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상상력의 미학적 형상화] 4. 시적 상상력을 키우려면

2018. 9. 28. 15:33☎시작법논리와전략☎

728x90

 

 

 

4. 시적 상상력을 키우려면

 

  1) 감수성(感受性, sensotovty)을 통한 연상력 키우기

  감수성이란 한 마디로 '자극을 받아들여 느끼는 성질이나 성향'을 말한다. 시는 누구나 일상적 체험에서 느끼는 감적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감동내지 감흥을 바탕으로 한다. 곧 인상적인 느낌(자연의 섭리, 생명성, 극적사건, 감동적인 순간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런 충격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하찮은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천성적이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우선 감수성의 능력은 느낌을 심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야, 이 장미 색깔 좀 봐. 어떻게; 이렇게 고울 수(강렬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하였던 신기함으로 어던 특정의 아기나 연인을 떠올렸다거나 혹은 '한 접시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느꼈다면, 그 장미를 두고 한 편의 시를 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햇살을 보아도 그렇다. 가령 겨울철 방안의 햇살을 보고, '아, 햇살이 눈부셔"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 번 더 되새김질해서 중얼거린다. 햇빛의 강렬한 누눕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제는 연상적으로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빗대어 생각한다. "햇살 속에 유리수슬들이 박힌 것 같애" 혹은 원거리 연상으로 "햇살 속에서 파도소리가 들려"등 청각적 이미지로 발전 시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각, 청각만이 아니다. 미각적, 후각적, 촉각적 오감의 느낌을 심화하게 되면, 어떤 대상에 대한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싱니은 보통 사람이 평소 느끼지 못했던 것을 남 다른 감각으로 그 감흥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남들이 못 보던 새로운 세상 신기한 세계에 눈을 뜨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대개의 시들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 의한 참신한 감동의 울림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시는 시인의 감수성의 연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성 있는 좋은 시를 쓰려면 무엇보다 먼저 남다른 감수성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 풍부한 감수성을 더욱 풍부하게 길러 나가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거꾸로 뒤집고 다르게 생각하기

  우리가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히 실용적이며, 육체적 삶의 연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인식은 자동화되어 있고, 경험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러나 시의 세계는 낯익은 것이 아니라 , 낯선 세계로 이루어진다. 예술성, 작품성은 낯익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설음, 고정관념, 상식을 버리고 무조건 뒤집어 생각하는 데서 태어나고, 일상성, 보편성을 탈피하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 가청적인 것에서 불가청적인 것을 드러내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보편적 진리나 생각, 신념까지도 거꾸로 뒤집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선악, 미추, 대소, 고저, 장단, 청탁 따위의 개념을 반대로 규정해 보는 훈련, 역발상은 시적 상상력을 얻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시를 쓸 때는 늘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쓸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물을 보는 나만의 독툭한 시안, 개성 있는 시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 같은 생각이나 비슷한 내용의 시는 예술이 아니다.

  해서, 대상을 보면 늘 관념의 틀을 벗어나는 질문을 통해 시작한다. 거꾸로 뒤집기는 상식을 뒤엎는 질문 파격적인 사고, 낯선 생각이 필시 수반된다. 물론 여기에서는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그 사물이 지닌 속성, 특성, 본질 등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이와 관련된 연상 등 남다른 사유의 상호덱스트가 적용될 것이다. 가령 "꽃이 아름답다", "똥이 더럽다", "섹스는 추하다", "방은 어둡다'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한다. 뒤바꿔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거기에 인생의 참다운 진리, 역설적 진실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촌한 글씨로 가득 찬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이대흠 <이동식 화장실에서>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화장실에서 구더기를 내려다본다. 그 다음 화자의 눈은 더럽고 징그러운 구더기를 뒤집어 거꾸로 보고, 꼬물거리는 활자로 연상해서 본다. 순간 활자는 불경(佛經) 활자로 바뀌고, 마침내 부처님의 말씀으로 치환된다. 구더기가 부천님의 말씀으로 바뀌는 악할 정도의 충격, 성속불이(聖俗不二)의 진리가 화장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장실 구더기를 통해서 불경을 읽는 화자의 시안(詩眼) 성속(聖俗)이 불리될 수 없는 불가의 진리가 시 속에서도 존재한다. 그래서 종교적 진리와 문학적 진리는 내통한다. 시적 텐션을 주는 긴장감, 이것이 시의 참맛이다. 

