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2013. 6. 23. 05:46☎열린文學人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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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HD 역사스페셜

박지원의 열하일기 4천리를 가다

 

 

200여 년 전, 조선의 지식인 연암 박지원.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청의 심장부에서황제를 만나 청의 실체를 깨닫고, 드넓은 중원에서 우리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는 길.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이 열어주는 세상. 4천리 대장정이 시작된다.

 

제1편 고구려성을 넘어 열하를 건너다

 

조선시대 때 중국 북경까지는 한번 가고 오는데만 석달이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길도 험하고 고생스러워 사신길을 떠나려면 반 목숨을 건다고 했습니다. 그 멀고 험한 길의 기행문이 바로 열하일기입니다. HD 역사스페셜에서는 2회에 걸쳐 박지원이 간 열하일기 대장정 길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쫓아가 봤습니다. 그런데 열하일기의 열하는 어떤 의미일까요.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사냥을 즐겼던 휴양지인데요. 온천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열하라고 불렀습니다. 북경에서 약 230km 떨어진 내몽고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열하일기 대장정의 종착지입니다. 열하는 처음 일정에는 없었습니다.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열하에 가 있는 바람에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죠. 한양에서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까지 가는 데는 무려 4천리, 1600km나 됩니다.

 

당시 청나라로 들어가려면 압록강을 건너 청의 관문이었던 책문으로 들어갑니다. 책문을 지나 험한 고개를 넘고 넘어 요동 벌판을 달린 뒤 청나라의 첫번째 수도인 심양에 들러야 했습니다. 심양에서 요하를 건너고 또다시 끝없이 펼쳐지는 요동 벌판을 달린 뒤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관문, 산해관을 통과해 북경에 도착합니다. 보통 이것이 정해진 루트인데요, 박지원 일행은 뜻하지 않게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죠. 자, 그럼 박지원의 열하일기 대장정, 그 루트를 따라 출발해 보겠습니다.

 

1. 고토를 만나다(압록강에서 봉황산까지)

 

 

 

 

 

 

열하일기의 첫 출발지는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중국으로 가기 위해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다. 취재진은 중국의 국경 도시 단동을 출발지로 삼았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가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온 곳이 바로 단동이다. 지금 한창 발전 중인 도시, 단동. 그렇다면 어디서 압록강을 건넜을까? 단동시의 호산 장성은 압록강 건너편의 북한 영토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바로 맞은편에 고려 때 지은 장대, 통군정이 보인다. 요동 땅이 잘 보여 압록강을 건너기 전, 사신들이 빼놓지 않고 들린 곳이다.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은 통군정 아래 구룡 나루에서 청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사신단은 규모를 보면 보통 사신 2명에 사신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 군관과 통역관 역관 그 밖에 화원과 사신 일행의 건강을 관리하는 의원 등 40명 정도다. 여기에 마부, 짐꾼까지 합해 4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사신들은 아들이나 동생을 자제 군관으로 데려가 견문을 익히게 했는데 박지원도 자제 군관 자격으로 청나라 사신길에 올랐다. 열하일기는 여정에 따라 마주치는 청나라의 풍속과 풍물, 청의 선진 제도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청과 조선의 관계, 조선의 고민 등 당시 시대상을 꿰뚫을 수 있는 지식의 보고인 것이다.

 

 

 

 

취재진은 역사학자인 조법종 교수의 도움을 얻어 열하일기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무려 4천리에 이르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대장정! 그 출발점에 올랐다. 단동 시내를 벗어나 만나는 마을마다 길 좌우로 보이는 붉은 벽돌집들이 인상적이다. 박지원이 강을 건너, 조선과 다르게 느낀 첫 풍경이 벽돌집이었다. 중국인들은 이미 청나라 때 벽돌집을 짓고 살았다. 벽돌집만큼 벽돌 공장도 많다. 취재진은 아직도 성업중인 벽돌공장을 찾았다. 벽돌을 옛날 방식 그대로 가마에서 구워낸다. 박지원이 세심하게 관찰했다는 벽돌 가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벽돌 공장 아저씨 인터뷰

