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도 核폭탄 만들 수 있다! [조갑제 닷컴]

2011. 3. 16. 23:37☎시사(時事)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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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의 사례연구

 核개발하면 경제봉쇄당한다는 俗說 
 

필자는 ‘한국의 自衛的(자위적) 핵개발’을 주제로 강연을 자주 한다. 북한정권의 핵무기를 폐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이런 反論(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한 안보포럼에서 예비역 중장이 했던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합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핵을 개발하면 망합니다.”  

물론 이런 俗說(속설)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다. 이런 요지이다. 
 

 “핵을 개발하다가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核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는 지금 미국으로부터 제재는커녕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정권도 核(핵)을 개발하면서 한국으로부터 100억 달러 이상의 금품, 미국으로부터는 10억 달러어치 이상의 重油(중유)와 식량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매년 30억 달러씩, 파키스탄은 2001년 9? 테러 이후 매년 20억 달러 이상씩 미국의 무상원조를 받습니다. 인도와 미국은 밀월관계입니다. 인도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가 미국이고, 원자력 발전소와 무기까지 팔겠다고 합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도 핵을 개발하려다가 포기한 代價로 주한미군 잔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지원 등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國益을 지켜주고, 파키스탄은 對테러 전쟁에 협조하고,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미국과 협조하므로 미국이 核무장을 묵인한 것입니다. 東北亞에서 한국은 이들 세 나라보다 미국에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국의 몸값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한국처럼 경제적, 地政學的, 군사적 가치가 큰 나라는 核개발을 해도 제재가 먹히지 않습니다. 朴 대통령이 核개발을 포기한 이유는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고,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한국은 1970년대의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에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東北亞의 이스라엘’ 수준 이상일 것입니다. 세계 5大 공업국, 5大 원자력 기술국, 7大 수출국, 8大 군사력(재래식), 9大 무역국에 드는 한국이 중국 편으로 기울면 일본도 버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覇權(패권)국가가 됩니다. 이런 한국이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갖겠다는데 미국이 정말 제재를 할까요? 우리가 被원조국입니까? 
 

한국에 경제재재를 하면 미국은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韓美동맹이 중요하지만, 한국에 미국이 소중한 만큼 미국에도 한국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미국, 중국, 유엔 등 국제사회가 北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은 이미 찢어졌어요. 우리는 중국 미국의 무능에 의한 피해당사국이에요.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도 이런 경우, 즉 敵의 핵개발로 국가 생존 차원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사전에 통보하고 탈퇴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우리는 ‘6者 회담이 6개월 안에 北核(북핵) 폐기에 실패한다면 NPT에서 탈퇴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核문제의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쥐게 됩니다. 주도권을 北의 손에서 빼앗아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넓어집니다. 핵게임을 즐길 수도 있어요. 국가가 결심만 하면 2년 안에 100개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한국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북한더러 ‘야, 그런 장난감 같은 핵폭탄으로 불장난 하지 말고 우리 다 같이 폐기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안 됩니까? 핵확산의 피해당사국이 자위적, 평화적, 합법적 목적의 핵개발을 하는데 누가 막습니까?” 
 
  이스라엘-프랑스의 核협력 
 

어느 나라든 핵무기 개발은 국가 지도부의 장기간에 걸친 계획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建國 직후부터 核개발을 추진한다. 建國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 직접 核개발을 지도했고, 서른 살에 국방부 국장으로 임명된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가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核개발을 지원해줄 나라는 프랑스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소련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금지한 상태였다. 建國 직후 무기를 팔던 체코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친소(親蘇) 정책을 쓰자 이스라엘의 숙적(宿敵)인 이집트에 무기를 팔기 시작했다. 
 

1956년 10월 말 프랑스 수상(기 모레)과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총리(벤 구리온)와 국방장관(모세 다얀)이 파리 근교에서 비밀리에 만나,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國有化)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을 상대로 3국(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또 다른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에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한 것이다. 
 

