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2. 00:03ㆍ☎청파의사는이야기☎
"김유정문학촌"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김유정 동상
“김유정 문학촌”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내가 수필강좌를 듣는 인천시 평생학습관 수필 반에서 (2013년 4월 10일 수)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 문학촌”으로 문학 기행을 떠나는데 같은 평생학습관 사진반과 함께 같은 차를 타고 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는 날 이 장날’이라더니 이날따라 잔뜩 찌푸린 날씨에 기온도 차고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중국에서 날아온 불청객 황사를 동반한 세찬 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하지만 이미 예정된 문학 기행이라 오전 9시 인천평생학습관을 출발 중간에 휴게소 한곳 들렸다.“김유정 문학촌”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그러니까 꼬박 2시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해 우리 수필 반은 곧바로 “김유정 문학촌" 관람을 하는데 사진반 회원들은 아직 개화가 덜 된 ‘생강나무(동백)꽃’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간 나는 춘천에 있는 삼악산, 오봉산, 감악산 등 산행을 하기위해 '김유정역'을 수차례 지나 다녔으면서도 인근에 있는 “김유정”문학의 산실인 문학촌 관람 기회를 놓쳤었는데 마침 이번 수필 반 문학 기행에 내가 늘 마음에 동경했던 “김유정 문학촌”을 관람할 수 있어 절로 흥이 난다.
우리가 '김유정문학촌' 기행을 오기 전 우리 수필 반은 '나윤옥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김유정 문학에 대한 강의를 들은 바 있어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은 선생님 강의를 들을 땐 아는 것처럼 머리를 끄덕이다 가도 돌아서면 곧바로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머리가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수필 반 '이정섭' 선생님께서 77세 연세에도 어쩌면 그렇게 총기가 밝으신지 차마 선생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다. 젊은 시절 한땐 나도 아무게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인데 왜 최근 드러 더 기억력이 약해졌는지 행여 나쁜 노인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문득문득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와 달리 실제로 김유정의 생가 현장을 돌아보며 문학관에 전시된 김유정의 보석 같은 유작들을 관람하다 보니 아쉬움이 남는것은 시간 여유만 있었으면 문학관에 전시된 작품 차근차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며 이해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은데 이미 짜여진 문학 기행 일정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문학관을 둘러보고 나오려니 아쉬움이 남는다.
김유정 소설 발표의 시기가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하려 침략했던 ‘일제 치하 시절’였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문학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여건 환경에서 오랜 기간동안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향토 소설을 발표할 수 있었던 김유정, 그의 문학 사상에 감동을 한다.
그런데 한가지 '내가 김유정 문학촌'을 돌아보며 아이러니한 것은 김유정의 생가 구조가 “□”집 구조인데 나의 고향집도 김유정의 생가처럼 같은“□”구조 인데 이상하게 이곳 김유정 생가의 사랑채 굴뚝이 안방이 있는 안채 봉당에 설치된 것을 보며 이해가 쉽지 않다. 왜냐면“□”집 한옥 구조 자체가 높지 않아 “□”집 구조상 환기가 안되는것이 사실인데
이곳 ‘김유정 생가’에는 역설적으로 미적 감각과 해충 방지를 위해“□”집 안채 봉당에 낮은 굴뚝을 세웠다는 자료를 보며 도무지 이해가 않된다. 설명에 따르면 이곳 김유정 생가를 복원을 하며 그의 조카에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실물 생가와 비스하게 복원했다는데 내 판단에 아무래도 김유정 조카의 고증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며 사실을 외곡해 미화 시킨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젊은이들과 달리 연세 드신 어른들께서 쉽게“□”집 구조에 대해 이해 하시며 공감하실 줄 안다. 김유정의 어린 시절은 '일제치하' 시대라 아궁이 땔 깜 연료란 것이 대부분 산에서 해오는 나무에 의존하거나 농촌에서 가을걷이 끝나고 난 볏짚을 땔 깜으로 사용을 해오던 시기다.
그렇게 때문에 안채와 달리 겨울철 사랑채는 군불을 땔때 ‘청솔(생소나무가지)’이나 집주변 허드레 땔 깜을 아궁이 가득 쑤셔 넣고 불을 붙이면 소나무에 있는 송진이 타느라 마치 기름을 부은 듯 후다닥 소리를 내며 훨훨 타며 그때 굴뚝으로 나오는 연기가 얼마나 많이 나왔으면 나의 고향에선 저녁때 ‘청솔 군불' 때는 연기를 보고 곰’잡는단 소리를 할 정도였었다.
