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8. 20:00ㆍ☎박동규교수문학실☎
제2장 단락 4. 단락의 요건 ~ 5. 단락의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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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머리가 하얗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전권을 타자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4. 단락의 요건
1)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 단락의 모든 내용은 하나의 소주제로 집약되어야 한다.
단락의 통일성이란 한 단락 안의 모든 내용이 하나의 소주제로 집약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락의 통일성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우선 소주제가 하나여야만 한다. 불가피하게 둘 이상의 화제를 다루어야 하는 경우라도 그 두 화제는 하나의 더 큰 소주제로 통합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리고 소주제와 무관하거나 상반되는 내용의 뒷받침문을 써서는 안된다. 뒷받침문이 약간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대 그저 분량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쓸데없는 일반 지식을 늘어놓거나 불필요한 수식에 매달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도 해서 내용이 좀더 충실해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락의 초점을 흐리고 집중력을 약화 시킨다.
인간은 신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누구이건 단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인간이란 증거인 셈이다. 흔히 '인간적'이란 말을 쓴다. 이 말은 누구나 호감을 가지는 긍적적인 개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물론 단점이 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단점을 가진다는 것은 오로지 배척해야만 하는 악덕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한 측면인 것이다. 나 역시 완전한 존재가 아닌 이상 장점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장점은 살려나가되 단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은 최선을 다해 고쳐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모든 단점이 고쳐졌다 생각되는날까지 나의 이런 노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터이니 결국 나의 노력은 죽는 날까지 계속되게 될 것이다.
위의 글은 통일성이 없는 단락의 예이다. 단락의 앞부분에서는 단점을 지닌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라 하여 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단락의 뒷부분에서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단점을 고쳐나가겟다고 함으로써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단락에는 전체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요지가 없다.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상반된 시각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독자는 도무지 잠작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단락을 통일성을 지닌 단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상반된 시각 중의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즉 단점을 긍정하는 앞부분의 내용을 없애거나 단점을 부정하는 뒷부분의 내용을 없애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두 시각을 조화시켜 보다 넓은 하나의 시각으로 통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단점이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점이 용서받을 수 잇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새로운 논리를 마련할 수 잇을 것이다. 즉 두 시각을 역접의 관계로 연결하여 하나의 더 큰 시각 속에 통합 시키는 것이다.
매화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겨울의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매화가 선구자적이고 초지상적인 느낌을 주는 데는 이것이 커다란 이유가 된다. 또한 매화는 그 모습에서 기품과 아취가 넘쳐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글 읽는 선비를 연상시킨다. 또한 매화에는 좋은 향기와 청초한 빗깔이 있어 사모하는 님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매화는 이른봄에 백색 또는 연분홍의 꽃이 피는 앵도과의 교목이다. 그 열매는 한약재로 스기도 한다. 눈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야생매가 아나라 화분에 담겨 피는 분매라 하더라도 이러한 그윽한 성품을 버리지 않은 것이 어디서나 한결같은 지조의 풍모를 더욱 짙게 한다.
위의 글 역시 통일성을 일고 있는 단락이다. 겉보기에는 매화의 특성에 대해 논한 글로서 통일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글은 매화의 여러 가지 특성에서 정신적인 의미를 발견해내고 있는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이다. 매화으 풍모를 고결한 인격을 지닌 인간에 비유하고 있는 데서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밑줄 그은 부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글의 성격이 바뀌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매화에 대한 정보글 제공하고 잇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 즐 설명의 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단락의 통일성은 내용의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글의 성격과 문제에 있어서도 통일성은 지켜져야만 한다. 이를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 단락의 통일성을 얻기 위해 유읳야 할 사항들
단락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우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우선 소주제를 되도록이면 명확하고 한정된 개념으로 잡아야 한다. 뒷받침할 재료가 보다 풍부하게 마련될 것 같은 느낌에 막연하고 추상적인 넓은 범주의 개념을 소주제로 잡는 사람이 많다.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은데 실제로 글을 써보면 이상하게도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화제가 명확하지 앟으네 재료가 명확하게 떠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다음으로 단락의 처음에서 끝까지 항상 소주제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나가야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앞의 문장과의 연관성만 생각하고 다음 문장을 이어나간다. 언듯 생각하면 계속 앞문장과 연관되는 문장만을 써왔으니 전체 단락도 당연히 서로 연관되는 내용으로만 채워질 것 같다. 그런데 실제를 글을 써보면 역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즉 제일 처음의 문장과 제일 마지막의 문잔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엉뚱한 내용을 각각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인간의 단점에 대한 상반된 두 시각을 함께 담고 있는 앞서의 인용문은 이러한 이유로 하여 통일성을 잃게 된 글의 대표적인 에라 하겠다.
