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란 무엇인가 / 신상성 교수

2013. 6. 23. 05:11☎열린文學人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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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필이란 무엇인가

 

강사/신상성 교수

 

1) 수필의 개념

 

우리의 국어생활에서 듣기와 말하기가 주로 음성언어라고 한다면, 읽기와 쓰기는 문자언어가 된다. 또한 듣기와 읽기가 이해 의 측면이라면, 말하기와 쓰기는 표현의 측면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해의 영역인 듣기와 읽기가 수동적인 태도라면, 표현의 영역인 말하기와 쓰기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언어활동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이 네 가지 영역을 두루 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떠들고 말하는데 그것을 글로 써 보라면 주춤거리게 된다. 말은 재미있게 하는데 글로 쓰려면 전혀 절벽이다. 그러나 말이나 글이나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글은 말보다 질서가 있고 논리가 있다는 것뿐이다. 글쓰기란 글로써 하는 '말하기'라 할 수 있다. 말에도 조리가 있어야 듣기 쉽듯, 쓰기도 순서만 지키면 아주 쉬운 것이다.

 

다만, 수필쓰기 전에 생각을 체계적으로 한번 정리해 보면 된다. 글쓰기에서의 사전정리, 그것을 작품구상이라고 한다. 시작-중간-끝 부분에 각기 무엇을 쓸 것인가, 설계도를 그리듯 간단 간단한 메모를 한 뒤에 집필을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줄기로 통일성 있게 얘기가 흘러내린다. 그러나, 사전준비를 하지 않고 시작하다 보면, 중간쯤 가서 쓸 것이 없어서 도중하차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물론, 세심한 관찰력, 넓은 통찰력, 날카로운 비판력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우선은 이웃집의 친한 친구와 얘기하듯이 평범하게 쓰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일상생활에서 극히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람은 어디서 불어 오는가? 해와 달은 왜 뜨는가?' 등 일반 사물과 사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이 저절로 생겨난다.

 

일반적인 글쓰기란 무엇인가. 우선 그 개념적 성격부터 살펴보자.

 

첫째, 글이란 마음속에 가진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글은 말에 비하여 공간적으로 멀리 전달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 오래 남을 수 있으며, 내용을 재음미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생각을 재정리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등의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글이 말보다 더욱 조리 있고 체계적일 수 있는 이유는 말은 즉시적인데 비해, 글은 통시적이다. 생각을 오랫동안 여과할 수가 있다. 말은 다만 의사전달을 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글은 글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초적인 글쓰기로서 '수필'은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글의 초보적 형태이다.

 

둘째,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글이 운문이 아닌 산문인 까닭은, 운문이 일정한 운율을 갖추어야 하는 조탁의 어려움이 있는 데 비해, 산문은 자유로운 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문의 기초는 수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필을 잘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함께 노력해 보자.

 

리드Herbert Reed는 그의 <영국 산문록>에서 수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심중에 잠재해 있는 관념이나, 기분-정서를 표현해 보는 것은 일종의 시도이다. 그것은 관념이나, 기분-정서 등과 상응하는 어떤 유형을 언어로써 창조하려고 하는 불형식(不形式-형식이 아니려고 하는)의 시도이다. 그것은 음악에 있어서 즉흥곡과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에 있어서 서정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산문분야에서 차지하는 것이다. 수필은 한마디로 특정인에게 보낼 필요가 없는 하나의 공개장이다." 리드의 견해는 수필의 성격,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인 글쓰기의 성격을 함축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몽테뉴Montaigue도 그의 <수상록> 서문에서 말하기를 "이 수상록의 내용은 나 자신을 그린 것이다."고 하여 그는 그의 글쓰기에서 가장 자유스런 방법으로 단편적이고 산만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도 독자가 그의 독백에 자꾸 끌려간다. 바로 독자들은 자기 아닌 남의 얘기를, 그것도 산만하고 독백적인 형식으로 쓰여진 글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수상록>은 자기실현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곧, 글쓰기의 가장 순수한 목적 즉, 자기의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에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몽테뉴의 이러한 독백이 바로 수필의 시작이 되었고, 성격이 되어버렸다.

