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사물시와 이야기 시

2020. 6. 14. 12:11☎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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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

 

1) 사물시의 정의

인간의 세계인식은 존재 가치를 헤아리는 의미 차원이다. 전자가 물질적인 세계에 관여한다면, 후자는 정신적인 세계, 곧 관념의 세계에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비평가인 랜섬(J.C.Ransom)은 특수한 가치를 지닌 시적인 담화형식으로서 사물을 제재로 하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 '관념을 제재로 하는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로 나누었다. 따라서 물질적인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물시(事物詩)이고, 정신세계나 관념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관념시(觀念詩)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시는 사물 중심의 해석적 진술, 관조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고, 관념시는 독백적 진술의 내면의식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인다.

사물시는 이미지즘 시인들의 시나, 포괄적올 물진 현상을 노래하는 시, 순수시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미지즘 시인들은 오로지 관념까지도 사물의 속성, 사물 이미지를 통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물시는 이미지스트의 시든 포괄적 개념의 시든, 순수시든 한결같이 관념을 죽임으로써 관념의 허위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한다. 그리하여 이미지스트들의 시적 동기는 쳬계적잉ㄴ 추상화의 세계<곧 과학의 세계를 혐오한다.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홍하지 못했을까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 다방 늙은 여자

봄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을 떨군다

-박성우<단풍> 전문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 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下手人이다

 

어둠 속에 같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敵意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棺 속에 누워있지만

한 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챤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

-임영조 <성냥> 전문

 

사물시는 한 편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된다. 위에서 박성우 시(단풍>은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 다방 늙은 여자"로 의인화되어 전반적으로 물질의 속성에 근거한 시각적 사물이지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성냥>은 정중동이 시학이 그대로 드러난 시이다. 우선 '성냥'이라는 사물이 화자의 상상에 의해 의인적으로 비유되어 있어 재미와 실감미가 한층 돋보인다. 마지막 행에서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라는 진술도 성냥이란 물질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불빛 나가는 창가에 줄을 쳐 놓았다

새소리와 꽃향기를 가로 막고

내 집을 기둥 하나로 삼아

농부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있다

-함민복 <거미> 전문

 

밭에 흙을 묻히며 살고 싶지 않아 허공으로 올라왔지요

허공으로 올라온 나를 땅 기운이 끌어당겨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 거꾸로 매달리곤 하지요

아침마다 허공의 뜰에 고인 이슬로 가랑이를 씻고

무언(無言)의 노래를 세상 밖으로 퍼뜨리지요

내 뼈를 추려내어 지은 집

환하고 눈부셔

지나가는 뼈 없는 곤충들이 스스로 집에 같히지요

내게는 집이지만 그들에겐 감옥이죠

땅에서 태어난 생명들은 땅에서 죽는다지만

내 집에 갇힌 것들은 영영 땅으로 내려가지 못하죠

곤충을 잡아먹을 때마다 내 뼈는 더 부드러워져요

내 뼈가 단단했다면 나는 결코

허공에 올라와 살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부드럽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뼈!

나를 허공에 밀어 올린 힘이지요

-김충규<거미> 전문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해 본다 그는 간간이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은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 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뉘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력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퉁겨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선된 지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김두안 <거미지> 전문

 

함민복의 시<거미>에서는 공충으로서의 '거미'의 속성을, 한 장면의 영상처럼 '농부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있다"는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김충규의 시<거미>에서는 거미라는 곤충의 생태적 속성과 '거미줄'을 "뼈를 추려내어 지어놓은 집"이라고 상상한다. 나아가 김두안의 시<거미집>에서는 '거미가' '목수'로 인간화되어 있다. 세 편 모두 거미와 거미집을 묘사하는 언어의 직조가 매우 섬세하고, 이를 내면적 감각을 이미지로 처리한 힘도 단연 돋보인다. 나아가 촘촘한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도 보여준다.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사물성 속에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물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한 순수한 관조의 세계가 선명하게 다가 오는 시들이다.

보통 사람들의 사물인식 방법은 감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성적인 사고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미지스트들은 사물을 논의하기 위하여 이미지로 나나탠다.이는 사물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은밀히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상반되는 관념시는 사랑, 그리움, 이별, 우정, 고독 등의 관념이 추상어로서 그대로 노출된다. 사물시가 표면적으로는 사물의 세계를 이미지로써 파고 들지만, 관념시는 그저 관념의 전달에 초점을 두기에 이미지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직설적인 운행을 보여준다. 가령 "약속히 떠나가며 남긴 그리움 / 깊은 밤 잠 못 들고 / 그대 창문을 바라보며 / 하얀 새벽 / 외로움 되어 가슴에 남네"와 같이 관념시(?)로 감정을 배설하듯이 토로한 경우이다. 그러니 상투적이어서 아무런 감흥도 없고, 상상력, 환기력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피상적인 넋두리, 곧 푸념으로 읽혀지게 마련이고, 마치 유행하는 가요의 노랫말 같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시인 것과 시가 아닌 것'이 분명하게 변별되는 것이다.

