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 17:32ㆍ☎시작법논리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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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시적 언어의 울림과 시 미학의 탄생
1. 시적 언어의 울림
1) '시적 울림'은 순간, 생명적 마음의 들림이다.
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적인 것'을 모르는 시인이 대단히 많다. '시적'인 것들이 깃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세상 만물들은 시인이 무엇인가 발견하기 전에는 단순한 존재물에 불과하다. 곧 그 존재가 시적 의미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인의 촉수 시안(詩眼)으로 다가가 구체적인 의미나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마치 김춘수의 시(꽃)처럼, 새롭게 명명되거나, 누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존재의 생명력을 들춰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적인 것을 발견해서 거기에 일정한 형식과 언어를 부여했을 때 비로서 시 한 편이 태어난다. 만일 시적인 것을 화가가 발견하여 그림으로 그렸다면 그것이 시적인 회화가 되는 것과 같다. 시적인 사진, 시적인 영상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시 장르는 순간의 섬광일 뿐 길지 않다. 영감, 광휘, 섬광을 김춘수 시인은 '마음의 들림'이라고 했다. 따라서 시인에게는 시적인 것을 잡기 위해서 대상을 향해 자신을 열고 집중하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사물 체험에서 얻어진 ㅅ둔간의 스파크가 시의 착상이 되는 셈, 비로서 시가 나를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 <시> 전문
시적인 것은 어디에서, 어떤 때에 나를 노크하는가? 파블로 네루다에게 있어 시가 건드린 것은 삶의 현장인 "어떤 거리, 밤의 나뭇가지들로부터, 불쑥 다른 사람들로부터, 성난 불길 가운데에서"였다고 한다. 곧 시적인 것의 출현은 조그맣고 하찮은 일상 속에서 감자기 온다는 것이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빗자루가 지나간 결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너른 마당 한 보판에 기왓장 깨진 것이 소복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치우려면 저 기왓잔 깨진 것도 좀 치울 것이지, 저곳에 몽땅 모아 논 것은 무슨 심보람.'
투덜거리며 대웅전 앞으로 가다보니 소복하게 쌓여있는 기왓장 안에 개미들이 분주하게 집을 짓고 있었다. 땅속에서 근로기준법과 육아출산에 관한 관계법을 개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과 감동적인 광경이여, 나는 마음이 두근거리며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게 금강경이지, 마음속에 사진 한 장 찰칵! 개미집과 그 개미집을 두르고 있는 조그만 담장이 주인공이 되고 대웅전은 계단 한 칸과 처마 그림자만이 사진 안에 기웃이 담겼다.
그리고 마당 곁엔 대숲이 있었다. 대숲 울타리 안쪽에 선방이 있는 듯 했다. 거기 작은 울타리에는 "새들의 산라기이니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람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숙"도 아니도 '돌아가시오"도 아니었다. 도량이니 어찌 어찌 하라는 명령도 거기에는 없었다. 나의 공부 때문이 아니고 어미 새와 솜털 보송보송한 새 새끼 때문이라고, 여기에서도 아주 조용하게 내 마음의 필림 속에, 찰칵! 요번에는 대나무의 푸른 이파리와 새소리가 가슴 깊은 곳으로 흘러들었다.
이정록 산문집 『시인의 서랍』중에서
이정록의 글에서 시적인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두 장면의 현장을 통해 명중하게 밝히고 있다. 곧 그에 의하면 절간 앞마당 한복판에 기왓장 깨진 것을 모아둔 개미집에서 한 장면 얻을 수 있고, 또 한 한 장면은 대숲 울타리 안쪽 선방 앞 새들을 보호하기 위한 팻말에서 발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개미집이 사람들의 등산화에 짓밟히지 앟도록 개진 기왓장을 쌓아놓고 도량에 들어간 스님들은 대체 무슨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인가?"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나아가 '정숙'이라는 팻말이 아닌 "새들이 산란기이니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에서 시적 감흥을 받았다는 것이다. '개미'라는 미물을 위한 배려, 그리고 새들의 산란기이니 정숙해 달라는 스님들의 마음씨가 곧 부처님의 말씀이고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사찰하면 의례 대웅전이나 석탑 등 국보급 건축이나 보물에 대한 문화적 정보에 관심을 둔다. 이런 지식들은 서적이난 인터넷 등에서 얼마든지 궁금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학, 곧 시적인 것은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위에서 발견한 개미집이나 선방의 팻말에서, 두 가지 소재의 시나 수필을 탄생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2) 정감의 상상적 언어가 감동적인 시를 만든다.
