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의미부여의 시 미학
2020. 6. 19. 16:13ㆍ☎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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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존재의 깊은 해서아, 정신적 가치화
시의 참맛, 시의 문학성, 시적 사유의 깊이, 통찰 등은 모두 의미부여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의미부여는 상상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시란 내가 보고 겪은 것을 그대로 토로하는 것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 내 자신의 체험에서부터 살마만상에 이르기까지 의미부여를 통해서 그 대상의 존재 이유, 사유의 깊이, 저마다 지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가령, 산중턱의 바위, 뜰 앞에 있는 나무, 바다의 섬들은 단순히 그냥 존재하는 것 들이지만, 의미부여를 했을 때만이 그 존재 가치가 드러나고, 신비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나에게 다가온다.
세계의 존재는 원래 갈가시적이고, 불가청적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비밀의 세계를 의미 있게 드러내는 일은 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A.Rimbaud)가 주창한 견자(見者, Voyant, Seer)의 눈빛을 가졌다고나 할까. 영감과 통찰로 가득한 두 눈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구현해내는 선지자가 아닌가. 따라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상상의 힘과 영안(靈眼)을 가진 시인은 천상과 지상을 오고가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 전문
위 짧은 3행의 시에서 화자는 '아기의 손가락이 왜 열 개인가'라고 시적 화두를 던진다. 참으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듯한 답변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해 화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7 태아의 노력 때문"이라는 의미부여의 답변을 내린다. 바로 <성선설>은 천기를 누설한 시이다. 과학의 눈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을 해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학적 진리이다. 이런 화두에 답할 사람은 시인밖에 없다. 이런 참다운 진리를 발견해내는 과업이야말로 시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정현종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전문
이 시는 두 행의 짧은 관념적인 시이지만 사유의 깊이는 남다르다. 내 삶의 깊이가 곧 시임을 보여준다. 과연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라는 명증한 화두에 그 어떤 답변도 망설여진다. '자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초월한다는 것, 혹은 남을 사랑한다는 것일 수도 잇다. 내 마음이 나를 벗어나는 일이란 내 안의 모든 것이 타인에게 다가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꽃들이 꽃향기를 뿜어내어 벌 나비를 부르듯이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의 향기를 내뿜어주는 데 있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내뿜는 일이야말로 자기를 벗어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시를 잘 쓰는 작가가 되려면 육안(肉眼)이나 뇌안(腦眼)보다는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으로 세계와 교섭하면서 느낌과 생각, 깨달음이 충만해야 한다. 보편적인 사람은 실용적 자아로 현실에 밀착하여 살아가지만, 시인은 예술적 자아로서 그 반대쪽 세계에도 늘 관심을 두어야 한다. 자기를 벗어나 관조와 명상을 통해서 생의 충만한 느낌, 의미부여의 통찰, 상상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운명을 지녔다.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잇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정일근 <종> 전문
종의 태생적 사명이란 가능한 소리를 멀리 보내는 것이다. 멀리 "조용히가 닿는 그곳"은 어디일까.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맥히는 그곳"이라고 말한다. 불가의 범종 소리는 땅위, 아래, 하늘, 바다 생명들을 깨워 혼탁한 세상에 위안과 경종을 주는 불가의 말씀이다. 곧 종의 본질은 소리로 인간의 고뇌를 씻고, 불도혹은 하느님의 도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 화자의 지향점인 영롱한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은 애타게 갈구하는 법열의 맑고 깊은 영혼의 궁극점으로 해탈, 니르바나의 세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내 주변의 하찮은 사물존대들이나 내 조그만 하나의 행동들도 각각 깊은 의미, 생명적 존재 가치들을 지니고 시인의 의미부여를 기다린다. 그래서 시가 사는 곳은 시인의 컴퓨터 속이거나 혹은 지면이겠지만 진실로 그게 사는 곳은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속일 것이다.
