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1. 13:14ㆍ☎박동규교수문학실☎
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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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멍멍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 전권을 타자를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2. 충실성
1) 충실성을 위해서는 소재와 주제가 명료해야 한다.
충실성이란 글의 내용에 읽을거리가 있고 또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글의 충식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의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읽을 거리가 없거나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은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
하늘이 쏟아진다.
태양이 머리위에서 녹아 흐늘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똑바로 걸어가려 애쓰고 있다. 호흡은 끈적끈적한 황냄새를 유발시키며, 머리를 희미한 혼동으로 몰고 나온다. 희미한 혼동 속을 또 낡은 우울한 외마디가 괴롭혀온다. 하얀 스크린 속으로 몽롱히 빠져든다. 무너지는 함성에 한동안 시야는 흐려지고 비틀거린다. 거품을 물고 악을 쓴 자아의 변명에, 살을 닳고 주름으로 올올이 집히어진다. 같혀 타는 마음들이 뒤틀리는 소리 때문에 마음 가득히 오싹함을 담고 방활할 것만 같은 사념들.
-<생활의 여울 속에서> 중에서
교과서에 인용되고 있는 어떤 여학생의 글이다. 이 글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말하고자 하는 뚜렸한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멋을 부리려고 애쓴 표현이 많아 눈에 거슬린다.
글은 내용은 물론 글의 형식보다 중요하다. 글의 형식은 글의 내용에 앞서서 생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이 공허할수록 이를 은폐하기 위해 더욱 형식에 신경을 스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수사적 기교도 내용의 공허함을 메워줄 수는 없다. 글의 내용이 알차면 기교가 좀 부족해도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킨다. 따라서 쓸거리가 없으면 아예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쓸 것이 없는데도 억지로 쓴 글이나 나아가 이를 감추기 위해 쓸데없는 기교에 치중한 글은 그 글을 읽는 독자를 우롱하는 글이다.
글의 내용이 충실해지기 위해서는 글의 소재와 주제가 명료하게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생각을 주제로 삼는 글은 결코 충실성을 지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글은 개인적으로 문장수련의 한 방법으로서 쓰여질 수는 있어도 결코 남에게 읽히기 위한 공식적인 글로서 쓰여져서는 안된다.
소재를 마련하는 데에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며 주제를 마련하는데에는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결국 내용의 충실성은 성실한 독서와 끈질긴 사색에의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음 글은 기교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나 소재와 주제가 명확하여 내용의 충실성이 엿보이는 글이다.
야구에 참가하면 희생정신이 길러진다. 특히,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원 아웃에 주자가 3루에 있을 경우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안타나 홈런을 치면 더 좋겠지만 1점의 점수가 승패를 좌우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포기하고 외야에 큰 플라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야에 플라이가 안타나 홈런보다 치기 쉽기 때문이다. 자기는 비록 외야 플라이 아웃이 되지만 3루에 있던 주자는 홈인하여 자기가 소속한 팀이 1점을 얻게 된다. 그래서 그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적으로 타율을 높이거나 홈런의 개수를 늘이게 되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기발한 소재와 심오한 사상만이 내용의 충실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위의 글은 평범한 소재와 소박한 충실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위의 글은 평범한 소재와 소박한 의견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확실한 지식과 진지한 사색의 산물이다. 따라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읽을거리가 되고 또 읽을 가치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내용의 충실성을 지니고 있으며 좋은 글의 한 보기로서 손색이 없다.
3. 진실성과 성실성
1) 내면의 진실이 가감 없이 드러나야 한다.
진실성이란 글쓴이의 내면의 진실된 모습이 가감 없이 그래도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글쓰는 이는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이를 허위와 가식 없이 표출하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것을 단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가정하여 글로 쓰거나 진실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을 단지 남들이 그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 글로 써서는 안된다. 이 말은 무슨 도덕군자가 되리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단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뿐이다.
진실성이 없는 글이 좋은 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독자가 그 글 속에 담긴 허위와 가식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그르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글쓴이의 인격을 의심받게 되는 일까지 생기게 된다. 본전을 건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뺨까지 한 대 얻어맞고 오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거사, 독자에게 가장 신뢰감을 주고 따라서 가장 글의 설득력을 높이게 도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글의 진실성을 봉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2) 진실성에는 성실성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진실성에는 항상 성실성이 또한 뒤따라야 한다. 미숙하고 부족한 모습은 그것이 진실한 모습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크나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 소재와 시각에서 많이 공부한 흔적, 깊이 생각한 흔적이 드러나야 한다. 더 나은 모습을 위해 노력할 때만이 진실이란 감동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바로 성실성이라고 한다.
