언제나 노력하는'과 '그가 사랑하는'이라는 두 개의 수식어가 '친구'라는 하나의 피수식어를 꾸며주고 있다. 그런데 이 어구에서 '언제나 노력하는'은 '그'를 수식하는 것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 이렇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쉼표를 사용하여 ⑸와 같이 고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⑷는 '엄청난'이라는 하나의 수식어가 '시간의 낭비'와 '돈의 낭비'라는 두 개의 피수식어를 꾸며주고 있다. 그런데 이 어구에서 '엄청난'은 '시간의 낭비'만 수식하고 '돈의 낭비'는 수식하지 않는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구를 변형하여 ⑹과 같이 고쳐주는 것이 좋다. 이처럼 수식어나 피수시어가 여러 개여서 생겨나는 의미의 모호성은 구두점을 사용하거나 문장을 변형하여 수식관계가 분명이 드러나도록 고쳐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