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281] 제2장 단락 1. 단락의 의미 ~ 4) 가벼운 서술로 출발할 수 있는 중괄식 단락

2020. 4. 27. 16:31☎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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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281] 제2장 단락락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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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머리가 하얗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전권을 타자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1. 단락의 의미

 

1) 내용단락과 형식단락

 

단락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우선 단락의 들여쓰기를 한 행이 다음 들여쓰기를 한 행을 만날 때까지의 글의 한 부분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의 단락을 형식달락이라 한다. 또 한 단락은 몇 개의 문장이 모여 하나의 중심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글의 한 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단락을 내용단락이라 한다.

형식단락과 내용단락은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의 형식단락이 하나의 중심사상을 지니고 있으면 일치하는 것이고 하나의 형식단락이 둘 이상의 중심사살을 지니거나 둘 이상의 형식단락이 하나의 중심사상을 지니고 있으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형식단락과 내용단락 중에서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단락은 바로 내용단락이다. 형식단락에 종속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단락이 내용단락에 의해 결정될 때, 다시 말해 내용단락과 형식 단락이 일치할 대, 가장 좋은 단락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글에서 각각의 단락을 구분하여 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한 단위의 사고내용과 다른 단위의 사고내용을 구분하여 보여줌으로써 글의 각 부분의 구성관계가 보다 명확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는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 글에서 각각의 단락이 지니는 기능은 한 단락에서 각각의 문장이 지니는 기능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단락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글은 문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단락과 같다. 적절하게 분절되지 않은 하나의 긴 문장이 한 단락을 구성하고 잇다고 생각해보라. 그 단락이 짜임새 있는 조직으로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단락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글과 단락의 관계는 단락과 문장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단락에 있어 문장이 그러하듯이, 단락은 글의 효과적인 전개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올바른 단락의 구성이 좋은 글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인 것이다. 이제부터 단락의 구조와 유형, 그리고 좋은 단락의 요건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앞서도 말했듯이 글과 단락의 관계는 단락과 문장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이제부터 설명되는 단락의 원리는 모두가 글의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들이다. 주의깊은 이해가 필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2. 단락의 구조

 

1) 소주제문과 뒷받침문

 

전체 글의 주제는 상당히 포괄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자세히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좀더 작은 여러 개의 하위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문명을 생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여러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글 전체의 주제라 하자. 만약 글쓰는 이가 이에 대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것저것 두서 없이 이야기한 다면 그 글은 짜임새 없는 글이 되어 독자를 힘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를 "인간은 도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인간은 조직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잇엇다"는 등의 여러 하우항목으로 나누고, 이 하위항목들을 하나씩 자세히 설명한 다음 이를 종합하여 위의 주제에 이른다면 참으로 짜임새 있는 글이 되어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글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주제를 펼치고 잇다. 주제를 새분화한 여러 하위항목들은 각기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단락을 구성한다. 내용이 간략하거나 주제와의 관련성이 작은 하위항목은 하나의 단락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겠지만 내용이 포괄적이거나 주제와의 관련성이 큰 하위항목은 여러 단락에 걸친 설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앞서 각각의 단락은 하나의 중심사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를 일러 소주제라 한다. 그렇다면 결국 각 단락의 소주제는 혼자서, 또는 여럿이서 모여, 주제를 좀더 세분화한 각각의 하위항목을 구성하는 단위가 된다. 따라서 각각의하우항목응ㄹ 구성하는 하나의 소주제,

또는 여러 소주제를 종합한 중간 크기의 주제 등을 모두 종합하면 결국 글 전체의 주제가 된다. 이를 도식화하면 위의 그림과 같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소주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이 되었을 것이다. 즉 소주제는 한 단락의 모든 문장의 내용이 집약된 중심사살이지만 이것은 또한 글 전체의 중심사상, 즉 주제를 세분화한 각각의 부분적 내용이 되는 것이다. 단락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소주제의 이러한 성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필요하다.