영불(英佛)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전투에선 이기고 외교에선 지는 결과를 빚었다. 점령지를 내놓고 철수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核무장한 소련이 위협을 해오는데 核무기를 갖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4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국가 지도부는 2차 대전 중 반(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建國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도 核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핵시설(원자로, 재처리, 폭탄 설계소)로 기술자를 파견했다. 수십 명의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프랑스 사람들과 같이 核개발, 특히 核폭탄 설계에 참여했다. 이스라엘 핵개발의 실무 책임자 페레스는 급한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 각의(閣議)가 열리는 장소에 가서 프랑스 수상을 중간에 불러내 “회의에서 이 사안을 꼭 의결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수상은 이를 흔쾌히 승낙할 정도였다. 
 

프랑스-이스라엘의 협력관계는 전면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라주 전투기 등 재래식 무기도 이스라엘에 팔았다. 두 나라의 과학자,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1958년 알제리 독립문제로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군부(軍部)와 국민들의 열화(熱火)와 같은 요청에 의해 정계(政界)에 복귀, 총리가 된 드골(改憲 후엔 대통령)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상호 유착이 너무 심한 데 놀랐다. 그는 원자력 담당 장관 장 자크 수스텔을 불러 협력중지 명령을 내렸다. 수스텔은 친(親)이스라엘 성향의 소유자였고 의회에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드골의 지시를 무시했다.  
  
  미국의 덮어주기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을 도운 것은 프랑스, 유대인들, 이를 알고도 덮어준 것은 歷代 미국 정부였다. 이스라엘은 핵개발을 비밀로 하기 위해 여기에 들어가는 자금은 국가예산 항목에 넣지 않았다. 미국의 유대계 富者들이 모금해 개발자금을 댔다. 
 

1957년 말 미국의 U-2 정찰기는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건설 중인 수상한 시설의 사진을 찍었다. 핵개발이 진행중이라고 판단한 CI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은 이 보고를 묵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참모들도 親이스라엘 성향이 강해 비밀 核개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1960년 2월13일 프랑스령(領)인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프랑스 최초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다. TNT 환산 6만5000t의 폭발력을 보였다. 대성공이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날의 핵실험으로 두 나라, 즉 프랑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사실상 핵무장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핵기술을 이스라엘이 공유(共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핵(核)폭탄을 만든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1차 핵실험 직후 드골 대통령은 親이스라엘 성향의 원자력 장관을 밀어내고 이스라엘과의 협력관계를 정리하라는 확고한 지시를 내렸다. 
 

1960년,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총리는 파리로 가서 드골과 담판을 했다. '救國의 영웅웅'과 '建國의 아버지'는 만나자마자 서로 통했다.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核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프랑스 기업은 기존 계약에 따라 협력을 계속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 회사들은 디모나 핵시설을 다 지어주고 떠날 수 있었다. 
 

드골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최종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1967년 6월 전쟁 직후였다. 드골은 전쟁 직전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는 나라를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에게 아주 작은 표차로 졌다. 정권 교대 작업이 진행 중이던 12월18일 미국의 원자력위원회 존 매콘 의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 정보를 흘렸다. 그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이스라엘 감싸기에 분노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 총리는, 1960년 12월 21일 의회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디모나 원자로 건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평화적 목적의 사업이고, 이스라엘 전문가들이 주도한 공사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젠하워 팀은 케네디의 정권 인수팀에 정보를 넘기고 떠나면서 디모나 원자로가 곧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核확산 금지에 관심이 많았다. 이스라엘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61년 5월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스라엘은 담수화(淡水化) 사업과 값싼 전력(電力)을 얻기 위해 디모나 원자로를 짓고 있다’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케네디 정부는 벤 구리온의 방미(訪美) 직전에 조사관 두 사람을 디모나 시설에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인 라비 교수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이사였다. 와이즈만 연구소는 이스라엘 핵개발 기술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측이 엉뚱한 설비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을 믿고선(혹은 믿는 척하고선) “핵무기 개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된 사건은 이스라엘로선 일종의 횡재(橫材)였다. 후임 존슨 대통령은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거둔 이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눈을 감았다. 1963년 12월 드디어 디모나의 원자로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원자로의 원료인 우라늄 원광(原鑛)을 프랑스로부터 수입하다가 나중엔 아르헨티나와 南아프리카에서 ‘옐로케이크’(원자로用으로 정제된 우라늄)를 사들였다. 1965년 이스라엘은 미국의 유대계 기업인 잘만 샤피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원자로에서 나오는 물질의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90kg의 농축우라늄을 빼돌려 이스라엘에 건네주었다. 우라늄 핵폭탄 1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샤피로는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 시절 주(駐)이스라엘 대사 바부르는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을 만족시켜 주라.” 
 