"예전의 벽돌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현재의 벽돌과 비슷합니다. 굽는 방식도 같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박지원을 압도시킨 청나라의 풍물은 바로 벽돌집이었다.1) 박지원은 청나라의 낯선 풍물만 본게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박지원은 우리의 역사를 만난다. 박지원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첫날 묵은 곳은 구련성이다. 구련성은 쉽게 찾았다. 단동에서 12km떨어진 시골 마을에 구련성이란 표지석이 있었다. 마을 외곽 이 둔덕이 바로 구련성의 흔적이다. 구련성은 금나라가 고려를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가에 쌓은 9개의 토성을 말한다.

 

조법종 교수

"판축을 켜켜히 ... 쌓아 나간 모습... 그 모습이 쫙 남아 있습니다."

 

 

 

 

박지원이 왔을 때 구련성은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지원 일행은 어디에서 묵었을까?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단들은 노숙을 했다고 한다. 열하일기에는 당시 노숙 광경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2) 보통 사신단의 숙소는 상대국이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일국의 사신단이 노숙한 까닭은 무엇일까?

 

 

 

 

 

 

청은 조선과의 국경지대를 자신들의 발상지라며 사람이 살지 못하게 봉금지대로 정해 놓았다. 구련성은 무인지대였다. 열하일기는 구련성에서 책문까지 120리가 봉금지대라고 했다. 책문 전까지 조선 사신들은 노숙을 해야 했다. 지금은 현대식 도로가 놓여 있는 국도가 됐지만, 그 옛날 박지원이 걸었던 연행길 그대로이다. 실질적으로 조선은 이 봉금지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봉금지대를 지나 만나게 되는 청나라의 첫 국경 도시, 책문.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 청나라 때 이곳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

 

조선족 인터뷰

"예전에 해방되기 전에요. 그때 8.15해방 전에 100여 가구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나요."

"숱하게 줄었지요. 1958년도, 그때만 해도 80가구 있었을 텐데"

 

책문의 기차역, 일면산 역. 그 원래 이름도 고려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실질적인 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마을 주민 인터뷰

"천구백육십 몇 년에 그곳에 고려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고려문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했고 그 후 이름을 바꿨습니다."

 

 

 

 

청나라는 중국 대륙 1800리 구간을 나무 울타리로 국경을 두르고 청으로 들어오는 17개의 관문을 뒀다. 청으로 들어가는 조선의 관문이 바로 변문인것이다. 국경을 통과했지만 산하와 풍토가 조선과 같다는 사신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국경 도시 변문은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보다 훨씬 번화한 곳이었다.

 

이승수 박사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수 백명의 조선 사신들이 책문에 당도했을 때에는 아마 임시로 상당히 번화한 시장 규모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조선의 상인들도 모이고 청나라의 상인들도 모이고 일시적으로 조선 사신이 지나갈 때는 한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거리는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책문에서 4km 가량 가면 험준한 산악이 나타난다. 봉황성이다. 이곳은 고구려를 떠오르게 하는 공간이다. 봉황성은 요동벌판에 진을 친 고구려성을 배후에서 지원했던 고구려의 오골산성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장벽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다. 성 내부에는 10만 병력이 주둔했을 정도로 오골산성은 고구려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비교적 낮은 구릉에는 잘 다듬은 돌로 적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쌓았다.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거대한 철옹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법종 교수 우석대 사회교육과