 

2) 사물시를 잘 쓰려면

유심히 주변을 관찰하면 사물시로 쓸 소재, 시의 꼬투리는 무궁무진하다. 리모콘 휴대폰, 연필, 스텐드, 화분, 시계, 거울 등 주위에서 사물 중심의 소재로 삼을 만한 것들이 널려 있다. 사룰시 쓰기의 능력은 평소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 그리고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온다. 이러한 사물시 쓰기의 능력과 관찰력, 상상력, 통찰력 드은 타고나는 것이 안니라, 꾸준한 습관의 시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가령 주위의 사물을 보고 고정관념에 얽매이거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그친다면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를 얻지 못한다. 해서 끊임없이 사물의 속성을재해석하고, 사물의 속성을 학장, 비유시켜나가고, 소재를 거꾸로 생각해 보고,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낯설게 보고, 남과 달리 보는 데서 시는 탄생한다. 그러면 사물은 스스로 본래 모습, 혹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⑴ 사물의 속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사물의 현상이나 속성에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나 존재의 의미, 깨달음을 진술해 나가는 방법이다. 시란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처마 끝에 매달린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만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상으로 뛰쳐나갈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개이 속,

저 푸른 풀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마경덕 <씨옥수수> 전문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사무실로 거리로

찻집으로 술집으로

또 무슨 식장으로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끝

도대체 누굴까?

이 견과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기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임영조<넥타이> 전문

 

사물시는 하나의 사물을 글감으로 삼아 특징, 성질, 속성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 관조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시이다. 우리 주위의 흔한 사물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작가가 아닌가? 여기에서 시 쓰기는 출발한다. 주위의 사물을 잘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상상력을 부여하여 속성을 깊이 들여다보면 통찰의 세계가 발견된다. 여기에서도 관계짓기를 발휘하고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좋은 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헛간 구석진 곳

키를 낮춘 항아리 하나 앉아 있다

살갗에 무성한 비듬 슬은 채

헛배가 부른지 가끔 트림을 하며 먼지를 올린다

항아리는 기억한다

밤마다 찾아와 얼굴을 묻던 그 사내

자신을 사랑하던 한 남자의 생을

사내가 가슴을 더듬을 대마다

마음껏 절줄을 물려주전 짜릿짜릿했던 그때를

그 목덜미 물고 놓아주지 않던

사내는 바마다 울었고 어둠이 장송곡을 연주했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입을 더 크게 벌렸고

사내는 광맥을 찾는 포식자처럼 눈을 번득였다

언제부터인가

항아리의 마른기침이 잦아지더니

사내의 발자국이 지워졌고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술항아리

그렇게 남겨졌다

- 정경애 <술항아리> 전문

 

정경애의 시 <술항아리>에서 '술항아리'라는 사물은 모성의 이미지로써 작고한 아버지와 연결된다. 무척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 그는 "밤마다 찾아와 얼굴을 묻던 그 사내"였다. 그렇게 항아리는 엄마처럼 "마음껏 젖줄을 물려"주었다. 또 그럴 때마다 항아리는 "입을 더 크게 벌렸고"< 아버지는 "광맥을 찾는 포식자처럼 눈을 번득였다'고 했다. 세상의 사내와 아버지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닦아주는 모성인 항아리, 얼마 포근한가. 또 그녀의 시 <자개장>은 낡은 가구를 어머니에 투사하여 정감 있게 그려진다.

 

⑵ 사물의 속석에 따른 메타포적 관계짓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다 연관되어 있다. 사물들은 서로 다르지만 연상과 상상을 통하여 같은 속성, 곧 유사성을 발견, 비유적으로 관계를 짓는 것이 곧 시의 세계다 비유를 쓰면 시가 강렬해지고 환기력이 높아지면 신선감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시는 본질적으로 비유, 은유 덩어리가 아닌가.