1968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창고엔 수백 톤의 우라늄 原鑛이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회사로 위장, 이를 수입하기로 했다. 원광을 실은 터키 화물선은 안트워프 항구를 떠나 공해(公海)로 나온 뒤 이스라엘 배에 원광을 옮겨 실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연구를 한 경험이 있어 지하(地下)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폭탄을 만들었다. 1966년 가을에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전문가들은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수소(水素)폭탄과 중성자탄(中性子彈)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본다. 1967년 6월 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두 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6일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는 강박심리가 작용했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 전투기가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기지를 기습,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함으로써 사실상 30분 만에 끝났다.
 
 
  미국-이스라엘 '核묵인' 비밀협정
 
 
  존슨 대통령을 이은 닉슨도 親이스라엘 노선을 따랐다. 1969년 9월 골다 메이어 수상이 미국을 방문, 닉슨과 회담했다. 메이어 수상은 25대의 팬텀기, 80대의 스카이호크 전투기, 그리고 2억 달러의 저리(低利) 차관을 요청했다. 닉슨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런 평을 했다.
 

<메이어 여사는 극단적인 강고(强固)함과 극단적인 친밀감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알았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는 굉장히 강고한 태도를 보였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공식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1년 이스라엘 언론에 의해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당시 닉슨의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의 메모가 비밀해제로 공개된 적이 있다. 비밀협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공개적 선언이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보유를 알리지 않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 사업(Nuclear Program)을 묵인하고 보호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작년 7월 6일 오바마 대통령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한 직후, “이스라엘은 독특한 안보상의 필요성에 따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안보상의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이는 1969년의 비밀협약이 유효함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메이어-닉슨 비밀협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核보유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核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게 되었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탄은 정밀한 내폭(內爆)장치를 필요로 하므로 核실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핵폭탄을 설계, 실험한 셈이므로 이 단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핵폭탄은 분리된 우라늄을 임계(臨界)질량 이상으로 합치기만 하면 터지게 설계되어 있어 별도의 핵실험이 필요하지 않다. 북한정권이 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수소폭탄이나 중성자탄은 핵실험이 필요하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 혼이 난 이스라엘은 敵의 기갑부대를 공격하는 데 적합한 중성자탄 개발에 착수했으므로 核실험장이 필요했다. 여기서 南아프리카가 떠올랐다.
 
 
  이스라엘-남아공의 核 커넥션
 
 
  1974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골다 메이어 수상이 물러나고 라빈이 수상, 페레스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페레스는 ‘프렌치 커넥션’으로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성사(成事)시킨 사람이다.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남아공(南阿共)에 눈을 돌린다. 남아공은 人種분리 정책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에선 흑인들의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이웃나라에선 親蘇 세력이 등장, 쿠바와 북한군을 불러들였다. 국내외로 불안이 증폭되자 남아공 정부는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장을 결심하게 된다. 작은 나라가 核무장을 하는 동기중 가장 큰 것이 체제유지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남아공은 우라늄 매장량이 많았다. 농축우라늄 방식에 의한 核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1974년 페레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아공의 존 볼스터 수상을 비밀리에 만났다. 여기서 핵개발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공개된 게 없으나 이스라엘은 핵무기 관련 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장비를, 南阿共은 우라늄 原鑛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을 것이다. 1974년 여름 두 나라는 수교(修交)하고 대사를 교환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얻은 교훈에서 중성자탄의 개발을 전략 목표로 설정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을 당할 경우, 자국(自國) 영토에서 핵폭탄을 써야 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중성자탄을 쓰면 적(敵)의 탱크부대 같은 집단 목표에 중점적인 타격을 주고 다른 시설물에 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976년 소련은 남아공의 핵개발 계획을 탐지, 미국에 대해 공동으로 발린다바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공습하자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 1978년 1월 발린다바 시설은 무기용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9년 9월 22일 지구를 돌고 있던 미국의 인공위성 벨라는 남아프리카 남단(南端)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0km 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및 북한 등의 비밀 核개발을 다룬 <核특급(Nuclear Express)>의 공동 저자(著者) 댄 스틸만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핵폭탄 연구소 기술정보 담당 국장이었다. 1979년 어느 날 그는 다른 일로 CIA의 원자력 국장 잉글레이 박사를 만났다. 
 

