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빛바랜 산행 사진을 CD로 굽다

2009. 7. 21. 23:50☎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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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빛바랜 산행 사진을 CD로 굽다
현재의 문명도 먼훗날엔 아련한 추억일 뿐
03.09.04 14:11 ㅣ최종 업데이트 03.09.04 18:31 윤도균 (ydk3953)
▲ 소령원에서 기념사진
ⓒ 윤도균

▲ 고령산 정상에서 (뒷줄 왼쪽이 필자의 모습)
ⓒ 윤도균
40여년 전 내가 살던 농촌마을(파주 탄현면 법흥리 약산동)엔 청소년이 남녀를 포함하여 150여명이 넘을 정도로 마을에 청소년 자원이 남아 돌았다.

6.25사변으로 인하여 피난을 나온 피난민들이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지를 못하고 정착을 하게 됐고, 산아제한은 삼신(三神上帝, 三神帝釋, 三神帝王)이나 조상님에게 죄짓는 일처럼 생각을 하였기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부부는 보통 아이들을 5~6명, 심지어 다산의 경우에는 12명 정도를 낳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시대적인 후진국 면모를 탈피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겪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농촌에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 숫자가 진학하는 사람들 보다 두 배는 많게 돼 많은 이들이 농촌에 잔류하며 소년시절부터 농촌을 지켜야 했다. 농업이라고 해봐야 고작 정해진 손바닥만한 땅 덩어리에 농사짓는 사람들의 수만 많았던 것이다.

당시엔 우리나라 인구의 70% 정도가 농민이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농촌 일은 기계는 생각도 못하고 마치 중공군의 인해전술 같이 사람의 힘에만 의존하는 농법으로 꾸려 나가야 했다. 그래서 당시엔 모내기 하는 날이면 모내는 사람 25명 정도에 모내기를 거들어주는 '모쟁이'의 수가 보통 7~8명이 되기도 하였다.

점심 때가 되면 모를 내는 논으로 점심을 이고 들판으로 향하는 아낙네들의 행렬이 어림잡아도 100명 이상이어서 마을 들판 한 복판에 있는 함포뚝을 빽빽하게 채우기도 했다. 철저한 인해 전술 농법의 표본이었다. 이렇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리가 정신없이 25~30일 정도 모를 내고 나면 이어서 애벌 김매기가 끝나고 두벌 김매기 전 잠시 며칠간의 농한기 비슷한 틈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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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을 떠나는 일행들의 모습
ⓒ 윤도균
이때를 이용하여 마을 청년들은 끼리끼리 단합을 하여 지역 내에 있는 유명한 산이나 냇가로 캠핑을 떠나곤 했다. 그 시절엔 등산이란 말은 전혀 생소한 말이었다.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산행을 하기 위하여 나선 일도 모두 캠핑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일행들의 캠핑 장비가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정말 웃기지도 않는 가관이다.

마을에서 애경사(결혼식 또는 상가) 때 사용하는 마을공동 차일(遮日: 햇빛을 가리려고 치는 포장)을 둘둘 단단히 묶고 길다란 나무로 끼어 앞에서 한 사람 뒤에서 한 사람이 메거나 들고, 커다란 양은솥과 식사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몇 꾸러미의 보자기에 싸거나 손가방에 챙겨 30리 길이나 되는 곳을 걸어서 다니곤 했다.

아마 요즈음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땐 마치 북한사람들의 남루한 단체행동 정도로 보이는 초라한 캠핑 행렬이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을 해보면 문화적인 면에선 미개하게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시절의 캠핑 모습이 요즈음 너도나도 산으로 향하는 등산행렬보다 훨씬 정감이 있고 인정있고 낭만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경오염이 전혀 안된 자연 상태여서 더 좋았다.

▲ 산 기슭 냇가에서...
ⓒ 윤도균
산기슭에 차일을 쳐놓고 그 앞에 흐르는 시냇물에 목욕을 하고 다시 그 흐르는 물로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식수도 그물로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 탈도 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을 팔고 있노라면 발밑에 가재가 살금살금 기어와서 발을 깨물 때도 있었고 1급 청정지역에만 산다는 쉬리 같은 이름모를 작은 물고기들이 물에 담긴 발을 콕콕 깨무는 듯 입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혹시 발 다리에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물고기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산행을 하기 위하여 고령산을 오를 때도 우리들은 검은 고무신이나 검은 운동화를 신고 오르곤 했다. 또 그때 그 시절엔 산에 오르려면 으레 단장(스틱)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되다시피 하여 너도나도 모두 단장을 짚어야 했다. 단장 감으론 뭐니뭐니 해도 노간주나무가 최고였다.

그 시절에 그렇게 나와 함께 캠핑을 다녔고 산행을 하였던 친구들이 어느덧 60대다. 이제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하며 이렇게 40여 년 전의 빛 바랜 산행기를 추억으로 그리며 쓰고 있다.

▲ 오락시간 중에 찰칵
ⓒ 윤도균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지고 발전하여 아름답고 우수한 양질의 장비들을 지니고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건강을 위하여 산행을 한다. 또 산행기를 인터넷에 올려 전국의 동호인들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이 찬란하고 현란한 문화도 앞으로 40여년 후엔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쯤되면 지금의 이런 모습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낙후된 모습으로 보여 '정말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 빛 바랜 산행기를 대하며 하릴없는 늙은이가 구질구질하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세태까지 미주알 고주알 우려먹으려 한다고 핀잔을 할 수도 있겠다. 낡아 빠져 더 이상 보관이 불가능한 나의 젊은 시절의 사진첩 앨범을 그냥 버리기엔 너무도 아까워 CD에 구워 놓으려고 작업을 하다 내친 김에 옛날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라 이렇게 빛 바랜 산행기를 써보고 있는 것이다.

▲ 고령산 헬기장에서
ⓒ 윤도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