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23. 22:58ㆍ☎청파산행과여행기☎
꿈은 이루어진다 도영할베 / 설악산 공룡능선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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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2013년 3월 11일에 명승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공룡능선은 백두대간에 자리한 설악산 정상의 북쪽에 있는 마등령에서 시작하여 남쪽 신선암까지 이르는 능선을 가리킨다. 이 능선은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나누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인제군 백담사와 속초시 설악동에서 오를 수 있는 공룡능선은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중심 능선이다. 이 능선에서 내설악의 가야동계곡, 용아장성은 물론 외설악의 천불동계곡과 동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지명은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지점에 연속되어 있는 암석 봉우리들이 마치 공룡의 등같이 생긴 데서 유래하였다. 공룡릉(恐龍稜)이라고도 불린다.
자연환경
공룡능선이 자리하고 있는 설악산은 중생대 쥐라기에 관입한 대보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다. 기반암인 화강암은 물의 침식에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침식작용을 활발하게 받았다. 따라서 설악산은 폭포와 암봉 등 아름다운 산악경관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우리나라 제1의 암석지형들이 자태를 뽐낸다.
능선을 이루는 암괴는 화학적 풍화작용이 진행되고 있으며, 심층풍화와 관련된 절리구조도 발견된다. 다른 산지와는 달리 미립물질이 대부분 씻겨나가 암괴만 남은 모습이 특징적이다. 또한 능선이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평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천화대와 칠형제봉이 천불동 방향으로 뻗으면서 설악골·잦은 바위골 등의 깊은 계류를 만들어 놓았다.
동해에서 유입된 많은 양의 수증기는 공룡능선에서 찬 공기를 만나 구름이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구름은 구름바다인 운해를 형성한다. 따라서 기상변화가 심하며 변화무쌍한 운해는 공룡능선의 암봉들과 어우러져 천혜의 비경을 보여준다.
현황
설악산 공룡능선은 설악산의 대표적인 능선으로 구름이나 안개가 자주 발생해 그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가 많지 않다. 험준한 봉우리가 줄지어 솟아 있는 공룡능선은 전국 국립공원 대표 경관 100경 가운데 경관이 가장 빼어난 ‘국립공원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최고의 능선이다.
설악산국립공원 내에서 공룡능선을 설악 중 ‘진설악’이라 일컫기도 한다. 능선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며, 단풍에 물든 가을의 모습은 절경을 이룬다. 마등령의 남쪽에 있는 나한봉을 왼쪽으로 돌아 오르면 본격적으로 봉우리들의 드나듦이 시작되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구간도 있다. 능선의 동쪽에 있는 신선대에서 공룡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도영할베 설악산 공룡능선을 넘다
2주전이다. 난생처음 지리산 1일 종주를 한 후, 집안 친인척과의 친목모임에 참석하느라 산행을 쉬었다. 그랬더니 몸이 욱신거린다. 어쩔 수 없이 새벽운동으로 매일 8km씩 하는 속보걷기를 10km로 늘렸다. 그러나 그동안 적체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
마침 요즘이 중,고생 기말고사 기간이라 산행 떠나기 쉽지가 않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산하올라온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기를 보며 마음을 다잡아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않다.
그런데 마침 아버님 기일이라 큰 형님댁에 온 가족이 모였다. 오후 8시 조금지나 차례를 모셨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두 아들과 아내앞에 말했다. 나 오늘저녁 11시에 출발하는 무박산행 버스 타고 설악산 공룡능선엘 다녀온다고...
그러자 두 아들 똑같이 난색을 표한다. 회사가 바쁘다고...그러자 곁에 있던 동생과 큰 형님도 아이들과 한 편이되어 나더러 양보하란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나의 표정을 읽은 아내가 말한다.
‘어떻하냐 우리 셋이 시간을 내봐야지’ 하고 아이들을 설득한다. 그러자 아들넘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럼 아버지 다녀오시라고 한다. 속으론 쾌재를 부른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않다.
아버님 기일인데도 동생은 운전 때문에, 큰형님은 몸이 편치않으셔 건배 한잔도 못했다. 그래서 나혼 혼술을 서너잔 마셨다. 그러다 보니 설악산을 향해, 달리는 차에서 꿈나라 여행을 한다. 비몽사몽 잠결에 내려 소피를 보고 휴게소(休憩所) 간판을 보니, 휴게소 이름이 “클린턴 휴게소(休憩所)”다. 웃긴다.
클린턴 휴게소에서 들린 버스가 한결 가볍게 칠흑같은 밤길을 달린다. 그러다. 한계령 고개에 공룡능선을 타지않는 B코스 팀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달려 새벽 3시 40분, 오색 남설악 매표소에 하차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일행들이 어둠속으로 산행을 시작하고 나 혼자다.
아무리 안내 산악회라지만 팀원들을 챙기지도 않고 그냥 갔을까? 생각할 수록 괘씸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리 상항파악을 하지못한 내탓이지. 3시 50분 남설악 매표소를 통과해, 급경사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속보로 따라간다.
