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작품 평가

2013. 6. 23. 05:12☎열린文學人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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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

 

평화를 위한 기도

 

우리들은 또 다시 몇 해 동안이나 항상 정다운 개인으로서의 세월, 사람다운 시대, 인간의 생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세계의 역사'를 체험하는 데에만 익숙해 왔다. 그리고 소위 위대한 시대가 지나간 뒤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이 세계역사에 대해서 커다란 전율과 구역질을 참을 수 없다.

 

우리들이 어린 초등학교 아동이나 소년이었을 때 '세계역사'라는 말은 얼마나 화려하고 믿음직스러운 의미로 들렸는가. 교과과정에 따른 교과서나 그림만을 보고 알고 있었던 이 훌륭한 세계역사를 진정으로 자기도 체험하고 함께 참여해 보려고, 얼마나 우리들 어린이는 항상 동경했던가! 아아, 그런 것을 동경하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다.

 

우리들은 비참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현실의 세계역사라는 것은 결코 학교 교과서나 삽화들의 화려한 그림이 아니라, 위대한 행동을 연결한 진주의 구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고뇌의 홍수이며 큰 바다다.

 

-헤르만 헷세

 

<수필 2>

 

 

비라? 비가 올려나? 비를 구경한 지도 정말 꽤 오래 전이다. 가만 있자 내가 여학생용 새 구두 한 켤레를 사고 난 후부터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구두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신고 다닐 수 있다고 기뻐하였지만, 너무도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구두가 나를 비웃듯이 그만 뒤축이 구겨지고 말았다.

 

내가 이곳 서울로 전학해 온 지도 6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만큼 이 곳 서울에 익숙해지고 배우고 느낀 점도 많았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라는 말이 있다. 현대를 사는 사람에겐 퍽 우습고 낡은 것같이 들리기 쉽겠지만 내겐 퍽 친근감이 든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그것도 청승맞은 겨울비였다. 친구와, 친지와 고향집과 정들었던 그 모든 것을 이별하고 난생 처음 와 보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심술궂은 세찬 겨울비는 전송하러 나온 친구들의 모습을 앗아가 똑똑히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얼마나 분개했는지 모른다. 질퍽해진 신과 빗방울에 튀어 습기찬 옷에 대조를 이루려는 듯 정신만은 너무도 선명했고, 그 슬픔은 너무도 또렷이 되씹을 수 있게 살아나곤 한다.

 

처음 맛보았던 이별의 슬픔이란 것, 유행가 가사처럼 마냥 흘려버릴 그런 속성의 것만은 아니었다. 슬픔이란 게 승천하여 하늘에 수놓은 한 작품이었을 게다.

 

-최은여(성심여고 2)

 

 

<작품 1>은 헤르만 헷세이고, <작품 2>는 여고생의 작품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작품 1>이 관념적인 수필이라면, <작품 2>는 소녀적인 감상이 사건적 수필이다. 이별의 안타까움이 인상적으로 나타난 심리적 작품이다.

 

하나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위의 두 작품은 각각 필자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관념적 또는 사건적인 방법으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표현해 주었다.

 

<작품 1>은 '세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추상적으로 전개한 것인데, '세계의 역사!' 하면 어린시절에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성장해 버린 지금은 고뇌의 원인적 바다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이 달라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린시절과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인식의 차이다. '더 확실히 알수록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고통스러운 세계의 역사다'라고, 관념적인 것을 차분하게 전개해 나갔다.

 

<작품 2>는 비로 인해 고향을 연상하게 되었고, 고향을 생각하다 보니까 친구들과의 이별이 안타까와 그 그리움을 사건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비오는 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고 친구들과의 이별하는 장면이 필름을 보듯이 행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심리적인 변화도 잘 묘사되어 있다.