  엉뚱한 착상이 시를 재미있게 만든다. 세상만물의 순환이란 연기(緣起)의 법칙에서 거듭 난다. 그래서 배설한 똥은 거름이 되고, 또 채소가 되어 우리의 몸 안에 들어온다. 이렇듯 모든 것은 썩어서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것이 순리다. "썩을 놈, 썩을 년!"은 참 진리이고, 감지덕지한 욕이다.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름달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산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함민복 <소스라치다> 전문

 

  쥐나 벌래를 보거나, 길거리에서 뱀이나 개구리를 만날 대마다 사람들은 소스라친다. 그러나 정작 놀랠 대상의 주나 뱀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뱀이나 쥐가 더 놀란다는 것을 모른다. 뱀이나 쥐는 청각이 예민하고 겁이 많아 소르라쳐 달아난다. 성경에서부터 뱀에게 악업(惡業)의 굴레를 씌우고, 간계와 교활의 낙인을 찍어 혐오를 조장한 게 누구인가? 바로 사람들이 아닌가. 우주에 존재하는 것마다 그들의 생명은 신비하고 존귀하다. 너무 인간적 관점에서 재단하지 말자.

  상상은 남다른 심안(心眼)이나 영안(靈眼)에서 점화된다. 그러나 상상력은 저 속세의 저속한 밑바닥에서 천상의 별천지까지 왕래한다. 육신을 위해 한 덩이 밥숟가락을 뜰 때도 예사롭지가 않다. 가령 밥상을 물리고 나니 밥알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단지 밥알이 아까워서 입안에 넣는 경우는 평범한 인간에 그치지만, "밥알은 하나님이 흘리신 하얀 눈물"이라고 읊조렸다면 그대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시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동과 진리는 시인의 일상사 도처에 있는 것, 하찮은 곳,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가벼움 속에 무거움이 있고, 속된 곳에 성스러운 것이 있는 것, 선과 악, 이와 추, 대와 소, 고와 저, 장과 단이란 변별이 없는 것에 상상력은 싹튼다. 보편적 진리나 생각, 신념까지도 거꾸로 뒤집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개념을 반대로 규정해보는 훈련 역발상은 시적 긴장을 얻는데 효과적이다. 시에서 중요한 구성윈리로 작용하는 역설이나 아이러니도 다 역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3) 축소지향, 미시적으로 한정화하기

  현대시에서 소재에 대한 상상력의 접근 방식은 미시적이고, 축소지향적이고, 현미경적 관찰을 전제로 하는 경향을 보인다. 말하자면 종래의 민중적이거나 저항적이거나, 이념적인 거시적인 관점을 지양하고 대상을 한덩하여 처리하는 촘촘한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스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매우 짧고 간명한 시다. 삼라만상의 모든 생(生)은 하나의 서사시이다. 여기서 서사는 함축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촘촘한 묘사와 어울러 있다. 달팽이에 밀착하여 생을 그려내고 있지만, 2차적으로는 화자 자신의 이야기로 변용되기도 한다.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업고"기어가는 생, 즉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드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의 주체가 시인 자신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이렇듯 사물에 대한 시인의 정신이란 옷 입히기가 시 창작에서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 창작에서 그 정신의 옷은 대상을 미시적으로 제한할 때 효과가 크다. 그것은 서정시의 소재가 순간의 예술로 하나의 비전을 추구하는 장르이기에 그렇다.

 

맨처음 침묵의 둥근 알이었다. 껍질을 뚫고

목 끝까지 잠수를 했다. 보기만한 하늘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가끔 흘러오는 물줄기만이

푸른 청맹과니 꿈을 흔들었다 처음으로 뿌리를

갖게 되었을 때 햇빛의 작두날에 한 번도

피 흘린 적 없는 우리는, 깜깜한 우물처럼 고요했다

눈부시게 깨워줄 햇살이 없으므로, 세상의

死線까지 간 적이 없었으므로, 아직은 풋내로

괴로웠다 더러 순결도 무거운 허물이 되어 발목을

잡지만 가슴에서 가슴으로 습기만 나르는

황홀한 입덧이었다. 지나온 날들은

바빡 초록의 불씨들이 눈을 떴다

어둠의 탯줄을 끊은 새떼들이 앞 다투어

잎새의 날개를 폈다 오래된 하늘을 밀어젖혔다

상여꽃 피우는 햇살을 향해 날아오르는

저 미친,

정유용 < 콩나물의 房> 전문

 