언어는 지시 가능만을 지닌 게 아니라, 미묘한 정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시인 서정주와 소설가 김돌리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화재는 '벙어리의 울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시적 발상과 산문적 발상의 표현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시인 서정주와 소설가 김동리는 시와 소설에서 각각 양애 산맥을 형성한 평생 문우였다. 젊이 시절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문단에서 시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할 대 자주 거론된다.
두 사람이 어느날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해진 김동리가 "어젯밤 잠이 아니 와서 지었다"하면서 자작시 한 편을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것을...,"이라고 읊자 서정주가 무릎을 탁 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버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 내 이제야 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하겠네."그러자, 김동리가 낯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이다" "자네가 잘 못 들은 게야!"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서정주가 술상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예끼 됐네, 이사람아."
박혜연 <시인을 섬기는 사회>
어찌하여 김동리 선생은 미당에게서 면박을 당했을까.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과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과의 차이는 바로 정서적 감동의 여부에 있다. 곧 전자는 상상을 통한 서글픈 감동의 울림이 가슴에 다가오지만, 후자의 표현은 인과적 사실의 메시지 전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시적 정감의 소통은 소설처럼 논리성을 적극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정주가 어이가 없어 술상을 내리치면서 "에끼, 됐네, 이 사람아!"라고 소리친것이다.
김동리는 벙어리 울음을 인과관계에 마춰 표현했으니 소설가 기질이 더셌고, 서정주는 그 소리를 시적(詩的)으로 변형했으니 평생 시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서정주는 "그래서 자내는 산문쪽으로 가야겠네."라고 충고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 김동리는 소설에 전념해 <무녀도>, <역마>, <등신불>,<황토기>를 줄줄이 내놓았다.
폴발레리(P.Valery)는 산문과 시의 차이를 보행(步行)과 무용(舞踊)에 비유했고, 청나라의 한 문인은 그 차이를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에, 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에 비유했다. 밥은 ㅆ깔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술은 쌀의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변하여 전혀 다른 맛을 낸다는 차이가 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술을 마시면 취한다. 거대담론이 사라진 요즘은 시든 소설이든 사소한 스토리텔링이 개입되지 않은 작품이 드물지만 시는 가슴에 호소하여 울림을 취하게 하는 장르인 것만은 확실한 것이다(권순진).
위의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의 에피소드를 오탁번은 놓치지 않고 이를 시로 만들어 냈다.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기가 막히다! 절창이네 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쫓어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고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쪽이
막 형서오디는 순간인 줄은 땅뜀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삐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오탁번 <시인과 소설가>
이런 실화가 있다. 뉴욕의 맨하탄 브로드웨이, 새 봄이 다가오는 계절, 길가에 한 장니이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상대로 구걸을 하고 있다. 장님 앞에는 적선 깡통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I am blund. please help me!'라는 글이 쓰여진 종이 팻말이 놓여 있다. 어쩌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동전을 던져주곤 한다. 그런데 한 청년이 힐긋 보고 지나가다가 돌아와서는 종이 팻말을 뒤집어서 글씨를 쓴다.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라고 ···,순간 다가온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 싶어 장님은 손으로 구두만을 매만진다. 청년은 유유히 사라져버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글귀를 보더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선을 한다. 한참 후, 청년이 되돌아와서 보니 많은 살마들이 적성을 하고 있음을 목격한다. 청년이 다가오자 장님은 구두를 마니면서 물어본다. "What did you do to my sign?"(내 종이판에 무라고 썼나요?)라고, 그랬더니 청년은 "I wrote a same but in doggerent words." (뜻을 같지마는 다른 말로 썼다.)라고 대답한다. 장님은 한 달 동안이나 적선 받을 돈을 단 하루에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청년은 프랑스의 젊은 시인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프랑스 청년이 팻말에 바꾸어 쓴 글귀에 주목한다. 곧 "I am bkind, please help me"라는 직접적 소통의 전달 언어와,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라는 정서적 감동의 표현적 언어가 너무나 다른 효과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바로 시적 언어 표현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심금을 울리는 효과적인 표현은 결코 직설에 있지 않고, 간접적 표현의 상상력에 작용하는 교감의 언어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울림을 주기 위해서는 돌려서 말하고, 빗대어 구체적 이미지의 언어 책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점이다.