소주제문을 제외한 단락의 모든 문장은 결국은 소주제문을 뒷받침하는 문장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문장과의 연관성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소주제문과의 연관성이다. 앞문장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그 문장이 반드시 소주제문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문장의 맥락만을 생각하고 뒷문장을 쓰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글의 내용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디까지 달려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항상 소주제문을 염두에 두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문장을 통제하려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음으로 문체의 통일 역시 잃지 않아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매화의 특성에 대한 글을 상기해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이 아니다. 뒷받침문의 표현형식은 소주제문의 표현형식과 통일되도록 해야 한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표현형식의 소주제문을 써놓고 이를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표현형식으로 뒤받침해서는 안 된다. 또한 소주제문은 단호하고 단정적인 어투로 표현해놓고는 이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식의 추정적이고 유보적인 어투로 뒷받침해서도 안된다.
2) 완결성을 지녀야 한다
▶ 단락의 소주제는 충분하고도 구체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단락의 완결성이란 단락의 소주제는 뒤받침문을 통해 충분하고도 구체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주제문은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뒷받침문의 내용이 이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든지 뒷받침문이라 짐작되는 구체적 내용은 풍부한데 이를 집약하고 통일할 만한 소주제는 없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단락의 와결성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단락의 소주제문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단라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뒷받침문의 내용이 일관성이 있어 이를 충분히 짐작해낼 수 있다면 완결성을 지닌 단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락의 전체 내용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이는 분명히 완결성이 결여된 단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락의 전체 내용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면 분명히 완결성이 결여된 단락이다.
완결성을 얻기 위해서는 뒷받침문의 내용이 독자가 소주제를 분명히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따라서 완결성의 수준은 대상 독자와 소주제의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소주제가 쉬운 개념이고 독자의 지식수준이 높다면 뒷받침문의 내용은 그다지 풍부할 필요가 없다. 아주 상식적인 소주제라면 사실 뒷받침문은 거의 필요하지조차 않다. 굳이 이를 이리저리 뒷받침하는 것이 오히려 글의 효과를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주제가 어려운 개념이고 독자의 지식수준이 낮다면 상당히 풍부하고도 제세한 내용의 뒷받침문이 필요하다. 하나의 단락이 다른 단락에 비해 아주 길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소주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즉 상세화, 합리화 예시와 예증 등의 방법2을 써서 소주제를 좀더 구체화 해주면 될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협조할 수도 있으나 때에 ㄸ라서는 심한 대립과 반발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이 사회를 거부하고나 사회가 개인을 부정할 대에는 갈등과 모순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이 자유를 찾아 투쟁했던 역사를 본다든지 독재국가에서 지성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면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를 위하여 사회가 개인을 위할 때에는 협동과 유대가 넘쳐나게 된다.
완결성을 지니지 못한 단락의 예이다. 이 단락의 주제는 첫 번째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개인과 사회는 조화될 수도 대립할 수도 있으며 조화하게 되면 협조가 이루어지고 대립하게 되면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좋화와 협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요지만 제시하고 있을 뿐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것이며 그렇다면 이글은 완결성이 결여되었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이 완결성을 갖춘 단락이 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물론 해명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즉 개인과 사회가 조화, 협조하는 관게에 대해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주면 될 것이다. 둘째는 뒷받침문의 내용이 균형을 이루도록하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할 수도 대립할 수도 있다는 이 단락의 주제는 사실 평범한 내용이다.
따라서 뒷받침은 풍부하고 자세할 필요가 없다. 밑줄 친 부분 정도만 있어도 충분한 뒷받침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조화의 관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채 대립의 관게에 대해서만 더욱 자세한 뒷받침을 시도함으로써 전체적인 뒷받침문의 내용이 규현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 "전체주의 ~ 있게 된다"의 내용을 삭제해 균형을 회복해주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느낌을 줄이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유치한 노래는 <정석가>이다. 또한 동요에 지나지 않는 노래로 <사모곡>이 있다. 얼마간의 문예성을 지닌 것으로는 <동동>이 있고, 보다 많은 향수층을 지녔던 것으로 <가시리>가 있다. 그러나 <가시리>는 선뜻선뜻한 재치가 뛰어남은 인정할 수 있으나 깊이가 없어서 경쾌한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락에는 단락 전체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잇는 주제문이 없다.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추론해낼 수도 없다. 단락의 내용이 초점이 없는 산만한 얘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로 고려가요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가유에 대한 개괄적 해설을 소주제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단락의 내용이 지나치게 충실하지 못하다. 단지 몇몇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여 해설의 기준도 뚜렷하지 않은 단편적인 감상만ㅇ르 하나둘씩 툭툭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결성이 없어 전체적으로 몽땅 뜯어 고쳐야 할 단락이다.