"지금 성벽이 계속 내려오다가 여기서 돌출 부위가 나오거든요. 이게 우리가 얘기하는 치라는 고구려 산성의 가장 대표적인 방어용 시설이 되겠는데요. 마면이라고도 합니다. 돌출돼서 이 면으로 돼서 저 앞에서 다시 꺾여서 돌출되는 돌기처럼 돼서 적이 성을 공격할 때 이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고구려의 거대한 오골산성이었던 봉황성을 조선시대에는 안시성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안시성이 아니라고 단언했다.3) 최근의 연구 결과 박지원의 고증대로 봉황성의 서쪽, 해성시에 있는 영성자 산성이 안시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압록강을 건너 청이 그어 놓은 경계인 책문 안으로 들어왔지만 박지원과 조선 사신들에겐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고토이자 조선의 영역으로 그들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조선 사신들이 통관 절차를 밟고 청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책문입니다. 조선 사신들은 연행을 갔다 온 뒤 연행록을 많이 남겼는데, 이 책문은 연행록을 근거로 복원한 것입니다. 근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왔다가 나무 울타리에 초가지붕을 얹은 책문을 보고 사신들은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요, 책문을 보고 꼭 '우리나라 목장의 말 우리 같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연행록은 당시 청나라의 풍물과 풍속을 볼 수 있는 거울이었습니다. 특히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완본이 나오기 전에 유출돼, 사본이 전국에 돌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죠. 그럴만한 게 눈 앞에 청나라가 펼쳐지는 듯 풍물과 풍속 묘사가 상세한데다, 한편의 소설을 읽듯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하일기에는 당시 중국의 사정과 역사는 물론 우리의 역사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현실과 명분 사이 - 반청 의식과 영토 인식(통원보에서 석문령까지)

 

봉황성을 지나고 나면 구불구불한 고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청나라 사신길에서 가장 힘든 여정이 바로 이 회령령과 청석령, 석문령 고개를 넘는 구간이다. 회령령 고개 마루부터 박지원 일행은 발이 묶였다. 장마 때문이었다. 장마 때문에 발이 묶인 박지원 일행은 통원보 마을에서 6일 동안 머물렀다. 이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낯선 풍속을 경험했다. 취재진이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이색적인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건물 2층을 올리는 집에서 사람들을 불러 놓고 사람들이 지나는 대로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찌아오롱장 마을주민

"2층 건물을 올린 후 상량을 축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축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척과 친구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통원보를 떠난 박지원은 초하구 고개에서 비극적인 역사를 만난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초하구 고개에서 봉림대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를 읊었다. 이후 초하구는 병자호란의 애환이 깃든 장소가 됐다.

 

 

 

 

조선 사신들이 병자호란을 떠올리며 힘들게 걸었던 길을 지금은 철길이 지나고 있다. 이 철길 또한 일본이 만주국 건설을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던, 조선의 아픈 역사가 스쳐 지나간 곳이다. 그 국도와 철길이 교차하는 곳. 청나라 당시 역참이었던 연산관이 옛 이름 그대로 쓰여 있다. 병자호란의 비극이 바로 이 연산관에서 시작됐다. 1636년 청 황제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들은 돌아오는 길에 청의 국서를 버리고 온다.4)

 

 

 

 

 

 

 

 

청태종은 이를 빌미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45일 만에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의 비극을 겪고도 조선은 명과의 의리를 고집하며 청을 배척했다. 청 태종의 국서를 받았다는 죄목으로 유배됐던 나덕헌은 청태종의 즉위식에서 신하의 예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뒷날 밝혀져 복권되고 특진까지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 간엔 이미 망해 버린 명나라를 숭상하는 일이 계속됐다. 그것이 의리라고 믿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도 지어졌다. 이것은 국가가 나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이미 여진족 자체를 생래적으로 오랑캐로 여기고 있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1637년 병자호란 당시에 항복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음 속으로 그들에게 복종하는 의식을 조선 사대부들에게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에도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나 적개심은 대단히 심각한 양상으로 물밑에 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척화파들의 지지를 얻고 왕위에 오른 효종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진다. 현실감 없었던 효종의 북벌정책은 10년 동안 계획만 세웠을 뿐 현실되지 못했다. 박지원은 그의 대표작 허생전에 북벌 추진을 위해 효종이 등용한 이완 대장을 등장시켜 북벌의 무모함을 꼬집었다.