3) 사물(체험) 대한 몰입, 적극적 상상이 좋은 시를 만든다.
대상에 몰입하면 시가 나를 찾아온다. 몰입의 순간에는 늘 상상력이 작동하고 울림이 따라온다. 그 울림은 사물을 향한 적극적이고 몰입적인 상상력의 결과다. 시인의 외부 체험에서 빚어진 내면의 깊은 영감, 상상적 이미지가 좌상을 통하여 언어로 형상화되는 것. 그 순간이 촉발된 적극적 상상으로 지어진 언어의 집이 바로 시다.
대상에 대한 관조, 섬세한 몰입에서 영감이 떠오르고, 상상력은 전개된다. 이 상상력이나 영감은 주체의 절대적 자유다 장자의 물고기(崑)가 시(붕새)가 되는 무한한 상상력의 구사, 얼마나 자유분망한가.
그런 점에서 시인은 '철학자의 나무를 키우는 사람'이요. '죽은 몸에서 생명을 물을 발견해 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깊은 영혼의 눈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고정관념이나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워진 몽상가와 같은 전신의 유영(遊永)으로 내면의 빛을 뿜어내는 몽상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思惟마져 붉게 녹슬어 치매에 걸릴지도 모르지 축대 아래 마른 개흙에 비스듬히 배를 깔고 기울어진 그의 자세 한때 청춘처럼 푸른 칠해졌던 옆구리 바람이 마르고 있는 잡풀처럼 수평선도 차츰 말라 줄어들고 언제가는 모래벌에 닻을 내리겠지 저런 자세로 기울어져 가겠지 폐션처럼 옆구리의 칠이 벗겨진 채
김윤식(廢船) 전문
위 김윤식의 시에서 개흙에 배를 깔고 있는'廢船'은 바로 '자아'로 치환된다. 한동안 바다라는 인생의 여로에서 왕래했던 생의 전력이 지금은 폐선처럼 그 기능을 다하고 갯벌에 얹혀있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폐션 속에 탄생의 과거와 현재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가 순간의 압축성으로 포착되어 있다. '폐션'과의 감정이입, 우주 속에 부레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고 지내왔던 폐션에 비유하여 에포케(epoke)의 시선으로 몽상을 전개해 나간다. 거기엔 그의 숙명적인 애상의 자아가 개입된다. 그래서 원초적 폐선은 '思惟마져 붉게 녹슬어 치매에 걸릴지도 모르는' 것으로, 또 "옆구리의 칠이 벗겨진채"로 기울어져가는 숙명적 생명체로서, 늘 슬픔과 아픔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결국 '廢船'은 다름 아닌, 화자의 자화상이며 우리들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감성적 삶을 지배하는 양식은 교감적 관계짓기에 있다. 엄마의 아기 사랑, 남녀 간 이성 교재, 이웃 사랑, 하나님과의 사랑 등 모두 교감에서 이루어지낟. 사랑이든 교감이든 간에 이들은 그대로 시정 시론에 대입된다. 가령 합, 감정이입, 동화와 투사, 물아일체,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 등 동양시학은 물론 서양의 시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몰입적 체험에서 사랑도 가능하고, 시도 지을 수 있다. 일찍이 플라톤(Platon)은 시인을 광인(狂人)이라 했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에 이르면 연인, 시인, 광인은 비슷한 부류로 보아왔다.
연인 관계나 아기 사랑은 오르지 주관적 몰입, 관심이 깊어질 때만이 성사된다. 이때 주체는 대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철저히 객관이 아닌 주관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미화시켜 나간다. 못생긴 얼굴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에 '제 눈에 안경'이니, '사랑에 빠졌다'느니, '눈에 콩깍지가 꼈다는'는 등 말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 관이으로서의 시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과 대화를 하는 자'로, 영매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바람과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들처내어 보여주는 언어 창조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 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관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런 못,
튼튼하게 뿌리래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고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는 그대, 의
붉고 푸른 못
유용주<붉고 푸른 못> 전문
시적 언어의 구사는 정서적 감동과 상상적 울림을 수반한다. 합리적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감흥으로 소통을 그대화시킨다. 그러니까 설명, 설득의 언어가 아니라, 보여주기에 비주을 둔 표현의 언어다.