 

위의 두 사람, 리드와 몽테뉴의 견해를 빌리면 작문은 형식과 내용에 제한이 없고, 무엇이든 소재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산문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에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친구에게 심정을 말하는 듯한 한편의 정성스런 글을 쓴다면 그것이 수필이 되는 것이다.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이것이 수필의 운명이고 성격이다.

 

김진섭은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소설, 시,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서 몇 가지로 분류하여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사조와 사회의식에 연결되어 발전·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문학형식인 까닭이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성쇠기복이 시대적 제약에 의거한다고 간주한다기 보다 오히려, 생활단면에 부딪치는 까닭에 비교적 관련이 적게 자라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는 수필이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요컨대 효과적인 글짓기를 위해서 우리는 아무런 구속 없이 온몸에 비치는 사실들을 여과하여 자기 나름의 느낌과 생각을 조리 있게 만들면 그것은 비로소 하나의 생명을 지닌, 자기만의 냄새를 가진 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생명이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면,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여 삶을 고뇌하고, 고독과 절망을 직시하는 데에서 귀중한 주제성을 솎아내야 한다. 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써야 한다.

 

습작기에는 때로, 원고지가 백지의 공포로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자기는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좌절감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보다 자기의 진정한 감정과 사상을 호소하기에 앞서 '언제나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인가'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 명예욕보다는 마음을 텅 비우고 여유를 가질 때, 우리의 감정은 봄 날 언덕 위의 들꽃같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우리의 가슴에 만발하게 된다.

 

다음에서 수필과 다른 문학형태와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이것은 수필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기초적인 문장형태인 '수필'에서 숙달된 후, 그 다음 단계인 시, 소설, 평론 등의 전문 문학형태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비교 분석이다._

 

2) 수필의 특성

 

하나. 수필은 마음의 예술이다.

 

마음이란 내 마음이 어떤 대상을 대했을 때, 마음에 전개되는 경지를 그대로 적어낸, 즉 내면으로 향하는 인간적인 흥미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에선 논리적인 것이나 비평적인 것, 학문적인 것과 교훈적인 것을 그 본질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순 문학적인 면에서 인간생활의 기록을 중시한다. 이 생활의 기록이란 단순한 신변적인 일상만을 뜻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새로운 발견이나 보다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자연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까지 포함시킨 인간생활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면생활의 기록'이란 면에서는 기행, 일기, 편지에서도 그러한 심경의 표출현상은 나타난다. 그러나, 수필은 하나의 예술 형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행, 일기, 편지 등은 그 작법에 있어서 자세가 안이하다. 심경의 표출이란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어떤 문학적인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수필에 그 작가의 심경이 인생과 관련된 것이면, 그 수필은 분명히 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인간에 있다면 수필같이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띤 문학형식은 서정시 외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맛은 결국 인간미에 있다.

 

둘.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문학은 고백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일 때 보다 진실해 진다. 그러므로 수필에서의 고백은 '자연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세속적인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초연하게 인생을 보고 생각하는 관조의 문학이다. 우선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는 끊임없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문학이다. 이 자세야말로 맑은 생명의 원천을 찾아 올라가는 심정이며, 수필이 인생과 자연에 동화되는 요소인 셈이다.

 

이러한 논리로 볼 때, 수필이란 인간본성에 가까이 하려는 행동이며, 그 본질에 접근했을 때, 아무런 허위와 가식이 없는 알몸뚱이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고백이 되는 것이다. 고백을 문학에 적용한 사람이 수필의 원조인 몽테뉴이며, 고백을 문학으로 보여 주고 그 고통을 체험시켜 준 사람이 루소이다. 위 두 사람은 각기 <법의 정심>과 <참회록>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세계 독자를 울리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루소, 톨스토이의 <참회록>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고백의 방법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고백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거기에 생명체의 근원이 약동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수필을 쓰기 전에 세계적인 명 수필집을 많이 읽고, 철학적인 이해와 더불어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고백적이고 뼈아픈 체험,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내면화되는 동안 걸러진 지혜와 진리의 이야기라면 더욱 좋다. 이렇게 쓰여진 수필은 인생 전반에 걸친 다각적인 지혜의 내용으로써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추어 주는 등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셋. 수필은 회의성과 담백성의 문학이다.

