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9. 14:18ㆍ☎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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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경교융, 관조의 시정
서사(徐事)가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식이라면, 서정(敍情)은 자아와 세계의 합일의 양식이다. 정경교육(情景交融)은 바로 동양시학적 개념으로 서정시의 시적 세계관인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정경교융은 서정시에서 서정적 자아인 주체, 곧 정(情)과 셰계로서의 객체인 경(景)인 셈이다.
정경교융의 시에서 시인은 서정적 자아가 된다. 나아가 정경교융에서 시인의 미적 체험은 관조(觀照)라는 개념으로 대체될 수 있다. 관조의 세계에서는 차별성이 없으며, 서로서로 각자 음양 관계에서 감응운동, 곧 교감하는 세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흔히 관조는 정관적(靜觀的)인 것만으로 알고 있는데, 겉으로는 정관적이면서 안에서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갈구하는 것이 관조이다.
이 관조는 시인의 정시이 스스로 팽창되어 최고조로 이른 상태로, 시인의 사물인식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시에서 관조는 감이수통(感而遂通)의 세계, 곧 온갖 만물이 서로 느끼고 교통하는 세계이다. 기실 64괘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론된다. 시인의 사물인식에 있어 시적 자아가 자연물에 투사(投射, projection), 곧 감정이입하여 몰입해 들어간다든지, 혹은 동화(同化, assimilations) 한다든지, 이른바 동일성의 시론을 형성하는데 관조는 아주 중요한 용어로 인식되는 것이다. 시인은 관조를 통해 사물과의 합일, 융합, 주객일체(主客一體)를 이루기도 하지만, 망아(忘我)와 뭉아개망(物我皆忘)의 시적 몽상의 세계로도 나아갈 수 있는 시적 발판을 마련한다. 이는 도가(道家)의 생기론적(生氣論的) 세계관과 맞닿아 있으며, 원융화통(圓融回通)의 상상력으로 생명주의적 시학을 형성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관조는 시인에게 있어 소강절(邵康節)이 말하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의 세계 인식의 공간이요, 또한 '정중동(靜中動)의 시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위 '생동하는 것을 정지태로 파악하고, 고적(枯寂)한 것을 생동태(生動態)로 잡는' 하나의 선(禪0적인 입신 방법 과도 관련된다.
자연친화류의 작품에서 관조는 오늘날의 시에서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으며, 현실시(사실시), 사물시(물체시)로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최근 시에서 그 효력은 여전하다.
산을 가다가 물을 마시려고
샘물 앞에엎드리니
물 속에 능선 하나
나뭇가지처럼 빠져 있다
물 마시고 일어서자
능선은 물 속에서도 하늘에도 없다
집에 돌아와 자는데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들여다 보니
내장까지 흘러들어간 능선에서
막 달이 솟는 소리
그때부터다
내 골짜기 새 울고 천둥치고
소나무 위 번개 자고 밤에 짐승 걷고
노루귀꽃 고개 들어 가랑잎 안에 해가 뜬다
내 안에 산이 걸어간다
이성선<내 안에 산이> 전문
위 시에서 관조의 맛이 물씬 풍긴다. 화자는 산에서 물을 마시려고 샘물 앞에 엎드린다. 그러자 물 속에 능선 하나를 본다. 그런데 물 마시고 일어서자, 능선은 물 속에서도 하늘에도 없다. 집에 돌아오니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내장까지 흘러들어간 능선에서 막 달이 솟는 소리가 난다. 그때부터 "내 골자기 새 울고 천둥치고 / 소나무 위 번개 자고 밤에 짐승 걷고 / 노르귀꽃 고개 들어 가랑잎 안에 해가 뜬다"는 몽상의 세계가 펼쳐지낟. 그렇게 화자는 "내 안에 산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체험한다.
시의 공간은 이렇게 대상을 즉(卽)하여 보면 보이지 않고, 뒤로 물러서면 보일 수 있거나 내 안에서 그 대상이 존재라는 모순의 공간이다. 몽상의 공간이다. 이 '바라봄'과 '짚어봄'이 바로 관조의 세계이다. 나의 존재함과 동시에 의식하는 존재양태를 지닌 것이 관조인 것이다. 세계와 자의의 동시성에서 펼쳐지는 서정시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자아(自我) 가운데 타자(他者)의 현전(現前)을, 다른 것 가운데 자의의 현전을 경험하게 된다.
문광영 지음 <시 작법의 논리와 전략>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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