각각의 단락은 대개 하나의 소주제문과 여러 개의 뒷받침문으로 국성된다. 글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들러낼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락 역시 소주제를 효과적으로 들러낼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단락의 구조가 바로 하나의 소주제문과 여러 개의 뒷받침문으로 구성된 구조이다.

소주제문은 단락의 소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문장을 말한다. 소주제문은 단락 전체의 내용을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뒷받침문은 소주제문을 좀더 구체화시킨 구체적 진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 나는 추상적 진실이니 구체적 진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2) 추상적 진술과 구체적 진술

 

추상적 진술이란 상대적으로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진술을 말한다. 즉 상대적으로 집약적이고 전체적이며 따랏거 보다 경험하거나 감각하기 쉬운 내용을 담고 있는 진술이다. 구체적 진술이란 상대적으로 세부적이며 특수한 진술을 말한다. 즉 상대적으로 분석적이고 단편적이며 따라서 좀더 감각하거나 경험하기 쉬운 내용을 담고 있는 진술이다. 여기서 상대적이라는 말은 어떤 문장이 추상적 진술인지 구체적 진술인지의 여부는 반드시 다른 문장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어는 한 문장을 절대적으로 추상적 진술이니 구체적 진술이니 하고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애기를 종합하면 추삭적 진술은 구체적 진술의 상위범주가 되는 개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⑴ 환경오염이 심각하다.

⑵ 수질오염이 심각하다.

⑶ 하천오염이 심각하다.

 

위의 예문에서 ⑴은 ⑵보다 추상적 진술이다. ⑴은 ⑵를 포괄하는 보다 일반적인 진술이기 때문이다. ⑴보다 ⑵가 좀더 경험하거나 감각하기 쉬운 내용임은 말할 것도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⑵는 ⑶보다 추상적 진술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각의 진술이 담고 있는 내용 중에서 어느것이 보다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것인가를 보고 추상적 진술과 구체적 진술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진술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 자체만으로는 서로간의 포괄관계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어느것이 추상적 진술이며 어느것이 구체적 진술인지의 여부를 문맥을 통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다. 다음의 예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⑴ 친구가 부자이면 나도 부자인 것이다.

⑵ 친구의 것은 곧 내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문 ⑴과 ⑵는 내용 그 자체만으로는 서로간의 포괄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친구가 부자라면 나도 부자라는 진술과 친구의 것은 곧 내것이라는 진술 사이에는 범주상의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문장 중 어느것이 추상적이고 어느것이 구체적인지를 문맥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이다'라는 말 때문에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이유와 주자, 또는 근거와 결론의 관계가 형선된다. 이유와 근거를 알아야 주장과 결론을 이해할 수 잇다. 다시 말해 이유와 근거를 알지 못하고서는 주장과 결론을 이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유와 근거는 구체적 진술이, 그리고 주장과 결론은 추상적 진술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예문에서 ⑵가 구체적이며 ⑴이 추상적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각각의 진술이 담고 있는 내용중에서 어느것이 전체에 해당하는 것인가를 보고 추상적 진술과 구체적 진술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3) 소주제문의 요건

 

단락의 소주제를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잇는 문장, 즉 소주제문을 단락 안에 배치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이 없다. 단락 안에 소주제문을 배치하면 단락의 중심사상이 분명해져 그링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갈 우려가 적다. 따라서 당영히 글쓰기가 쉬워질 것이며 독자 또한 이를 이해하기가 수워질 것이다. 소주제문이 지니는 이러한 중심의 효과를 보다 분명히 하려면 소주제문을 단락의 첫부분에 배치하는 두관식의 단락을 쓰는 것이 좋다.

소주제문은 한 단락의 전체 내용을 펼처가는 중심이자 기준이 되는 중요한 문장이다. 따라서 삼사숙고하여 결정하여야만 한다. 소주제문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 이를 중심으로 펼처가는 나머지 내용이 짜임새 있는 내용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소주제문을 구성하는 요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여기서 미리 말해둘 것은 글 전체의 주제문과 소주제문의 관게이다. 글 전체의 중심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잇는 문장을 주제문이라 한다. 이 주제문과 소주제문은 주제문을 세분화한 각각의 하위항목이 되는 것이다. 좋은 주제문의 요건은 그대로 좋은 소주제문의 요건이 된다. 이 둘은 모두 주제문이란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ㅔ문이다. 좋은 주제문의 요건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좋은 소주제문의 요건에 대해 여기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이 다음에 나오는 주제문의 요건을 참고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주제문의 요건과 구별되는 소주제문의 특별한 요건 몇 가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 절절한 범주의 추상적 진술이어야 한다.