불과 몇분차인데, 앞서 출발한 일행들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캄캄한 등로에는 어느 산악회 팀인지 뒷사람 생각은 안하고 느림보 거북이 산행으로 일관한다. 마음은 급하지요. 어둠속 등산로는 위험하지요. 그러다 보니 추월도 쉽지 않다. 속이 바짝바짝 탄다.
남설악매표소 03:50
◐ 이제사 비로서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이다. (5시 51분)
◐ 등산객들이 바리바리 무거운 짐을 지고 대청봉을 향해 오른다.
◐ 급경사 코스를 오르는 산님들의 모습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친다. 우르릉 쾅쾅 당장 엄청난 폭우가 쏟아질 것 같더니 곧이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나 우의를 꺼내지 않고 그냥 비를 맞으며 서둘러 대청봉으로 간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비를 맞아도 좋은데, 사진촬영을 하는 디카가 문제다. 디카를 보호하기 위해 챙 넓은 모자를 쓴다. 그러나 모자가 우산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을 동반한 강풍이 몰아친다. 서둘러 모자끈을 질끈 동이고 오른다.
천둥, 번개칠 때 촬영은 위험하다. 하지만 나는 죽고
사는 것은 팔자고 운명이란 생각을 하며 앞으로 전진이다
◐ 이 건물은 구 대청봉 휴게소다. 출입금지다. 그런데 음산한 날은 귀신나올 것 같다.
◐ 와! 드디어 대청봉이 보인다.
◐ 설악산 대청봉 정상비
◐ 대청봉 정상에는 인증샷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러다 보니 정상비 사진찍게 양보좀 해달란 소리를 언감생심 못한다. 그런데다 비바람이 세차서 더 이상 지체할 수 가 없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모르는분 인물이 들어간 사진을 찍고 중청대피소로 향한다.
◐ 나같은 약골은 세찬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가던길을 멈추고 바위사이에 납작 엎드려 바람을 피한다.
◐ 중청대피소와 뒤에 중봉(천문대)가 보인다
마타리꽃 비슷한데 정확한것은 모르겠다.
흰송이풀 꽃
◐ 중청대피소에서 겨우 일행들을 만났다.
중청에서 돌아본 대청봉
오색 매표소 들머리에서 헤어진 일행들을 겨우 중청 대피소에서 만났다. 약간은 허기가 진다. 간단히 빵 하나에 음료수 하나로 요기를 한다. 식사후 산악대장에게 공룡능선 강행여부를 물었다. 그러자 대장이 말한다. 아무래도 오늘 날씨가 불순해서 공룡능선 산행을 강행하는 것이 무리될 것 같아 봉정암 지나 구곡담 코스로 하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맥이 빠진다. 학생들 수험기간이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산행에 참가한 것은 공룡능선을 타기 위함이다. 그런데 공룡능선 산행을 포기하고 우회한다니... 너무 무책임한 대장의 말에 화가난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공룡을 타겠다고, 대장에게 말했다. 나 혼자라도 꼭 공룡을 타고 갈테니 내 걱정 하지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장이 청파님 괜찮으시겠어요. 하며 반 허락을 한다. 그 소리를 듣자 마자 나는 산악마라톤 선수처럼 중봉을 향해 달려 간다. 그런데 날씨는 아직도 세찬 바람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린다. 날씨를 보면 혼자 산행을 하는 것이 무리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운명이다. 사나이 먹은 마음을 바꾸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한가지 염려되는 것은 솔직히 공룡능선에 대해 코스 정보도 모른다. 다만 강인한 체력과 도전정신 하나로 강행을 선택했다. 기상조건도 안좋은날 홀로 산행을 하다 만에 하나 사고 나면, 자칫 죽엄과 연관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용히 마음에 기도를 한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 안전을 지켜주세요.’
중봉과 천문대
◐ 공룡이 나를 귀여히 여겨 품에 안으려 하시면 안길것이고, 버리려 하면 버림받을 것이다. 단단히 마음을 다그쳐 먹고 앞만 보고 달린다.
◐ 이제 골깊은 공룡 품속에 나는 나 혼자다. 그런데 이때다. 별안간 안보이던 사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반가운 마음에 언뜻보니 푸른소나무산악회 명찰을 달았다. 반가워 공룡을 가는거냐 물었다. 그러자 그분이 말한다. 자신도 공룡을 타기위해 산행에 참가했는데 다른코스로 간다고 해서 기분 상했는데, 또 다른 한분이 앞서 혼자 갔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 왔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쁘다. 그리고 마음이 놓인다.
◐ 마음 급하게 희운각 대피소를 통과 하려는데, 동행한 분이 잠시 쉬었다 가자해 휴식을 취하곤 곧바로 무너미 고개를 향해 속보 행군이다. 얼마쯤 갔다. 한무리의 산꾼들이 무너미고개 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 지난본 이곳 무너미 고개에서 운해 아우를 혼자 공룡으로 보내고, 나는 발목을 접찔려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했던 쓴맛이 기억난다.