 

모두들 못생겼다고 하지만

모과는 얼굴이 아니고

주먹이다

돌덩이만큼 단단한

주먹이다

-이안 <모과> 전문

 

너의 좁은 아파트 한 구석

시든 꽃잎 하나 헉! 소리를 내며

우글쭈글해진 모노륨 마루 위에 눕는 소리 들린다.

 

- 땅에 내려가고 싶다

 

누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강은교 <곷잎> 전문

 

이 시대에 희한한 聖者

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빈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임영조 <비누> 부분

 

사물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상투성의 껍질을 벗겨가다 보면 맛깔스런 과육, 속살이 보인다. 과일에게서 속살의 의미(정신)는 무엇인가? 이것을 나의 일상사에 비춰본다면 여기에서 발전하는 그 어떤 관념이 존재한다. 이때 사물의 외면풍경과 내면적 관념의 옷을 입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사물의 또 다른 본질, 의미를 찾아내려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마중물을 넣고 열심히 펌푸질하듯 해야 한다. 처음에는 팍한 물이 나오게 마련, 사물의 관조와 몰임- 상포텍스트의 관계짓기, 스키마, 연상, 상상, 비유적 상상 등에 매진하다 보면 나중에는 맑고 차가운 생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시란 생수와 같은 대상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이다. 현실적 실용적, 일상적, 논리적 관찰을 거부하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로서 그 대상은 자신의 비밀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 온다.

 

⑶ 현미경적으로 대상의 속살 파고들기

종전의 시들은 거시담론이었지만 현대시는 미시담론으로 접근한다. 또한 원래 시라는 것은 추상적 셰계가 아니고 이미지로 드러내는 구체적인 세계이다. 더구나 감정의 세계는 원래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다. 따라서 사물을 근경(近景)속에서 현미경적으로 파고들어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드러내야 한다. 내용도 그렇고, 묘사도 그렇고, 형상화도 그렇다.

 

난로 위 맹물 쫄고 있는 주전자, 주전자가 열이 바짝 올라 있다.

 

꼭지 달린 모자 눌러 쓴 주전자는 콧대가 높다 감기라도 걸리면 코마개 할때도 있다. 그러면 가래 끓는 목 가다듬으면서도 철없이 태평소를 불어댄다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놓고 아랫목 같은 그 주변으로 둘러앉아 젖은 깃 털듯 마른 손을 비벼대며 패평소 이야기에 젖곤 했다. 그러나 이젠 찾아주는 이라곤 잠시 왔다 간 사무실 미스 홍, 한두 잔 뜨거운 커키물만 콜록콜록 따라갈 뿐, 사람들에게 태평소는 시끄러운 소음일 따름이다.

주전자는 얼굴 가득 침통한 기색으로 화끈거린다. 줄담배를 피운다. 수음하듯 뿜어대는 탄식의 비음, 난로는 풀무처럼 쉼 없이 불을 뿜어대고 주전자는 매번 모자만 벗었다 썼다 할 뿐, 속이 타는 자의 갈증을 알아주는 이 없다. 구수한 보리차, 생각 조각을 조금 썰어 넣고 목 가다듬어 한없이 불던 태평소, 이제는 한 모금 훌쩍이며 적실 이도 없다.

밤새도록 달아있는 난로 위 사내의 아랫도리가 쓸쓸하다.

-심명수 < 그 노총각 참 쓸쓸하다> 전문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녀의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실되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신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 이재무 <냉장고> 부분

 

묘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자 하는 시적 대상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속성과 특징적 요소, 인격화, 인간화, 동물화의 비유나 화라유법 등 다양한 표현이 동원될 수 있다. 심명수의 시 <그 노총각 참 쓸쓸하다>에서 보듯 제목은 사람이지만, 본문은 난로 위에서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재무의 시 <냉장고>에서는 낡은 냉장고를 "늙고 지친 여자"에 비유해서 냉장고라는 사물의 속성을 매우 흥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도마는 칼날을 받아냈다

벌써 십 년을 해 온 일이다

대부분 죽은 것들이 도마를 거쳐 갈 때마다

칼자국이 남았다 시체를 동간내는 칼날 밑에서

도마는 등을 받쳐주었다

도마의 등뼈에 수 없이 파일 골짜기

핏기가 스몄다

시체들의 찌꺼기가 파묻힌 자리에선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났다

도마는 칼날에 잘리는 시체들의 마지막 생의 향기를 안다

생을 마감할 대 잠시 미끄러져 달아나려 했던 두려움을 안다

시체들을 통과한 칼날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도마

죽음을 섭생하고는 빽빽하게 영생불사의 날짜를 새겨 놓는다

도마는 죽지 않는다

- 윤의섭 <도마> 전문

 