 

'회의주의'란 과학정신의 기초가 되는 탐구정신으로서 인류문화를 발전시켜 온 지적인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속박의 대상을 자유롭게 하는 과학정신이다. 이러한 성격은 고정적이고 반복적인 태도를 싫어한다. 회의적인 자세는 지성적일수록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회의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때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다. 회의가 입장을 바꾸어 가면서 다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양한 관찰력은 수필의 한 개성이 되어 왔다.

 

적극적인 탐구로 창조를 이룩하고, 다각적인 관찰로 특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수필은 문학과 철학의 접경에 위치한다. 그리고 담백하다는 이유 때문에 수필은 자칫 단순하다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내면에 흐르는 주제를 간과해선 안 된다.

 

수필은 시를 쓰는 데에도 필요한 문장숙달의 기초적 방법이다. 수필은 성격상 자유로운 형태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전개방법에 있어서 어떠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물론 수필도 그 나름대로의 형식이 있지만 시나 소설과 같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의 특성이기 때문에 수필에서 훈련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세부 전공에 따라 시나 소설 평론 또는 드라마나 시나리오 등 어떤 문학형태건 선택해 나갈 수 있다.

 

말하자면, 수필은 음악에서의 오선지나 미술에서의 데생과 같다. 음악에서 오선지 운용은 나중에 기악을 하든, 성악을 하든 기본적인 것이다. 음악가가 되려면 오선지를 모르고 음악가가 될 수 없듯이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데생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동양화든 서양화든 될 수가 없다. 문학가도 수필로서 기초적인 문장수련을 거치지 않고는 발전될 수가 없다.

 

그런 기준에서 수필은 매우 좋은 훈련방법이다. 예를 들어 스스로 제목을 정해서 한 편씩 써 나가는 것도 좋다. 어머니, 고향, 내친구 등은 그 제목만 보아도 쓰고 싶은 얘기가 많다. 그래서 백일장 등에선 이러한 제목들이 자주 나온다. 어머니 하면 어머니에 대한 갖가지 많은 추억들이 떠오르고, 고향하면 어린 시절 소꿉장난하던 고향 모습이 눈 속에 아른거린다. 내 친구도 국교-중교-고교 등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있는가. 그러한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생각나는 친구에 대해서 쓰면 되는 것이다.

 

쓸 때는 생각나는 대로 연습장에다 줄줄이 써내려 간다. 쉽게 써내려 가면 이래도 되는 건지, 이런 게 소위 글이라고 하는 건지 의문도 생기고 불안도 생긴다. 그런 것에 조금도 구애받지 말고 그냥 써내려 가면 된다.

 

일단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난 뒤에 며칠 후, 다시 읽어보면 군더더기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러면 또, 거침없이 가지치기를 해준다. 원래 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이탈되거나 한 것은 사정없이 삭제해 나간다.

 

제목이나 소재에 따라서 잘 써지는 것도 있지만 잘 진행이 안돼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수필집을 읽어본다던가 특히 철학적 에세이들을 훑어보면 다시금 영감이 떠오르고 정신적 윤활유가 되어 흘러내린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선배 수필가들의 고뇌들도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느끼는 고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고민의 내용이나 성격은 다르겠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습작기에 글이 막히는 경우는 대개 장면전환이나 주제의 명료한 표현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수필집을 보면, 아! 그들은 이런 경우, 장면전환이 어떻게 변화되고 주제적 표현이 어떻게 강조되었느냐가 쉽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도 똑같은 제목을 가지고 직접 써 보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의 글을 살펴 보아야만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글이란 음식과 같아서 실제로 먹어 봐야만 쓰다거나 달다거나 하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어떻게 맛이 있다 없다 하고 느낄 수가 있겠는가. 문학은 실제로 그리고 많이 써 보는 사람만이 먼저 소설가로 성공할 수가 있다.

 

수필의 분량은 대개 원고지 15쪽(2백자 기준) 안팎이 된다.

