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4. 14:23ㆍ☎열린文學人사랑방☎
고산 윤선도와 다산 정약용
학교 교육은 한 나라를 유지해 가는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청소년을 가르치는 중·고등학교의 교육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4·19, 5·18, 6·10항쟁 등 민주주의를 지켜온 큰 역사적 사건들은 정말로 바른 역사의식이 심어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진면목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육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한 우리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잘못 가르치는 일이 언제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다산과 동시대 인물로 다산에 버금가는 박학한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다산·추사를 병칭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으로 모두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추사에게 학자적 이미지는 거의 없고 모두가 ‘추사체’를 개발한 서예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학교 교육의 잘못이 아니고는 달리 변명할 길이 없는 일입니다.
고산 윤선도는 다산의 외가 6대조로 당대의 직신(直臣)이자, 대표적인 예학자(禮學者)로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는 전대미문의 가혹한 당쟁에서 노론의 우암 송시열과 맞서서 남인을 대표해서 싸운 탁월한 예학 이론가요 불의에는 참지 못해 언제나 항의하고 투쟁하느라 여러 차례 극지에 유배당해 10년 이상을 고생한 정의파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 한글 시조를 지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탁월한 노인 윤고산 선생 卓犖孤山老
인품이 속세를 훨씬 벗어난 분이셨네 風標逈出塵
화란 막으려 간신배 물리치고 擊奸消禍亂
인간질서 세우려고 입바른 상소 올렸네 抗疏正彝倫
한나라 조정은 장유(長孺)를 소외시켰고 漢室疎長孺
오문에 숨었던 자진(子眞)이었네 吳門隱子眞
강력히 주장한 묏자리 때문에 却因風水說
천 년 지나도록 충신이 되었다네 天載作忠臣
「윤남고에서 써서 부치다[簡寄尹南皐]」
다산이 외가 선조에게 바친 시입니다. 1616년 광해 8년, 성균관 유생이던 윤선도는 이이첨의 횡포에 분노해 무서운 상소를 올려 오랫동안 함경도 변두리에서 유배를 살아야 했고, 자의대비 복제(服制)로 기년설에 대항해 3년설을 주장하다 또 오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장유는 급암(汲黯)의 자인데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한 한(漢)의 충신으로, 고산도 그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매복(梅福)의 자는 자진인데 세상이 싫어서 은둔해서 살았고, 고산도 세상이 싫어서 보길도에서 숨어 살았다고 말한 내용입니다.
효종의 장례에 고산 윤선도가 자리 잡은 수원의 묏자리는 노론의 반대로 장사지내지 못했는데, 정조 때, 사도세자의 묏자리가 되어 고산 후손들이 큰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간(比干)은 심장을 갈라 죽고 比干剖心
백이(伯夷)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屈原)은 강에 빠져 죽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해질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미수 허목이 지은 윤선도 묘갈명[海翁尹參議碑]」
추사나 고산에 대해서 이제는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곧고 바른 학자 윤고산의 피가 다산의 몸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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