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0] 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 1. 독창성

2020. 2. 10. 15:50☎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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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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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멍멍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 전권을 타자를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글이란 결국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이 효과적으로 표현, 전달된 글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요건이 많다. 일반적으로 독창성, 충실성, 정직성, 성실성, 경제성, 명료성, 정확성, 일관선 등이 예로부터 거론되어온 좋은 글의 요건들이다.

  물론 이러한 요건들이 다 갖추어졌다고 해서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한 요건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으며 때로는 이러한 요건들이 서로 모순되는 작용을 하여 이를 골고루 만족시키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글로 인정되는 글은 대부분 이러한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대 이것들을 좋은 글의 규범으로 삼는 것은 글쓰는 이에게는 반듯이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을의 요건으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독창성


  독창성이란 글쓴이의 독자적 창의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이가 이미 말한 내용을 상투적인 표현으로 재진술하는 글은 쓰여질 이유가 없다. 즉 글이란 무엇보다도 그 표현과 내용에 있어 참신성과 개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측면을 일러 글의 독창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창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새롭고 특별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새롭고 특별하되 반드시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글의 독창성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성과 조화된 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이 독창성을 지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소재의 독창성과 시각의 독창성, 그리고 표현의 독창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지녀야만 그 글은 독창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소재가 도창적이어야 한다


  ▶좋은 글의 절반은 글감이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하더라도 독자가 그 글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 글이 좋은 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글이라 원 무엇보다도 독자에게 잃힐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읽힐 수 있는 글이 되기 위해선 독자의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것, 이를 일러 흔히 주의환기라한다. 주의 환기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참신한 소재이다. 뻔히 아는 내용의 글을 읽으려는 독자는 없다 반면에 자신이 모르고 있는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마다할 독자 또한 없다. 결국 소재의 독창성이 바로 글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좋은 글의 절반은 글감"이란 말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개 기생에 불과하였던 황진이의 시조가 당대에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후대에 와서도 국문학사상의 한 획을 그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당대의 시저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관습적인 소재에서의 탈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이정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충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날 밤이어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 황진이


  당대에 있어 시조의 주요 향수 계층이었던 사대부들은 유교적 관념이 뼛속 깊이 물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조는 매난국죽 따위를 들어 충효를 논하거나 강호의 산수를 배경으로 안분지족을 논하는 것 등으로 일관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이정보의 시조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황진이는 남녀의 자연스런 연애감정을 시조에 도입함으로써 소재상의혁신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시조를 유교적 관념을 전달하는 도구쯤으로 여기던 사대부 계층에게 단연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과 맞닿아 있는 새로움이었다. 그리하여 황진이의 시조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되었고 이후 비슷한 경향의 시조가 한 유파를 형성할 만큼 시조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보다 현대적인 글을 들어 소재의 독창성이 글을 일게 만드는 큰 힘이 되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자.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議政府)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가지고 가려고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던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ㄷ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깎고 있다. 인제 다 됐으으니 다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이다. 차 시간이 ㅃ듯해왔다. 차 시간이 바쁘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모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간이 빠뜻해왔다. 갑갑하고 지리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깎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낸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 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면. 차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더 거칠고 늦어 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릅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깎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망이는 다 깎아 없어질 것만 같아. 또 얼마 후에 방망이를 들고 이리 저리 돌려보더니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 윤오영, <방망이 깎던 노인> 중에서


  이 글은 방망이 깎는 노인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끌어나고 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소재이다. 그러한 소재의 독창성이 일단 독자의 시선을 끈다. 범상치 않은 직업, 범상치 않은 인물의 성격, 그리고 범상치 않은 글쓴이의 대응 등이 모두 독자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매우 진부한 것이다. 즉 하찮아보이는 일이라도 혼신을 다하여 완벽을 추구하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부한 주제를 상식적인 소재를 가지고 야기하려 한다면 독자는 하품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소재의 독창성이 진부한 주제를 오히려 신선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별난 노인의 황소 같은 고집이 우리에게 가슴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재의 독창성으로 주제의 효과적인 전달에 성공한 좋은 글이라 하겠다.

  그러나 소재가 평범한가 새로운가 하는 것이 곧바로 소재의 독창성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병범한 소재라 해도 이를 새로운 시간으로 통찰하여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미 그 소재는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새롭고 신기한 소재라 해도 그것이 단지 았는 그대로 제시되는 데 머문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글을 낳는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단지 기발하고 신기한 소재에만 골몰하는 것은 야릇한 사진으로 눈길을 끄는 삼류잡지의 선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쓰여진 글은 좋은 글은커녕 어디에나 널려있는 잡학사전의 한 항목에 불과할따름이다. 따라서 소재의 독창성은 반드시 시각의 독창서으로 이루어져야만 좋은 글을 낳는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시각이 독창적이어야 한다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

  시각의 독창성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 통찰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의 독창성은 글의 독창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독창성이 있는 소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평범한 소재라 해도 시각의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로 독창적인 소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시각은 반드시 거기에 알맞는 새로운 표현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결국 시각의 독창성이 소재의 독창성과 표현의 독창성까지 결정짓는 셈이니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할 것이다.