 

일반적인 글씨체로 쓴다면, 대학 공책으로 3-4쪽 정도의 분량이다. 습작기에는 원고지에 번거롭게 쓸 필요가 없다. 외부에 투고할 때만 원고지에 정서를 하고(요즘은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문학공책 같은 것을 준비해서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내용적인 문장 숙달이므로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쓰고 싶은 제목을 자유롭게 정해서 문학공책에 써 모은다.

 

그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은 원고지에 옮겨서 언론매체 등에서 모집하는 <수필 응모작> 등에 제출해 봄으로써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좋고, 또는 문학공책을 가지고 주변의 문학가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거나 가까운 학교의 문학가들에게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것도 좋다. 우리들 주변에는 관심만 가지면 문인들이 적잖게 있다.

 

전국 각 시·도에는 문인협회 또는 민족문학가협회의 지부도 있고, 각종 문화센터에 가보면 다양한 문학강좌들이 있다. 더욱 편리하고 활발한 곳은 인터넷 문학관련 사이트이나 각 PC 통신망의 '문학동우회'이다. 이런 곳에 참여하면 문학공부를 하는데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2. 수필의 성격과 차이

 

1) 시와 수필

 

형식의 제약이나 구속 없이 자유롭게 쓴 견문, 체험, 편지 같은 것을 통틀어 수필이라 한다. 따라서 그 내용도 일기적인 것, 기행체, 감상체, 사색체 등 그 범위가 대단히 넓고 다양하다. 곧 작가의 개성이 직접적이며, 내성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수필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정신과 체취가 생생하게 풍기게 된다. 서정문은 시적인데 비해서 서사문은 산문적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정리해 보자.

 

첫째, 자기의 감정을 서정화 시키는 동시에 객관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작가의 개인적 정서나 체험도 글로써 형상화될 때에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논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시는 하나의 주관적인 관념을 운문으로 감동을 주는 문학이라면, 수필은 객관화된 사실을 서술해야 되는 것이다.

 

둘째, 자기의 생각을 종합하는 것이기보다 분석해야 한다. 시는 여러 개념을 포괄하는 이미지를 선택하여 사상들을 종합하는 것이라면, 수필은 그러한 개념들을 이야기로 서술해야 하므로 분석적이고 해설적이다.

 

셋째, 자기의 사상을 상징하기보다 구체화시켜야 한다. 시는 응축된 상징어를 조탁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에 비해, 수필은 사념들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수필과 시의 성격을 비교해 보았다. 물론 시와 수필이 주관적인 문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시정신에 의해 쓰여지는 시와, 산문정신에 의해 쓰여지는 수필은 구체적으로 위와 같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형태의 산문시'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 정신의 서정화라는 맥락에서 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 수필과 소설

 

수필과 소설의 공통점은 산문성에 있다. 그러나 같은 산문문학이긴 하지만 소설이 객관적이라면 수필은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수필과 시의 공통점은 주관적인 형태의 문학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시가 운문인데 비해 수필은 산문정신에 의해 쓰여진다는 데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소설과 수필은 같은 산문 문학으로서, 소설이 객관적인 형태의 문학인데 비해, 수필은 주관적인 형태의 문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와 소설의 중간역할의 균형을 담당하는 것이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수필은 시적인 주관성과 소설적인 객관성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서 수필은 주관적인 산문이고 소설을 객관적인 산문이다.

 

즉 소설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이러한 허구는 바로 소설의 매력일 수가 있다. 허구라는 비누 거품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허구성의 유무가 바로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가르는 또 하나의 특징이 된다. 소설과 수필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소설에서 허구를 구축하게 되면 '복합성'의 글이 되고, 허구성이 없을 경우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허구화된 글은 고도의 축적된 기술을 요구하게 된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충분한 리얼리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둘째, 수필에서는 허구성보다는 사건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에 어쩌면 고백적인 문학이라는 데에 매력이 있다. 수필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추상적인 사상이거나 아무런 구속이 없이 자유롭게 소재화하되 솔직한 문학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셋째, 허구화했을 때의 아름다움은 '입체적이고 웅장한' 내용이지만, 허구화되지 않았을 때의 아름다움은 '평면적이고 관조적인' 철학성을 준다. 다만 그 허구성이 리얼리즘을 가져야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시와 소설 그리고 수필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요컨대 시나 소설에서 보여 주는 문학정신은 고도의 기술과 문학성을 준다. 그렇다고 문학이 무슨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수필은 시나 소설과 같은 고도의 기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쉽게 아무나 할 수 있는 문학이다. 말하자면, 기초적 문장훈련 방법으로 아주 적당하다. 우선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게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문장력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문장에 조리가 있고 더 나아가서 호소력까지 갖추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그 다음 단계인 시나 소설로 옮겨갈 수가 있다.

