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7. 16:13ㆍ☎시작법논리와전략☎
6. 죽음의식의 상상력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삶의 불안, 공포와 관련된 궁극적 화두는 '죽음'에 귀결된다. 그래서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현대상회에서 인간의 욕망적 의식은 소외되어 점차 육체가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이 상상의 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이다. 죽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수록 묘하게도 불안감과 쾌감은 배가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근저에서 죽음에 대한 변명으로서의 '생성'을 낳게 되는데, 이 생성의 동력이 바로 시인의 심미적인 에토스이다. 생성을 통해 죽음은 시적 육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수영에게도 '죽음'은 일상에 걸친 화두엿다. 그가 죽음 의식을 동력으로 삼아 시를 써 간 데에는 서구 존재론의 근본을 뒤흔든 하이데거 철학의 영향이 컸다. 근원적 존재자가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존재의 세계에서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삶의 순수한 연관적 전체'에서의 '또 다른 측면으로 부상된다. 곧 여기서 '죽음'은 '생성'과 맞물리는데, 김수영은 바로 이러한 '죽음"의식을 받아들인다.
김수영의 시에서 이러한 죽음의식은 '투신(投身)적 죽음', '해탈(解脫)적 죽음', '선(禪)적 죽음'으로 드러난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김수영<눈> 부분
먼저 위 시는 "눈"을 통해 '투신(投身)적 죽음'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 시는 '눈을 살아 있다'는 시구와 '기침을 하자"는 시구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서 의미 해석의 단서는 2연에서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는 말과 3연의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란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시인'은 사물과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진실된 정신을 의미하며, 죽으마져도 "기침"과 "가래"는 젊은 시인이 내뱉어야야만 하는 현실의 부적적 불순물이다. <여름뜰>(1956)이 <屛風)(1956)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김수영에게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드러나지 않는 '삶의 또 다른 측면', 곧 '생성'을 지향한다.
누나야 諷刺가 아니면 解脫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수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八月의 하늘은 높다
높다는 것도 이렇게 웃음을 자아낸다
김수영 <누나야 장하고나> 부분
김수영은 '해탈(解脫)'을 통해 일조의 초시간적 공간 속에서 자신을 해체시켜 버리고자 하는 해탈적 죽음의식을 보여준다. 누이동생은 죽은 오빠의 사진을 부담 없이 걸어 놓은 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근세사의 수많은 사건들과 이어진 아버지의, 동생의, 그리고 여타 사람들의 역사적인 죽음은 오히려 풍자적 상황을 통해 민중적 해탈의식에 닿아 있다. 여기서 화자의 "웃음"은 '해탈적 죽으로 깨달은 사람에게서만이 볼 수 있는 생성의 동력으로 하나의 에토스적 초탈의식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라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풀> 부분
이 시는 김수영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발표한 유작(遺作)으로, '풀'과 '바람'이라는 자연물을 제재로 하여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고, 번복과 대구를 통해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이시에서 '풀'과 '바람'은 각각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풀'은 강한 생명ㅇ력을 지닌 자연물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며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 온 민중, 민초(民草)이다.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 독재 권력과 외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연에서는 풀으 수동적인 모습을, 2연에서는 바람보다 빨리 눕지만 먼저 일어나는 풀의 모습을 노래하여, 민중들이 시대 상황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면모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3연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모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3연에서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 권력의 횡포를 지혜롭게 견뎌내는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나아가 시 <풀>에서 시적 공간은 '절대적인 자유', 곧 '선(禪)'적 '不立文字直指人心'을 지향한다. 소멸과 생성의 '선적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급직적인 파괴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답게 육체의 관능에 자기 감각을 내맡김으로써 신비주의적 선사(禪師)와는 구별된다. '풀과 바람'의 공간은 이러한 김수영이 꿈꾸었던 '절대적인 시' 공간의 한 모습이었고, 여기서 시인은 소멸되어 시로 다시 이루어진다. 이렇듯 김수영은 죽의식을 통해 시적 '새로움'과 '자유'의 생명을 획득하는 시적 성취에 도달한다.