단락의 소주제를 뚜렷이 드러내 귀애서는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잇는 문장, 즉 소주제문을 단락 안에 배치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이 없다. 단락 안에 소주제문을 배치하면 단락의 중심사상이 분명해져 그링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갈 우려가 적다. 다라서 당연이 글쓰기가 쉬워질 것이며 독자 또한 이를 이해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소주제문이 지니는 이러한 중심의 효과를 보다 분명히 하려면 소주제문을 단락의 첫부분에 매치하는 두괄식의 단락을 쓰는 것이 좋다.

소주제문은 한 단락의 전체 내용을 펼처가는 중심이자 기준이 되는 중요한 문장이다. 따라서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여야만 한다. 소주제문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 이를 중심으로 펼처가는 나머지 내용이 짜임새 있는 내용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소주제문을 구성하는 요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여기서 미리 말해둘 것은 글 전체의주제문과 소주제문의 관계이다. 글 전체의 중심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장을 주제문이라 한다. 이 주제문과 소주제문의 관계는 앞서 말한 주제와 소주제의 관계와 같다. 즉 소주제문은 주제문을 세분화한 각각의 허위항목이 되는 것이다. 좋은 주제문의 요건은 그대로 좋은 소주제문의 요건이 된다. 이 둘은 모두 주제문이란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주제문의 요건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좋은 소주제문의 요건에 대해 여기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이 다음에 나오는 주제문의 요건을 참고하면 될 것이기 대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주제문의 요건과 구별되는 소주제문의 특별한 요건 몇 가지에 대해서만 지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 적절한 범주의 추상적 진술이어야 한다.

소주제문은 지나치게 추상적 포괄적 진술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단락의 안에서 완벽히 다루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소주제문은 또한 지나치게 구체적, 세부적 진술이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단락을 구설할 만한 내9용적 충실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주제는 한 단락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자 글 전체의 주제를 세분화한 일부분이다. 따라서 소주제는 지나치게 넓지도 또 좁지도 않은 적절한 크기의 추상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소주제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소주제문이 어느 정도의 추상성을 지녀야 하는지는 쉽게 짐장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독서는 여러 측면엣거 효용가치가 있다"라는 소주제문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한 단락 안에서 완벽히 다루기가 힘들다. 이것을 글 전체의주제문으로 적달할 것이다. 또한 "독서는 전문시식을 넓혀주는 효용을 지니고 있다"라는 소주제문은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한 단락을 구성할 만한 내용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두 문장의 중간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는 "독서는 실용적 측면에서 여러가지 효용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의 추상적 진술이 소주제문으로 합당하다 할 수 있다.

 

▶ 단일한 내용이어야 한다.

소주제문은 서로 무관하거나 대립되는 둘 이상의 내용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글 전체의 주제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제문은 그 내용이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둘 이상의 내용을 함께 다루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주제문의 경우와는 달리 소주제문은 둘 이상의 내용이 대등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대는 양자가 비록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이들을 함께 다루지 않는 것이 좋다.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 내용들인 만큼 이들을 다루는 비중이 균일해야 할 것인데 글을 쓰다보면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다 잘 알고 잇는 어느 한쪽으로 내용이 조금씩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내용을 다루다보니 자연 단락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다른 단락과의 분량상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소주제문이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 둘 이사으이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는 도도록이면 이것들을 분리하여 두 개의 소주제문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문학은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이요, 무용은 행위를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라는 소주제문이 있다면 이것은 "문학은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라는 소주제문과 "무용은 행위를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라는 소주제문으로 분리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둘 이상의 내용이 같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내용이 유사하여 굳이 별개의 내용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 그리고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주와 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같이 다루어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노력이란 힘들지만 보람이 있다ㅏ"라는 문장의 경우 힘들다는 내용과 보람이 있다는 내용은 불리되어 다루어질 수 없다. 이 두 내용은 상호간의 대조를 통해 보다 더 큰 내용으로 나아가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은 기쁨을 주며 위안을 준다"라는 문장의 경우 역시 기쁨을 준다라는 내용과 위안을 준다는 내용은 같이 다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낫다. 이 두 내용은 보다 더 큰 의미에서는 통합될 수 있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명료하고 간결해야 한다