위 시에서 '나무'를 '땅에 박힌 못'으로, '별'을 '하늘에 박힌 못'으로 비유한 것은 새롭고 신선하다. '나 또한 그대에게 박힌 못'이고, '그대 도한 나에게 박힌 못'이란 표현은 시인이 목수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수용된다. 그러나 나무나 별과 달리 인간은 가장 위험스러운 못이 될 수도 있다. 혹여나 가장 가까운 당신에게, 파상풍 예방주사도 받지 않은 그대에게, 치명적독이 되어 고통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듯 '나무'와 '별'이 '못'으로 지환된 것에서, 나아가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런 못"이라는 전경화의 처리에서 시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시적 울림의 탄생은 화자의 정서가 촘촘한 사물의 이지지로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적절한 장치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무언가를 '더하거나, 혹은 연결하여'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보면 된다. 마술사에서 거장 마르셀 뒤상은 '변기'를 전시장 벽에다 걸어놓고 '샘'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존 케이지는 음악과 소음을 연결하여 새로운 음악- 포스트모더니즘 음악을 만들었다. 걱축에서는 과거의 이오니아, 코린트, 도리아 양식들을 현대식 건물 외부에 치장하여 새로운 현대 전축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아이팟 + 전화기 + 인터넷)도 상상력의 산물이고, 짬짜자의 출현도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4) 남다른 정신의 옷을 입힐 때, 시적 울림은 탄생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셔져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유용주 <시멘트> 전문
어쩌면 시라는 것은 물질, 대상에 정신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공사장에서 철저히 자신이 가루가 되어 견고한 힘을 발휘하는 시멘트라는 물질, 인간도 시멘트 가루처럼 철저하게 부셔져 본 사람만이 "부드러운 거이 강하다"는 새응ㄹ 터득한단다. 인생이란 스스로 가루가 되도록 부셔졌을 때 그때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이는 사물체험의 적극적인 몰입에서 탄생하는 것, 그리고 물리적 현상을 정신으로 바꾸어놓고자 하는 시인의 정감적 눈썰미엣거 가능한 것이다.
유영주 시인은 "사람에게 항상 몸이 중요하다. 노가다판에서 못을 박을때 지시하는 조장보다 직접 박는 사람이 나무의 살결을 제대로 알고 급소를 찾아 못질한다."고 말한다. 이 말뜻은 시가 몸소 체험에서 빚어지지만 정신의 갈무리가 뒤따를 때 비로서 작품이 된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대로변
깍두기머리로 깎아놓은 쥐똥나무 뒤
누군가 실례해 놓은 물똥 한 판
똥파리들이 해치운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처음엔 무료급식이라 쭈뼛거리더니
날이 갈수록 동네잔치로 판을 키웠다
늦은 귀가길, 누군가
젖 먹던 힘까지 조여 넣었을 괄약근
거어이 뚫고 나온 그 간절함에 화답하듯
성찬을 즐긴 식객들의 등피가 사뭇 번들거린다
쓰레기 치우던 환경미화원이 방긋 웃는다
몸 바꿔 입은 푸르름이다
이영식 <축제> 전문
월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한 알의 모래 속에 셰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의 하찮은 존재라도 의미 있게 들여다보면, 거기엔 온 우주의 섭리와 참다운 생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위 시처럼 대로변 물똥 한 판을 똥파리들이 해치우는 것을 축제로 본 시인의 눈이 얼마나 경이롭고 대견스러운가? 이런 상상력이 시의 참맛을 만들어낸다.