그럼에도 불구 김유정 생가엔 안채를 향해 굴뚝이 나 있었으니 사랑방 군불땔때 그 연기가 얼마나 심했고 그로 인하여 집을 끄실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자료를 보면 안채를 낸 사랑발 굴뚝이 미적 감각과 해충 구제를 위해 안채를 향해 굴뚝을 냈다는 주장은 납득이 쉽지 않다.
그러나저러나 이번 문학 기행을 통해 나의 어린 시절 농촌에 살던 고향“□”집 구조와 같은 초가집을 둘러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특히 저만큼 동떨어진 별채 디딜 방앗간에 전시된 각종 옛 생활필수 공예품 중 다래끼, 종다래끼, 광주리, 채반, 바가지, 소쿠리, 바구니, 바수코리, 삼발이, 망태, 추녀에 매달아 놓은 멍석, 장석, 집세기, 코뚜레, 작두, 쟁기 등과 같은 소품들을 돌아보다 보니
갑자기 그 옛날 남달리 손재주가 좋으셔 집안에 사용하는 모든 용품은 그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아버지 당신께서 손수 만들어 사용을 해 오셨다. 그뿐 아니다. 우리 아버지의 손재주가 얼마나 좋으셨으면 온 동네방네에 아버지 손재주 칭찬이 자자해 농번기 끝나고 농한기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아버지께 수고비를 드리면서 집안 살림용 공예품을 주문해와 우리 아버진 농한기에 심심치 않게 밀려드는 주문 공예품 만들어 넉넉지 않은 살림을 보태셨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회상하니 마음이 짠하다.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 생존해 하셨으면 모르긴 해도 ‘인간무형문화재’는 충분히 되셨을 정도의 소질을 가지신 분이다. 특히 아버지 손재주 중에서도 초가지붕 이으시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 추수 끝난 초겨울이면 아버지는 우리 동네 120여 호의 지붕을 이으러 뽑혀 다니시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셨을 정도로 솜씨가 탁월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솜씨와 비슷한 ‘김유정 생가’초가지붕과 “□”집 구조 매력에 빠져들다 보니 어느새 이날의 예정된 문학 기행 일정으로 이동 시간이라 서둘러 “김유정 문학촌”을 떠나며 나중에 기회되면 손자 아이와 함께 다시 “김유정 문학촌”을 찾을 것을 다짐하며 김유정 문학촌을 떠난다.
내가 이번 문학 기행을 통해 “김유정 문학”에 대해 좀 더깊이 머리에 각인 시키기 유해 "김유정 문학촌" 홍보자료를 발췌한 내용을 아래에 싫는다.
김유정의 삶
우리나라의 소설가(1908~1937).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 일보》에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구인회’ 작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농촌을 무대로 하는데, 토속적 인간상을 해학과 익살스러운 필치로 서술하였다. 단편 소설로 <봄봄>, <동백꽃>, <따라지> 등이 있다.
1930년대의 작가 김유정(金裕貞 1908. 1.11-1937. 3. 29)은 춘천시 신동면 증 리(실레마을) 에서 김춘식과 청송 심씨의 2남 6녀 중 차남(일곱째)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울 종로로 이사하고 일곱 살에 어머니를,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성결핍으로 한때 말을 더듬기도 했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휘문고 보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 1930년 4월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당대 명창 박옥주를 열렬히 구애하느라 학교 결석이 잦아 두 달 만에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실연과 학교 제적이라는 상처를 안고 귀향한 김유정은 학교가 없는 실레마을에 '금병의숙'을 지어 야학 등 농촌계몽활동을 약 2년간 벌이는 가운데 30년대 궁핍한 농촌 현실을 희화적으로 체험한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열정에 빠진다. 1933년 잡지<제일선>에 '산골나그네' 왕<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고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 가 조선 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는 한편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김유정은 등단 이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글쓰기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과수원집 흙마루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휘문고 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3. 18)를 끝으로 3월 29일 달빛 속에 하얗게 핀 배꽃 속에서 삶을 마감한다. 29세로 요절한 참으로 아까운 작가의 짧은 생애가 안타깝다.
김유정이 남긴 30여 편의 단편소설은 탁월한 언어감각에 의한 독특한 체취로 오늘까지도 그 재미, 그 감동을 준다. 이는 김유정이야말로 소설의 언어에서나 내용은 물론 진술방식에서 우리 문학사에 진정한 이야기꾼으로서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음을 뜻한다.