 

신병주 교수

"박지원의 입장에 보았을 때는 바로 이 청나라가 오히려 문화국가였고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할 그런 대상이었기 때문에 멸망한 명나라를 계속 붙잡으면서 그 문화 거기에 대한 중화의식 이런 것을 가지는 것은 결코 어떤 국가 발전이라든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그런 명분이라든가 이념, 자존심의 측면보다는 실용이라든가 구체적인 삶의 방식 이런 문제에 훨씬 더 비중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폐쇠적인 조선이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은 청나라 사신길이었다. 그 가장 험난한 구간 청석령으로 가는 길.

 

"청석령이 어디인가요?"

"앞 쪽으로 가시면 저쪽이 다 청석령이예요. 저쪽 산등성이가 청석령이군요."

 

 

 

 

청석령 고개를 넘어 석문령으로 통하는 길은 현재 찾기가 어렵다.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고 청석령 고개 올랐다. 조선 사신들이 오갔던 청석령 길을 찾을 수 있는 표지는 연암일기에 기록된 관우의 묘이다.

 

마을 사람 인터뷰

"여기는 정원이었고 바로 저기가 사찰이었습니다."

 

 

 

 

명은 관우를 무병과 재화를 약속해 주는 최고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명의 관제묘 신앙은 조선에도 널리 전해졌다. 이곳에서 청나라로 들어가는 조선의 사신들은 그들의 안전과 명나라를 기리는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박지원 일행도 제사를 올렸다. 명이 망하고 130여년이 흘렀지만 조선은 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청석령 길을 안내해준 이 마을 노인은 이 골짜기의 돌 색깔이 푸른빛이라 청석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청석령을 박지원과 조선 사신들은 조선의 국경으로 여겼다. 압록강 넘어 청석령까지는 조선의 영역이라는게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5)

 

조법종 교수

"중국과 조선의 경계를 삼는다면 여기가 제일 좋겠다. 고구려도 여길 경계로 했다는데 서로 논의 하면서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 국토 방위라던가 옛 영토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많이 나눴던 것 같습니다."

 

 

 

 

 

 

청나라 사신길에서 얻은 영토와 국경에 대한 관심은 조선의 지리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사신길을 다녀온 뒤 일부 학자들은 북방 지리와 지형, 교통로를 자세히 그린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도를 통해 국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외적의 방어를 위해서는 지리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신병주 교수

"예전처럼 허무하게 침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특히 국방 군사적으로는 청에 대해서 세심하게 분석을 해야 더 이상의 침략이라든가 이런 것은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바로 이러한 서북피아양계말리지도와 같은 지도 제작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석령 고개 마을인 계명촌에는 지금도 고구려의 생활 방식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을에는 특이한 시설이 눈에 띈다. 이 마을 집집마다 갖고 있는 야외창고, 부경이다. 고구려는 집 옆에 원두막처럼 생긴 부경을 지어 창고로 사용했다.6) 조선 사신들이 청석령을 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한 데에는 이곳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취재팀은 마을 뒷산에 고구려 무덤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무덤 입구로 보이는 구멍이 보였다. 안쪽 공간은 넓게 뚫려 있었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 적석묘가 분명해 보였다. 적석묘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인 것이다. 마을 노인의 안내로 적석묘 두기를 확인했다. 근방에 더 많은 무덤들이 방치돼 있다고 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이들 무덤은 옛날부터 고구려 무덤이라고 했다는 게 노인의 증언이다.

 

마을 사람 인터뷰

"예전에 이곳에 무덤이 많았습니까?"

"당시 제가 봤을 때는 15개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무덤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고려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산하와 닮아있는 사신길의 모습들. 연행길은 우리의 고토와 역사를 다시 만나게 되는 통로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닫혀 있던 세상에서 눈 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깨우침의 길인 것이다.