너누 체험적 현실만을 드러내기에 지착하지 말라, 문학은 그것에 상상과 정감의 힘을 더하는 언어의 리모델링 작업이다. 사고의 부족, 상상의 빈곤에서 오는 창작품들이 얼마나 활개치고 있는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 본대로 적어내거가 피상적 관념만을 토로하는 작품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시는 순간의 예술이고, 순간을 파고들어 강렬하게 써야한다. 다음의 시구는 아마도 <김밥천국>지의 순간적 경험을 살려 쓴 시이다. 보통 김방이 아니라, 천국김밥지의 김밥이다.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기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방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깨소금이 데커레션을 감당하는 그 나라,
김밥천국
가지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
권형웅 <김밥천국에서> 부분
김밥에 대한 몰입적 자유로운 상상, 이것이 시를 재미있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위의 시에 대해 정끝별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손쉽게 먹히는 한 '끼니'가 되기 위해 '멍석말이'에, '잘게 토막난' 채 '육시당한 몸'으로 누군가의 깜깜한 뱃속에 들어가 허기를 채워주는 김밥들의 소명의식은 얼마나 거룩한 순교주의인가. 원조, 야채, 김치, 계란말이, 치즈, 참치, 소고기, 샐러드, 누드, '모듬'…,김밥들의 순교 메뉴가 빼곡하다. 이런곳을 어찌 '천국'이라 이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미경적 삶의 치밀한 묘사를 통한 생생한 현장감을 제시하거나, 여기에 절박한 삶의 체험적 갈등이나 문제의식, 자기만의 깨달음을 부과하는 것도 좋은 시를 얻는 비결이다.
5) 울림의 확장은 신체의 연장물로 보는, 내면적 깊에서 나온다
모름지기 글쟁이란 존재 형태는 나의 테두리 속에 가혀있는 '닫힌 꼴'이 아니고, 늘 나의 테두리를 넘어서는'열린 꼴'의 존재, 혹은 그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열린 꼴을 실존철학에서는 '초원(Trandzendenz)'-실존을 초월이라고 한다. 자신이 늘 '열린 꼴'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의 자유로운 결단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얼'에 의해서 늘 새롭게 이륙해 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시인이고, 수필가이며, 소설가이다. 그래서 이들은 민감하게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면서 모순된 세계를 조화시켜나가면서 투철한 사명의식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가 작가로서 주목해야 할 현대 철학은 세계와 자아가 늘 교섭하는 존재, 세계 속에 피투된 존재로서의 세계관을지녀야 할 것이ㅗㄱ, 동양의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나아가 작가로서 나는 늘 열려있는 존재이고, 불확정적이며 동시에 가능태의 존지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모습은 일찍이 노장사상의 물아일체(物我一體)에서부터 서양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살마의 실존을 '나와 나 자신이 관계하는 것', '나 자신과 관계함으로써 하나님과 관계하고 이웃과 관계하는' 관계 구조로 파악한다. 이를 메를로 퐁티(M,ponry)는 식으로 해석하면, '셰계는 나의 신체의 연장물'로 '나의 머리칼에 의해 하늘이 시작되고, 나의 발바닥에 의해 땅이 숨을 쉬고, 나의 몸으로 세계를 느낀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이데거(m, heidegger)도 이간의 신졸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와의 얽힘'(das in der welt sein)으로 열림꼴의 존재로 보고 있으며, 괴히테(Fiete)eh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만 사람이 된다"라고 하여 인간을 얽혀 있는 존재로 보고 있다. 더불어 최근의 철학은 자연혹은 사물, 진리 등을 고적적,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학정적인 인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진리, 사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예술은 깊은 체험의 느낌과 생각이란 두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이다. 많은 시인들과 독자들은 아직도 남다른 느낌의 영역보다는 현실적 앎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머리로 쓰는 시보다는 몸으로, 상상의 마음으로 쓰는 시보다는 몸으으로, 상상의 마음으로 쓰는 것이 시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번 뚜어보는 게 나을 걸
뛰다가 넘어져 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라는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 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닥이는 심장 뜨듯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 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중략>
그리하여 네가 만져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애인과 푸른 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거와 한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위에 밤낮 펴져 있거라
정현종 <시창작교실> 부분
위 시<시창작교실>에서 시 쓰기의 산공부를 배운다. 말라르메가 말한 "시는 감성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여실히 발혀준다. 생동감 있는 체험을 바탕으롤 삼지 않은 감성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가령 "<전망>이라는 말, 언뜻 / 앞이 탁 트이는것 같지만 그보다는 /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그렇다 물고기에 대해 쓸 대도 냇물에 들어가 "살아 시퍼런 소리", "살아있는 걸 / 확실히 손에 쥐어" 보는 일이야 말로 시적인 세계에 탄력있게 다가서는 일이다.
문광영 지음 <시 작법의 논리와 전략>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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