주제문은 사실 글의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적다. 글 전체의 내용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소주제문은 오히려 글의 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한 단락의 내용을 보다 쉽게 쓰고 이해하기 위한 초점의 구실을 하기 ㄸ매누이다. 따라서 소주제문은 실제적인 표현의 측명 격시 대단히 중요하다. 글쓰는 이나 글읽는 이가 가장 명쾌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주제문은 우선 명료해야 하낟. 모호한 표현은 금물이다. 명쾌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유보적, 소극적 표현도 되도록이면 피한다. '~인 것 같다', '~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추정의 형식대신 단호하고 단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 또한 간결해야 이해하기 쉽다. 쓸데없는 수식을 피하고 소주제와 이에 대한 글쓴이의 의견만을 집약적으로 나타내여 한다. 수식이 많으면 소주제문의 의미는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4) 구체화의 방법

 

뒷받침문은 소주제문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켜 해명하는 문장이다. 구체화란 추상적 진술을 보다 구체적 진술로 바꾸어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뒷받침문이 소주제문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상세화, 둘째는 합리화, 셋째는 예시 또는 예증이다.

 

▶ 부연하고 상술하여 구체화한다.

상세화란 상술 또는 부연을 통해 추상적 진술, 즉 소주제문의 내용을 상세하게 풀이해주는 것이다. 상술이란 보다 상세하게 풀이하는 말, 그리고 부연이란 덧붙여서 이해를 돕는 말이란 뜻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인간의 힘에 의한 사회개조의 가능성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내용과 구상을 요청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보다 살기 좋게 개조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이룩할 것인가, 전치는, 경제는, 사회체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하는 것이 가장 인간사회의 진보를 촉진시키고 인간성의 완성에 적합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술의 기능은 대체로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두가지로 구분된다. 미적 기능이란 쾌락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이 주는 감동적 자극을 의미하며, 사회적 기능이란 교시적(敎示的)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이 주는 정치적, 교육적, 도덕적인 여러 종류의 광범위한 사회적 영향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들은 상세화를 통해 소주제문을 구체화하고 있는 글의 전형적인 예이다. 소주제문인 첫 번째 문장을 이후의 문장이 아주 자세하게 풀이해주고 있다.

상세화는 주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설명적인 글에 많이 쓰인다. 소주제문에서 대상에 대한 개력적이고 전체적인 정보를 준 다음 뒷받침문에서 상술이나 부연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상세화의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상세하게 풀이해서 이해를 돕는 방식은 무엇이나 상세화가 될 수 있다. 대상을 세분화해서 분석하는 것, 개념을 풀이하거나 해석하는 것,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것 등이 모두 상세화의 방법이다.

 