 

<작품 1>은 서술적으로 관념화된 글이고, <작품 2>는 묘사적으로 사건화된 작문이다. 하나는 헤르만 헷세라는 세계적인 문학가가 쓴 글이고, 하나는 여고 2년생의 수필이지만, 문장에서 크게 차이나는 것이 없다. 단지, 내용적인 사상에서 깊이가 다르게 느낄 뿐이지 우리에게 전달되는 감동은 비슷하게 부딪친다.

 

왜 그런 것일까?

 

바로 이 점이 수필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수필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 또 특별한 문장의 숙달 없이도 쉽게 써지는 것이다. 단지, '솔직하게'만 쓰면 그대로 감동이 되는 문학 형태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글에서 뿐이 아니고 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글과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솔직한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고 반갑다. 글에서도 솔직한 글을 만나면 감동이 된다. '글은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명언이 잘 대변해 준다.

 

사건적으로 쓰면, 자신이 체험했던 하나의 사건을 통해, 어렵지 않게 주제를 추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적이란 것은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것이 성공하기에는 많은 숙달을 거친 뒤에라야 심미적, 철학적인 문제에까지 포함시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 다음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기로 하자.-

 

<수필 3>

 

그림자

 

골목길을 들어설 때 집집에서 들려오는 행복한 웃음 꽃 그림자, 아기를 잃은 엄마의 얼굴에 나타나는 애달픈 그림자, 범죄자의 뒤를 쫓는 후회의 그림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주택복권을 산 어떤 실업자 아저씨의 꿈 속에 나타난 어렴풋한 돼지의 그림자,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따오기의 그림자 등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림자 또한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한 그림자에는 생명이 없다. 그저 밖으로 본 물질을 반사해 비쳐줄 뿐 자기를 밟아도 싫어할 줄 모르고, 자기를 길게, 작게 늘렸다, 오무렸다 해도 아픔을 느낄 줄 모르고 한치의 반항이 없고 감정이 없는 물체이다.

 

옛 선조들이 길게 늘여뜨린 그 그림자를 우리가 밟아가고 있다. 그 그림자를 길게 넓게 좀더 좋게 꾸며가며 생명이 없던 그림자에게 생기를 넣고 희망을 불어넣고 기쁨의 노래를 실으며 우리가 밟아가고 있다. 기와집 처마 밑의 다정스런 그림자가 높고 빽빽한 빌딩의 숲 그림자로 변해가고 있다. 넓고 무성한 고목의 그림자 밑에서 더위를 피했던 우리가 지금은 밑둥어리만 남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부채질하며 더위를 쫓고 있다. 천연의 시원함은 땔감으로 없애 버리고 애꿎은 부채만을 괴롭히고 있다.

 

나와 같이 삶을 꾸며나갈 나의 그림자. 나는 이 그림자에 생명을 주고 싶다. 그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사명처럼 강렬히 생각된다. 한낱 그림자에만 그치지 않은 그 무언가 독자적인 기능을 주고 싶다. 나의 행동을 그대로 비쳐줄 나의 그림자. 이 그림자를 허공에서 헤매게 하고 싶지 않다. 안정되고 즐거운 곳에 정착시키고 싶다. 땅 속 깊이 튼튼하게, 어디에 내 놔도 부끄럽지 않은 나의 그림자를 만들고 싶다.

 

-조성숙(상명사대부고 2)

 

<수필 4>

 

그림자

 

스님은 말년에 육환장을 노상 짚고 다녔었다. 회의 장소고, 차안이고, 가리지 않고 몸에 그림자처럼 지녔다. 승가에서 육환장은 걸식하는 비구라면 누구나 짚고 다니도록 되어 있다. 부처님 때 어떤 비구가 밥을 빌러 갔는데 임신한 여인이 불쑥 나타나 그 비구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유산을 했다. 그때부터 지팡이에 쇠고리를 달아 그 울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게 했던 것이다. 여섯 개의 고리는 수행 덕목인 6바라밀을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이 육환장의 용도를 다양하게 썼다. 길을 가다 발 끝에 채일 돌멩이나, 유리병 조각, 혹은 휴지 나부랑이가 있으면 반드시 육환장으로 한쪽에 치워놓는 것이었다. 비가 와서 빗물이 고인 마당에도 이 육환장 끝으로 물길을 터 빗물을 빠지게 했다. 속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권위를 위해 휴대하는 걸로 오해했을지 모르지만 스님은 그러한 용도로 썼던 것이다.