좋은 시는 묘사(descripton)와 진술(statement)의 절묘한 조화에서 온다. 윤의섭의 시 <도마>는 묘사와 진술이 교직되어 구성되어 있다. 묘사에 치중한 시는 산뜻해서 좋지만, 깊은 맛은 또 진술의 결합에서 온다.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가시적, 제시적, 감각적으로 명료화하는데 일조 하지만, 진술은 언어를 사고적, 고백적, 해석적 깊이로 체험화한다. 따라서 사물 중심의 묘사와 의미적 진술이 어울려야 바람직한 시가 탄생한다. 하지만 사물시는 묘사적 이미지에 치중하는 성향을 보인다.

 

3) 관심시의 정의와 문제

사물시가 사물 중심을 지향한다면 관념시(platonic poetry)는 자아 중심을 지향한다. 그래서 사물시가 주로 몰입과 천착에 의해 해석적 진술로 이루어진다면, 관념시는 독백적 진술의 내면적 사유나 감정 표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관념시는 현대시론의 관점에서 볼 때 추상적 관념어가 주조를 이루면서 직설적으로 형상화되기에 예술성, 작품성 문제가 제기된다.

관념시는 자기 독백의 고독, 그리움, 이별, 슬픔, 기쁨, 사랑, 우정 등의 관념을 그대로 전달한다. 나아가 관념시는 정치, 예술, 사상, 이념 등 관념 일변의 지나친 목적의식으로 시의 예술성이 결여된 목적시, 선동시, 선전시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대로 관념이 노출되는 관념시는 제목이나 본분에서 객관적상관물이나 묘사적 이미지, 비유 등이 들러나지 않고, 그 어떤 심리적 텐션이 없다. 따라서 관념시는 그 어떤 상상력도 텐션의 미적 고려 없이 시를 가장한 과학이거나, 도덕이거나, 법률이거나 아니면 추상적 관념의 표백에 지나지 않는다. 데이트(A. Tate)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관념시는 알레고리에 불과하고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폐해를 언급한다.

그래서 관념시는 사물시의 대척점에서 자기 주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감정 표현, 대상의 피상적 진술, 혹은 치기어린 상념, 넋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비판 받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의 근대십두터 종래의 시들은 관념시 일변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시에서는 객관적상관물이나 비유적 이미지를 동원한 촘촘한 상상력이 발동되는 사물존재를 탐색하는 시들이 대세를 이룬다. 따라서 관념시의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감정의 설사나 획일적이고 상투적인 주제를 벗어나야 하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나 상상에 초점을 둔 재구성의 시적 형상화를 반드시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4) 관념시 쓰기의 극복

시에는 관념적 요소가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 관념적 요소와 특수한 시적 특성으로 드러나는 요소와의 관계에 있다. 시의 참된 특성은 언제나 언어사용의 특수성에서 발견되며, 형이상학 시의 개념이 드러날 수 있는 계기 도한 이 언어 사용의 특수성에 찾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어떤 가치관으로 인간 탐구라든지 건강한 인간관계, 아니면 사회의 모순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전망 등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대상으로 삼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는 없다. 말하자면 현실과 내면을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령 그 언어 사용의 특수성이란 콘시트(Conceit)적 착상이나 객관적 상관물의 적용, 나아가 비유적인 이미지나 상징 등을 동원, 재구성하여 형상화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안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표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어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새> 전문

 

이 시는 '새'로 표상되는 자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명력과 '포수'라는 인간의 파괴적인 본성을 대비시킴으로써 문명의 불모성(不毛性)을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자연의 순수함'이나 '파괴적인 문명성'에 대한 관념을 직접 진술하지 않고, '새'와 '포수'라는 상징물을 동원하여 우회적이며 구체적인 장면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곧 '새'는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사물의 꾸밈없는 순수한 상태를 장싱하는 바, 이에 대해 인간의 파괴적 본성을 상징하는 '포수'는 새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현실의 한 부분을 언어라는 도구로써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서 또 시인의 이러한 문명 비판의 가치관을 대립관게의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문명의 비판이라는 주제의식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한편, 이 시는 인간이 포수이든 작가이든 학자이든 간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기가 욕만하는 순수(가치)를 획득하려 할 경우에 오히려 순수를 파괴하고 만다는 역설을 주제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랑'이나 '순수'와 같은 관념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비중은 크지 않고, '새'나 '포수', '납덩이' 같은 시어의 보족관념으로써 관념어를 대신하고 잇다.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는 본래 작가가 가치를 느꼈던 실재 현실과는 다르다. 그것은 첫째,시의 언어가 표현 효과에 촛점을 두는 형상적 언어라는 점이고, 둘째는 시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재구성해 낸 허상이라는 점을 깊이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시적 진술은 시의 예술성과 미학적 요소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써 바람직하지 않다.