  위시는 콩나물이 피어나는 모습을 상큼한 비유를 써서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는 시인 특유의 직관으로 "침묵의 둥근 알"에서 "초록의 불씨", "잎새의 날개"라는 이미지로 박진감 이게 이끌어간다. 시루 속에서 막 싹이 피어오르는 콩나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실감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치밀한 상상력의 진폭은 높고도 깊다. 곧 "보자기만한 하늘"이라든가, '황홀한 입덧", "초록의 불씨", '어둠의 탯줄을 끊은 새떼" 등의 비유가 새롭고, "끝까지 잠수를 했다 보자기만한 하늘", "사여꽃 피우는 햇살을 향해 날아오르는" 등 시적 이미지의 역동적인 처리가 매우 참신하다. 이렇게 콩나물이란 사물 특유의 속성을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상상력은 더욱 풍부해진다. 마지막 행에서 "저 미친"이라는 결구처리는 더욱 압권이다.

 

  4) 우주적, 혹은 생명주의적 친화력 갖기

  우주, 자연이란 본래 사물의 연속성, 희귀성, 윤회성,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시인이 대상을 우주적, 혹은 생명주의적 합일 내지 자연친화의 시안으로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 하려는 의식은 잔념람 덕니자. 짜아거 기님니 죄디 뉘래거믐 '우주적인 감각', '우주적인 연민'을 먹저 키워야 한다. '우주적인 詩情'은 별것이 아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력적이든, 타력적이든 어떤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명적 연장을 시켜 자기 나름의 발견과 깨우침을 찿아내야 한다.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촉촉히 옷섶을 적시는 이슬,

강물은

흰 구름을 우러르며 산다.

만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온몸으로 우는 울음,

바다는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솟구치는 목숨을 끌어 안고

밤새 뒹구는 육신,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움에 산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별 하나 두고,

이를 수 없는 거리에

흰 구름 하나 두고,

오세영 <먼 그대> 전문

 

  위시는 우주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그리움을 노래한다. 인간에게 있어 그리움이란 누구나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근원이요 정서다. 이 시에서는 그리움이란 닿을 수 없는 거리, 이룰 수 없는 거리를 각각, 꽃과 별, 강물과 흰구름, 바다와 하늘이란 공간적 거리의 시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곧 "꽃은 별"을 그리워하며 우러르면 살고, "강물은 흰구름"을 그리워하며 우러르면 살고, '바다는 하늘을" 그리워하며 우러르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 때문에 꽃은 피고 별빛은 빛나는 것일까. 그래서 또한 바다는 출렁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인간은 무엇을 그리워하며 우러르며 살까. 만나지 못하고 멀리 있다는 것은 고통이자 축복이다.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움은 괴로움과 힘겨움을 동반한다고 한다.

  상상을 하려면 늘 우주와 자연과 내통해야 한다. 발은 비록 땅을 디디고 있을 지라고, 시인의 시선은 멀고 먼 밤하늘을 향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뇌 크기는 축구공보다 작지만 상상의 힘으로 이 우주를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적 연민 내지 우주적 상상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내 몸이, 그리고 마른 풀잎 하나라고 그 몸이 우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인들은 매사 건성으로 스친다. 그러나 작가는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마음의 눈을 열고 대상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평범한 일상의 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리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순간순간 사물의 섬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세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

 

솔잎 하나에 두 손가락

사랑 미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갈등

 

한 생을 겨루다가

살어도, 죽어도

떨칠 수 없는 사랑은

둘이 하나,

김숙려 <솔잎의 갈등> 전문

 

  솔잎의 두 잎에서 '사랑'과 '미움'이 함께 공존한다는 생명적 울림의 미학을 본다. 예리한 관찰(통찰)이다. 곧 작가란 이 사물과 저 사물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고, 여기에 인간의 정신을 심어준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고립되지 않고 상호 교감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대상을 논리적으로 따지려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즉각적으로 다른 어느 것과 연관시키는 것은 순진무구한 마음이 되어야 가능하다. 과학적 사고를 버리고 시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며, 감각을 활력 있게 가동시켜 비유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이렇듯 시인에게 있어 자연이란 글감의 보고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더욱 그렇다. 과학자는 자연을 사실대로 관찰하면서 변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체, 분석하지만, 시인읜 자연에 생명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5) 깊은 응시(凝視)와 의미부여

  상상력은 자기 체험에 대한 깊은 응시(凝視, 관조(觀照)의 의미부여에서 온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정중동(靜中動)의 이중성을 지닌다. 이것은 순전히 시인의 몫에 달려 있다. 언어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안에서 이렁나는 틈새에서 대상의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일, 혹은 자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인생의 신비한 비의(秘義)를 잡아내려고 노력하는 일에서 상상력은 활발해진다.