 

이제 육환장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회의가 다 끝날 무렵 "잠깐 일분간만 말하겠소"하고 일어날 사람도 없다. 법문 도중에 시간이 지났다고 쪽지를 띄울 일도 이제는 없어졌다. 사람은 가고 기억의 그림자만 남는 것일까.

 

-법정(송광사 스님)

 

 

위의 <작품 3>과 <작품 4>는 똑같은 '그림자'란 제목의 수필이다. 앞의 것은 관념적으로, 뒤의 것은 사건적으로 전개한 좋은 보기가 되고 있다.

 

<작품 3>은 여고생의 작품으로 그 주제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그림자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담은 것이다. 관념적인 글로서 자칫하면 하나의 통일성을 상실하기 쉬운데, 이 글에선 효과적인 열거로 재미와 더불어 주변에서 좋은 소재로 골라내는 재주가 엿보인다. 마지막 부분에선 자신의 강렬한 의지를 주제로 담고 있다. 이처럼 관념적인 글이 안고 있는 약점을 필자는 구심점을 유지하면서 잘 보완하고 있으며, 단순한 개념의 나열이 아닌 자기 생각의 형상화로 성공하고 있다.

 

<작품 4>는 법정 스님의 작품으로서, 스님이 모시고 계시던 청담 스님에 대한 기억을 정연하게 얽어놓은 사건적인 수필이다. 평소 청담 스님의 독특한 습관을 사건적으로 실감을 자아내고 있다. 즉 스님께선 남들이 권위로 알고 있는 육환장(지팡이)을 지니시는 까닭이 보다 다른 뜻에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스님의 평소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거창한 주제보다는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서 소박한 주제에의 도달은 담백한 감동을 준다.

 

사건적인 글에서의 장점은 이와 같이 시간의 선후관계, 상황간의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저절로 분명해 진다. 그것은 마치 그 사건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독자가 바로 법정 스님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렇게 '그림자'라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제목이 관념적인 것과 사건적인 것의 서술 방법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를 잘 비교해준 작품들이다.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없는 그림자를 <작품 3>에선 실제 살아있고 또한 거기에다 생명까지 불어넣고 싶다는 여고생의 생각이 설득력있게 전개되었다. <작품 4>에선 육환장이라는 스님들의 지팡이를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다룬 것이다. 육환장을 들고, 돌멩이나 유리 병조각, 휴지 나부랑이를 치우는 모습, 물꼬를 트는 행동을 우리는 연상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체험했던 것을 그대로 제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위의 네 가지 예문에서 보았듯이 특별한 비유법이나, 요란한 문장이 전혀 없다. 그냥 친한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차근차근 쓰면 한 편의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 단지, 친구에게 말하는 것과 글로 기록하는 것과의 차이는 순서와 구성이 다를 뿐, 전달하는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백일장에서 입상한 작품을 갖고 좀더 과학적인 분석을 해보자

 

<수필 5>

 

 

인간은 모두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화려한 인생의 앞날을 그려보는 행복한 꿈도 있을 것이요, 사랑하는 임을 멀리 보내고 독수공방 잠자리의 꿈속에서나 그리는 안타까운 꿈도 있을 것이요, 집 없는 사람은 주택복권이나 맞아 전세방이라도 얻는 꿈을 꾸며 살아갈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꿈을 소망에 담아서 미래의 자기를 설계한다.