어디쯤일까? 가파른 코스를 힘겹게 오르는데 우리 뒤로 또 한분의 산님이 닥아 온다. 자세히 보니 그분 역시 우리와 같이온 산악회 일행이다. 그분도 공룡을 밟지않고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앞으로 몇분이 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 붙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분은 우리산행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혼자 앞서 가버린다. 그 모습보니 나도 나름 산탄다고 자부했는데 이분보니 난 아직이다.
◐ 우리가 대청에서 출발할땐 비가 내렸다. 그러나 지금 시간 공룡엔 비도 안내리고, 바람도 기암절경에 막혀 아늑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다 도전하는자에게 복이 있나니..
어떤 산님의 죽엄 / 동판속에 비문 내용
오늘은 바람이 불고
너의 마음은 울고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연마는
아무리 찿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산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먼 - 그림자
그 슬픈 그림자를 우리 어찌 잊으랴
1985년 O월 O일
- 친우일동 -
가던길을 멈추고 잠시 저만큼 절벽위에 붙여놓은 동판에 쓴 글을 사진에 담는다. 자세히 보니 어떤 사람의 소행인지, 낙석에 의해 훼손된것인지 동판 글씨 일부가 훼손 되어 있다. 같은 산악인으로서 고인에 대해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함께하신 일행분 말에 의하면 나한봉 힘겨운 코스를 지나면 앞으로 가야할 구간은 대체적으로 완만한 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고행산행을 각오하고 나왔기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앞만보고 간다.
마등령 방향으로 가면 나한봉이 나오고 희운각 방향으로 가면 대청봉 방향이다.
일행분과 함께 인증샷을 남긴다. 반바지 차림이라 찰과상을 입었다.
아 멀고 험한 공룡이여...
산목련
그렇게 힘겹게 오르고 나면 다소 여유로움도 있다. 우리 인생도 역경만 있는것이 아니라 역경뒤에는 꼭 행복도 있다. 나에 산행은 편한 산행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 이보다 더 험한 산행도 난 결코 피하지 않고 도전할 것이다.
마등령고개에 도착했다.
고사목인데 영락없이 목공예작품 같다.
우리는 오세암 방향으로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에 속한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백담사).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했다. 1548년(명종 3)에는 보우선사(普雨禪師)가 중건했다.
1643년(인조 21)에는 설정(雪淨)대사가 중건했는데, 그에 얽힌 다음과 같은 관음설화가 전한다.
즉 설정대사는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키웠는데, 월동준비차 양양 장터에 갈 때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4세 된 조카에게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음보살)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부르면 너를 보살펴줄 것이다"라 이른 후 새벽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장을 보고 신흥사에 도착했을 때 밤새 폭설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다음해 3월에 돌아오니 법당 안에서 은은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니 방 안은 더운 기운과 향내로 가득 차 있고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카가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조카가 관음상을 가리키며 "저 엄마가 밥을 주고 놀아주었어"라고 하여 대사는 관음상 앞에 합장하며 예찬을 올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5세 된 동자가 관음의 신력(神力)으로 살아난 것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888년(고종 25)에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법당·승방·객사·산신각 등이 있고, 근처에 석물들이 남아 있다. 이 암자는 설악산에 있는 암자 가운데 제일 아늑하며 김시습·보우선사·한용운 등이 거쳐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오세암 전설이 가슴을 여미게 한다. 어린 스님이 얼마나 무섭고 고생을 하셨을까...
평생 오세암에서 먹어본 절밥맛 정말 환상이었다. 기회되면 다시 오세암에 들려 절밥을 먹고 싶다.
오세암 / 천진관음보전
망초꽃
물양지꽃
꿀풀
개미바늘 / 애기별꽃
톱풀속
영시암
1648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흡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정사를 창건했다. 그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된 뒤로는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었는데 1705년(숙종 31) 모친상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후 건물에 불이 나자 서쪽으로 몇 리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다시 지어 머물렀다. 방을 연묵실(淵黙室), 당을 산립당(山立堂), 다락을 연백루(延白樓) 혹은 지백루(知白樓)라고 하였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 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영시암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다. 그가 이곳에 머문 지 6년이 되던 해인 1714년(숙종 40) 11월에 공역(供役)을 하던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인제군수 이광구(李廣矩)가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으며 그 후로 김창흡의 후손과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기는 등 주목을 받았다. 1691년에 오세암의 주지였던 설정(雪淨)이 조원봉 북쪽에 승당 24칸과 비각 1칸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다. 관동 관찰사에게 절의 지난 내력을 알리고 의논한 뒤 유불(儒佛)을 사모하는 공덕자(公德者)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절을 중건하고 낙성하였다.
절의 규모가 높고 크며 견고함이 천궁(天宮) 같았다고 한다. 풍악과인(楓嶽過人)이 지은 「영시암 개금 불사기(永矢庵 改金 佛事記)」에 의하면 옛 암자는 조운봉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며 1925년 이기호가 영시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그 후 윤기중(尹基重, 1931~1934)과 김재호(金在浩, 1934~1940)가 주지에 재임하였다. 6·25전쟁 시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설악산의 유명사찰로 조선 후기 유·불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백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근대에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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