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널 산행 소리에 따라나선 북한산행 길에서 난 뺑빼이를 돌고 왔지요[사진]

2006. 6. 30. 18:32☎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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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널 산행 소리에 따라나선 북한산행 길에서 난 뺑빼이를 돌고 왔지요

 

 

 

  

 

북한산

 

지구상에서 탐방객이 가장 많은 산
 

북한산국립공원은 우리나라 국립공원중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원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8.5㎢(약 2,373만평)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서 울특별시의 도봉구 등 총 5개구와 경기도 고양시와 의정부시를 끼고 있는 도심 자연공원 으로, 2천만 서울 시민들의 자연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북한산 백운대(836.5m)와 인수봉(810.5m), 도봉산 자운봉(739.5m)과 선인봉 등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진흥왕순수비, 북한산성 등의 문화자원을 지니고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은 도시 에 둘러싸인 '고립된 생태섬'이지만 그 안에 1,3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녹색 허파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2천만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인 북한산국립공원은 장점은 무엇보다 수도권 어디에서도 접근이 비교적 쉽다는 점일 것이다. 수려한 자연풍광과 편리한 교통편 때문에 연평균 탐방 객수가 약 500만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우이령을 중심으로 크게 북쪽의 도봉산과 남쪽의 북한산 지역으로 나 뉜다. 북한산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가 있는 북한산의 옛 이름은 삼각산으로,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를 서로 이으면 삼각형이 형성되기 때문에 이런 산이 름을 얻게 되었다.

북한산국립공원 가운데 또 다른 축을 이루는 도봉산은 자운봉 정상 부근에 포대능선과 칼바위암릉, 만장봉과 주봉 등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어 도봉산만 전문적으로 다니는 산행객이 생겨났을 정도로, 일요일이면 도봉산 능선에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잘 발달된 거대한 화강암벽이 있어 전문 산악인들의 암벽 훈련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들 봉우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산악운동은 훗날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북한산성 北漢山城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지정연월일
:
1968년 12월 5일
  시 대
:
조선시대
  규모·양식
:
543,795㎡ 석축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 외, 서울특별시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백제 개로왕(蓋鹵王) 5년(132)에 이미 나타나고, 신라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眞興王)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진평왕(眞平王)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 800명과 함께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한산성(漢山城)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顯宗)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삼각산에 옮겨왔다. 고종(高宗) 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삼각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보현봉·만경대·백운대·원효봉·대서문·의상봉·증취봉·나한봉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 된다.

 

그 중에서 수문(水門) 북변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 292보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 821보는 금위영에서, 수문 북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북변에서 용암까지 사이에 수문(높이 16척, 폭 50척),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이 있고, 용암 북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 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이 있으며,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승군 총섭(摠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여 거의 완공 단계에 있다.

 

- 서울시문화재 홈피에서 발췌 -

 



산행지도

 

 산행일시  : 2006년  6월 28 일 (수요일)

  산  행 지 : 삼각산

   산행코스 : 녹번역- 탕춘대성 암문 - 탕춘대능선- 향로봉 정상- 비봉-사모바위- 문수봉 정

                        상- 청수동암문- 남장대지-행궁터-중성문-등운각-구파발역

   산행인원 : 20명

  산행시간 : 6시간 반

  

 

사람이 살다 보면 때론 좋은 일도 글구 나쁜일도 있지요 ㅋㅋㅋ 아마도 그말은 날 비웃기 위해서 생긴 말이 아닌가 생각을 했지요 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수요산행행을 떠나는 날인데 시상에 이눔의 노릇을 어케 해야 하나요? 내가 이렇게 입찬 소리 하는것 아닌데... 하지만 어케 하나요 지난 토욜 잘 아는 친구의 아드님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 축하를 위하여 하객으로 참석하여 먹은것은 술도 아닌 갈비탕 한 그릇밖에 없는데...

 

느닷없이 밤 12시 여늬 날처럼 근무를 하고 있는데 어랍쇼 다리 힘이 빠지며 맥이 빠지네요 그렇다고 이눔의 팔자 뒤웅박 팔자가 되어서 어디 자리잡고 누워 있을 여유가 없네요 그러니 죽지못해 살아 있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간신히 새벽 2시에 학원문을 닫고 퇴근하여 일단은 넉 다운이 되었지요 구토광란의 요란한 회오리 바람을 다 겪으며 잠을 잔것인지 기를 쓰며 버둥 거린것인지 하여간 그밤은 그렇게 난생처음 고역의 밤을 새우고 말았지요

 

산에 다닌 10여년 동안은 입찬 소리가 아니라 아무리 맹렬추위가 몰려 올때도 감기 한번 안들고 나름대로 강인한 체력을 유지하며 산다고 친구덜은 나더러 대단하다 했는데 아니 이거이 무시기 아닌 밤중에 홍두께 인가요 난데없이 와 벼란간 토사구팽을 하는가 말입니까? 그리고 나니 그눔의 후유증이 당장에 다리가 비실비실 비비 꼬이질 않나 나참 나가 완전히 한 물간 느낌드는것 있지요 아마도 무언가 열병을 앓은듯한 생각을 하지요