시인이란 작가의 천재성, 작품성, 예술성은 의미부여의 상상력에서 나온다. 요즈음 우리 시단의 한 문제는 울림이 뚜렷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웅얼거림에 갇혀 초점이 분명치 못한 시들이 많다는 것이다. 혹자는 자기반영성의 독창서을 드러내거나 어눌한 함축성과 다의성을 들어 면피하려고 할지 모르나. 이는 작품의 내용면에서 새악ㄱ과 감정이 깊고 치밀하지 못한 데서도 기인한다. 나아가 어휘력 부족이나 언어를 조탁하는 힘에서도 깊이 숙고할 문제이다.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이 편한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쉬르빌, 아르크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누군가 그 감정에 바져 입주를 결심했다면
그 감정의 절반은 집의 감정인 것
문제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 날 갈라서면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바뀐다
미소는 마음으로, 푸르지오는 흐르지오로 감정을 정리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무궁화 아파트는 제 이름만큼 꽃을 시었는가
집들이 감정을 정할 때 사람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금이 가고 소음이 오르내리고 물이 새는 것은
집들의 솔직한 심정,
이제 집은 슬슬 속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마경덕 <집들의 감정> 전문
위 마경덕의 시는 재미있고 신선하다. '아파트'를 시적 소재로 끓어왔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서두부터 이 시는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생명체로 보고 의미부여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푸르지오, 미소움, 백년가약, 이 편한 세상" 등 건설사들에 의해 명명된 아파트가 저마다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는 것이다. 또한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쉬르빌, 아르크타워" 등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시인의 의미부여는 발전한다.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는 것인데, 곧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날 갈라서면 /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바뀐다"고 하며, "미소는 미움으로, 푸르지오는 흐르지오로 감정을 정리 한다"고 말한다. 또 "소음"이 생기고, "물이 새는 것"도 역설적으로 이들 아파트들이 갖는 숙명적을 지닌 '집들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문득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오른다. <꽃>은 명명이전(命名以前)의 즉자존재(卽自存在)에 있는 '꽃'이 명명이후(命名以後)의 대자존재(對自存在)로 바뀌는 존재 철학의 시다. 명명의 '의미부여', 곧 '너에게 이름 붙여주었을 때 비로소 다가오는 꽃' 처럼 세상만사에 '의미를 붙이면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심장한 일인가.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파,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문정희 <남편> 전문
참으로 맞는 말이다. 새삼 부부관계가 떠오르고 의미부여가 재미있게 읽힌다. "아버지도 안니고 오빠도 아닌 /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춘수쯤 되는 남자"가 바로 '남편'이라는 명사다. 때론 친구였다가도 애인이 되고, 아이들의 아빠도 되는 대상이 남편이다. "밥을 나와 함께 / 가장 많이 먹은 남자"이고, 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이면서도 동시에 새벽녘 고열로 아팠을 대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찬 물수건을 대주는 것 또한 남편이다. 또한 나란이 누워 갖자의 세상으로 등 돌리다가도 다시 돌아누워 슬쩍 한 쪽 다리 올려놓으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애증(愛憎)의 양면 동전과 같은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가 바로 남편이 아닌가. 이렇게 평소 인식하지 않고 있던 하찮은 관계도 시인의 의미부여의 시상은 시를 감칠맛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의미부여의 상상력은 사람부터 사물, 현상, 풍경, 관념 등 모든 것에 작용한다. 그러니까 주변 소재에 대한 남다른 몰입의 해석으로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어떤 사물이든지 상식적, 고정적, 관습적,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자이며, 사물의 또 다른 모습, 시적 진리를 찾아내 명명하는 자이기도 하다.