박사는 광선 분석 자료를 내놓으면서 스틸만의 의견을 구했다. 평생 핵실험 자료를 접했던 스틸만은 즉석에서 “대기권 핵실험의 흔적이다.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잉글레이 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스틸만은 “핵실험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9월 22일의 폭발이 핵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공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를 인정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에 제재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럴 배짱이 없었다. 事實은 정책을 위해 희생되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核무장을 덮어주기 위하여 여러 번 정부 차원의 거짓말을 해야 했고 法 집행을 유보하였다. 안보상의 國益은 도덕과 法에 우선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컨테이너에 넣은(음파 교란 목적) 작은 중성자탄을 바지船에 실어 폭파시켰다고 본다. 태풍이 부는 시기를 골라 터트린 것은 방사능이 바다로 쓸려나가 사라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디모나 핵시설에서 일했던 기술자 바누누는 1986년에 한 폭로에서 1984년부터 이스라엘은 중성자탄(中性子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1983년부터 우라늄 방식의 핵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름이 60cm, 길이가 180cm인 폭탄의 무게는 약 1t이었다. 이 核폭탄은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개발한 중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었다. 1989년까지 남아공은 약 400kg의 농축 우라늄과 여섯 개의 우라늄 폭탄을 제조했다. 
 

남아공을 둘러싼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冷戰) 종식, 앙골라에 배치됐던 쿠바군의 철수, 인종분리 정책의 재검토, 만델라와 정권 이양 협의 등. 1989년 남아공 白人주민은 클레르크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核시설 및 폭탄의 해체를 명령하고, 1990년에 옥중(獄中)의 만델라를 석방했다. 白人정부가 핵무장 폐기를 결심한 것은 만델라가 영도할 흑인정부에 核폭탄을 넘기기 싫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클레르크는 1993년 3월 24일 국회에서 한 보고를 통해 핵개발에 약 4억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이스라엘-남아공 커넥션이 끝났다. 남아공은, 일단 핵무장을 했던 나라가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적응, 핵을 포기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란 核 과학자 암살
  
  이스라엘은 자신의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중동 이슬람 국가가 핵무기를 갖는 것은 반드시 저지한다는 방침도 확고하다. 
 

연평도 도발로 동북아(東北亞) 정세가 긴장되어 있을 때인 지난해 11월 29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연쇄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핵(核)물리학자인 마지드 샤리아리는 부인과 경호원을 태운 푸조 승용차를 몰고 출근 길 정체(停滯)가 심한 시내(市內)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오더니 푸조 문짝에 무엇인가를 붙이고 사라졌다. 직후 차는 폭파되었다. 샤리아리는 즉사(卽死)하고 다른 탑승자들은 중상(重傷)을 입었다. 
 

몇 분이 지난 테헤란의 주택가, 또 다른 핵물리학자인 아바시 다바니가 탄 차 옆에 오토바이가 따라붙었다. 다바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서 유엔 안보리의 대(對)이란 제재결의문에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관계하는 인물’이라고 특정된 사람이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차체(車體)에 무엇인가를 붙이는 것을 본 다바니는 차를 세우고는 타고 있던 부인을 끌어내렸다. 그 직후 차가 폭발했다. 다바니는 목숨을 건졌다. 
 

작년 1월엔 핵개발에 종사하는 이란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가 같은 방법으로 암살됐다. 이스라엘이 일련의 암살작전에 관련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에게만 보복을 하는 게 아니다. 적국(敵國)의 핵, 미사일, 신형 대포 등 신무기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에 대하여도 국적(國籍)을 묻지 않고 암살을 해온 경력이 있다. 
 