 

나에게 있어서 꿈은 평범하다. 어릴 적, 논둑길을 따라서 더 높게 뛰려는 개구리를 잡으러 하루종일 논 속에서 놀다가 호되게 꾸중 듣던 일, 냉이 쑥을 캐러 가는 누나를 따라갔다가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깨어보니 아무도 없어서, 울면서 동네어귀를 들어서던 일, 산 속 높은 나무에 회오리밤을 따다가 손에 찔려 울던 일 등은 아직도 기억 속에 아름답게 존재한다. 그러다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면서 농촌은 지금까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요즈음같이 하염없이 흐르는 도심의 사회 속에서 나는 장차 내 꿈을 설계한다.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그것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사오면서 더욱더 산자수명한 농촌을 그리워하고 애타게 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넓은 마당에 온갖 만물을 다 진열해 놓고 앞으로는 물이, 뒤에는 높다란 산이 자리잡고 있는 양옥이 아닌 한옥 속에서 한쪽은 작품생활을 할 수 있도록 원고며, 다른 여러 가지 문학지를 차곡 차곡 싸놓을 수 있는 그런 서재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제법 주경야독하는 선비가 되고 정녕 무영무욕의 신이 되어 일하고, 책 읽고, 생각하고, 글쓰고 하는 나를 그려본다. 이렇듯 설계를 하고 나면 마냥 즐겁다. 언젠가는 될 듯한 나의 설계를…….

 

아니 꼭 이루고 말 것이다. 단순한 꿈의 설계가 아닌 집념 속의 설계가 될 수 있도록. 추녀끝 물방울이 주춧돌에 홈을 파 놓듯이 나의 집념도 계속적인 노력으로 완성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심이 나의 생활터이다. 그래서 도시 생활 속에서 아주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나의 속기 탓이리라.

 

도심이 암만 싫어도 피해서 갈 수 있는 농촌이 남아 있으니 희망이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꿈을 그냥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성곽 속에서 나는 엄연히 성주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꿈의 설계를 저 높은 창공에 다시 그려본다. 그것은 정녕 아름다운 농촌 속의 나의 농장이 되어가고 있는 설계다.

 

석양을 바라보며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를 고목나무 옆 벤취에 앉아서 청징, 청허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이 정도면 내 설계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고, 도심 속의 농촌을 볼 수 있는데, 과연 누가 나의 설계를 꿈을 허망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꿈은 꿈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아주 욕심없이 그 꿈을 키워 나간다면 세상에서 아름답고 자기에 알맞은 희망이 될 것이다. 그러한 꿈은 처음과 마지막에 찾는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정종택(경복고 3, 동국대 백일장 우수작)

 

<수필 6>

 

어떤 인연

 

상큼한 산 특유의 냄새가 가쁜 숨을 달래준다. 안개 뒤로 몸을 빼돌린 연초록의 산자락이 봄빛에 반짝이고 아직 채 몸을 풀지 못한 봄의 표정들이 부끄러이 햇살을 쪼이고 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나볏이 퍼지는 이야기를 주으며 지난 봄, 꽃잎처럼 가버린 그들이 행여 올봄엔 민들레로나 피어날까 생각해 본다. 젖어오는 마음을 위로하며 봄볕에 익어가는 산길을 걸어 낯익은 암자에 닿았다. 말끔히 쓸리운 빗자국 자리마다 산향기가 물씬 묻어있는 암자의 댓돌 위에는 비구니들의 하얀 고무신이 푸른 물을 머금은 채 연한 졸음에 잠겨 있었다.

 

숨소리조차 미안한 산사의 봄날 오후는 산 아래 마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상이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는 산새의 몸짓이 한결 봄을 가까이에서 느끼게 했다. 창밖의 봄은 내 봄이 아니라고 문 열기를 두려워하던 아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봄의 정취를 받아들여야 하리라. 자연의 조화로운 음성에 마음이 저렸던지 빙긋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애띤 비구니의 모습이 마냥 안타깝기만 했다.