시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시의 아름다움은 의미부여된 내용의 정신적 가치에서 오는 것이다.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사물 하나라도 소중하게 보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따뜻한 시선, 그 눈썰미가 시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근원이 된다.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상사의 주변의 세상을 의미 있게 해석해 나가는 일이다. 그러기에 의미부여된 시편들은 약동적이고 생명적 기운이 넘쳐난다. 시적 사물이 지닌 속성, 특성에 의미부여된 정신의 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띄지도 않더니
잎이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겻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어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더 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주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김신용 <넝쿨의 힘> 전문
시의 형상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의 가치화, 곧 한 개인의 겪는 정서체험의 내면 가치화의 여부일 것이다. 화자는 언덕 밑 둔덕에 심어놓은 호박 넝쿨을 본다. 그리고 시인은 감나무에 매달린 호박 한 덩이에서 신비스런 생명의 힘을 발견한다. 호박 넝쿨은 언덕 바닥을 편안하게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계(飛階)를 올라 감나무 가지 꼭대기 허공에 둥그렇고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아 놓는다. 시인의 말대로 얼마나 공중 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뭇사람들은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차고 비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막길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과 누란을 건설했듯이 집요한 포복으로 하늘길을 마련한다. 그 호박 넝쿨의 힘, 생명의 길, 그리고 잎이 떨어진 뒤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오른 넝쿨의 궤적이 보여주는 힘. 여기에서 시인은 '뻗어 오른다'는 것은, '기어간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의 여정이요. 숙명적 생명적 길임을 간파한다. 곧 시인은 수평적 삶의 평이성을 뛰어넘는, 수평적 삶이 지닌 신화적 경이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하늘의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 살리는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
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넗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 닭들을 내쫓기도 하고
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
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더니
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기가 줄고
몽당비처럼 닳아
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
토사구팽 兎死狗烹
기어이 아궁이는 그를 삼킬 것이다
조경숙 <부지깽이> 전문
위 시를 보니 타다모토의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라는 하이꾸시가 떠오른다. 나뭇가지의 일생을 다룬 시가 성찰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 시 <부지깽이>에서 화자는 '나무가지'이다. "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 / 사릴는 것"이 그의 일생이다. 그래서 돼지를 삶아내는 마당 솥 아궁이에서 아라곳 하지 않았고, 널어 놓은 곡식 멍석에서 닭들을 내쪽기도 하였으며, 길손으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결국 하늘 향해서 자라던 나뭇가지는 아궁이의 숯으로 사라진다. 한 줌의 재, 그래서 아궁이는 '캄캄한 숲의 무덤'이라고 화자는 말하ㅗㄱ 있지만, 어쩌면 부지깽이는 우리 인생의과정을 치환한 것이기도 하다.
2. 독창적 자기반영서의 의미부여
시인은 자신의 시적 대상의 의미부여의 시상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심도 이게 드러낸다. 시인의 의미부여를 통한 시들은 세계에 대한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 해석의의지를 보여준다.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 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이성선 <나무 안의 절> 전문
설악산의 시인 이성선, 그는 불교와 노장사상을 무기로 하여 우리 전통시의 감각을 살려 의미부여의 상상력을 신비롭게 보여준다. 위 시에서 보듯 그의 시는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체감 속에서 벌어지는 상상놀이를 통하여 우주 속에서 자기존재의 깨달음을 얻어간다.
월리엄 블레이크(W.Blake)는 그의 시 <순수의 전조>(Auguies of Innoce)에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 편이 시 속에는 우주가 들어 있으며, 그 속에서 자아 존재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는 것이다. 위의 시는 의미부여의 상상에 의해 "나무"가 "절", "목탁", "꽃", "나비", "물고기", "산", "스님" 등으로 은유처리가 되어 있고, 하나의 선상에서 동일하, 일체감을 이룬다. 그래서 나무 안은 '절'[寺]로 은유적으로 처리한다. 절은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도를 추구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성(聖)적 공간이다. 그 나무[절] 속에는 시간적으로 사계절 풍경이 담겨 있고, 공간적으로는 지상의 꽃에서 하늘의 별과 구름까지 닿아 있다. 그래서 그 나무 안에서 "꽃 피는 소리", "나비 날아가는 ㅗㅅ리" 등이 들릴 뿐 아니라, 온 "우주의 속삭임"도 들리고, "나무"[너] 안에서 "나"도 들리고, 나아가 "산이 걸어가는 소리 /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까지도 들린다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한 나무에 깊이 관조, 몰입하여 동심원의 확산적 우주적인 의미부여로 세속의 욕망을 뛰어넘어 고요하고 평안한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고고자하는 시심을 드러낸다.