1980년 6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팀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 협조하는 이집트인 核전문가 예히아 엘 마샤드를 파리의 한 호텔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암살팀은 총기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마샤드가 투숙한 방으로 들어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옆방에 있던 창녀(娼女)는 경찰에 자신이 들은 소란에 대해 증언한 직후 뺑소니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살해되었다. 
 

1980년대, 후세인의 이라크 정권은 캐나다 출생으로 벨기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제럴드 불과 ‘수퍼 건’ 제작 계약을 맺었다. 사정(射程)거리가 수천 km나 되는, 핵폭탄을 쏠 수 있는 대포(大砲)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 대포 제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90년 3월 모사드의 암살단이 벨기에 브뤼셀의 한 아파트 문을 노크했다. 제럴드가 문을 열자 다섯 발을 쏴 죽였다. 그들은 제럴드의 시신(屍身) 사진을 찍어 대포제작에 관계하는 유럽 기술자들에게 이런 글과 함께 보냈다.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내일부터 일하러 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북한정권을,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북(北)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종사하는 요인(要人)들도 모사드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암살과 보복의 경력이 화려하지만 민주국가이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자유도(自由度) 랭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나라’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적용되는 원칙이지 국방과 안보를 민주적으로 할 순 없다.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안보 전선에선 자위(自衛)의 원칙이 가장 유효하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代價로 미국 정부로부터 매년 30억 달러이 無償원조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核무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화협정은 맺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이스라엘의 자신감과 이집트의 無力感이 결합된 결과이다.
 
 
  핵개발한 파키스탄과 인도를 묵인한 미국
 
 
  미국이 반대한 核개발을 강행하고도 미국의 지원을 즐기는 나라가 또 있다.
  미국은 1998년에 核실험을 한 인도와 파키스탄에 무기 기술 경제 금융 분야에서 제재를 가한 적이 있다. 핵심적인 제재는 원자력 관련 기술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1년부터 부시 행정부는 태도가 돌변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의 중요성을 감안,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하고 제재를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9.11 테러 이후엔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협조한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도 완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22일 우선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재재부터 해제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파키스탄의 對테러 작전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제재를 풀고, 파키스탄을 非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였다. 그들의 對테러 예산을 지원하였으며 의회가 30억 달러를 경제원조 하도록 했고, 우리 시장을 열어 파키스탄의 상품과 용역을 수입하도록 했다> 
 

2005년 7월 부시 대통령과 인도 싱 수상은 공동성명을 통하여 美-印 민간 원자력 협력 협정을 추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2008년 10월 美 의회는 이 협정을 승인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인도는 군사적 핵시설을 제외하고, 민간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인도에 원자력 기술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나서서 美 의회, 국제원자력 기구, 원자력공급국가회의를 설득, 對인도 제재를 풀어 줄 것을 로비하였다. 농축 및 再처리 관련 자재도 인도에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核확산 국가를 제재하도록 되어 있던 미국의 국내법은 國益 앞에서 흐물해졌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미국-인도 원자력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국가와 가장 큰 민주국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려는 우리 노력의 결정이었다>면서 <인도는 인구가 10억 명이고, 잘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있는 나라여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 협정은 인도가 국제무대에서 맡을 새로운 역할을 알리는 역사적 巨步였다>고 自讚(자찬)했다.
  인도 원자력 건설시장의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150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美印 원자력 협정에 따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미국은 작년에, 향후 5년간 군사지원 20억 달러, 민간지원 75억 달러를 또 약속하였다. 파키스탄은 親中국가인데도 이렇게 특혜를 주었다. 
 
  부시의 暗示? 
 
  1998년 3월 인도 총선에서 집권한 중도우파 정당(자나타)은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약했었다. 바즈파이 총리는 취임 즉시 핵실험을 지시, 두 달 뒤 地下 핵실험이 이뤄졌다. 그 직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에게 바즈파이 총리가 보낸 편지는 한국이 핵실험을 한 뒤 어떤 논리를 세워야 하는가 참고가 될 만하다. 