  ▶ 시각의 독창성을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각의 독창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상적 인식에서 본질적 인식으로의 전환, 그리고 관습적 인식에서 개성적 인식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의 의미나 그 실천방법을 겉보기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상의  겉으로 드러나 있어 우리의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잇는 부분을 현상이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속에 숨어 우리의 오감으로 감각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는 현상이 이러저러하게 나타나도록 조작하고 있는 보다 중요한 부분을 본질이라 한다.

  현상은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누구나 동일하게 인식하는 부분이다. 누구나 나무는 푸르고 얼름은 차갑다는 것을 쉽게 안다. 따라서 현상의 차원에서는 독창적인 시각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본질은 감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인식할 수 잇는 것이 아니며 또한 누가 이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인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가 그것과 동일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독차적 시각이란 결국 본질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본질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을까. 그석은 바로 사고를 통해서이다. 본질은 다양한 현상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물이라는 본질이 강과 바다. 그리고 얼음과 눈이라는 다양한 현상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이러한 현상들을 서로 관련지어 종합하고 분석해보는 데서 비로소 우리는 그 다양한 현상들 속에 숨어 있는 물이라는 본질을 인식해낼 수 잇다. 바로 이 작을 하는 것이 사고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의 인식에는 감각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본질을 알기 우해서는 우선 분질이 드러내는 다양한 현상들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는 감각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고란 다양한 현상에 대한 다양한 감각들을 서로 관련지어 종합하고 분석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현상적 인식에서 본질적 인식으로의 전환이란 결국 감각에서 사고로의전환을의미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현상들을 단순히 감각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를 서로 관련짓고 종합하고 분석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어보는 습관이 필요핟.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왜 나는 이렇게 느껐을까? 이와같은 질문을 귾임없이 던져보다보면 자연이 여러 현상과 감각을 서로 관련짓고 종합하고 분석하는 습관을 갖게 될 것이다.

  관습적 인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인식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 인식을 관습적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진리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만흔 사람이 그렇게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은 젼혀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이 다분히 현상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의 인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대상이나 그것을 끈질기게 깊이 사고하는 사람보다는 대충 훑어보고 마는 사람이 더욱 많게기 때문이다.

  관습적 인식이 시각의 독창성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관습적 시간에서 개성적 시각으로의 전환을 실천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관습적 시각과는 다른 방향에서 대상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면 뜻밖에도 아무도 모르고 잇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해내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시각의 독창성이 좋은 글을 낳고 잇는 구체적인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소의 뿔은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복종만 해야 하므로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소를 다른 동물과 구별지어주는 표지일 뿐이다.


  이 글의 소재는 소의 뿔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이다. 만약 대상에 대한 글쓴이의 인식이 감각적 차원에서 머물러 있어다면 이 글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껏해야 그것을 모양새가 어떻다느니 그 성분은 무엇고 무엇으로 구성되엇다는니 하는 뻔한 소리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상적 인식인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그 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차원으로 인식의 방향ㅇ르 돌렸다. 그리하여 그 뿔의 본래의 용도와 현재의 용도를 비교하여 깊이 사고해본 결과 이제 그 쁠은 단지 소를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표지로 전락해버렸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평범한 소에서 독창적인 시각을 이끌어내고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갑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 <눈물>


  이 글의 소재는 눈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커다란 술픔을 상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과 슬픔을 고통과 절망을 주는 것, 그래서 가지고 싶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관습적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시인이 또한 그런 시각에서 눈물을 바라보고 고통이이나 절망에 대해 노래했다면 이 시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관습적 시각을 버리고 개성적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기쁨과 웃음은 한순간에 시드는 꽃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슬픔과 눈물은 열매와 같이 영원토록 변치 않는 생명이요, 순수요, 고귀한 가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 시인은 슬픔을 삶의 고통에서 인격 완성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잇는 것이다. 개성적 시각을 통해 대상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는 좋은 예라 하겠다.


  3) 표현이 독창적이어야 한다


  ▶ 참식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얻어야 한다.

  표현의 독창성이란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얻는 것을 말한다. 참식하고 개성적인 표현은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여 글의 흥미를 높이게 되낟. 즐겁게 글을 읽은 기억이 글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수용도를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임은 물론이다.

  국문학사상 표현의 독창성을 통해 작품의 호소력을 높인 대표적인 예로서 정철과 윤선도의 작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대 귀족문학의 지배적인 경향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한자 어구의 나열을 통해 유교적인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사대부 출신이었던 이들 역시 그러한 유교적 관념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웠다 전철은 문학이 주로 충효의 사상을, 윤선도의 문학이 주로 강호한정의 사상을 펼치는 데 주력하였음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그 표현양식에 있어서 뚜렷한 새로움을 보여주었고 마침내는 이로 말미암아 당대에서나 후대에서난 조선시대 귀족문혹의 으뜸가는 모습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금생여수(金生麗水)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날쏘냐.

아무리 사랑(思郞)이 중하다 한들 님님마다 좇으랴.