김유정의 작품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금> <떡> <만무방> <산골> <솥> <봄, 봄> <안 해> <심청>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音樂會> <동백꽃> <夜櫻> <옥토끼> <생의 伴侶> <貞操> <슬픈 이야기> <따라지> <땡볕> <연기> <정분> <두 포 전> <兄> <애기> = 발표 연대순 = <김유정 문학촌 자료 참조>
김유정역에서 올라오며 바라본 "김유정문학촌" 전경 모습
수필반 일행들과 함께 김유정문학촌에서 기념 사진을 ...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을 묘사한 생강나무(동백꽃) 이 동백꽃 씨를 따
기름을 짜 우리의 어머니들께서 머릿기름으로 사용 하셨었다.
수필반 일행들과 함께 김유정문학촌에서 기념 사진을 ...
김유정문학촌 안내도
김유정이 태어나 살았던 실레마을 전경도
실레마을, 김유정 문학의 산실
김유정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실레마을은 마을전체가 김유정 문학촌이라 할 수 있다. 금병산자락이 아래 잣나무숲 뒤쪽은 동백꽃의 배경이다. 김유정기념전시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움막을 짓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야학(안 해) 터가 있다. 마을 가운데 잣나무숲으로 들어서면 실존인물이었던 [봄&봄]의 봉 필 영감이 살았던 마름 집이 있다.
점순 이와 성례는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 먹는데 불만을 느낀 ‘나’가의 장인영감과 드잡이를 하며 싸우는 모습이 막 눈앞에 그려지는 곳이다. 그 옆으로 김유정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錦屛義熟)이 있다. 건물 옆에는 당시 김유정이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있다. 김유정이 코다리 찌개로 술을 마시던 주막 터도 남아있다. 멀리 한들의 팔 미천에는 산골 나그네(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산골 나그네) 터가 있다.
이들 작품과 함께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산골], [만무방], [솥], [가을] 등 12편이 이곳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점순 이, 덕 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등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지금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실레마을을 내려다보는 금병산(해발 652m)에는 김유정의 소설 제목을 단 등산로가 산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소설 속으로 이끈다. 실레마을은 작가의 생가와 기념전시관은 물론 금병의숙이 있고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인 소중한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다.
김유정의 생가
나윤옥 선생님께서 생강나무(동백꽃)을 살펴 보시는 모습
봉필이와 나윤옥 선생님
점순이와 성례는 안시켜주고 일만 부려먹는데 불만을 느낀
[나]가 장인 영감에게 드잡이하며 싸우는 모습
김유정 선생께서 닭싸움을 시키고 있는 점순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 모습
점순이가 일부러 닭싸움을 시키는 모습
수필반 일행은 김유정 생가를 돌아본다.
김유정의 생가“□”집 봉당에 설치된 사랑채 굴뚝
디딜방앗간
김유정문학관
김유정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활동
문우들이 말하는 김유정
필승전
1930년대의 한국소설
구인회원
김유정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
김유정의 유작 작품 사진
김유정의 소설 작품 배경지도
이곳에선 6.25 전쟁 당시 춘천의 참혹한 전쟁 현장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랑의 강 / 조병화
사랑의 강에 밤이 내린다.
하늘에 먼 별들이 물에 비쳐 흐른다.
사랑은 물가에 모여 하루의 손을 잡는다.
바다 바람이 젖은 하얀 벤치들에
수건을 펼치고
야자수 그늘
사랑의 강은 가슴에 안겨 흐른다.
물은 흘러 강은 흘러 내려도
세월은 가벼려도
사랑은 머무는 것
아 두고온 사람아
사랑의 강은 흘러 내려도
밤은 깊어 내려도
문학공원
쓰는자의 고통이 읽는자의 행복이 필때까지 / 한국문인협회와 국토해양부에서 세운 문학비
노벨상의 빈자리 / 문학이 보다 밝은 세상을 만든다.
한국문학의 힘 / 문인의 꿈
현민민속관
이곳은 "현민민속관"인데 실내 전시관은 문이닫혀 관람치 못하고 야외 전시장을 둘러 보는데 전시된 작품들 대부분 하나같이 예술 작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남의 조상 묘를 파혜친 도굴꾼들이 도굴해온 상석' 문인석' 망부석들로 장식 되어있다. 이 희안한 전시관 모습을 보며 내 작품 세계도 아닌 작품을 가지고 "현민 민속관"을 조성한 가족들의 정성이 다소 빛바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http://cafe.daum.net/salam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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