  사실 많은 등단 작가들에게서도 막연한 관념, 넋두리에 가까운 푸념이거나 혹은 센티멘털한 감성을 직적적으로 토설하는 시들을 수없이 목격한다. 이는 상상력의 빈곤, 관념을 구상화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비롯되는데, 상상력으로 들러내야 시의 참신성과 환기력, 호소력 있는 강렬한 인상을 가진 내용의 시가 될 수 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과 나오 켜는 해금가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시는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남다른 의미의 발견이기도 하다. 사유의 깊이도 상상력이다. 그래서 역설적 사고나 뒤집어복, 거꾸로 보기는 시의 참신성을 뒷받침해 준다. '속이 비어 있다'는 말은 텅 빈 상태로, '내용이 부실하다'든가, '알맹이가 없다 등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화자는 긍정적으로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라는 시적 깨달음의 명제를 던진다. 그러면서 "갈대도 그렇고", "대나무도 그렇고",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오카리나도 그렇고", 해서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고 기원적 시점을 노래한다. 그러고 보면 '속 빈 것들'은 모두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다. 사람이라고 어찌 다를까마는 욕망의 시대에 욕망을 버린 사람들, 마음을 깨끗이 비운 사람들도 속 빈 악기와 같은 터이다. 시인의 말 대로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곰감이 간다.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달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을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도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떼까지

흔들어 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가지를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는 법> 전문

 

  시는 깨달음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뻘에 말뚝을 박는 법', 곧 요령, 노하우로서, 그 깨달음은 하나의 지혜이다. '법'이란 하나의 원리, 곧 질서이다. 함민복 시인이 제시하는 뻘과 말뚝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법은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드는 것이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을 발아들일 때까지 / 좌우로 또는 앞두리로 열심히"흔드는 것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길이다. 그럴때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말뚝은 바로 서게 되어 그 말뚝에 그물을 걸고 망둥이며 새우며, 물고기를 잡는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힘을 써서 내리 박으면 안 된다는 진리, 깨달음, 통찰의 시안은 억지와 강제를 부리는 우리네의 삶에서 통석과 같은 부드러운 삶을 환기시킨다. 말랑말랑한 것고 딱딱한 것을 결합시키는 삶의 지혜, 원리, 질서슬 그는 강화 동막리 갯벌 체험에서 보여준다.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난다

바ㅏㄴ듯한 내 귀들이 날카롭게 모진 눈인사를 나누고

같은 방향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고무망치의 등 두들김에도

끝내 흰 금을 긋고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 세월

화목이란 말은 그저 교과서에나 살아 있는 법

모와 모가 만나고 선과 선이 바르게만 살아 있어

어디 한구석 넘나들 수 있는 인정은 없었다

이가 딱 맞다

주강홍 <타일 벽> 부분

 

  위 시를 쓴 사람은 걸설회사 사장이다. 타일 공사 현장의 깊은 응시와 의미를 담고 있다. 타일 작업을 의인화한 이 시는 공사현장 타일공이 펼치는 인생론이다. 욕실 타일 벽 공사를 하면서 시인이 깨달은 것은 고무망치의 두들김에도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세월"의 의미이다. 공사현자에서 타일 벽은 이가 딱 맞아야 하지만, 실제 인생이란 것이 어디 그러한가. 때로는 이가 맞지 않고, 뒤죽박죽이고,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타일벽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규범 속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제 본분을 지켜나가야 한다.

 

  6) 대상의 전도(轉倒), 의인적(疑人的)으로 비유하기

  평소 일상적 자아(현실적 자아)가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은 늘 인간적 시점, 실용적 축의 관점에 있다. 그런데 문학적 자아(상상적 자아)로서의 시를 잉태하고자 하는 순간만큼은 이 세계와는 다른 상상적 극점에 닿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체에서 벗어나 대상이 주가 되게 써야 한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에 중심을 두고, 대상의 마음을 읽어보고, 그 대상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 쓰라는 것이다. 가령, 화분에 심어진 뿌리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어낸다든가, 하루 종일 고개를 흔드는 선풍기의 마음을 읽고자 할 대 뿌리나 선풍기들은 스스로의 존재의 비밀을 열고 시적인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대상과의 동화, 투사의 동일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나아가 여기에서 시적 화자의 의미부여의 상상력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좋은 시를 얻을 것이다.

