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시제를 지냈습니다

2009. 7. 22. 00:17☎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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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시제를 지냈습니다
04.11.23 15:34 ㅣ최종 업데이트 04.11.23 18:25 윤도균 (ydk3953)
나의 성씨는 파평 윤가이며 나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파평산 인근이다.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고향 마을 용산동에는 파평윤씨 8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으로 집성촌을 이뤄 살던 종친들이 피난을 떠났다가 더러는 객지에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잡고 살다보니 고향 마을에도 점차적으로 타 성씨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해 현재는 파평윤씨 종친들이 마을전체 인구의 과반수 정도가 되었다.

우리집 또한 6·25 전쟁때 피난을 갔다가 아예 부모님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으시고 객지에 뿌리를 내려 살게 돼 파평면 마산리 용산동 마을은 말로만 고향일뿐 피난 나와서 살게 된 마을이 제 2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난을 나오기 전에 살던 용산동 마을은 우리 가족은 물론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종친들에게는 명실 상부한 고향이기에 선대 조상님들에 묘가 아직도 그 고향 마을에 남아 있어 매년 벌초 때와 시제 때가 되면 우리 가족은 물론 외지에 살고 있는 종친들이 모두 고향마을을 찾는다.

특히 매년 이맘때 음력 시월만 되면 외지 각처에 살고 있는 종친들이 고향 마을 선산에 묻히신 선대 조상님들의 시제를 모시기 위하여 찾아오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전까지만 하여도 시월이 되면 고향의 종중땅 논과 밭을 위토를 주어 그곳에서 텃도지를 받어 조상님들의 시제를 거창하게 차려 종친들이 조상님을 모셨다. 급속도로 변천하는 시대의 흐름으로 인하여 세태도 바뀌어 이제는 농촌에서 땅을 묵혀 버릴지언정 텃도지를 내면서 농사를 짓는 경작인들이 차차 없어지게 되니 자연히 호화롭게 모시던 조상님들의 시제가 거의 약식으로 차리는 실정이 되었다.

게다가 농촌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하늘에 별따기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고 보니 이제는 80세를 넘기신 종친 어르신 몇 분이 농촌에서 조상님 모시는 시제를 주역으로 일을 하시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종친 노인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보니 이제는 고향에서 시제를 모시는 종친들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2003년도에 아직 생존하여 계신 80대 이상의 종친 어르신 몇 분들이 서둘러 주선하여 고향마을 연못가에 으리으리 하지는 못하지만 정성을 들여 아담한 재실을 짓고 이곳에 "용산제"라는 현판을 달고 매년 시제날이면 30여 곳에 산재되어 있는 조상님들의 시제 모시는 일을 새로 건축한 재실 한 곳에서 나누어 지내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산 저산 찾아다니며 시제를 모시는 것보다는 상당히 간편하여 바람직한 면이 있기는 한데 문제는 점심을 먹고나면 시제에 참석하였던 종친들이 너도 나도 모두 볼 일이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도에 빠져 버리고 나니 나이드신 종친들 몇 분들이 남아 아직 못다 모신 조상님들의 시제를 모셔야 하는 쓸쓸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 앞에 근 50여년간 우리 파평윤씨 용산동 문중의 회장(유사) 업무를 맡아 일을 보아 오셨던 어르신께서 이제는 당신도 나이도 있고 힘이 들어 더 이상 종사 업무를 보실 수가 없다고 사의 표명을 하시며 종친들 앞에서 나를 거의 강제로 회장 업무를 보게 밀어붙이셔 나는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종친회 회장 임무를 맡게되었고 올해 그 첫 시제를 모시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시제에 참석하였던 종친들이 오전 시간만 끝나면 모두 자리를 뜨는 것을 예상하고 올해는 아예 30여분의 조상님들의 시제를 합동 시제로 1부와 2부로 나누어 2번에 끝낼 수 있도록 계획했다. 위패(지방)와 축문도 과거 시절부터 전해오는 유교문화 제례방식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현대사회 생활과 접목이 될 수 있는 방안으로 개선하여 준비했다.

사전에 젊은 종친들에게 인터넷으로 종친회 카페를 만들어 시제 모시는 제례방식에 대하여 상의를 거쳐 드디어 2004년 11월 21일(매년 음력 시월 2째주 일요일) 용산제에서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연세가 드신 종친 어르신들께서는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모시는 시제에 대하여 100% 동의는 못한다 하시더라도 어느 정도 머리를 끄덕이시며 아무개가 참 잘한다는 칭찬을 하시기까지 하는 가운데 나는 일사천리로 사전 준비한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개선된 시제 방식에 대한 동의를 요청을 하며 시제를 모시다보니 뜻밖에도 시제 참석 종친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여 시제를 모셨다.

시제를 마치고 보니 12시 30분이었다. 곧바로 점심식사후 나는 아예 내친 김에 파평윤씨 대종회 결산보고와 재산목록을 유인물로 만들어 나누어 드리며 발표를 하며 대종회를 개최했다. 사방에서 종친들이 너도 나도 올해 시제 정말 모처럼만에 종친들이 다함께 모여 시제를 모시게 되어 뜻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종친회 돌아가는 형편은 나이드신 어른들 몇 분들만 대충 어림잡아 파악하고 계시어 젊은 종손들 입장에서는 늘 우리 종친회의 재산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하고 궁금하던 사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여 종친들에게 유인물로 나누어 주었더니 진작 이렇게 열린 종친회가 되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시제를 마치고 돌아와 나는 즉시 회의 내용과 찍은 사진을 정리해 시제 모습을 기사로 작성하여 종친회 카페에 실어 놓으니 뜻밖에도 인터넷을 하는 젊은 종친들이 너도 나도 "회장 아저씨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환갑이 지나신 아저씨께서 젊은 사람들도 쉽지 않은 종친회 카페까지 운영을 하시며 종친회 발전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회장 아저씨 화이팅!!"이라며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힘은 들었지만 종친회장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 용산제 현판
ⓒ 윤도균

▲ 용산제 건물
ⓒ 윤도균

▲ 제상 차림 전경 모습
ⓒ 윤도균

▲ 종손께서 잔을 올리시는 모습
ⓒ 윤도균

▲ 시제에 참석한 제관들이 배례를 하는 모습
ⓒ 윤도균

▲ 배례후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후손들의 모습
ⓒ 윤도균

▲ 제례 준비를 한 모습
ⓒ 윤도균

▲ 시제가 끝난후 식사하는 모습
ⓒ 윤도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