진실성과 성실성의 결여는 문장쓰기의 초보자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자신의 미숙함은 생각지 않고 글로써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에 있어 자신의 교양과 지식, 또는 감정을 과장하려 하거나 표현에 있어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게 된다. 이러한 글들은 대학 초년생들에게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연륜에 걸맞지 않은 거창한 소재와 주제를 온갖 화려한 수식어와 난해한 개념어들로 포장해서 보여주곤 한다. 그보다 낮은 수준의 독자가 여기에 혹 속는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교양인이라면 결코 여기에 속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규정된 실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지향하는 생명적이고 재생적인 것으로 보려는 태도이다. 삶이란 결국 자기발견의 노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규정되어버린 자아를 탈피하고 오염되지 않은 자의식을 향해 몸부림치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일상성에서 탈출하여 보다 첨예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자아를 실재하고 있는 표면성 이상의 본질로서 파악, 한 단계 승화된 실존으로 다가서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유한자로서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존재 본질의 충동이다. 존대의 보다 깊은 의미를 성찰하고 도 성찰을 실천할 수 있는 보다 확고한 존재방식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그러한 충동에 귀기울여야 한다.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삶이란 주제로 작문을 해보라고 한다. 위의 글은 한 학생이 제출한 글ㄹ의 일부이다. 전체적으로 글쓴이가 애기하고자 하는 바는 짐자갈 수 있다. 현재의 삶에 머물러 있지 말고 좀더 차원 높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제를 꼭 이런 식의 내용과 표현으로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이 글의 내용은 글쓴이의 내적 성찰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대학 초년생이 흔히 몰두하게 되는 실존철학의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는 내면의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는 멋진 수사와 난해한 개념들이 줄을 지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글쓴이 스스로도 이러한 표현들을 분명히 이해하고 쓴 것인지 의문이 간다. 이글은 성성 역시 결여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진실성과 성실성의 결여는 본래의 자ㅏ신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봐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을 의식하고 글을 쓸 때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허위와 가식이 있게 되고 또 이를 감추려다보니 겉멋만 잔뜩 부린 표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3)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수공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실성과 진실성의 결여를 문장의 대가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소위 문장의 대가들에게는 겉보기에는 멋있는데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글들이 의외로 많다. 나는 그런 글들을 보면 이들이 무슨 공장의 숙련된 기술자 같은 생각이 든다. 내면이 진실에서 우러나온 사상과 감정을 마지신만의 언어로 고심하면서 표현해낸다기보다는 온갖 잡다한 지식이 저장되어 있는 두뇌의 창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온 내용을 숙련된 글쓰기 시술을 가지고 멋잇게 조립해서 내놓는 것 같은 생가이 든다는 말이다.
이러한 글들은 글쓰는 기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산, 제작되는 물품과도 가다. 비록 그들보다 교양과 지식의 수준이 낮다 핟라도 이러한 글들에서 나타나는 진실성과 성실성의 결여는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 다채로운 지식과 유창한 달변, 그리고 화려한 수식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기계적인 글쓰기의 생산원리를 쉽게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수공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학생들에게 겉보기에 멋있는 글들을 경계하라고 자주 충고한다. 글쓰기의 초보자들은 이런 글들에 쉽게 호감을 갖는다. 그리하여 이를 자꾸만 모방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중의 몇몇은 어느 순간 그러한 글들 밑에 숨어 있는 간단한 생산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 또한 이런 식으로 소위 문자의 대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게조차 되지 못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허영만 잔쯕 부린 글을 써놓고는 혹시 남들이 이를 알아차릴세라 전전긍긍하는 글쓰기의 낙오자가 되기 일쑤이다. 어는 경우가 되건 서글픈 모습이란 건 마찬가지이다.
진실성과 성실성이 담긴 글은 지식과 기교를 뛰어넘는 감동을 준다. 반면 이러한 것들이 결여된 글들은 그 유창한 달변에 감탄을 금치는 못할지언정 감동을 주거나 설득력을 지니긴 어렵다. 다음의 글은 소박한 내용과 표현을 지니고 있지만 글쓴이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좋은 글이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다사로운 햇살이 떨어져 있을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을 혼자 있게 될 때,
- 안톤 시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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