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결심하면 2년 안에 核폭탄 100개 만들 수 있다”
‘한국의 自衛的(자위적) 핵개발’을 주장해온 趙甲濟(조갑제) 기자가 핵무장의 필요성과 가능성, 방법을 정리해 《우리는 왜 核폭탄을 가져야 하는가?》(조갑제닷컴, 148페이지, 1만원)로 펴냈다.
趙 기자는 머리글에서 “이 책에 수록된 글은 1990년부터 2011년까지, 21년에 걸쳐 쓰였다. 그 사이 북한은 核보유에 성공했고, 한국은 원자력 大國(대국)이 되는 데 성공했다. 원자력 대국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최신 핵무장 기술도 갖게 됐다. 문제는 누가 이 기술을 동원하는가이다. 천안함과 연평도 때 폭격명령을 내리지 못한 대통령이 핵개발 명령을 내릴 것인가? 다음 대통령은? 국민이 결단하고 지도부가 명령을 내리는 데 이 책이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1985년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북한은 2002년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공식 인정, 2003년 NPT를 탈퇴한다.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 2009년 5월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대한민국에 접경한 敵(적)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할 조짐을 보이자 핵무기 개발의 기반시설을 공격해 제거했다. 소련은 미국에 대해, 영국·프랑스·중국은 소련에 대해, 인도는 중국에 대해, 파키스탄은 인도에 대해,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해 對應(대응) 핵개발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정부는 北核(북핵) 시설을 폭격하지도, 대응핵을 개발하지도 않았다.
北核이 한반도 안보의 주요 사안으로 떠오른 것은 1990년대부터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는 1990년부터 국제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1992년 중 재처리시설 완료, 2∼3년 이내에 핵폭탄 보유가능’이라는 전문기관의 신뢰할 만한 정보분석이 제시됨에 따라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유지에 심대한 위협요인으로 등장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서도 비밀리에 핵개발을 진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非核化’(1991년 11월8일), ‘한반도의 核不在’(1991년 12월18일)를 선언함으로써 核개발을 위한 핵심시설인 재처리 시설을 갖지 않겠다며 대응 수단을 자진 포기해버렸다. 1992년 북한정권과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핵무기 개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북한의 기만전술이었다.
1993년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을 때 김영삼 정부는 “우리도 탈퇴하겠다”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막고 對北 억지 수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키는가 하면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미국에 맡기고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4억5000만 달러의 불법자금을 제공했다.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핵문제를 꺼내지 못했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후 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수정해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려 하자 이를 막았다. 노무현 정부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는데도 韓美(한미)연합사를 해체해 對北억지력을 약화시키는 利敵(이적)행위를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2010년 천안함 爆沈(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을 겪고도 단호한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이 핵무기 小型化(소형화)에 성공해 미사일에 탑재, 원자력 발전소 등 전략 요충지를 겨냥하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2015년 韓美연합사가 해체되고 미군의 대규모 증원 여부에 의문이 들 때, 양적으로 국군의 두 배나 되는 북한군이 핵무기와 從北세력을 믿고 전면 南侵(남침)을 개시한다면 핵무기를 갖지 않은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도 核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절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국가가 과학기술자들에게 特命(특명)을 내리면 2년 안에 정밀한 核폭탄 100개를 지하실험을 할 필요도 없이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왜 核폭탄을 가져야 하는가?》는 그런 自衛的 핵무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머리글_ 核개발 명령을 누가 내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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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朴正熙의 核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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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원자력 大國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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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北核 후원자는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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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이스라엘式 비밀 핵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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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核에는 核―自衛的 핵무장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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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1945년 10월 일본에서 났다가 이듬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현재의 釜慶大)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 제대 후 1971년 부산의 국제신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경찰, 공해, 석유분야를 다루었는데 1974년 중금속 오염에 대한 추적 보도로 제7회 한국기자상(취재보도부문·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취재를 했다. 1980년 6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월간잡지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일했다. 저자가 月刊朝鮮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月刊朝鮮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도로 1994년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제정)을 수상했고 <6·29 선언의 진실> <12·12 사건-장군들의 육성 녹음테이프> 등 많은 특종을 했다. 1996년부터 1년 간 국제 중견 언론인 연수기관인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재단에서 연수를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分社하면서 (주)月刊朝鮮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조갑제닷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석유사정 훤히 압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有故≫ ≪국가안전기획부≫ ≪軍部≫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朴正熙≫(전 13권) 등을 출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