 

가장 힘들었다는 회령령과 청석령 고개를 넘어 또다시 험한 석문령 고개를 넘으면 한점 가로막힘이 없는 요동의 넓디넓은 벌판이 펼쳐집니다. 박지원은 험한 고개를 넘어 드넓은 요동 벌판을 만났을 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열하일기 중 호곡장 기록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히고 걸려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지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 하늘 끝과 땅 변두리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비구름만이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한바탕 울만한 곳! 역시 당대 최고의 문장가답게 그 표현이 정말 멋진 것 같습니다. 이쪽을 보시죠. 위성사진으로 보면 요동 벌판과 산봉우리들이 만나는 접점이 있습니다. 이 접점에 고구려 산성이 쭉 일렬로 줄지어 있습니다. 요동 벌판의 끝  지역이었던 이곳에는 중원의 세력들이 넘어서지 못하게 고구려는 1차 방어선으로 이렇게 산성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수당군을 맞아 고구려가 승리를 이끈 바로 그 지역인데요, 역사적으로 이곳은 북방세력이 중원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였습니다. 박지원이 이곳에 갔을 때, 이 요충지는 청나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중원의 대세는 명에서 청으로 기울게 됩니다.

 

3. 요동의 요새(요동벌과 요양)

 

 

 

 

 

 

 

 

 

험한 고개를 넘자, 산 지형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끝없는 요동 벌판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산봉우리가 끝나고 요동 벌판이 시작되는 바로 그 접점에 고구려 백암성 자리하고 있다. 백암성은 태자하를 자연해자로 삼아 200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다. 최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는 고구려 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릉으로 연결되는 쪽엔 능선을 따라 잘 다듬은 돌로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성벽 아랫부분은 계단처럼 안으로 들여쌓았다. 이것은 성벽이 큰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를 이룬다. 요동 벌판에서 진격해 오는 적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새 중에 요새다.

 

조법종 교수

"백암성은 태자하와 요동벌이 만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에 여기를 방어하면 평양을 더 안전하게 방어하는 2차 방어선의 축이 되는 것인데 그런 과정 속에서 당나라가 가장 힘을 들여서 공격을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전개됩니다."

 

요동 벌판을 향한 산악 지역에는 백암성과 같은 요새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들 성들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선이면서 동시에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교두보가 된다. 고구려의 요동 방어 제일 중심성은 요동성이다. 수당 전쟁 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가 요동성을 차지하기 위한 공방이었다. 요동성은 오늘날의 요양시다. 중국왕조가 바뀔 때마다 요양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요양을 차지하고 백탑을 지었다. 요양이 요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높이 71m의 이 거대한 탑을 지은 것이다. 박지원은 요양을 천하의 판세를 장악할 수요지로 봤다.7)

 

 

 

 

 

 

요양은 천하의 호전장이었던 요동의 심장부다. 의주, 길림, 대련, 조양, 중국 대륙의 동서남북 요지가 요양으로 통한다. 요양은 사통팔달의 요충지인 것이다. 그 중심이었던 요동성은 어떤 모습일까? 숱한 이민족을 방어했던 고구려의 견고한 성이었던 요동성은 고구려가 그 자리를 내어준 이후, 요, 금, 원, 명으로 주인이 바뀐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명나라 당시 요동성의 상세도다. 직사각형 성벽을 따라 태자하가 남북으로 흐른다, 동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렇다면 태자하의 물길을 근거로 요양성을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요양성도 흔적이 사라졌다. 1950년대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정에서 붕괴됐는데 성벽 돌로 마을 집을 지었다고 한다. 위용을 자랑했을 요양성벽은 어느 집 담벼락에 초라하게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의 노인들만 명나라가 차지했던 요양성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마을 사람 인터뷰

"제가 어렸을 때 학교 다닐때 성광의 폭이 두 대의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였어요."

