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시적 상상력의 원천] 3. libido적 상상력

2018. 9. 3. 15:43☎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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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ibido적 상상력

 

   'libido'라 정신분석학 용어로 성본능(性本能) · 성충동(性衝動)의 뜻이다. 프로이트(S.Freud)는 예술, 문학, 미학에 관해서 22개의 저작물을 남길 정도로 창조적인 작업들에 관심이 많았다. 흥미롭게도 미술이나 음악보다는 주로 연극이나 소설, 시 등에 더 열광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예술가들의 창작행위란 "강력한 본능적 욕구를 억압하면서 현실로부터 방향을 틀어서 자신의 흥미와 리비도를 자신만의 공상의 세계로 옮겨 놓는 것"으로 보았다.

  모둔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성충동을 통하여 번식하고 숙명적인 생을 구가해 나간다. 사람이나 물고기들이 짝을 이루고, 후대를 길러내는 것, 또한 식물들이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트리는 것은 지상의 명령이고 자연의 순리이다. 그래서 우주는 운행을 하고, 자연은 충만하게 지탱되며, 지구는 신비롭고 아름다워진다. 다라서 리비도적 상상이란 원래 생명적일 수밖에 없고, 문학적 상상력의 한 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익은 수박은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혀끝만 닿아도 쩍,

벌 어 진 다

수박물에 떨여져 젓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끄틍으로 벗겨낸다.

 

수박씨처럼 음모를 뱉어내기도 하면서

마름침만 삼키곤 했던 수음의 사춘기를 서른에 버린다

박성우 <황홀한> 전문

 

  박성우의 <황홀한 수박>은 매우 관능적인 시이다. 화자가 수박을 가르고 시식하는 순간을 성적 착상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곧 수박이 지닌 모양, 색깔, 감촉 등을 여성의 속성에 절묘하게 비유시켜 남성에 의해 주도되는 성적 묘사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리비도적 본능의 용출은 생명적 시를 탄생시키고, 충만한 생을 인식하게 한다.

 

  신랑이라고 거드는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르 서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더 오토바이를 팽기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스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뉘 치마을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 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살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애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전문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모르나 리비도적 상상력이 깔려 있다. 동네 아주머니의 입을 빌려 술술 풀어내는 농밀한 성적 입담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 시의 백미는 끝부분에 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를 돌아가고 있더라니까"라는 장면과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라는 독백은 매우 감칠맛 나는 표현이다. 충남 홍성 출신인 시인은 실제로 개그맨 시험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소설가 한창훈은 발문에서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유랑극단 변사를 했을 것"이라고 했고, 그의 입담은 황석영 선생도 고개를 저으며 "너한테는 졌다"고 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 시인의 실감미 넘치는 성적 묘사도 그러하지만, 알싸한 삶의 무게를 슬며시 밀어 올리는 저 능청과 해학에서 생명적 카트르시스를 느낀다.

 

어디 보쌈이라도 당하고 싶네

하늘아

분홍꽃잎아

무개야

 

어쩔 수 없는 내 맘

몽땅 싸가지고 어디론가 데려가주렴

그곳이 눈 뜨면

연밥 속일지라도 좋아

이인원 <연蓮> 전문

 

  성적 충동, 곧 '연(蓮)'의 마조히즘(masochism) 성적 심리가 드러난 작품이다. 프로이트에 의해 정의된 리비도는 건강한 에로스다. 리비도는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성적 본능으로 만물운행의 원초적 힘이 된다. 대상이 주가 되어 상상력을 발동하면 열락적 상상력으로 극치의 맛을 볼 수 있다.

 

씨불알, 씨앗부터 다른 연놈들이다

진흙타에서 뿌리 굵은 연놈들이다

천 년 묵은 종자에서도 싹을 틔우는 혈통

뿌리 속에 허공르 가두어 꽃구멍을 ㅐㄹ 줄 아는

 

씨불알, 연놈들 뭣들 허구 자빠져길래

오뉴월 대낮 참에도 꽃대강이들 안 뵈는 겨 시방?

아직두 멀었다 그 말여 시방?

개안허믄 다시 와라 그 말씀이여?

조명 <연蓮> 전문

 

  불가와 속세, 선사의 화두와 중생의 욕지거리가 한바탕 어우러져 묘한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연(蓮)'만이 갖고 있는 사물의 속성을 드러내는 등 시적 운행은 아주 활달하다. 위 시에서의 화자는 연꽃과의 조우를 통하여 깨달음을 알아차리고자 한 것일까? 아지 피어있지 않은 연꽃을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을 질탕하게, 욕지거리 섞이 사투리 상말투로 건네는 순박한 중생의 화두에 경악한다. 너무 질펀한 막말에 과연 불심이 다다를지는 의문이 선다. 하지만 화자의 이면적 소원은 뜨겁고 간절하가. 곧 "뿌리 속에 허공을 가두어 꽃구멍을 낼 줄 아는", "굵은 언놈들"의 꽃을 보고 싶은 불심의 깊은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자연적 생명력 자체를 정싱의 옷을 입힌 언어적으로 육화하는 일이 시가하는 일임을 굳게 믿는다. 곧 우리의 고향인 원초적 생명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투명한 "창(窓)'이 곧 인간의 육체이고 그 살의 역동 곧 에로스적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피워내는 생살이 '꽃'이요, '시'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젊은 ㅗ가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ㅡㄴㄴ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 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밤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문혜진 <홍어> 부분

 

  시 <홍어>에서 중심 소재인 홍어가 리비도적 상상에 의해 여성의 성기로 치환되어 있다. 남성 화자가 체험한 삭힌 홍어의 후각적 이미지로, "두엄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사라점을 씹는 순간 / 입 안 가득  퍼지는 /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라는 여성 성기의 리비도적 상상으로 발동된 것이다. 여성 성기로 타자화한 이미지, 오로지 남성적 시각에서 본 원초적 리비도의 발상이다.