 

무슨 세상의 인연이 그리도 아팠기에 곱게 기른 머리를 자르고 잿빛 장삼 속에서 어린 날의 큰 꿈을 사위고 있는 것일까. 빗겨난 생각을 되돌리기라도 하듯 정오를 알리는 법고 소리가 퍼져왔다. 지워버리기 아까운 세상사의 이야기를 저 법고 소리에 담아 멀리 떠나보내며 그녀들은 많이도 숨죽여 울었겠지. 마냥 감격하기 좋아하던 시절,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왔었던 애틋함이 그녀에겐 그리도 아팠던 걸까.

 

그래서 안타깝게 부여잡는 길들인 풍경들을 뒤로 하고 백팔염주 속에서 감정을 도금하며 반 십년을 살아온 것일까. 그러는 사이 그녀의 상채기에도 뽀얀 새살이 돋아나고 얼굴 가득히 석가의 고운 미소도 흉내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도량석을 들던 영재 스님의 장삼자락이 유난히 찰랑이던 지난 가을의 일을 더듬고 있는데 나이가 살풋한 여승 한 분이 염주알을 굴리며 몸 가득 봄을 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야속하게도 내게 영재 스님의 부재를 알려주고는 조용히 법당 안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만큼의 인연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신 걸까. 영재 스님은 겨울이 풀리던 어느 날 잿빛 짙은 하늘을 이고 남쪽으로 고행을 떠나셨단다.

 

내가 영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의 늦은 봄이었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었다 지고 나발같은 오동꽃이 땅위를 뒹굴고 아카시아가 작은 망울 터뜨릴 무렵, 평소에도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나는 그날도 혼자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갔다. 법문을 시작하려면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벌써 법당 안은 말씀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 한 귀퉁이에 자그마니 서 있는데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애띤 모습의 여승이 내게 같이 앉기를 권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 자신도 성직자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존경심 같은 감정을 가져왔으므로 그런 여승의 호의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비록 좁고 불편한 자리였지만 그날의 법문은 일상의 불안들을 씻어 주었다.

 

먹빛 승복에 가려진 그녀와 청바지 차림인 나와의 어설픈 만남이었지만 거기에 의미를 주고 싶었던 것은 오직 나만의 성급한 충동이었을까. 그 사실이 인연이 되어 도봉산의 작은 암자에 있는 여승을 나는 자주 찾아다녔고 그녀의 고운 모습 위에서 나는 데미안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그녀와 나는 다른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의 형상을 쫓고 있었지만 인간이고자 애쓰고 고뇌하는 노력은 서로를 이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는 법구경의 구절을 즐겨 외우며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사의 정情에 아파하던 그녀의 고뇌는 나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왔다. 그녀를 만나고 내려오는 도봉산의 하늘은 가득 채워지길 원하는 하얀 백지가 되어 다가왔고, 골바람이 비집고 가는 여린 햇살에 다소곳 익어가는 나의 마음은 빈 그릇이 되어 야속하던 어떤 친구의 마음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도봉산의 풀빛 하늘을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녀, 그렇기에 떠나야 한다고 산너머에 꽂은 시선이 조용히 말하던 사슴 닮은 그녀의 모습이 오늘은 더욱 보고파진다.

 

봄이 오면 그녀에게도 기다려지는 일이 있었으리라. 말없이 떠나와야 했던 그리운 사람들을 이번 봄엔 넉넉한 여승의 눈길로 쓰다듬으며 재회하지 않을까. 자꾸 짙어가는 초록이 남아있는 봄의 정취를 다 몰고 가기 전에 그녀의 한이 풀어졌으면 좋겠다.

 

허허한 마음을 보듬고 내려오는 나는 제발 우리들 인연에 부처님의 보살핌이 깃들어 서로가 또 하나의 성숙의 표지를 달고 마주치게 되기를 합장했다.