 

2. 이야기체 시(narrative poetry)

 

1) 이야기체 시의 의미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세워서 쓰는 시로 서정양식과 서사양식이 결합된 개념의 시가 이야기체 시이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곧 시에다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체 시는 1930년대 임화의<우리 오빠로와 화로>, 오장환의 <야행차 속>, 이용악의 <낡은 집>< 백석으 <여승> 등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70년대에는 김지하의 담시(譚詩)인 <五賊)을 비롯하여 서정주의 <해일>, 신경림의 <농무>로 이어진다. 80년대에 이르면 연작시 <대꽃>을 쓴 최두석의 「이야기시론」에 입각, 본격적으로 이야기체 시의 확산을 꾀한다.

저마다 사람들은 살아온 내력과 더불어 일종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잇다. 각자는 그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세계를 해석하고 깨우침을 얻는다. 그것은 한 보편적 인간 삶의 뿌리가 된다. 이야기를 구연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상황 묘사와 화자의 정서적 반응 및 견해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으로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고 말한다. 사실 우주는 온통 내밀한 이야기로 가득 찬 세계다. 하나의 풀잎, 모래까지도 이야기로 얽혀 있다. 또한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무수한 사건들로 이어진 인생사이기도 하다. 나아가 우리 생할 주변에는 수많은 이야깃 거리들이 숨어 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 내 옆에 있는 친구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이야깃거리가 아닌 것은 없다. 식물, 동물, 바위도 다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수천 년을 거치면서 나름대로의 살아온 내력과 더불어 일종의 이야기를 구연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상황 묘사와 화자의 정서적 반응 및 견해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름대로 재구성한다.

한 인간의 삶, 생애란 바로 사건의 연속이고, 그 연속성에 벗어날 수가 없는 것. 만일 시인으로서 진지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깨달음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야기를 만들과, 여기에 나름의 의미를 심어갈 것이다.

 

2)이야기 체 시의 전개

이야기체 시의 내용 전개는 대체로 네 가지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① 발상, ② 에피소드의 선택 혹은 창작을 통한 이야기화, ⑶ 배열, ⑷변용이 그것이다.

먼저 '①발상'은 보고 겪은 경험의 주관적인 사색이나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모티브이다. 시인은 자기만의 사색이나 깨달음을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책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끄며내게 된다.

그 다음으로 '② 이야기화'는 두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창작으로서 이야기를 상상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체험에서 얻어진 의미 있는 사건을 바탕으로 이야기화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완결된 이야기로 써야 한다는 것, 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것, 반전이 이는것, 압축된 사건 중심으로 감각적으로 제시 할 석, 제시된 이야기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어떤 내면화된 의미로 함축해야 하는 것 등이다.

'③ 배열'에서 이야기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한다. 즉, 하나의 소재로서 단순한 이야기(fable. fabula) 가 아니라 구성(plot. sjufet)으로 재편, 재구성되어야 한다. 서설적인 전개로 도입, 발전, 갈등, 위기, 결말 등의 순서를 감안하면서도 cut back(전장면 회귀기볍)과 같은 시간의 재구성, 시 공간에 텐션 주기, 대립적 구조 등 이를 살려나갈 필요가 있다. 가령, 먼저 결말을 이야기하고 도입부를 중간에서 진술하는 것과 같이 순서를 뒤바꾸는 전개라든가, 특별한 에피소드를 강조하거나 중첩시키는 전개라든가. 혹은 독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시적 효과를 귿대화한다든지,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을 대조적으로 전개한다든지, 액자식으로 전개한다든지, 회고적인 방식으로 전개한다든지, 연상에 의하여 에피솓를 나열하는 방식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나아가 화자 시점의 설정에 있어서도 일인칭('나') 주인공의 시점, 일인칭 참여자로서의 시점, 삼인칭('그') 관찰자 시점, 이인칭('너' 혹은 '당신') 시점 삼인칭 전능자 시점 등 그야말로 다양하게 활용 할 수 있다.