 

버티고 서 있다고 어찌 다 기두일랴

흔들려도 떨지 말고 푸르게 일어서야지

당신께 등을 기대면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 넋을 들창 무시로 드나들던

바람과 함께 뒹군 막다른 벼랑에서야 

함부로 눈발에 버려진 당신을 보았습니다

 

부끄럽지 않으려고 견전을 읽었는지 

굽어도 굽지 않은 성자처럼 서 있지만

무엇을 기다리는지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이제 더는 아버지, 당신께만 기댈 수 없어

나를 일으키는 동안 내 등도 이미 굽어

꽃보다 향기가 슬픈 옹이 하나 안습니다

민병도 <소나무> 전문 

 

  시의 맛깔은 치환, 곧 비유의 묘미에서 온다. 바꿔 말하면 비유적 장치가 없다면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구 부분에서 보듯이 이 시에서 소나무는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다. 전반과 중반부는 소나우의 속성과 자태을 묘사하면서 아버지로서의 희생과 자식 사랑을 중첩시켜 노래한다. 곧 '버티고 서 있는 기둥'과 '푸르른 절개'로서의 아버지, 벼랑에서 서서 '바람'과 '눈발'속에서도 굽어도 굽지 않는 성자와 같은 소나무가 곧 아버지이다. 이제, 세월

은 흘러 자신도 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등 굽고 옹이를 품는 소나무가 된다. 

  이렇듯 시는 생명적 비유와 상상의 덩어리이다. 곧 비유나 상사잉 없으면 아무런 울림 감흥을 얻을 수 없다. 

 

밀봉된 바, 무게 400g 꽁치의 짭조롬한 눈물이 캔에 담겨있다 천사백원읠 지불하면 원터치로 열리는 진공의 바다, 같은 용량의 인스턴드 바다들이 마트 진열대에 쌓여있다. 제발 저를 당겨주세요., 꼬리는 밑바닥에 바짝 들어붙었다. 누가 안전핀을 뽑듯 저 고리를 당겨준다면... 뚜껑이 열리기까지는 얼마를 기다려야 하나, 유통기한을 며칠 남긴 꽁치의 눈빛이 흐리다. 바코드가 찍 저 바다는 누군가의 식탁으로 초대되어 참았던 숨을 왈칵, 토할 것이다. 순간 손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뚜껑을 조심할. 열 받은 것들은 뚜꼉이 열리기 쉽다. 

마경덕 <통조림> 부분

 

  통조림이 재이있게 의인화되어 있다. 여기에서 꽁치통조림의 속성, 성질, 모양,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통조림에서 우리네 삶의 분신들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상상력의 시학, 곧 상상력의 시는 외면풍경의 내면화로 이루어진다. 들숨과 날숨의 파노라마다. 누구나 평소 관차로가 상상을 하겠지만, 그것이 언어로 건축되어 힘을 가지려면 작가의 남다른 시안의 의인적 비유의 깊이가 필요하다. 

 

  7) 동심적 연상의 발상   

  좋은 시를 쓰려면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예부터 동심(童心)은 시심(詩心)이요 천심(天心)이라 했지 않은가. 이러한 태도가 바로 일상적, 상식적 인식의 껍질을 벗는 방법이 되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남다른 상상력이 발동된다.

 

흰 목련꽃을

엄마, 여기 조개꽃이 피었어!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엄마, 여기 눈이 내렸어!

벚꽃이 지는 걸

엄마, 바람이 꽃을 아프게 하는 거야?

좋은 냄새를

엄마, 이게 꽃이 피는 냄새야?

양선희 <어린 것들> 부분

 

  성인들은 현실에 잘 긷들여져 있어 상투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자동화된 인식들은 일탈적이고, 상상적으로 반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동심(童心)이나 시심(詩心)은 매사 호기심을 가지고, 상식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 대상을 연상적으로 바라본다. 곧 "목련꽃"을 "조개꽃"으로, "밥물 자국"을 "눈송이"로, "벚꽃이 지는" 마음을 '바람이 꽃을 아프게"하는 것으로, '좋은 냄새"를 맡고 "꽃이 피는 냄새"등 시각과 후각 등으로 말하는 남다른 연상적 상상력이다. 이는 동심에서 비롯된 관찰을 뛰어 넘는 사고 행위다. 따라서 관습과 상식의 옷을 버리고, 동심처럼 난생 처음 사물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8) 듀얼리즘의 상상력, 중층적 비유 구조로 쓰기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래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정호승 <들녘> 전문