 

-이미자(성신여대 지리교육과 3)

 

 

<작품 5>는 '꿈'이라는 제목의 관념적인 글이다. 우리가 백일장에 나가서 꿈이라는 지정제목이 나오고 두 시간 내에 써서 제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몹시 당황스럽다. 꿈! 하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 데도 막상 쓰려고 보면 쓸 것이 없는 시꺼벙한 것들이다.

 

이것을 위의 학생은 잘 정리해 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꿈과 연관된 사건도 많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잘 안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찮게 생각하는 '시꺼벙한' 것을 정리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생과 같이 차분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또 쉽게 써진다. 이 능력이 몹시 어려울 것 같지만 당장 공책에 시작해 보면 아! 글이란 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로 이 생각 차이에서 종잇장 한 장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생각으로만 쓰고, 생각으로만 포기하지 말고 실제로 문학공책 같은 것에 시작해 볼 일이다. 위의 학생 글도 막상 읽어보면 역시 시꺼벙한 얘기다.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얘기, 또 대개는 비슷하게 경험했던 얘기들이다. 그런데도 이 학생은 어떻게 치열한 백일장에 입상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은 바로 그 흔한 시꺼벙한 얘기를 '실제로' 써 내었다는 '능력' 때문이다. 위 학생은 '꿈'에 관한 것을 5단계로 나누었다. 각 단락의 요지를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모두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둘째, 나의 꿈은 평범하다는 것.  

셋째, 도심의 사회 속에서 나만의 꿈을 설계해 보고 싶다는 것.  

넷째, 도심에서 생각하는 농촌은 아름답다. 

다섯째, 꿈은 꿈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자신의 안식처이다.

 

이것을 다시 3단계로 요약해 보자. 그러면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자기가 쓸 때도 이런 식으로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①꿈에 대한 일반적 의미 ②자기의 꿈에 대한 설계 ③꿈은 자신의 안식처가 된다.

 

말하자면 주제는 '꿈은 처음과 마지막에 찾는 자신의 안식처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위와 같은 긴 글을 전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제가 잘 설득되어 있는 문장력이지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린다면 '넷째' 단락 부분의 삽입이 전체 줄거리에서 다소 어긋난 군더더기였고, 한자숙어는 다소 어색함을 주었다.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얘기로 끝나버린 안타까움도 있다.

 

이러한 몇 가지만 보완한다면 아주 훌륭한 글이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둘째' 단락에서 한꺼번에 나열한, 어린 시절 농촌에서의 추억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내어서 자세하게 소개했더라면 훨씬 깊이 있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준다.

 

농촌 논둑길에서 하루종일 개구리를 잡으러 다닌 사건이나, 냉이를 캐러갔다가 산 속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사건들을 앞의 <작품 3>나 <작품 4>에서나와 같이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작품 6>도 '어떤 인연'이라는 제목의 관념적이면서 다소 사건적인 것을 적절하게 조합한 단아한 작품이다. 이 작품도 분석해 보면, 우선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봄날 산사의 풍경묘사  

둘째, 여승과의 만남  

셋째, 여승에 대한 동경과 동정심

 

비단 수필뿐 아니라 모든 문학 장르는 작가의 성격에 따라 관념적인 것과 사건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관념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색이 그리고 자연과 인생에 깊이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하겠다. 사건적인 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요지가 주제에 어떻게 형상화되느냐에 달려 있고, 또 필자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개별성도 하나의 '글'로서 형상화될 때에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감성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의 작품 분석에서 보면, 결국 글쓰기에서의 요령이 있다면 사건적인 것을 중심으로 관념적인 것을 조화 있게 승화시킨 글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수필쓰기 비결이 될지도 모른다. 아주 좋은 전범이 바로 위의 <어떤 인연>이다. 여대생이 법문 들으러 갔다가 우연히 어느 여승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사건만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간간히 관념적인 것을 양념으로 섞어 넣음으로써 충분히 발효된 글이 된 것이다. 호수같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수필문학이 갖는 장점은 바로 이러한 특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