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시적 상상력의 원천] 2. 노자 . 장자적 상상력

2018. 8. 13. 19:39☎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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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자 . 장자적 상상력

 

  노자(老子)의 핵심적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있고, 장자(莊子)는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두고 있다. 이들 도가적 사상의 핵심은 인위(人爲)와 세속(世俗)을 초월하여 자연의 흐름에 내맡기고 살고자하는 철학적 배경을 담고 있다. 곧 반문명적, 탈가치적, 반형식적인 가치관으로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운행하는 도()’의 근본, 질서에 따른 사유이자 삶이다.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란 우주만물의 공통된 본성으로 우주만물의 운행을 관장하면서도 인위적인 작위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태고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장자(莊子)는 문학적인 비유와 상상력이 풍부한 동양의 탈무드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노장사상은 말, , 영상 등의 틀을 벗어나 신비주의, 직관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지식, 추상, 전문화를 경계하고, 대립된 입장들을 함께 같이 밀고 나간다. 그들이 보는 모든 대상은 양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한 측면에서 보는 것은 독선적 지배 또는 왜곡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老子)상선약수(上善若水0’에서 보듯 ()’의 비유로서 의 속성을 설파하고, 장자(莊子)에서는 바다 속 물고기인 곤()이 하늘에 나는 붕새로 변신하는 무한한 정신의 유영을 제시하고 있으며, 장주와 나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업는 만물일체의 절대적 자유로운 경지라는 발칙한 상상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물은 자기 새깔이 없다

붉은 그릇에 담으면 붉은색으로

푸른 그릇에 담으면 푸른색으로

 

물은 자기 모양도 없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양

납작 그릇에 담으면 납작 모양

 

물은 물러터진 것이다

물은 자기 것이 없는 것이다

물은 자존심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을 잡으려고

손으로 주물러보고

막대기로 휘저어봐도

물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물은 고집이 세다

김은 <물은 고집이 세다> 전문

 

  위 시는 '물'의 속성을 노래한 시로, 노자가 도(道)의 개념을 '물'로 풀이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구절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먼저 "물은 고집이 세다"라는 표제는 반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시의 주제는 물에서 배우는 깨우침이다. '상선약수'와 같이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물의 속성을 시화한 것이다. 화자는 '물은 자기 색깔이 없고, 자기 모양도 없고, 자기 것이 없는, 물러터진 것' 이라는 자존심이라는 성경을 지녔지만, '물은 쉽게 잡히지 않는", 그런 "고집이 세다"라는 것이다. 이는 도덕경 8장 에서 말하는 '水善利萬物而不爭"과 "夫唯不爭"의 '겨루거나 다투지 않는[' "不爭"의 성정, 그리고 "處衆人之所惡"라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하는 도(道)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흔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여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위 시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이라는 가정법 형식을 통해 완전한 합일과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를 소망한다. '물'은 '가뭄'으로 표상된 현대인의 삶의 고독을 해소시키고, 나아가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는 생명을 기원하는 객관적상관물이다. 동시에, 물은 "아직 처녀인 / 부끄러운 바다로"로 표상된 이상과 소망의 셰계, 미지의 신비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이것이 3연에 이르면 '물'이 아닌 '불'로 만나려 한다. '물'로 상징되는 조화로운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한 것들을 깨끗이 태워 버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음"을 발견한 시인은 4연에서 이 "불'이 지나가고 난 후, "만 리(萬里) 밖"의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흐르는 물"로 만날 것을 기원한다. 화자가 지향하는 "넓고 깨끗한 하늘"이란 바로 완전한 합일과 충만한 생명의 세계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물에 대한 이야기가 줄기차게 나온다. 노자에게 있어 "도(道)'란 바로 '물'이다. 물은 원초적 생명력, 세속적 욕망을 정화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 시는 '물'과 '불'이 지닌 대립을 극복하여 새로운 생명력의 조화로운 합일에 대한 희구적 시선으로 노장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 물과 불이 가장 이상적으로 만날 때가 있다. 마치 솥에 쌀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불을 때면 밥이 되듯이 말이다.

 

나는 어둠이야

이 고요함 ㅅ곡에 나는 온통 별이야, 눈물이야

하늘이어 팔을 내려

번쩍이는 북두칠성 굽은 팔을 내려

나를 안아 주오

이 영혼이 별의 가지 끝에 이슬로 맺혔다가

날아가

밤의 나라, 고요히 불타는 나라

그 가슴에 묻히면

무궁에 눈뜰거야. 우주에 피어니 해탈하여 날아다니며

노래할꺼야

풀잎에 어둠으로 웅크려

밤하늘을 쳐다보면 꿈꾸는

나는 지금 죽음보다 활홀한 짐승

이성성 <짐승의 꿈> 부분

 

  『노자』 41장에 보면 가장 흰빛은 어둠과 같다는 말이 있다. 시인은 위의 시에서 자신을 어둠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어둠은 영원한 어둠이 아니다. 그는 곧 자신을 빛의 하나인 '별'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 떠있는 번쩍이는 별인 '북두칠성'에게 "굽은 팔을 내려"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한다. 어둠이고 빛(별)인 시인은 결국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유한한 세계, 즉 풀잎의 어둠 속에서 무한한 우주적 세계인 밤하늘을 꿈꾸는 일이야말로 노자가 말한 황홀의 경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과 교감을 느끼고 있는 시인은 "황홀한 짐승"인 것이다. 이선에게 있어서 하늘은 그의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며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의 몸은 지상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하늘에 살기를 원하고, 그의 영혼은 하늘의 별로 피어나 찬연히 빛나기를 기원하고 있다(<몸은 지상에 묶여도>). 이러한 글들의 단편만 볻라도 그가 얼나나 자신의 삶과 영혼의 문제에 고심학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슬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전문

 

  천상병의 대표 시로 일컬어지는 이 시는 노장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접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 시인이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부활'과 "승천"을 통한 구원의 정신에 닿아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어 이 땅에 내려보냈으니 죽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자세히 보면 그 속에 순환적 생명의식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노자』40장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원한 도의 운동양식"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순환적 세계관과 상통하는 명이 있다. 이렇게 볼 때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시인의 고백은 기독교의 구원과 노장적 순환의식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적절하게 결합된 예에 해당한다. 두버째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시인이 이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이승과 저승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노장사상 족에 가깝다.

  따라서 시인이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노장적 셰계관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이 시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새벽빛", "이슬"< "노을빛", "구름"과 같은 자연 이미지와 어우러져 더욱 강화된다. 즉 천상병이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는 자연은 인간이 만물과 다를 바 없다는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에 쉽게 포섭된다. 천상병 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천진성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더불어 만물제동의 노장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