▶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 구체화한다

합리화란 이유나 근거의 제시를 통해 추상적 진술, 즉 소주제문의 내용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내 생각엔,진정한 여성의 교양미는 그 여성이 아름다워지려고 애쓴 흔적이 있을 때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다. 아마 이렇게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외모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인데, 그럼 못생긴 사람은 죽으란 말이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현대의 아름다움은 '예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요즘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예쁜 데 지나지 않고 '멋'에 있다. 이 '먹'은 '교양'에서 통한다. 옛날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선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잇다. '예쁜 여자'라는 말은 못 들어도 '멋이 있는 여자'라는 말은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멋이 있는 여자'야말로 최고의 찬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내용과 형식의 두 가지 면에서 골고루 조화를 이뤄야 하듯이, 여성에게 있어서도 내용(마음)과 형식(외며)이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것이 '멋'이요, '교양'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장이 소주제문이다. 글쓴이는 여성의 교양미란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문장에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주중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즉 현대의 아름다움이란 예쁜 용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멋에 있으며 이 멋이란 교양과 통하는 것이기 ㄸ문에 아람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곧 교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 주된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문학이 우리 주위에서 벌여지는 여러 가지 일상적(日常的)인 삶의 모습들과, 거기에서 야기되는 복잡 다단한 문제들을 작가의 미적(美的) 태도(태도)에 의해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부각시키고, 예술적 형상화의 과정을 토앻 작품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현실(現實)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작품 역시 그러한 작가적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 다시 말해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眼目)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글의 소주제문은 마지막 문장이다. 위의 인용문과는 달리 근거를 먼저 제시하고 이를 통해 어떤 주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글쓴이는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가 문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문학이란 삶을 다루는 것인데 문학에서 다루는 삶이란 작가의 미적 태도에 의해 수렴된 살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합리화는 주로 주장을 하고 이를 입증하는 논증적인 글에 많이 쓰인다. 소주제문에서 결론에 해당하는 주장을 한 다음 뒷받침문에서 이유나 근거를 제시해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 예시와 예증을 통해 구체화한다

예시 또는 예증이란 예를 들어보이는 것을 말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시나 예증은 상세화나 합리화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시란 예를 들어보임으로써 내용을 상세하게 풀이해주는 것이고 예증이란 예를 들어보임으로써 내용을 입증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시난 예증은 워낙 특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고 또한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라 따로 독립된 구체화으 한 방법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돼지는 후각이 빼어나게 발달되어 있다. 멧돼지는 몇십 리 밖에 있는 포수의 화약냄새를 맡고 일찌감치 도망해벌릴 정도로 후각이 발달되어 있다. 집돼지도 마찬가지로 냄새 맡는 기능이 매울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제 새끼와 다른 새끼를 구별하는 데나, 주인과 남을 구별하는 데에 주로 후각을 사용한다. 다른 동물이 침입했는지, 먹이가 들어왔는지 알아차리는 데도 주로 후각을 이용한다.

 

예시를 통해 소주제문을 구체화하고 있는 글이다. 돼지의 후각이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류도 마찬가지여서 민족간에는 자존성이 있다. 유생인종과 무색인종간에 자존성이 있고 같은 종족 중에서도 각 민족의 자존성이 있어 서로 동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한 나라를 형성하였으나 민족적 경쟁을 실로 격렬하지 않았는가. 최근의 사실만 보더라도 청나라의 멸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혁명 대문인 것 같으나 실은 한민족과 만주족의 쟁탈에 연유한 것이다. 또한 티베트족이나 몽고족고 각각 자존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면 궐기하려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동화정책,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동화정책, 그리고 수많은 영토에 대한 각국의 동화정책은 어느 하나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없다.

 

위의 글에서 글쓴이는 민족은 각기 자존성이 있어 서로 동화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대국의 식민지 동화정책이 실패한 예를 여럿 들어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예증의 방법으로 소주제문을 구체화하고 있는 글이다.

앞의 글은 설명의 글이며 뒤의 글은 논증의 글이다. 이처럼 에시, 예증은 어떤 양식을 글에나 두루 쓰이고 또 가장 많이 쓰이는 구체화의 방식이다.

 

▶ 접속어를 이용하면 보다 쉽게 구체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구체화의 방법 세 가지를 잘 알고 있으면 소주제문을 해명하는 뒷받침문을 만들기란 아주 쉽다. 단락과 소주제문의 성격을 잘 파악하여 여러 구체화의 방법 중 어떤 것이 적절한 것인지를 결정한 다음 결정한 방법에 ㄸ라 구체적 진술을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 진술의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는 각각의 구체화의 방법에서 흔히 쓰이는 접속어들을 알아두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상세화에서는 즉, 다시 말해, 환언하면,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쉽게 말하면, 특히 등의 접속어가 자주 쓰인다. 만약 단락이 뒷받침문이 먼저 나오고 소주제문이 뒤에 나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면 이러한 접속어들은 그러므로, 따라서, 그리하여, 그 결과 등의 접속어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시, 예증에서는 예를 들어, 예컨대 등의 접속어가 자주 쓰인다.