 

수필은 고도의 해박한 지식이나 현학적인 미사여구보다는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을 통해 삶의 진리를 담은 내용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이해되고 전달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문학수단이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에서도 영국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집> 같은 철학적 장편 수필이 많이 나와야 하겠다.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전혜린, 김태길 등의 수필은 이런 점에서 그동안 좋은 전범이 되어 왔다. 주변잡담이나 단편적인 수필이 아니라 깊은 사상과 넓은 사색력을 주는 장편 수필집을 많이 발간한 수필가들이다.

 

오랜 훈련의 준비가 없어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필가가 될 수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이 규격화되고 형식화된 형태에 따라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긴장을 지닌 작업인 반면에 수필작법은 굳이 상징이나 어려운 비유에 구애받음이 없이 솔직담백하게 자신을 보여 줄 수 있다. 시나 소설에서 불가능했던 표현이라든지 비교적 넓고 다양한 독자층을 갖고 있다는 데에 수필의 장점이 있다.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1. 관념적인 글과 사건적인 글의 차이

 

강사/신상성 교수

 

의사소통 수단으로 글 외에 말이 있다. 그러나, 말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기에 글로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적으로 오래 남을 수 있고,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됨으로써 확실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다듬어서 글을 쓰게 될 때 인간은 사고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서 수필 능력의 배양이 요청되는 것이다.

 

수필이란 단순히 글을 쓰는 손재주만이 아니라,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저절로 세심한 관찰력, 날카로운 비판력, 진실한 자세가 일상화 된다는 것은 대개의 문학가들이 체험한 얘기이다. 더구나 문학은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공감을 폭넓게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학가가 되기 위해서 기초적인 훈련, 즉 삼다三多가 필요하다.

 

다독多讀, 다사多事, 다작多作, 이 세 가지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다독이란 많은 독서를 통해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체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다사란 우리 주변의 일상현상을 인생의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하고 파악하는 사색력을 키우는 것이며, 다작은 독서와 실제 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많이 습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원고지에 충분히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쓰고 싶은 것이 머리 속에서는 뱅뱅 돌지만, 정작 만년필을 들거나 컴퓨터 앞에 앉으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많다. 한 가지 사실을 표현하려 해도,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더구나 문학적 표현이란, 하나의 대상을 리얼리즘으로 형상화해야 하므로 사법고시 준비하듯이 뜨거운 집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흔히 말하는 소질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문학가가 되겠다는 뚜렷한 신념이 없이 소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소질 특히, 문학에 대한 소질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숨어 있다.

 

2. 수필을 쉽게 쓰는 요령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취해진 것들을 에세이로 묶어 놓은 것이 몽테뉴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붓 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란 다른 문학형태에 비해 엄격한 구속형식이 없으므로 쉽게 쓸 수는 있으나,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써도 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무질서의 질서를 말한다.

 

수필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누다. 관념적인 글과 사건적인 글이다. 습작기의 글들을 보면 대개 이 두 가지로 대별된다. 관념적인 글은 종합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의 글인 반면에 사건적인 글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글이다.

 

두 가지가 다 장단점이 있다. 관념적인 글은 우주적인 반면에 자칫하면 중구난방의 구름잡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자기가 써 놓고도 무슨 얘기를 썼는지 모를 정도로 헷갈리기가 쉽다. 사건적인 글은 구체적인 사건을 보여 주기 때문에 주제나 소재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하면 신변잡기적인 잡담으로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그러나, 습작기의 초보자들은 사건적인 글을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 이유는 우선 쓰기도 쉽고, 또 독자들을 쉽게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것부터 훈련하다 보면 나중에 김형석이나 임어당 같은 관념적 글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서 관념적인 글과 사건적인 글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가면서 실제훈련을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