마지막 '④ 변용'을 통한 전개이다. 이야기체 시에서의 이야기 구성은 시에 알맞도록 대폭적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없다. 시이기 때문에 내용면에서 극도의 압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간결하게 서술한다. 또 묘사는 주관적이고 정서적 표현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리 시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의미로 제시하고, 그 전개에 있어서도 상상력이 이원적 대립이나 등가성의 반복 등 상상력의 논리를 적용해야 재미있고 환기력이 높아진다. 그러하니 여기에는 비유, 상징, 역설, 아리러니, 풍자 등의 시적 장치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도한 언어의 음악적 기능을 살리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3) 이야기체 시의 실제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 항시 누에게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동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서정주 <해일> 전문

 

위<해일>이라는 시는 그야말로 압축된 이야기체 시의 전범을 보여준다. 우선 이 시의 시적 대상의 바다의 해일로 화자가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시의 ① 발상은 바다의 해일이란 '우주적인 리비도-사랑의 욕망 표출'이라는 데서 시작된다. 바닷물은 바다에 빠져 죽은 외할아버지의 영혼이다. 여기에서 '바다의 큰 물결'은 남석적 리비도의 상징이고, 마당에 몰려 들어온 바닷물을 보고 수절하고 있는 외할머미의 얼굴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애처롭게 갈망하는 외할머니의 여성성을 드러낸다. 곧 외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그리움은 단지 '바다쪽만 멍하니 바라보는' 행동으로 제시한 것은 암시적 기법이다. 따라서 해일을 통해 집 마당에 밀려온 바닷물과 홀로된 외할머니(여성성)의 만남은 리비도의 충족행위로 설명될 수 있다. 이렇게 회고적 에피소드는 시인의 의식지향에 의해 재배열, 재구성되어 시적 차원으로 '④변용'된다.

다음으로 '② 이야기화'의 내용상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묘사 등은 압축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여기에는 또 시적 공간의 대립적 구조로 '바닷물과 집 안마당'이라는 두 개의 상상력이 이원적 대립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바다 혹은 바닷물이 남성을, 대지 혹은 안마당이 여성을' 대립적구조로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결국 이 대립항들은 '바닷물과 안마당'이 만남으로써 하나로 일원화된다. 주제적으로 리비도의 충족에 해당하는 기능이다.

'③ 배렬'면에서 살펴보면 일인칭 참여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바다에 얽힌 이야기로 '나'가 체험한 사건은 자신이 어렸을 때 주인공인 외할머니가 겪은 사건이다. 이야기의 구성면에서 보면 액잫여 구성화 회고적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길이가 매우 짧지만, 큰 틀의 이야기(액자) 속에 다른 핵심적인 이야기(내용)가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액자형 구성을 취한다. 큰 틀의 이야기는 화자('나") 겪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집의 해일에 관한 것이다.

'④ 변용'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첫째, 이야기의 내용이극도로 압축되어 변용되어 있다. 곧 이 시의 진술은 한 편의 소설로 쓸 수 있는 내용을 불과 두 개의 단락으로 처리하였다. 그것은 주요한 단락의 토픽 센텐스 다섯개 만을 간추려 정리해 놓는데서 가능하다. 곧 그 토픽 센텐스는 '옛날 외갓집은 해일이 들 때 바닷물이 마당까지 넘친다', '그런 날 나는 파도에 휩쓸려 밀려온 물고기들 줍기를 좋아했다', '해일이 일 때 할머니의 볼은 유난히 붉어 보연다', '외할아버지는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가 푹풍으로 익사하였다', '해일로 마당에 밀려온 바닷물을 보고 외할머니는 부끄러워하며 볼을 붉혔다. 이다. 둘째로는 이야기체의 시에서는 극적인 부분을 살려 내는데, '외할아버지의 익사와 외할머니의 볼그레한 볼'이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셋째로,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에 대한 인물 묘사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넷째로, 주관적 묘사와 정서적 표현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다. 가령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 과정을 개울, 삼대 울타리, 옥수수밭 등 시인의 자의적이고 주관적 선택에서 묘사된다. 또 마당까지 넘쳐나는 바닷물의 상황 묘사에서도 바다가 마치 생명체처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그려지고 있다. 다섯째 비약과 암시의 기범을 활용한 점이다. 곧 외할머니의 늙음을 단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비약에 속하고, 외할아버지에 대한 외할머니의 그리움을 단지 '바다 쪽만 멍하니 바라보는' 행동으로 제시하여 암시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여섯째로 시 <해일>은 하나의 이야기가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 이미지나 비유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가령 화자의 유년시절 철없이 놀기 좋아하는 성격을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로 묘사한다거나, 외할머니의 이야기 솜씨를 "누에가 실을 뽑듯이"로 표현했다거, 외할머니의 불그레한 볼을 "노을빛 처럼' 고운 볼 등으로 묘사한 점이다. 일곱째, 변용은 순간적인 직관적인 직관과 상상력의 논리인데, 우주적 리비도의 표출을 바다의 해일에 끌어왔다는 것이다. 곧 바닷물의 넘침과 외할머니의 관계를 사랑하는 남녀의 재회로 해석한 시인의 남다른 상상력이다. 나아가 상상구조의 이원적 대립으로 크게 '바다와 대지', 작게는 '바닷물-남성과 집 안마당-여성'이라는 공간적 대립을 구축하고 있다. 바다 혹은 바닷물물이 남성을, 대지 혹은 안마당이 여성을 상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대립항들은 바닷물과 안마당이 만남으로써 하나로 일원화된다. 주체적으는 리비도의 충족에 해당하는 기능이다.