속으로 이러한 접속들을 되뇌이면서 구체적 진술을 해나간다면 한결 그 내용이 잘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접속어들은 꼬박꼬박 적지만 문장이 시작될 때마다. 이러한 접속어가 나타난다면 오히려 눈에 거슬릴 것이다.

 

3. 단락의 유형

 

단락의 유형을 가르는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바로 단락의 구조이다. 즉 단락 안에서 소주제문과 뒷받침문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나타나는가에 ㄸ라 단락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구분해보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단락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단락의 초점이 분명해지는 두괄식 단락

 

먼주 두괄식 단락이 있다. 소주제문이 단락의 첫부분에 위치하고 뒤이어 뒷받침문이 나나나는 단락이다. 두괄식 단락은 가장 많이 사용되고 또 가장 권장받는 단락의 유형이다. 단락의 중심사상을 먼저 제시해놓은 다음 단락을 펼쳐나가기 때문에 단락의 초점이 뚜렷해지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락의 내용이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 산만해질 우려가 적고 독자 또한 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을 미리 알고 글을 읽게 되기 때문에 글의 내용이 단조롭게 느껴질 우려도 있다. 따라서 두괄식 단락을 사용할 때에는 구체적 진술이 흥미 있는 내용이 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다음은 두괄식 단락의 예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무해한 오락물같이만 보이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는, 철저한 백인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고고학자호서의 그의 기량은 오로지 성퀘나 성배를 찾는 데에만 바쳐지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에 의하여 직접·간접으로 파괴되는 원주민들의 문화유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유럽인들은 대개-특히<인디에나 존스2> 편에서 -미개하고 괴이한 인간들로 묘사되고 그들 중 똑똑한 몇몇은 인디의 부하로 일하는 '영예'를 누린다. 물론 그들은 인디에게 전적인 존경과 충성을 바친다. 나머지는 백인을 '구세주'라고 믿는 순박한 '선인'들과, 기과한 의식을 통해 힘을 얻고 선인들을 괴롭히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악인들로 뚜렷이 양분된다.

 

첫 문장이 소주제문제이다. 소주제문을 서두에 위치시켜 글의 초점을 분명히 한 다음 여러 뒷받침문을 통해 이를 구체화 하고 있다.


2) 독자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주는 미괄식 단락

 

두 번째로 미괄식 단락이 있다. 뒷받침문이 되는 구체적 진술이 먼저 나타나고 단락의 끝부분에 소주제문이 나타나는 단락이다. 이때 소주제문의 첫멀리에는 대개 따라서, 그러므로, 결국, 이처럼, 여기서, 한마디로 등의 접속어가 나타나게 된다. 소주제문은 그 앞부분의 내용을 집약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미괄식 단락은 독자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즉 여러 구체적 진술을 통해 글쓰는 이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한 후에 끝에 가서 결론을 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단락 전체를 일관하여 독자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부분을 써나갈 때는 글의 초점이 뜨렷하지 않기 때문에 글의 내용이 엉뚱한 곳으로 빗나갈 우려가 있다. 결국 미괄식 단락은 두괄식 단락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바꾼 것이라 생각하면 쉽다. 따라서 미괄식 단라글 사용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단락의 초점을 분명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소주제문을 미리 분명히 결정해두고 마치 이것이 단락의 첫 부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글을 써나가는 것이 좋다. 다음은 미괄식 단락의 예를 든 것이다.

 

독서, 즉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소리내어 읽는 눙력과는 구별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글자의 음대로만 읽었다고 하여 읽기가 완결된 것은 안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그 내용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어야 글을 완전히 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서는 문자로 표기된 문자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문자언어를 해독하여, 그 언어 기호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음미한 다음, 어떤 반응을 나타내어야 읽기가 완료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글의 소주제문은 마지막 문장이다. 단락의 서두에서 질문을 던져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 이에 대한 해명을 점차 구체화시켜 마침내 결론에 이르고 있다.