 

이를 보다못한 도영 할마이 평상시 건강할때 진작 해줄것이지 시상에 나가 송장같은 모습으로 벌러덩 누어 있는 모습을 봉께 겁이 덜커덩 났을까요 서둘러 강화에 사는 큰 처남에게 부탁하여 보신용 한 마리를 사오고 날리를 치대요 하여간 그 덕을 보았는지 화욜은 그렁저렁 산 송장 모습은 조금 피해 거를만 하여 아침운동 나가 또 8킬로를 걷고 달리고 말았지요

 

그랬더니 도영 할마이 나 이젠 모른다구 펄펄뛰네요 다 죽은 송장 보신 시켜 살려 놨더니 또 그걸 못참고 운동을 하고 있다구 그러면서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내가 본 표정은 마치 낼은 수요 산행이구 지랄이구 때려 치우고 해주는 밥이나 처먹고 군소리 하지말고 쳐박혀 있으란 눈치로 째리며 흘기는데 흐미 증말 여자가 앙심 먹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나데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살그머리 꼬리를 내리고 응 나 괜찮아요 할만해요 하구 용기를 보이지만 사실은 아직도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상황이지만 그눔의 수요산행 참가 하려는 욕심에 애써 안 아픈척을 하지요 으이그 나가 6학년 3반이나 인생을 살고서도 아직도 울 도영 할마이 눈치밥을 먹고 사네요 증말 어떤 산님들 보면 나가 남자 망신은 다 시킨다고 욕을 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 솔직히 조금도 변명할길 없네요 인정 합니다 ㅋㅋㅋ

 

그리구선 수요산행 공지를 보니 삼각산 탕춘대능선 어쩌구 저쩌구 했구 그리고 더욱 이상한것은 북한산을 가려면 의례히 구파발 종점에서 만나야 하는것이 일반 상식인데 어랍쇼 이건 아예 불광동도 아닌 녹번동에서 9시 반까지 만나기로 되어 있으니 그렇치 않아도 궁금한 일은 참지 못하는 내 승질머리가 어케 그 묘령의 코스를 포기하고 집구석에 붙어 있을 수가 있나요? 도영 할마이 앞에 치신멀리 없이 있는 아양 없는 아양 다 떨어서 간신히 도영할마이 챙겨주는 도시락 배낭에 확 쑤셔넣고

 

퓨휴하고 긴 한 숨을 내쉬며 걸음아 날 살려라 부평역으로 향하지요 그런데 웃기는 일이지요 엇 저녁까지도 후들 거리던 세 다리가 글씨 멀쩡하게 걸어 다니네요 ㅋㅋㅋ 아니 청파님은 와 다리가 세개야 하고 의아해 하시지요? ㅋㅋㅋ 맞아요 남자덜은 다리가 셋이랍니다 ㅋㅋㅋ 내가 미첬지 나이 값도 못하고 아니 지가 한 생전 청춘인줄 착각을 하고 있는것 아닌가 나도 잘 모릅니다 하여간 조대장도 좋고 그리고 사람들이 좋고 또 더욱 좋은것은 늘 새로운 뉴-페이스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떠서 그러지요

 

매일같이 하루 밤잠이라고는 고작 3시간 4시간을 자는 인생을 살다 보니 그래서 일까요 언제 어느곳에서던지 잠시 토끼잠을 자는것이 그렇게 달 수가 없어요 이날도 부평역에서 종로 3가 구간을 나름대로 늘어지게 단잠을 자고 3호선을 갈아타고 녹번역에 하차하여 드뎌 그리운님들을 만나지요 아니 근디 놀라운것은 시상에 늘 나와 함께 산행을 하시는 수요산님덜 어쩌면 그렇게 철저히 이중성을 가지고덜 사시는지요?

 

조대장이 잠시 아퍼 2주간 쉬게되어 대타로 최윤영님께서 산행대장을 하였을땐 연속 2주 수요일이면 비가 내리는 우중 산행이긴 했지만 고작 6명 또 한 번은 13명 수준이더니 아니 조대장 퇴원하여 삼각산 간다하니 단번에 20명이 나오다니... 증말 그 인기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네요 아니 내가 무슨 격세지감을...느낀다면 최윤영(연산동)님께서 느껴야 할것이지 ㅋㅋㅋ

 

근디 더 웃기는것은 시상에 어쩌면 열길 땅속 깊이는 알수 있어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 최윤영(연산동)님은 대타로 하던 산행대장 짤리고 나더니 사연이야 물론 다른데 있겠지만서두 으쩌면 연짱 두주나 수요산행을 참석을 하지 않네요 다른 산행은 늘 그 샛 하얀 이를 내보이며 호탕스런 웃음을 팔면서 잘도 다니면서요 ㅋㅋㅋ 증말 시상은 요지경 속 같네요 대장 짤렸다고 안나오는 사람이나 대장 바뀌었다고 문전 성시를 이루는 울 산님들이나 증말 그 묘한 감정을 알 수가 없네요 ㅋㅋㅋ

 