  <우리는 핵무장한 나라(중국)와 國境(국경)을 접하고 있다. 1962년 인도를 무장 침공한 나라이다. 지난 年代에 두 나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으나 不信은 여전하다. 이 나라는 우리의 다른 이웃 나라(파키스탄)가 핵무장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 나라는 지난 50년간 우리를 세 번이나 침공한 적이 있고 테러공격을 부추긴 前歷이 있다> 

  인도와 한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등 國力이 비슷하다. 敵國으로부터 수많은 침공과 위협을 받아온 점에서도 같다. 물론 한국의 경우가 더 심한 피해국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있는 점에서도 같다. 한국이 핵무장을 한다고 미국이 경제재재를 하고 韓美동맹을 해체할 것인가? 핵무장한 한국이, 철강생산량은 세계 전체의 50%(약6억t)이고, 3조 달러의 외환보유고(2위인 일본의 세 배)를 가지고 연평균 9%(복리)의 고도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편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부시 정부는, 2008년에 아무런 양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정권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준 나라이다. 천안함 테러를 자행해도 再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제재를 가한다면 미국의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온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엔 묘한 대목이 있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의 非核化보다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저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일본, 한국, 대만이 북한의 核에 대응하기 위하여 核무장을 추구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중국은 자신들의 현재 태도에 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2002년 10월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江澤民(강택민) 중국 주석을 크로포드 목장에 초청, 회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부시 회고록).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부정적 영향력을, 중국은 긍정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 우리 두 나라가 이를 결합시킨다면 근사한 팀이 될 것이다.” 


  江澤民은, 북한은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이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라고 말했다. 몇 달을 기다렸으나 진전이 없자 부시는 새로운 論法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그는 江澤民에게 ‘만약 북한이 核개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일본이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통보하면서,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군사적 공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는 것이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6개월 뒤 6者 회담이 열린 것은 이 압박 덕분이란 투로 이야기하였다. 미국은 속으론 일본과 한국이 核개발 카드를 써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부시와 럼스펠드의 말은 "왜 한국은 核개발을 추진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야 중국과 북한의 억지에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이 NPT를 탈퇴하고 自衛的 차원의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나와도 우리는 반대하는 척만 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된다.
 
 
  2015년 연합사 해체 전에 核무장해야
 
 
  지난 3월3일 애국단체총협의회 주최 自衛的 핵무장 관련 심포지엄에서 朴定秀 전 해병대 준장(워 게임 전문가, 前 연합사 대항군 사령관)은 ‘북한의 核무장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지적하였다.
 
  1. 한국이 武力위협을 받지 않고 영토와 영해를 지킬 수 있는가?
 
  2. 核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이 가능한가?
 
  3. 한국이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번영을 지속하며 선진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가?
 
  朴 장군은 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라고 했다. 북한정권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實戰(실전)배치, 미국과 일본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된다면 한국은 北의 ‘핵인질’이 될 것이다. 北은 다양한 核戰略(핵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核戰力과 재래식 무기와 從北(종북)세력을 결합시킨 여러 가지 공세가 가능하다. 局地(국지)도발, 全面(전면)남침, 핵공갈 등 여러 방법으로 남한 赤化나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朴 장군은 미국이 약속한 '核우산'은 北核에 대한 억지력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核우산은 韓美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고 있으나, 조약의 실행은 미국의 헌법절차, 즉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불완전한 약속이다. 유사시 미국의 개입을 자동적으로 유발하던 韓美연합사는 2015년에 해체될 것이다. 북한의 끈질긴 주한미군 철수 공작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핵우산을 억지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억지력이 되지 못한다. 북한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면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는 것을 억지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 국민과 의회는 핵 戰場에 아들 딸들을 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고, 남북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북한 측이 판단할 것이다. 核과 같은 국가안보의 치명적인 위협에 대한 억지는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핵우산’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2015년 韓美연합사 해체 전에 核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하나의 時限(시한)을 가진 셈이다. 6자 회담에 절망한 국민들의 분노가 '自衛的 核무장'을 지지하는 압도덕 여론을 만들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核무장을 공약하는 후보와 정당이 나오고 그 공약 덕분으로 집권할 수 있어야 自主的 핵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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