3) 연결성을 지지녀야 한다.
▶ 단락의 각 문장은 유기적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
단락의 연결성이란 단락 안의 문장들잉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긴밀성이라 하기도 한다. 단락이 연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락 안의 여러 문장들이 그 의미와 논리에 있어 서로 맞물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각 문장 사이에 의미상, 또는 논리상의 단절이 있는 경우, 예를 들어 앞문장의 내용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뒷문장이 왜 나왔는지를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이 단락은 연결성이 결여된 단락이다.
또한 그러한 각 문장 사이에 연관성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야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아 그 의미와 논리의 연관성을 유추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면 이 또한 연결성이 결여된 단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연결성이 없는 단락은 서로 상관없는 문장들의 무의미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문맥이 통한다느니 통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다. 이때의 문맥이란 바로 단락의 연결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 문장이 서로 연관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앞문장의 내용의 일부분을 받아서 뒷문장을 이어나가야 한다. 따라서 뒷문장에는 대개 앞문장의 내용의 일부분이 반복되는 부분이 있게 된다.
결국 단락의 연결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반복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부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글은 당연히 장황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러한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부분을 지시어나 접속어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다.
사회마다 독특한 문화특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온 생활 지혜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문화에 더욱 친숙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김치와 된장맛을 잊지 못하고 온돌방에 향수를 느낀다. 외래문화가 전파되더라도, 전통적인 생활양식의 힘이 강하면 그것을 수정하여 독특한 새로운 문화특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 우리나라에 많이 건설된 아파트의 난방방식이 파이프를 이용한 온돌식으로 된 것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위의 글은 연결성이 결여된 단락의 예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적 관계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문맥의 형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접속어를 사용하여 각 문장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확실히 밝혀주면 좀더 짜임새 있고 분명한 내용의 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문장에 앞에는 '그래서', 세 번째 문장 앞에는 '가령'이나 '예를 들면', 네 번째 문장에 앞에는 '그리고' 정도를 넣어주면 적당할 것이다.
4) 강조성을 지녀야 한다
▶ 글의 내용을 통해 강조할 수 있다
우선 글의 내용을 통해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수 있다. 내용을 통해 강조하는 방법은 크게 어휘에 의한 강조와 반복에 의한 강조로 나눌 수 있다.
어휘에 의한 강조란 강조의 의미를 지닌 어휘를 사용하여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요컨대', '첫째', '둘 째' 등 가옺의 의미를 지닌 어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는 적절하게 사용되어야만 실제적인 강조의 효관를 낳을 수 잇다. 과장된 강조의 어휘를 사용한다든지, 또는 강조의 어휘가 지나치게 남발된다든지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힘써야 한다. 산업간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 또한 더없이 중요하다. 요컨대 중소기업의 활성화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해외협력의 강화 역시 일차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사화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 각 부분에서의 제도개혁이라 할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모든 문장,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중요하자 않은 문장에 더 관심이 갈 정도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괜히 흥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나친 호들갑은 비우음을 살 뿐이다.
반복에 의한 강조란 중요한 부분을 한두 번 더 반복해줌으로써 이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는 방법이다. 반복은 대로 그 자체만으로도 반복되는 내용에 대한 강한 믿음을 유발하는 주술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 종교나 의식 등에서 사용하는 주문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문을 읊조리는 사람들은 사실 그 주문의 구체적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의미도 잘 모르고 그 주문을 단순히 반복하기만 하는데도 그들은 도한 대부분 마음의 평정을 얻거나 원하는 것이 곧 이루어질 듯한 믿음에 휩씨이게 된다.
반복이 어떻게 하여 이러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심리학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하지만 규칙적인 반복, 즉 리듬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인 음악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은 지성이나 논리보다는 생리와 감정에 호소한다. 생리와 가정의 자극이 그 어떤 논리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반복은 아마도 우리의 생리와 감정을 자극하는 그 어떤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시문학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노린 반복의 기법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도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도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끊임없이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웃고 일어설 줄 아는 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이 풀은 대개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주장하기 위해 시인은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잇다. 또한 우리의 정서를 자극할 만한 별다는 수사나 기교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를 읽고 풀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하 강한 믿음을 가제 되며 또한 감동받게 된다. 그것을 바로 반복의 기법이 가져다주는 주술적인 효과 때문인 것이다.
얼굴다운 얼굴이 없다. 얼굴다운 얼굴이 하나도 없다. 신앙ㅇ은 우리들의 얼굴을 얼굴다운 얼굴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맑고, 고귀하고, 부드럽고, 겸허하고, 이 같은 얼굴이 얼굴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얼굴이 아니다.