詩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뜨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험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궐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뒷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긍정적인 밥> 전문
시 <긍정적인 밥>은 평범하고도 쉽게 쓰여진 시 같지만, 시인 나름의 독창적인 의미부여의 시로 전개되고 있다. 각 연에서 '시 한 편과 쌀 두 말'(1연), '시집 한 권과 국밥 한그릇'(2연), '시집 한 권과 소금 한 됫박'(3연)으로 병치(竝置), 발전되면서 남다른 정신의 시적 깊이를 보여준다. 자신이 바라보는 재화적 가치의 정신적 가치로서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적 착상은 독창적인 그만의 사유적 깊이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매우 따뜻하고 긍정적이다.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어렵게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게 한다. 시가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며, 그 인과적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어 공감이 간다.
육교에 매달린 햇살이
연등의 이마를 덥히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모두 부처를 만나러 석왕사로 갔을까
가까운 산이 들썩이고 거리는 한산하다
부천세무서 사거리 쭈홍반점
빈 식탁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마리
파리로 태어난 죄 싹싹 빌고 있다
파리채를 들었다 놓는다
오늘은 너도 손님이고 나도 부처다
조경숙 <파리 손님> 전문
부처님이 오신 날 화자는 중국음식점인 쭈홍반점 주인으로 빈 식탁에 앉아 있다. 순간 파리 한 마리가 원죄로 태어난 죄를 싹싹 빌고 있다. 파리채로 잡으려다가 그만 부처님 오신 날임을 의식한다.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너도 손님이고 나도 부처다." 그러니 어찌 미물을 살생할 수 있는가. 아니 오히려 파리 앞에서 화자는 부처가 되어 파리를 손님으로 맞이한다. 화자가 전도된 상상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가 있다. 일본의 하이구 시인 고바야시 잇사가 부처님 앞에서 하루종일 기도하다가 가려워 순간 모기를 때려잡았다는 아이러니한 얘기와는 대조적이다.
사실 내 자신도 그러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마다 비밀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존재 이유 등 의미 없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바로 시인은 남다른 촉수로 그들의 불가지적, 불가시적, 불가청적 영역에까지 본래적으로 숨겨져 있는 비의들을 들춰내주어야 한다. 해서, 시인의 관심과 교감, 관조와 몰입, 상상 등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관건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로부터의 갱신, 견자의 시학, 원화통의 상상력 등 인문학적 소양에서부터 무의식, 몽상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안(詩眼)이 요구된다.
제재로 선택된 사물에 나만의 의미부여와 정감, 자기만의 남다른 생각과 해석, 사상을 깊이 담아내야 독창성을 획득할 수 있다. 나아가 자연을 보는 눈이 세속적인 공리나 현실적 갈등에 편승하지 않고, 세계와 대상에 대해 긍정적이고 따스한 마음일 때 시상이 왕성하게 발휘되는 것 같다.