 

3) 소주제문을 뚜렷이 강조해주는 양괄식 단락

 

다음으로 양괄식 단락이 있다. 소주제문이 단락의 첫부분과 끝 부분에 두 번 나타나고 그 사이에 뒷받침문이 위치하는 단락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괄식 단락이 소주제문을 두 개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소주제문이 두 번 나타나는 것일 따름이다. 이처럼 소주제문이 두 번 나타나는 것은 소주제문을 뚜렷이 강조하여 독자에게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하서이다. 따라서 양괄식 단락이 사용되는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우선 바로 그 단락의 소주제문이 글 전체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을 때이다. 따라서 소주제문의 반복을 통해 그 내용을 독자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락의 첫부분에 소주제문이 나타났지만 이어지는 뒷받침문이 매우 길어졌을 때이다. 뒷받침문이 오래 계속되다보면 앞서 나왔던 소주제문으로부터 독자의 관심이 멀어지기 쉬우므로 이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우해 끝에 가서 한 번 더 소주제문을 제시하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단락의 소주제문이 다음 단락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 때이다. 이 경우에는 소주제문과 다음 단락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좋으므로 미괄식 단락이 아니라면 소주제문을 한 번 더 반복해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괄식 단락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지만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피하기가 어렵다. 다라서 끝부분의 소주제문은 앞부분의 소주제문과 그 내용과 표현이 완전히 같아서는 안된다. 내용은 같더라도 표현양식을 조금 달리 하거나 또는 그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용을 조금 발전 시키는 것이 좋다. 다음은 양괄식 단락의 예이다.

 

인간의 역사는 또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유, 즉 사살의 자유가 꾸준히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지구가 도는 것임을, 만민이 평등함을, 권력의 국민의 것이어야 함을, 재부가 만민의 것임을 납보다 먼저 말했다가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무리 무서운 권력도 뿌리 깉은 인습도 인간의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를 계속 누를 수는 없엇다. 사상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내용의 소주제문을 단락의 서두에 놓고 있다. 그리고 부연을 통해 이를 구체화한 다음 단락의 말미에 가서 이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단락의 말미에 붙은 내용은 서두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즉 사상의 자유가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격이었다는 내용으로 서두의 내용이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가벼운 서술로 출발할 수 있는 중괄식 단락

 

다음으로 중괄식 단락이 있다. 소주제문이 단락의 중간으로 오고 그 앞뒤로 뒷받침문이 위치하는 단락이다. 두관식 단락이나 미괄식 단락은 단락이 처음부터 띁까지 아주 논리적으로 조직화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소주제문이 먼저 나왔다면 뒷받침문이 이를 명쾌하게 해명해주어야만 하며 뒷받침문이 먼저 나왔다면 이로부터 수주제문이 논리적으 이끌려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괄식 단락은 이러한 논리성의 부담에서 어느 젇오 벗어나 가벼운 서술로 출할 할 수 잇는 장점이 있다. 앞서 나온 뒷받침문과 뒤이어 나온 소주제문의 관계가 명료하지 않더라도 마지막의 뒷받침문을 이용하여 이를 보강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관식 단락은 주의환기에 적젏나 비교적 가볍고 자유로운 서술로 단락의 말문을 연 뒤 이를 통해 잠정적으로 소주제문을 유도하고 다시 뒷받침문을 통해 이를 좀더 논ㄴ리적으로 보강하는 형식을 띤다. 가볍게 출발하므로 글쓰는 이가 쉽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단점도 잇다. 우선 소주제문이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단락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두의 가벼운 서술만으로 바로 소주제문을 이끌어 내게 되므로 논리적 비약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쉽다.