비닐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대,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기형도 <죽은 구름> 부분
어른들은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있는 힘 다해 높은음자리로 뛰어 올라가고 그날 밤 삼촌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기형도 <삼촌의 죽음> 부분
위 시에서 보듯 기형도의 시는 곳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 결국 그렇게기형도는 29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요절은 가장 순수했을 대,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청춘의 절적이였을 대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시편들은 유년시절에 겪은 누나와 삼촌의 죽음, 그리고 가족의 병고와 가난 등 자신의 트라우마와도 맥이 닿고 있지만, 80년대 후반 도시적 일상과 산업화시대의 풍경 속에서 지식인이 갖는 어후와 예민한 감수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기형도의 시에는 오직 죽음만이 살아 있다. 인간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연도 마치 죽어있는 것처럼 차갑고, 무겁고 딱딱하게 그려낸ㄴ다. 나아가 생명이 없는 사물까지도, 아니 살아잇는 생명체까지도 죽어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게 죽음을 더씌움으로써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했던 것이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이 운전사는 이따금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부분
시 <입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가 여름휴가 중 광주 망월동 묘지에 참배를 하고 온 뒤에 쓴 것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택시 운전사가 등장하는 이 시는 죽음 의식과 불안감의 정조가 깔려 있다. 암울한 배경과 희색빛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평소에 접하기 힘든 명제의 냄새를 맡게 한다. 그의 죽음 이미지들은 체념으로 가득 차 어쩌면 친근감으로 해석되기까지 한다. 어때든 ㄱ의 시적 '공강'에는 심연의 안개, 늘 죽음이 차 있엇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그는 시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죽음을 택했고, 그 결과 그의 죽음 자체가 주체가 되어 우릐의 곁에 남게 되었다. 위 시 구절에 말한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시를 통해 죽음을 느끼며 그 대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뿐이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발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는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까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쨍쨍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돼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위 글은 <시작 메모>에 불과하지만 문장이 너무 시적이다. 하늘에서도, 지상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눈발은 시인 마음의 모습이었을까. 쓸쓸함도, 무력함도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며들 것을 믿었던 시인,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더니 그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였다.
죽음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허혛게 눈을 뜨는 것이다
몸 냄새를 갖는 것이다
눈빛은 먼 데 허공을 향해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비탈기를 내려오는 달라이라마 그림자처럼
김윤식 <북어5> 전문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리고 죽음 후의 세상은 아무도 모른다. 공포와 불안의 화신인 '죽음', 김윤식은 그 '죽음'이라는 절대 절명의 숙명적 운명을 '북어'라는 존재를 관조하면서 인식해 간다. '죽음'은 북어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고 "허옇게 눈을 뜨는 것"이며, "몸 냄새를 갖는 것"이기도 하고, 또 '눈빛은 먼 데 허공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도 이 북어에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고, 또 죽음을 탈속한 화자의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감자탕 집 냄비 속에서 뼈와 살이 결별한다
나는 마지막 유골이 나올 대까지
뼈에 붙은 살을 발라 먹었다
티베트의 검은 새처럼 주둥이 소에 살을 우겨 넣었다
그의 생이 목에 걸리면
걸쭉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화장이든 조자이든
누군가 살을 발라내고
누군가 불을 피웠고 관을 날랐다
국자 하나가 연꽃처럼 냄비 속에서 피어났다
냄새를 맡은 바람이
뼈를 잘게 부수기 위해 다가 오는 게 보였다
박서영 <냄비 속의 장례> 부분
냄비 속의 장례, 죽음이란 삶만큼 두렵고 혼곤하면서도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다. 먹는 일이 마치 한 편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처럼 그려지고 있다. 식당이 곧 장례식장이라고 본 착상이 꽤 공감이 간다. 숙연한 "죽음과 먹거리를 만드는 식당의 '삶'을 벼맃시킨 상상력 죽어야 하는 곳에 삶이 있다는 역설, 그것이 냄비 속에서 그려진다. "식당은 장례식처럼 분주했다 / 누군가 살을 발라내고"라는 이미지에서 보듯 어쩌면 섬뜩하리만치 살벌한 풍경인데도 뼈만 남은 감자탕 냄비 속에서는 생의 법열이 작동한다. 냄비 속에서 뼈 혹은 해골의 불꽃 속에서 "국자 하나가 연꼬처럼 냄비속에서 피어났다"라는 사바의 연꽃을 연상시킨 이미지 때문이다. 주음과 삶의 법칭이 공존하는 냄비 속의 감자탕, 일종의 죽음 의식을 거행하는 식당에서 생명적축제로 본 시인의 눈썰미가 참신하다. 그러고 보면 모든 가정의 주바이란 하나의 장례식장인 셈이고, 요리를 집전하는 주부들은 사형집행수, 곧 망나니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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