배가 볼록한 돋보기
아버지는 이 확대경으로
빛을 모으셨다
검은 동그라미로 본
그 밝은 약속을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공책에 적어
자식들에게 주셨다
이 작은 돋보기 하나로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까지 거뜬히 넘어가셨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여리고성을 몇 바퀴나 도셨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을 만나고
병상(病狀)을 들고 걷기 위해
쉬지 않던 아버지,
치매도 살라 버리셨다
가끔 흰 융으로 유리를 닦으며
가슴에 자리 잡은 우상도
하나씩 깨트리셨다
내게 그 밝은 눈을 물려주신 아버지,
볼록한 중심으로 빛을 모아
아버지가 가신 하늘을 펼처 본다
미처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까지 환하다
류인채 <돋보기> 전문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뿐만 아니라, 들리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우주의 섭리와 비밀을 드러낸다. 그러하니 '나'라는 존재의 이력이며 가족사의 심연까지도 듣는 것은 당연하다. 위의 시 <돋보기>는 '돋보기'라는 속성을 살려 자기반영적 내면을 드러내는 객관적상관물로서 채용한 것인데, 그 소재가 매우 독특하고 신선하다. 게다가 돌아가신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깊은 효심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읽힌다. 화자는 '돋보기'의 속성을 통하여 그리운 아버지의 분신이며, 가족사의 내력 등 모든 의미를 담안낸다. 모세의이야기와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모습 등 시공간을 역동적으로 넘나들면서 화자의 신앙심까지 중첩된 시 미학의 참맛을 보게 한다.
시인이 산다는 것은 세상을 의미 있게 해석해 나가는 일이다. 존재하는 것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인공적인 사물에서부터 자연의 돌, 풀잎, 작은 곤충, 심지어 먼지도 모두 나름의 역사가 있고, 존재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는 바로 사물 존재의 역사의 의미를 확장하고, 나로부터 다른 사무로가 관계의 비밀을 얻어가는 작업이 아닌가. 오로지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속에 남다른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이 작동하고, 의미부여 할 수 있으며, 시적 상상력은 발휘된다. 특히 문학과 예술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들리지 않는 대상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
강원도 깡촌, 줄창 시퍼렇게 서 있는 여름산의 무르팍이 싱싱했다. 산비탈에서 굴러온 바람이 달리는 차창으로 맨발을 디밀었다. 발바닥에서 서늘한 그늘내가 났다. 떡대 좋은 산 하나를 끼고 돌자 풋내가 질펀했다. 산딸기를 만지고 온 농익은 바람이 딸기물 든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 어루만지고 버스는 투더투덜 돌밭을 달렸다. 툭, 탁, 다급한 돌멩이가 계곡으로 튀고 물 젖은 바람이 벼랑을 타고 기어올랐다. 강바람은 이끼빛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있었다. 곳곳에 바람의 몸에 맞는 바람집이 있었다. 마을에 사는 바람은 미간을 찡그리고 밭두렁에 쪼그리고 있었다. 바람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뒷좌석에 마음을 눕히고 찬찬히 바람을 맛보기 시작했다. 개울에 발 담근 물소리를 집어먹으니 박하사탕을 깨문 듯 후련했다. 눈을 감고 바람의 뒷다리를 흠흠, 들이마셨다. 동시에 누군가 나를 맛보고 있었다. 익었나, 설었나, 뒤집고 있었다. "나"라는 맛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나를 한 입 베어 문 바람이 퉤퉤! 나를 뱉어 버렸다.
마경덕 <나는 바람을 맛보았다.> 전문
마경덕의 '바람'을 보라. "달리는 차창으로 맨발을 디밀고", "산딸기를 만지고 온 농익은 바람이 딸기물 든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 어루만지고"등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얼마나 구상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시인은 이런 바람에게 "밥 좀 주라, 얼마나 힘들겠니."라고도 할 수 있다. 바람은 우주를 순한시키는 비밀의 표정을 담고 있다. 나뭇잎은 늘 바람과 함께 산다
그녀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람'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명적 역동성으로 드러난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움직인다. 소리를 동반하고 울기도 하며. 씨안도 퍼뜨린다. 성깔도 부릴줄 알고, 또 배가 고프기도 하다. 결코 바람은 머무르는 법이 없기 때문에 거처가 없다. 하나의 해체적 코드를 지니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해체이자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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