 

상식이 지배하는 정치가 자리잡을 수 잇는 하나의 가능성은 아마도 전치가들에 대한 주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전치가들이라야 상식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을까. 정치꾼은 많지만 정치가는 참으로 드물다. 미사여구(美辭麗句)의 선언문만으로는 보다 더 큰 거리감만을 느끼게 해준다. 웅변이나 선언문이 아니라 정치가의 의식과 능력이 바로 사식의 정치를 틀 잡게 할지도 모른다. 상식의 정치는 정치가가 의식의 면에서는 아마추어적이고, 능력의 면에서는 프로패셔널할 대 비로소 기대될 수 잇는 것이기도 하다. 바꺼 말하면 정치가의 의식은 항상 그 자신이 뽑힌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부름을 받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며, 그러면서도 정치를 스포츠처럼 정정당당하게 겨루어보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가의 능력은, 그가 맡은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느 전문가의 능력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함이 입증될 수 있어야 할것이며, 그 방면의 최고의 권위자로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공해문제에 대하여, 청소년문제에 대하여, 농민소득에 대하여, 도시교통에 대하여 외교문제에 대하여 그 나름의 능력이 기여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단락의 소주제문은 단락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잇다. 밑줄그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단락의 서두에서 일단 어떠한 정치가라야 상식의 정치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고 잇다. 그리고는 정치가의 의식과 능력이 중요하다는 매개적 진술을 한 다음 아마추어의 의식과 프로페셔널의 능력을 지닌 정치가가 상식의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소주제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문장에서 어떤 정치가가 이러한 정치가인지를 구체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아주 자임새 있게 구성된 중관식 단락이라 할 수 있다.

 

5) 소주제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괄식 단락

 

마지막으로 무괄식 단락이 있다. 소주제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단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단락에 소주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단락은 단락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괄식 단락이 사용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소제문이 지나치게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일 경우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신다"라는 소주제문은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어서 이를 뚜렷이 드러내는 경우 단락의 내용 전체가 진부한 것으로 비취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소주제문을 없애고 뒷받침문만을 제시하여 독자 스스로 소주제문을 발견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즉 어머니의 사랑의 구체적 실례들만을 주욱 보여준다면 독자는 거기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유추해낸 뒤 이에 대해 미처 몰랐던 사실처럼 새로이 감동을 받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뒷받침문으로도 단락의 소주제를 독자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단락의 내용이 비둘기의 얼굴과 몸통, 그리고 다리에 대해 소상히 묘사하고 잇는 것이라면 그 단락이 비둘기의 겉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모를 독자는 없다. 이 경우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겉모습을 지니고 있다"라는 소주제문을 넣어주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려면 무엇보다도 물의 양이 알맞아야 한다. 우선, 냄비에 계량컵으로 정확히 물의 양을 측정하여 붓는다. 그리고 나서 부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양파를 썰어 넣어 물이 팔팔 끓도록 기다린다. 물이 끓으면 라면을 수프와 함께 넣고 냄비의 뚜껑을 비스듬히 냄비 위에 올려놓아 넘치지 않게 한다. 면이 익기까지의 7~8문 간은 가장 분주한 순간이다. 라면의 맛을 돋우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들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팔를 씻어 송송 썰어 넣고 묵은 김치도 준비해놓는다. 라면이 익은 후에는 달걀을 풀어 영양가를 높인다. 1~2분 동안 달걀이 익는 것을 기다린 후 예쁜 그릇에 담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묵은 김치와 함께 자신이 직접 만든 뜨거운 라면을 먹는 것은 출출함을 달램은 물론 하나의 즐거운일이 되기까지도 한다.

 

위의 단락에는 소주제문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이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잇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따라서 "라면을 맛있게 끓이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쓴다"라는 식의 소주제문을 넣어주는 것은 오히려 미숙한 글쓰기라는 느낌을 준다.

앞서도 말했듯이 무괄식 단락은 소주제가 없는 단락이 아니다. 소주제문을 명시하지 않은 것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르 쓰지 않은 단락일 분이다. 무괄식 단락을 사용할 대에도 글쓰는 이는 소주제문이 단락의 서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써나가는 도중에 소주제에 대한 의식이 흐려져 초점이 없는 산만한 글이 되기가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