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9. 12:17ㆍ☎시사(時事)이야기☎
아 ! 윤봉길 의사 의거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 윤봉길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 - 1932년 12월 19일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는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거사가 예정 된 아침, 25세의 윤봉길은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끝내고 김구 선생에게 말했다.
[논란이 된 사진, 주인공은 윤봉길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윤의사의 폭탄. 당시 채소장수로 변장했던 윤의사는 저격용 물통폭탄과 자결용 도시락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이 "행사장에 올때는 도시락과 물을 지참하라"고 대중에게 홍보했기 때문에 이런 모양의 폭탄을 제조한 것이다. 윤의사는 물통폭탄을 먼저 행사장에 투척한 후 도시락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결국 도시락 폭탄은 쓰지 못한 채 체포당했다.
*폭탄 제조자는 중국인
2010년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연구원 부원장이 윤의사가 던진 폭탄의 제작자가 19로군 후원회 병기 책임자인 중국인 향차도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1979년 4월 28일 동아일보의 향차도 인터뷰 기사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향차도는 상하이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의 무기제작에도 비밀리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당시 강보에 싸인 두 아들이 있었다.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진전이 열리는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할아버지의 폭탄 투척만 알려졌는데 농민운동과 교육사업도 재조명받았으면 한다”고 밝히는 친손녀 윤주경씨
서경덕 교수는 트위터에서 "오는 29일은 윤봉길의사 의거 80주년입니다. 그리하여 송혜교 씨와 또 의기투합하여 상해 윤봉길 기념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했습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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