마지막으로 외적인 율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내재적인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로 낭독에 적당한 호흡단위에 맞추어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는 구문형식이다. 그리고 서두에서 "넘쳐서", "올라와서", "지나서" 등 어법적인 차원에서 어구를 반복시키고 있다.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과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 였던가

 

<중략>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던가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중략>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정이었다

밤 12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 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중략>

 

낮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엇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김남주 <학살/> 부분

 

시<학살2>도 이야기체 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너무나 잔인한 장면의 연속이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낮과 밤이 교차되면서 점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는 낮과 밤이라는 시간적 대랍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만행의 현장을 더욱 강하게 고조시켜 분위기를 급박하게 몰고 간다. 민초들을 저지, 탄압하기 위한 경찰과 군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간결한 문장으로 그려내면서 파노라마처럼 연속, 반복적인 시어로 묘사되면서 순간순간 급박했던 당시의 모습을 고조시켜 나간다. 이런 이야기 전개 방식에 독자들은 더더욱 처절한 절규와 공포를 체험하게 된다. 극적인 에피소드, 극적 전환과 전투적인 시어의 활용, 비유적 처리, 전환의 기법 등 이야기체 시로서 실감미와 박진감을 읽는 것이다.

 

내 마누라 김연복은 오 남매를 쑥쑥 낳아 길러낸 생산적인 여자

김연복은 여섯 살 땐가 일곱 살 때

아버지 그러니까 내 장인어른의 특명으로

난산의 어미 돼지 좁은 산도에, 어린 조막손 밀어 넣어

오물오물 일곱 마리의 새끼돼지를 꺼낸 것을 기억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녀는 동네의 어겐 머슴 녀석들과 어울려

녀석들이 못하는 거친 일도 척척해내며 그들을 손아귀에 넣고 커갔다

이를테면 남자들도 못 드는 무거운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든가

누구와 싸움이 붙어도 절대 지지 않는 그런 여장부로 야생마로 길들여진 김연복,

중매결혼으로 나에게 시집온 뒤에도 힘으로 군립하는 그녀에게

손에 흙 안 묻히는 일들은 일도 아니다 거지발싸개다

이를테면 내가 밤새워 쓰는 시 나부랭이는 휴지 쪼가리에 불과하고

내 혈을 갈아 입으로 벌어오는 돈은 돈 가치로 쳐주지도 않는다

그녀가 밭에서 일하며 얻는 년간 2백여만 원의 높고 귀한 가치에 비해

다달이 그 열 배도 더 되는 나의 퇴직연금(그녀가 몽땅 받아쓰니까 정확한액수를 나는 모르지만)은 그 발꿈치에 묻은 흙만도 못한 적은 돈이다

김연복 여사는 비단옷보다 무명옷이 어울리는 여자

치마저고리도 양장도 아닌 작업바지가 어울리는 여자

그녀는 여인들 누구나 선호하는 도시생활을 마다하고

시골에다 손수 큼지막한 집을 지어놓고(내 마누라지만 대단하다)

지난 여름 나를 끌어내린 것도 그녀다 고맙게도

통 큰 그녀의 몸빼바지 안에서 나는 편안하다 따뜻하다

그녀가 얹어 준 2층 사랑방에서 마누라 몰래 긴장하며(들키면 야단맞는다)

이른 시각부터 김연복 여사를 컴퓨터에 올려놓고(글감을 준 그녀에게 감사하며)

또 열심히 되지도 않는 글을 써대는 비생산적인

나는 그녀 앞에서 언제나 졸장부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시 한 편 지어 바치지도 못하는 나는

-정대구 <위대한 김연복 여사> 전문

 

<위대한 김연복 여사>늘 팔순이 된 아내를 기념하는 헌정시로 지은 것이다. 소통불능의 시가 양산되고 있는 우리 시단에서 체험과 생활이 묻어나는 시인의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이 재미있게 읽히면서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아내는 지금 시인과 함께 화성에서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다. 시인은 안내의 성적에서부터 그녀가 걸어온 길, 에피소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자기 반성 등 진솔한 이야기로 실감미 있게 풀어놓는다.

