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시적 상상력의 원천] 1. 불교적 상상력

2018. 8. 11. 13:03☎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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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적 상상력

 

  문학과 종교는 인간 구원을 위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곹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종교가 내세를 지향하는데 비해 문학은 현세를 지항하며, 종교가 율법과 의식을 중요시하는데 비하여 문학은 상상세계의 자유분방한의식을 중요시한다. 또한 종교가절대적인 존재를 숭상하는데 비하여 문학은 평등 지향적이란 점에서 다르다.

  불교사상은 많은 시인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성향을 벗어나 정신적 자양분으로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왔고, 윌 한국 시단의 중요한 명맥으로 자리 잡아 왔다. 말하자면 대다수 시인들이 시적 상상력의 원천을 불교 사상에서 찾고 있다. 가령 많은 시편들이 성속불이(聖俗不二), 무(無)와 공(空), 윤회(輪廻), 연기설(緣起說, 因緣說), 만다라(mandaka, 曼陀羅)등의 개념들을 끌어와 시의 형상화에 다채롭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었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 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빠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유안진 <다보탑을 줍다> 전문

 

  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는 정겹고 재미이는 시이다. 시인은 고개를 떨구고 길을 걷다가 다보탑이 주조된 10원싸지 동전 하나를 줍는다. 그리고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났다는 그 다보탑을 떠올린다. 바로 불교적 시상으로, 화자가 주운 구리동전이 바로 "영취산"이고, "불국정토"인것이다. 동시에 화자는 실제로 별로 쓸모가 없는 10원짜리 구리동전처럼 쓸모없이 살아온 삶에 대해, 동전과 같이 살아가는가" 하는 존재론적 초월에 이르게까지 이른다.

 

폐가 앞에 서면, 문들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굴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디면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며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때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흔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김신요 <도장골 시편 - 폐가 앞에서>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흙벽이 무너지고 풀들이 무성한 폐가를 본다. 이 폐가의 풍경을 중심이미지로서 펼쳐지는 사유의 근저는 불가적 상상이다. "묵언수해", "부처의 고행상", "못난이 부처들",  "소신공양", "등신불", "설산고행" 등의 이미지드릉ㄴ 다 불교적 개념들이다. 지금 폐가의 풀들은 묵언수행주의 부처가 된다. 곡기마저 끊고 용맹정진하는 수행의 삼매가 얼마나 깊은지 풀들은 뼈만 앙상하다. 또 풀은 "못난이 부처들"이 되어 폐가를 껴안고 있다. "홀로 뒹그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도 부처다 풀들은 이런 형상을 모두 거느리고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을 자비심으로 품는다. 사람이 떠난 집은 소신공양 중이다. 불교적 상상의 폐가 풍경은 세상에 버림받은 연약한 존재들을 모두 감싸 안고 만민 평등의 풀의 집으로 귀환하는 대승보살의 무량한 마음을 연상시킨다.

 

계곡으로 물고기 잡으로 따라 나섰다가

깨진 얼음장 속에 꽁꽁 얼어 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물이 서서히 얼어오자 막다른 길목에서

물고기는 제 피와 살 버리고

투명한 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혔다

귀 기울여도 심장 뛰는 기척이 없다

조식(調息)을 하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에 목숨 묻기도 하듯이

물 속에 살기 위해선

얼음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이글루 짓고 ㄷ르어앉은 에스키모처럼

은빛 지느러미 접고 아가미 닫고

사방 얼음벽 들러친 무문(無門)의 집에서

물고기는 다시 올 봄을 아예 잊었다

얼음장이 그대로 고요한대적관전이 되었다

주용일 <얼음대적광전> 전문

 

  시인은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피와 살을 버리고 투명한 얼음장에 얼어 붙어 있는 물고기에서 부처를 본다 참다운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수행이 깊은 선사가 입적을 하듯 물고기 역시 얼음장 속에서 어느 날 홀연 법계로 옮겨간 모습을 본 것이다. 물고기를 품은 얼음장은 바로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자나불을 모신 절집이다. 그러니까 얼음장이 품은 고기는 비로자나불이다. 마음의 분별을 끊고, 집착에서 벗어나야지만 부처의 해탈을 볼 수가 있다는 불교적 관법(觀法)’의 시상이 적용되고 있다.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새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서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음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빛나는

저 꽃꽃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의 동지가 있을 뿐

 

그리하여 이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임영조 <갈대는 배후가 없다> 전문

 

  위 임영조 시의 '갈대'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감정이입, 교감에서 출발된다. 화자는 지금 본 갈대(외면)를 보고 불교적 시안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반추한다.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리고 "禪文에 들듯 /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는 것이다. 곧 갈대가 지닌 고독한 존재 방식으로 '비워야 한다'는 공(空)의 깨달음, 갈대의 속성과 같이 곱게 늘을 줄 알아야 한다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비움과 겸손 속에서 고통을 딛고 선 자의 절실한 생의 의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으로 사는 것, 곧 그것이 자기 구원이고 세계구원이라는 것이다.

 

통닭이 내게 부처가 되라고 한다

어린 아드을 데리고 통닭을 먹으러

전기구이 통닭집에 갔더니

뜨거운 전기구이 오븐 속에 가부좌하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통달이 내게 부처의 제자가 되라고 한다

부다가에 가서

늘푸른 보리수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해본 적은 있지만

부처의 제자는커녕

부다가야의 앉은뱅이 거지도 될 수 없는 나에게

통닭은 먼저 마음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끝내는 사랑하는 자식마저 천만번을 죽이고

이 화염의 도시를 떠나

부다가야의 숲으로 가서 개미가 되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돈이나 주우려고 떠돌아다니는데

돈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부동산임대계약서에 붉은 도장이 찍고 있는데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플라스틱 쟁반 위에

꼭 잘린 부처님처럼 가부좌하고 나오신

저기구이 통닭 한 마리

정호승 <통닭> 전문

 

  통닭집에 간 시인의 체험적 깨달음을 쓴 시이다. "통닭이 내게 부처가 되라고 한다"는 모티브가 도전적이고 강렬하다. 개유불성(皆有佛性)의 시심이 작용한 탓이리라, "목 잘린 부처님처럼 가부좌하고 나오신 /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가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는가? 이런 시에서 시적 착상은 인간 주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벗어나 대상이 중심이 되도록 쓰라는 시 작법을 읽게 한다.

  이렇듯 존재하는 대상을 만유불성(萬有불性)으로 때로는 무상(無常)과 해탈(解脫) 등의 관법으로, 혹ㅇ느 윤회(輪廻)와 공(空)의 세계로 초월적인 시상으로 형상화하는 불교적 상상의 시들이 많다. 실로 불교적 상상력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단초로서 문학 상상력의 경계선을 휠씬 추월하고도 남는다. 현대물리학조차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대의 우주론적인 상상력부터 극락과 지옥, 전생과 후생, 윤회 등 불교적 상상력은 시적 상상력을 압도한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