"넓이가 얼마나 되었나요? 차 두 대라면?"

"이 두 대의 차는 마차를 말합니다."

 

 

 

 

한때는 고구려가 요동성을 구축하고 이곳에서 수당과 치열한 전쟁을 벌었다. 요동성이 당나라로 넘어간 이후 누가 성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중원의 대세는 결정났다. 명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뒤 대공사를 벌여 거대하고 견고한 요양성을 구축했다. 성의 높이만 무려 30m. 이 철옹성을 중국 변방에서 일어난 후금이 차지한다. 중원의 대세가 다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만주일대에 흩어져 살던 만주족을 통합하고 1616년 후금을 세웠다. 그 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한다. 전면전에 돌입한 누르하치는 무순성을 단숨에 함락하고 이어 심양을 공략한 뒤 닷새 만에 중원으로 들어가는 교두보인 요양성을 차지한다.

 

투웅위에 연구원 심양 고궁박물관

"원래 요령의 동북 지역은 여진족과 만주족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 후 한족의 거주지로 진입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수도를 점령할 필요가 있었지요. 당시 요양은 정치 중심지였기 때문에 먼저 1621년의 4, 5월에 몇 십일에 걸쳐 현재의 요동 요남지역 70여개의 도시를 공격했습니다. 그 후 명나라의 역대 통치 중심이 요양으로 옮겨 오게 되었고 이곳으로 천도했습니다."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누르하치는 심양에서 요양으로 천도한다. 동경성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기존의 요양성을 두고 전시에 새로 성을 쌓은 것이다. 이것은 후금이 요동의 새로운 주인임을 밝히고, 중원으로 뻗어나가겠다는 대외적인 천명의 의미가 있다. 동경성은 명청 교체의 시작을 상징한다. 당시 동경성은 연행사들이 빠지지 않고 들렀던 장소이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조선 사신들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명나라가 망한지 한세기가 지났건만 조선의 사신들은 여전히 명의 멸망을 안타까워했다. 박지원도 동경성을 지나며 명의 멸망에 대한 쓸쓸한 감회8)를 남겼다. 후금이 요동의 심장부 요양을 차지하자 대세는 명에서 후금으로 기운다. 뒷날 후금은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중원의 새로운 패권자로 나섰다.

 

요양성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면 천지가 한눈에 들여다보입니다. 이 요동 벌판을 차지하려다 수양제가 망하고 이어 당태종까지 쓰디쓴 참패를 맛봐야 했던 곳. 천하의 옛 영웅들은 이 요동벌판에서 수없이 싸우며 역사를 바꿔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곳을 변방의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가 차지하고 대제국 청을 일으킵니다. 누르하치는 이곳을 교두보로 중원으로 진출하게 되는데요, 이 때만 해도 누르하치는 중원의 한족과는 달리, 조선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고 조선에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선조실록기록)을 보시죠.

 

老乙可赤來救之言 氷凍後 率三萬名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었던 선조 때입니다. 누르하치는 3만 명이나 되는 원병을 보내주겠다는 역사적인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조선은 오랑캐인 후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조선은 출병을 미루고 있던 명이 하루 빨리 구원병을 보내주기만을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금의 제안을 거절한 조선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과 손잡고 청의 배후를 칠 수 없도록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처참하게 짓밟은 것입니다. 만약 그 때 누르하치의 역사적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겠죠. 박지원이 들렸던 청나라 창업 도시 심양에는 지금도 곳곳에 조선의 애환들이 남아 있습니다.

 

4. 청의 발상지이자 조선의 애환지, 심양

 

 

 

 

 

 

 

중국 동북부 최대의 공업 도시 심양. 새로 들어서는 초고층 현대식 건물로 하루가 다르다. 현재 심양은 중국 10대 도시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심양은 청나라 창업 도시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심양고궁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황궁으로 사용한 곳이다. 1626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시 청 제국이 이룩한 세력은 현재 중국의 영토와 맞먹을 정도로 광대했다. 청태종은 많은 형제들을 제치고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정해질 만큼 카리스마가 넘쳤다. 대제국 청의 기틀은 홍타이지 때 다져졌다.