 

옛날에 어떤 괴짜 시골생이

문득 결심했단다. 죽자고 하면 된다!

그리고는 대학 못갔어도

나는 변호사 된다고

죽자고 책을 파고 또 파고 하더니

변호사가 되었단다

국히의워 된다고 하더니 되고

또 된다고 하더니 두 번 안 되고는

그래도 또 된다! 고 하더니 되고

장관 된다고! 하더니 되고

그럼, 대통령?

죽자고 하더니 되었단다

 

그 죽자고 대통령은

대통령을 2년쯤 하자

대통령 마치면 고향 내려가서

아아, 시나 쓰고 살아야지, 했단다

내 친구 시인 하나가 흥분했단다

우리 시인을 뭘로 아는 거야!

그래도 나는 생각했단다

분명 시인 될거라,

시인도 죽자고 괴짜시인 될거라

 

대통령 마치고 고향 내려가서

그 죽자고도 깨달았으리

시인 되려면 10년은 걸린다

그래서 또 무늑 결심했는가

먽, 부엉이가 되자!

 

그리고는 저 바위에서 뛰어내렸단다

뛰어 내렸어요도

그럼! 죽자고도 다는 못 되었단다

부엉이는 억만 년 걸린다

우리 부엉이를 뭘로 아는 거야

부우엉! 부우엉!

 

나, 참,

박의상<부엉이> 전문

 

위 시도 시사적인 인물에 고졍시켜 서사화한 이야기체 시이다. 주인공은 아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일대기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연결하여 축약하고, 죽음음을 회화화시킨 화자의 시신에 공감이 간다.

시인은 부상상고 출신의 괴짜 시골 고시생이 변호사가 되고, 국회의원, 장관에 이어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생가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자살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그려낸다. 여기엔 "죽자고 하면 된다!"와 "파고 또 파고 하더니", "도 된다! 고 하더니 되고"라는 신념적인 어구에 리듬어법을 첨가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나아가 여기에 "아아, 시나 쓰고 살아야지"에서 보듯 시인이 되고자하는 에피소드와 "먼저, 부엉이가 되자!"라고 하는 에피소드를 첨가하여 '자살'이란 명예롭지 못한 선택을 한 주인공의 자조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 어조를 담고 있다. 화자가 말하고 있듯이, 적어도 "시인 되려면 10년은 걸린다'고,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화자는 주인공이 "먼저, 부엉이가 되자!"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내렸어도 /그럼! 죽자곤도 다는 못 되어다"다는 것. "부엉이는 억만 년 걸린다"는 해학적 이유를 달고 있다.

인생사의 많은 경험을 겪었을 주인공이 자살을 택하기까지 깊은 충격과 고뇌가 있었을 테지만, '자살'이란 방법으로 단명의 길을 택한 그의 판단은 명예롭지 못하다. 무엇보다 그는 생전의 성정이나 평소 그의 행동과 언행으로 보아 예술가의 감성을 지녔다. 이는 학창시절과 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 그리고 정치 역정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흥적이며, 예민한 그리고 다혈질적 성격은 한 마디로 시인, 예술가적 기질에 가깝다. 위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아무나 되지 못하지만, 차라리 시를 쓰거나, 예술에 심취했다면 평탄한 노후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부엉이가 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가끔 부엉이가 나타나 울고 갔다고 하는 봉화산의 부엉이바위가 뭇사람들의 자살바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 시인의 표현은 너무 재미있다. "죽자고 하면 된다", "된다고 하더니"라는 말의 반복적 행간 처리에서 인물의 성격이 잘 묘사되어 처리되어 있고, 여기에 시인과 부엉이를 끌어들여 슾픔을 회화한 발상과 클라이맥스에서 부엉이로 화자 전도를 꾀한 결구처리의 상상력이 매우 재치가 있다.

대통령을 지낸 주인공의 화려한 일대기에서 마지막 '자살'이란 안타까운 종말을 보는 이 시에서 씁쓸한 어조와 함께 인생무상의 한 삶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