 

  정호승 <들녘>은 어린 날 겪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거억이 어느 순간 분출한 시이다. 오월 푸르른 날 아버지는 모를 내고, 먹왕거미는 거미줄을 치는 농총풍경을 비유의 한 쌍으로 선연하고깨끗하게 보여주고 있다. 날이 밝자마자 모를 내는 아버지나 아침부터 거미줄을 치는 먹왕거미나 "두 분 다 참 부지런하시다"라고 말함으로써 동일성의 비유를 성립시킨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비유 속에서의 대상들은 원융화통(圓融回通)한다.

  시는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인생이 재미있어야 하는 것처럼, 시 읽는 즐거움은 재미와 감동에서 온다. 곧 발랄한 재미가 있고 감칠맛 나느 감성이 들러나야 하는데 바로, 듀얼리즘의 신들린 듯한 상상력과 비유가 시를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음악이 밥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중국집 요리사가 된

그는 드럼 치는 남자였다

 

오늘도 하얀 밀가루 포대를 악보처럼 펼쳐놓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반죽을 시작한다

길고 짧게 후려치는 손목의 힘, 점점 오티브가 길어지고

높고 낮은 음표들이 태어나 오선지에 앉을 시간

 

가닥가닥 갈라지는 반죽들

그는붉은 닭 벼슬 위생모를 쓰고 경쾌한 연주에 몰입한다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

때맞춰 절정을 찾아야한다

드럼 속으로 들어간 그는 아무릴 불러도 대답이 없다

 

사라진 먼 꿈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던 남자,

입에서 뱉어지던 맵고 아린 소금기,

세상이 바닥으로 그를 후려칠 때

그가 미끄러지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사분음표 국자를 들고

드럼을 두드리듯 요리를 하는 남자

웅장하고 장엄한 바다 심해의 삼매경 삼선짬뽕,

쫄깃한 음정과 음표를 넣어 짜장을 볶는다

조경숙 <드럼 치는 남자> 부분

 

  시 <드럼 치는 남자>는 이야기 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인공은 한때 드럼 지망생었으나 생계 때문에 포기하고 결국 중국집 요리사가 된 남자이다. 늘 그는 하얀 밀가룰 포대를 악보처럼 펼처놓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반죽을 시작한다. 그리고 짧게 후려치는 손목으로 높고 낮은 음표들의 가닥을 만들어내는 연주를 한다. 참으로 기발한 비유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사분음표 국자를 들고 / 드럼을 두드리듯 요리를 하는 남자 / 웅장하고 장엄한 바다 심해의 삼매경 삼선짬뽕, / 쫄깃한 음정과 음표를 넣어 짜장을 볶는다"에서는 요리사의 율동이 전해올 만큼 엄청난 실감미로 다가온다. 밀가루 반죽과 드럼치기의 증충적 듀어리즘의 구조, 그 비유 덩러리들의 맛과 생기발랄한 묘사, 적절한 텐션이 그려내는 언어 조탁의 힘에서 상상의 풍만한 재미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드럼의 쫄깃한 리듬이 실려 있는 면발과 음정으로 빚어낸 짙은 짜장면이 먹고 싶어지는 시이다.

 

  9) 체험의 한 순간을 잡아 비약적으로 상상하기

  일상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쓸 때, 제시된 시구 모든 부분에서 상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후경화된 시의 내용 중 어느 한 순간을 잡아 발칙한 상상력으로 전경화하여 처리하면 시 전체가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는 시를 얻을 수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이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햅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젖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밭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져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ㅈ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부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시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옹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고영민 <과수원> 전문

 

  위 시는 이야기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인 화자는 하루종일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통 바닥을 휘저어주고, 어머니는 호스를 당겨주고 아버지는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분부를 한다. 만약 이 시가 과수원에서 있었던 내용만을 썼다면 아마도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화자는 그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발칙한 상상력으로 내면을 여과 없이 들러낸다. "긴 막대기로 양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화답이 퍽 재미있다. 아들의 그 행동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시적 상상은 아버지에게 전도되어 매우 치밀하게 드러난다. 호스의 분부기가 노즐을 빠져 나올 때ㅑ" ~발씨발씨발, ~ 지보지보지"하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추즉하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사과의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로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라는 것이다. 참으로 발칙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