 

갑작스런 화재로 집이 전소되었다

화인은 난로의 과열

아빠는 죽고 엄마는 화상을 입고

단란한 가정은 깨져버렸다.

물질도 때로는 욕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일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자 일순,

본능으로 전율하는 쇠붙이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건드리지 마라

오늘밤 나는 너와 더불어 온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전류(電流),

밤마다 정사(情事)를 꿈꾸는

물질의 에로스

오세영 <욕정> 전문

 

  위 시는 네 부분으로 분할이 가능하다. 화재 이야기(4행), 물질의 본능에 대한 생각(4행), 인간의 욕정(3행), 그리고 마지막 3행은 "전류"가 지닌 사지로 보고, 여기에 전류의 속성을 대입시킨 짧은 시편에 속하지만 시상 전개상 행간의 빈틈 메우기가 요구된다. 남자의 성적 욕구는 폐경기에 있는 여자보다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인간의 욕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물질의 욕정, 물질의 에로스에 대해 노래한다. 물질이 몸부림치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온몸을 불사르고, 밤마다 정사를 꿈꾼다는 리비도적 상상력,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인이야말로 언어의 창조주가 아니고 무엇이랴. 짧은 시이지만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푸성귀나 산채를

제 아무리 즐겨 먹는 중질이라 하지만

산사에 딸기밭이 있는 것은

좀 야릇하다

 

봄밤에는

경 읽기도 힘들지만

자꾸 여자 생각하는 하초 간수하기도

여간 일 아니어서

 

잘 익은 딸기알들을 보노라면

환속한 소설가 김성동이

절에 들던 나이 또래의 스님들이

탱탱해진 불알 두 쪽을

쑥쑥 뽑아서는 내던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라, 가랑이를 알맞춤 벌리고

딸기밭에 와서는

뭐 하드기

지그시 내리누르는 구름

 

어떤 것들은

아이크림 핥는 아이들의

혓바닥처럼 낼름대고 있어서

딸기밭에서

나는 그만 혼절하고 마느니

강우식 <백운사 딸기밭> 전문

 

  절간에 딸기밭이 있는 것을 보고, 화자의 리비도적 상상력이 발동된 시이다. 그야말로 육감적이고도 야릇한 성적 호기심을 촉발시킨다. 탈속한 산사의 성스런 공간에, 이와는 대비되는 관능적인 성적 이미지를 끌어들여 긴장미를 더하고 있다. 대체로 원초적 본능인 리비도적 상상은 연락적이고 생명적 이미지로 들러나기 마련이다. 또한 리비도적 소재 처리는 시의 발상 측면이나 독자들의 텍스트 수용에서 강렬한 심리적 작요을 환기시켜 준다.

 

 

아파트 정문 앞 플라다너스 나뭇잎 사이로

빨간 우체통이 서 있다

 

그 앞을 오가며

아무도 모르게 그 속에다

낙엽니나 꽃잎을 집어넣을 때처럼

남편의 몸속에 쓰윽 손을 넣는 밤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낙엽이나 꽃잎 같은 노래가 흐르는 몸

왜 그 순간 갑자기 편지가 쓰고 싶었던 걸까

분명 속으로만 되뇌었을 뿐이데

 

벌떡,

남편이 날 아한 종이처럼 펼처놓고

편지를 쓴다

 

글자가 뜨겁다

고경옥 <편지를 쓰다> 전문

 

  고경옥의 시에서 리비도적 상상력은 감칠맛이 있다. 화자는 "발깐 우체통"의 비밀(?)을 통해서 리비도적 욕망을 풀어간다. 화자의 리비도적 욕망은 '편지를 쓰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여기 "빨간 우체통"은 여성성과 동시에 남성성을 사잊ㅇ한다. 후반부의 "벌떡" / 남편이 날 하얀 종이처럼 펼쳐놓고 / 편지를 쓴다"에서는 뜨거운 정사의 에로틱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실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이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려 날 피울 꽃을 얼떨경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정현종 <좋은 풍경> 전문

 

  시 <좋은 풍경>은 매우 에로틱한 시다. 상상의 세계라고 하지만 시인의 재치, 장난끼가넘쳐나고 있다. "늦겨울 눈 오는 날", "눈은 부드러워 /새 살인 듯", "입김을 풀어놓으며 /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했던 것, 남녀 한싸의 뜨거운 섹스, 이를 지켜 본 밤ㅁ무도 참다못해 봄이 되자. "여러날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 한나절에 다 피워"놓았다는 이야기다. 인간과 나무가 일체감을 이루어 한껏 춘정(春情)을 드러낸 이 시에서 생명적 사랑의 충만함을 느낀다.

  우리 시단에서 리비도적 상상력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꽤 많다. 문정희, 오탁번, 강우식, 이정록, 김영승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시편에서 에로스적 시정을 읽게 된다.  리비도적 시의 상상력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요, 생명적 삶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사랑만큼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사랑은 달콤한 술과 같아서 어느 순간 판단력마저 흐리게 만들고, 또 무한의 심연 속에 빠져들게 한다. 천상과 지옥을 오가는 생명적 에로스의 힘, 이것이야말로 자연이아 인간을 순환시키는 힘,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