교육도 우리들의 얼굴을 얼굴다운 얼굴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교양도, 문학도, 도덕도 우리들의 얼굴을 얼굴다운 얼굴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우리들의 얼굴을 얼굴다운 얼굴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막 못하다. 우리들의 신앙, 교육, 문학, 도덕, 정치, 경제, 그리고 형명조차도 우리들의 얼굴을(僞)되고 천하고 교만하고 보기 흉하게 만든다. 남성의 장하고 무서운 얼굴, 여성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얼굴이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허영과 교만과 아첨의 얼굴 껍질과 분과 화장술과 머리 모양을 한데 뒤섞어 가지고 자기들 얼굴이라 일컫고 있다.
오늘 우리들의 병도 어디까지나 얼굴의 병이다. 그리고 얼굴의 병은 결국 심정의 병이고, 얼굴이 맑고, 고구하고, 부드럽고, 겸허한 자가 아니고는 우럴찬 새로운 역사를 향도(嚮導)하기 어려울 것이다.
효과적인 반복을 통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좋은 글이다. '얼굴' 또는 '얼굴다운 얼굴'이란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도 장황한 느낌, 산만한 느낌,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글에 힘이 실리고 내용이 주는 호소력이 강화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정서적 자극을 주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반복이 이러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복은 글을 산만하고 지루하게 하여 독자의 짜증을 유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만함과 지루함의 위험을 피하며서도 내용을 적절히 강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반복의 방법은 없는 것일까.
효과적인 반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같은 내용이 그대로 복사되어서는 안 된다. 적절한 표현의 변화와 의미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 즉 이전의 표현과 유사한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또는 같은 의미를 지니는 비유적 표현으로 형식이 바뀌어야 하며 의미 역시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심화된 점진적 발전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결국 효과적인 반복의 여부는 어느 정도 수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많은 동의어와 유의어를 알아야 하며 비유법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휘의 이미지와 뉘앙스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다시일 내에 배양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이 없을 때는 반복을 통한 강조보다는 어휘를 통한 강조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부분을 서로 붙여놓는 것보다는 띄어놓는 것도 효과적인 반복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 글의 형식을 통해 강조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글의 형식을 통해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수 있다. 형식을 통해 강조하는 방법은 크게 분리에 의한 강조와 위치에 의한 강조론 나눌 수 있다.
분리에 의한 강조란 중요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아예 한 단락으로 독립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각적 효과를 통해 독자에게 분리된 부분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좋지 않다. 이때의 분리된 단락은 물론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단락이 될 수 없다. 앞서 얘기한 단락의 요건을 가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적절하게 단락화된 부분이 많아지면 자연 전체 글은 혼락스러워지게 된다. 독자의이해가 어려워질 것임은 물론이다. 다음 예문의 두 번째 단락은 강조를 위해 분리시킨 단락이다.
글쓰기의 초보자는 흔히 자기가 실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쓰기 보다는 그렇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너 남들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을 추측하여 쓴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따라서 애국이나 효도를 권장하는 것 같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주제를 애써 선택하기 전에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마음에 돼새겨보아야 한다.
진실은 가장 큰 힘이다. 진실이 담긴 글이야말로 읽는 이를 설득하는 큰 힘을 발휘한다.
위치에 의한 강조란 단락 안에서 독자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곳에 중요한 부품을 가져다놓는 방법이다. 단락 아나에서 독자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서두부부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말미부분이 될 것이다. 중간부분은 독자의 집중된 관심이 미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단락의 소주제가 대부분 서두나 말미에 위치하는 것은 위치에 의한 강조의 일종이다.
위치에 의한 강조는 범위를 좁혀 한 문장 안에서도 쓰일 수 있고 범위를 넓혀 전체 글에서도 쓰일 수 있다. 중요한 부분을 문장의 첫 머리에 도치시킴으로써 강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전체 그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제제시부분이나 결론부분은 글의 서두나 말미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5. 단락의 길이
단락의 길이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길어야 좋다든지 짧아야 좋다든지 하는 기준은 없다. 단락의 길이는 완결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도면 된다. 즉 소주제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길면 되는 거이다.
따라서 쉽고 가벼운 글은 비교적 짧은 단락을 만든다. 수필이나 소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등은 대개 200자 원고지 2~3장의 분랴아, 즉 150~200개의 단어 정도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단락의 길이는 되도록이면 다른 단락의 길이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짜임새가 있어보인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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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258] 제4부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5) 부적절한 명사형의 표현을 피해야 한다~14구어적 표현을 피해야 한다 (0) | 202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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