-박팽년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길 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냇속에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간 깊은 속에 온갖 고기 뚜노난다.

-윤선도


  박팽년의 시조는 당대 사대부분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금생여수'나 '옥출곤강'과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한어구를 사용하여 한 사람의 님만을 섬기겠다는 유교적 충효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철과 윤선도의 시조는 이와 뚜렷이 대조된다.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 두 사람 역시 충효나 강호한정과 같은 유교적 관념을 노래하고 있는 거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한자 어구의 나녈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세련된 우리말의 구사가 눈부시다. 이를 통해 대상의 모습과 화자의감정든 추상성과 관념성을 말끔히 벗어던지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들의 작뭄이 독자의 정서를 자극해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표현의 독창성 때문이었다.


  ▶ 소재와 시각의 독창성이 표현의 독창성을 낳는다

  그러나 표현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의 단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표현의 양식과 이를 통해 표현하려는 내용이 반드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하려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표현의 새로움은 아무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공허한 말장난처럼 들려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정철과 윤선도에게 있어 표현의 새로움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어디까지나 그것이 표현하려는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은 결국은 충의와 강호한정의 유교적 관념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여기에 임하는 그들의 소재와 시각은 다른이의 것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정철은 님을 그리는 여인의 애틋한 심정을 통해 연구느이 정을 드러내었고 윤선도는 ㅗㅅ박한 농어촌의 실제적 모습을 통해 강호의 한정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러한것들을 그리는 데는 자연스런 우리말이 제격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바로 이 사사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국문학사상 보기 드문 가작(佳作)을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결국 그들의 작품에 있어서 표현의 새로움을 가져온 원동력은 바로 소재와 시각의 새로움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재와 시각의 독창성은 필연적으로 표현의 독창성을 낳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표현의 독창성 그 자체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소재와 시각의 독창성을 통해 표현의 독창성이 자연스레 이끌려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글의 내용과 무관하게 표현의 독창성만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독자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예를 다음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변연(便娟)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대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 무용이 원거리(遠距離)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悽然)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러헤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游)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연락(悅樂)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한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는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코한 족송이요, 바람의 희장자인 색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의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까지를 너희의 혼락 속에 휩쓸어 넣은 작정일 줄은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뻐이, 혹은 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는 자도 많이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런 혼탁한 와중에서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 김진섭, <백설부> 중에서


  위의 글은 눈이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경쾌한 윤무', '고공 무용', '천국의 아들', '경쾌한 족속', '무정부주의' 등 현란한 비유가 눈부시다. 표현의 독창성과 새로움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작 이글이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바로 이 글이 글의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게 표현의 새로움을 자체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눈 내리는 모습은 일견 춤추듯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일견 난잡하고 무질서한 모스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 이처럼 현학적이고 과장된 비유가 사용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그 현학성은 단지 글의 내용을 한층 어렵게 만들고 있을 따름이며 또한 그 과장성은 글쓴이의 심리상태를 아주 불안정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글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내적 필연성이 없이 표현의 새ㅗㄹ움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독자에게 참신함을 느끼게 하기는커녕 거부감을 느끼레 할 따름이다.


  ▶ 표현의 독창성만을 가지고도 글이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재와 시간의 독창성과는 무관하게 표현으 독창성만을 가지고도 그 그링 큰 힘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적인 글들이 바로 그것이다. 초청장이나 안내문 같은 글이나 서간문, 식사문, 연설문 드의 서두부분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글들은 객관적인 정보의 전달을 그 생명으로 하기에 소재나 시각의 독창석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내용 또한 뻔한 것이어서 아예 이를 표현하는 어휘나 문구가 획일적으로 약식화되어 있다. 다음은 이처럼 표현이 양식화된 청첩장의 한 예이다.


  가내 두루 평안하옵시며 사업은 날로 번창하시는지요?

꽃피고 새우는 가절을 맞아 늦은 문안 올리옵니다. 아뢰올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금번에 저의 둘때 여식이 가약을 맺게 되어다는 소식이옵니다. 공사다망하시겠지만 모쪼록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십시오.


  이러한 청첩장을 일러 우리는 흔히 납부 고지서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뻔한 표현으로 뻔한 내용을 전달하는 무미건조한 글이니만큼 아무런 감흥이 일어날 리 없다. 그리고 결혼식에 가게 되면 축의금을 내야 하니 이것이 공과금을 내라고 날오는 납부 고지서로 생각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 둘의 표현과 목적이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독창적인 표현으로 고쳐보자.


꽃들이 저마다 기지개를 펴며 잠을 깨는 봄입니다.

저희들도 이제 혼약을 맺어 새 삶의 기지개를 피려 합니다.

저희들이 새로 일구는 꽃밭에 부디 참석하시어

진한 햇살과 향기를 더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납부 고지서 같은 딱딱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을 초대하려는 간절한 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멋있고 괜찮은 젊은이들일 것 같은 신선함도 느껴지낟. 한번 가서 직접 보고 축복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글을 쓰는 데에도 반드시 주의할 것이 있다. 직접적인 친분관계가 없는 상대방도 고려해서 지나치게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을 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