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시의 언어] 3. 구체적이면서 함축성이 짙은 언어 / 오세영 <꽃씨를 묻듯>

2018. 1. 30. 15:28☎시작법논리와전략☎

728x90


14011_장려상_지리산_산그리메_고갑진_D



3. 구체적이면서 함축성이 짙은 언어


  시의 언어는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의 말대로 언어는 관념, 정서,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 정서, 욕망을 드러내는데 있어 시인은 절실해야 되고, 보다 구체적인 음영(陰影)이 짙은 언어라야 한다.

  이러한 함축성과 동시에 구체적인 언어는 감정의 온전한 환기 및 상상력의 깊이 있는 활용에 그 본질이 있다. 곧 시의 언어가 울림을 주기 위해서는 이미지, 비유, 상징, 신화, 역설, 앙이러니 등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함축적으로 형상화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시는 일차적으로 그 언어가 관념적, 추상적 직설적 진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것은 음이 짙은 이미지에 의해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 " 내마음은 슬프다" → ㉡ "내 마음은 벌레 먹은 능금이다"

㉠ "꽃이 피었다" → ㉡ "꽃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위 두 쌍의 문장에서 ㉠은 시적 진술이 될 수 없다. ㉠의 "내 마음은 슬프다"는 '감정에 대한 진술' 곧 단순히 슬픔이라는 감정의 사실 보고로 끝났을 뿐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은 객관적 사실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두 문장 모두 시적 화자 주관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감정적 반응을 표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의 것은 시인 자신에게 독특하게 환기된 감정의 표현, 곧 감정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시인이 그의 상상력을 통해서 자신이 체험한 바 정서적 반응을 음영으로 짙게 형상화시킨 데 있다.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讀經을 하고, 呪文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木船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오세영 <꼿씨를 묻듯> 전문


   모든 시은 은유, 상징, 이미지, 신화, 역설 따위로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인용된 시에서도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화장'을 '땅에 꽃씨를 묻는 행위', '땅에 불씨를 묻는 행위', '목선이 삭고 있는 상황'으로 지유시키고 있다. 만일 시인이 "사랑하는 그대 죽음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외롭고 허무하다. 그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식의 진술을 사용했다면

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또한 시가 감정, 그것도 과잉된 감정이나 감상의 표출로만 씌어져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면 이는 잘못이다.

  따라서 시적 감정은 균형과 조화로, 예컨데 단일한 감정이나 긍정적인 감정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사랑과 미움, 공포와 연민, 즐거움과 슬픔, 고독과 충만 등의 감정이 갈등과 긴장 속에서 하나의 통합된 세계(이미지의 이원적 대립)로, 심미적 효과를 이루는 방향으로, 가치 있고 숭고한 감정으로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서 말하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준다. 수필처럼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림을 주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시 속에는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함충석인데,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모호성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설익은 감정의 배설이나 과잉된 주관, 치기 어린 감정의 토로는 지양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 종교적, 도덕적 차원의 비판, 추상적인 언어를 쓰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런 점에서 엘리엇의 '객관정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의 적용은 매우 유익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문광영 지음 <시 작법의 논리와 전략>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