 

조법종 교수

청나라가 여진족에서 시작해 어찌 보면 수적으로 열세였다. 30만의 여진족이 1억 2천만의 한족을 복속 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당시 팔기제를 기반으로 하고 한족의 효율적인 제도나 능률을 활동, 포용책을 통해 한족을 통제하는 그런 효과적인 정책을 취했다.”

 

팔기군을 바탕으로 중원을 점령한 청태종은 조선이 숭명반청을 고집하자 12만 대군을 이끌고 와 조선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병자호란의 뼈아픈 고통을 겪었던 조선인들에게 청나라의 수도 심양은 무섭고도 끔찍한 곳이었다. 박지원 때에도 심양은 조선인들이 가장 오기 싫어했던 공간이었다.

 

한명기 교수

아마 당시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인들에게 심양이라고 하는 곳은 소현세자나 봉림대군 그리고 일반 신료들의 아들들이 끌려 가 있는 볼모들의 도시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끌려가 있는 피로인들의 도시라고 해서 일종의 심양이라고 하는 곳은 결코 가고 싶지 않고 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당히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도시였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심양 곳곳에 남아 있다. 세자관은 바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와 억류당했던 곳을 말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심양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인질들이 억류돼 있었다. 최근 현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억류당했던 세자관은 고궁 밖, 대남문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치는 1907년에 제작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자관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취재진은 처음으로 세자관 자리를 찾았다. 낡은 아파트 사이의 조그만 공터. 400년 전 조선의 왕자였던 소현세자가 갇혀 지낸 곳이다.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조선에서 온 사신들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홍중다 관장 심양아동시립도서관

청나라 정부는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 우선 황궁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황궁에서 너무 먼 곳에도 둘 수 없었습니다. 너무 멀어도 안 되었습니다. 당시 이 일대의 중간은 네모 모양이었습니다. 분명히 이 네모 안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생활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간섭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8년이란 긴 시간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 억류돼 있었다. 그동안 청나라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생긴 북만주의 힘의 공백을 틈타 하나로 뭉친 만주족은 파죽지세로 중원을 향해 나갔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던 시기, 청은 이미 만리장성까지 진출해 있었다. 중원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숭명반청 정책을 지속하는 조선의 백성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곳 남탑거리엔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형성됐다. 당시 만주족은 조선인 포로들을 팔아 전쟁자금을 마련했다. 남탑거리 주변에서는 팔려나가는 조선인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됐다.9) 조선 사대부들은 심양으로 끌려와 처형을 당하면서까지 숭명반청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투웅위에 연구원 심양 고궁박물관

이곳은 대서문 밖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쪽과 저쪽일 것입니다. 이곳은 당시 채소를 파는 곳이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지요. 이런 곳에서 참수는 죄인의 죄목을 알린 후 처형을 함으로써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그 참혹함을 지켜 보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신들이 처형된 곳은 이 부근이었을 겁니다.”

 

 

 

 

 

조선인의 애환이 깃든 처형장은 심양 최대 번화가인 가전제품 상가로 변모해 있다. 볼모생활이 중반에 이를 무렵, 소현세자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심양을 가로 지르는 혼하 강 주변. 서울 강남과 같은 아파트 개발 붐이 일고 있는 곳이다. 아파트 입주 행사가 한창이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 혼하강 주변의 공터.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우선 청나라가 불하해준 땅에 농사를 지어 생활비를 조달하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자금을 만드는 일을 추진했다. 소현세자는 벌어 들인 자금으로 청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아 나간다.

 

 

 

 

 

청의 문물을 받아 들이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서양의 놀라운 과학기술은 소현세자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소현세자는 망원경과 자명종 같은 서양의 선진물품을 조선에 가져가기 위해 모은다.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을 살찌우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데 유용하다는 판단이었다. 세자의 태도는 반청 입장을 고수하던 조선 국정에 대한 배신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신병주 교수

소현세자는 정말 전쟁이라는 극악한 상황에서 청나라로 가게 됐지만 그것이 하나의 또 계기가 되어서 청의 선진문물을 직접적인 최전선에서 볼 수 있었던 왕 후계자였죠. 어떻게 보면 조선의 왕이 될 인물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인물이 왕이 되었다면 가정이지만 조선의 어떤 북학논의는 좀 더 활기를 띠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소현세자의 생각은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북학파들에게로 이어진다. 청의 선진문물은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게 북학파의 주장이다. 박지원은 그 누구보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10) 조선의 척화파들이 국제적인 정세도 파악 못하고 명분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박지원은 청의 발상지 심양에서 잠도 자지 않고 청나라 사람들을 만났다.

 

이승수 박사

조선인 지식인 조선 사회가 명나라 지식을 왕성하게 받아 들이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중화주의를 내면화했고 내면화된 중화주의가 여타의 문화, 여타의 민족에 대한 편견을 낳았고 그 편견이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연암의 말은 조금도 더 근원을 따지면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리 내재된 편견을 없애고 배우자 그런 걸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박지원은 청나라 사신길을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하는 일생일대의 호기로 여겼다. 요하를 건너 황제가 있는 열하.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박지원이 청나라 사신길을 갔을 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명이 망한지 130여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명과의 의리를 내세우며 청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배척하는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교적인 폐쇄주의로 일관해온 조선이 그나마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청나라 사신길이었습니다.

 

조선 사신들은 4천리 멀고 먼 길을 가며 청의 풍물과 풍속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청이 오랑캐라는 생각을 버리고 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움직임도 청나라 사신길을 통해 들어옵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엔 박지원 같은 실학파들이 있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대장정길. 그것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고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며 조선의 대안을 찾아가는 방향타가 되어 주는 길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박지원은 열하에서 청나라 황제를 만납니다. 열하에는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글 내용의 저작권은 KBS HD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주

1) 집이 벽을 의지해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며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 열하일기

 

2) 여러 곳의 노숙처를 둘러보니 역관들은 무리지어 한 장막씩 차지하고 역졸과 하인들은 무더기 냇물을 등지고 나무를 얽어매어 자리를 잡았다. 밥 짓는 연기는 서로 잇닿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말 울음 소리가 아주 버젓해 한 마을을 방불케 했다. - 열하일기

 

3) 봉황산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다... 안시성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 3백리 또다시 동으로 2백리 가면 봉황성이 있다. - 열하일기

 

4) 나덕헌과 이곽이 대청황제라 칭한 국서를 받고 몰래 버려두고서 돌아왔다(인조실록).

 

5) 예로부터 고구려의 옛 국경이라 일컬었다. 여기는 삼한을 위해 하늘이 만들어준 경계이면서 중국의 영역에도 별 상관이 없다. - 홍경모<청석령기>

 

6)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는데, 이를 부르는 이름은 부경이라 한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7) 천하의 안위는 늘 이 요양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진다면 천하에 싸움북이 요란히 울려 퍼졌다. - 열하일기

 

8) 아, 슬프다! 명이 말운을 당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으니 가히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 뜨렸다고 - 열하일기

 

9) 청이 높은 값을 요구하는 폐단이 생겼다. 자기 혈육을 찾아오려고 수백냥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었다(인조실록).

 

10) 우리는 종이를 앞에 두고 글씨를 써가며 필담을 나눴다. 이들은 비록 학문이 높지 않았지만 자기 일에 해박한 상인들이었다. 골동품을 고르는 법에서부터 수제 그릇을 만드는 법 등 청나라 문물과 풍속에 대해 밤새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