기나 저나 하여간 나야 늘 대장되기는 포기한 사람이고 우리산내음 수요산행팀에서 승진같은것은 꿈에도 없승께 그렇게 편안한데 ㅋㅋㅋ 누가 시켠 주고? ㅋㅋㅋ 그렇게 또 한 주만에 일행들을 만나 우리들은 녹번동 언덕받이 달동네 마을길을 지나 힘겹게 들머리 구간이라고는 누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주택골목을 요리조리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치 하늘위에 자가용 하체 부분이 올려다 보이는 다락계단길을 올라서니 드뎌 이날 산행의 들머리 구간을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시작된 등로에는 요즘 전국적으로 아카시아 나무에 노오란 단풍이 들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몇일전 강화에 갔을때 그곳에도 그런 현상을 만났는데 정말 이상하게 아카시아 나무에 노오란 단풍이 지며 고사 단계가 시작이 되고 있는 모습을 이곳 등로에서도 만날 수 가있네요 아마도 농촌출신인 나의 직감으로는 올해 유난히도 강수량이 많아 다소 지나친 습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카시아 나무의 특성상 생겨난 발병이 아닌가 돌파리 진단을 해보지요

 

정말 그나 저나 내년엔 우리나라 국민들 아카시아 꿀  구경도 못하게 되는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지금은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을 이루어 아카시아 나무가 다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 산림이 황폐하였던 1960년대 그시절 우리나라의 녹화사업에 일익을 크게 담당하며 공로를 세운 아카시아 나무가 원인 규명도 제대로 안된 상태로 고사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되니 왜 일까요 가슴이 답답하고 어케 보면 꼭 내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처량한 생각까지 드는것 있지요

 

 

산행을 온것인지? 고적 답사를 온것인지? 조대장의 탕춘대산성 이야기가 일행들의 산행길

발걸음을 잡고 이어지고 있네요 산행왔다 역사공부 하고 가재잡고 도랑치고 일거양득이지요

 

뜻밖에도 탕춘대능선길은 마치 우리들이 단체로 소풍이라도 나온듯 널널하게 이어지는 산행로에 탕춘대산성길을 지나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조대장의 해박한 탕춘대산성 역사 이야기가 나를 감명먹게 하네요 그러면서 속으로 아니 저 조대장 저 사람의 상식은 어디에서 바닥을 볼 수 있능거야 산이면 산 역사면 역사 시상에 몰르능거이 있어야 나 같은 퇴물도 한 다리를 낄 수가 있지 ...

 

계속되는 산행길 이야기에 곁들여 내가 아우 오늘 산행 시간이 어떨까? 하고 물으니 조대장 하는말 형님 오늘은 4시간 반 정도 널널 산행으로 이어질 껍니다 하고 아주 떡떠먹듯 장담을 하면서 향로봉도 비봉도 문수봉도 모두 우회를 할것이니까 아마 다른날 산행 보다 쉽게 끝날껍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어케 그말을 안 믿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굳세게 조대장 그말만 믿고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산행을 하고 있는데...

 

 

탕춘대성곽

 

홍지문 및 탕춘대성 弘智門 및 蕩春臺城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
지정연월일
:
1976년 6월 23일
  시 대
:
조선시대
  규모·양식
:
일원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 4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인왕산 성벽과 탕춘대성을 연결하는 흥지문 또는 북한문 이라 한다. 좌측으로 물이 흐르는 오간수문이 있다.1921년8월 홍수로 유실 되었으나 77년 복원 하였다.서울 성곽과 북한산성의 방위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숙종44년(1718)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봄에 완성되었다.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 시키고 있다. 탕춘대성 이란 칭은 현재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리워진 것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온 성벽은 세검정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산중에 있는 성벽이라 보존이 잘 되었다.서울 도심에서 바라본 인왕산, 가운데로 성벽길이 보인다. 세검정 흥지문과 청와대 뒤편 북악산 성벽과 연결 되어진다.인왕산 초입 교촌동 성벽은 인왕산 성벽으로 연결 되어있다.

 

아주멀리 향로봉이 올려다 보이네요

 

 

향로봉 방향으로 탕춘대능선의 흔적을 따라 가지요

 

 

건너편 방향에 족두리봉이 보이네요

 

 

점정 가까워 지는 향로봉을 바라보며

 

 

 

 

향로봉 가는 암릉길에서 일행들과 함께 비봉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어 두지요

 

 

향로봉 암릉길

 

어랍쇼 분명히 나더러 향로봉도 비봉도 우회를 할꺼라고 약속을 해놓고선 시상에

조대장 누구 기죽일 있나요 앞장서 성큼성큼 향로봉을 우회는 커녕 치고 오르네요

 

 

쉬! 조용히 우리들은 지금 주간 월담하여 집단 탈옥중 입니다

 

 

암벽틈에 핀 야생화

 

 

향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비봉 가는길

 

 

비봉가는 암릉길

 

 

가까워지는 비봉

 

 

 

 

 

 

 

 

지난 겨울 비봉에 올라 암벽코스를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일행들의 릿지모습을 촬영을 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애지중지 애용하던 자이툰 부대 모자를 날려 저 암벽으로 날려 버렸지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찿아 보고 싶지만 너무나 험준한 암벽구간이 되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해도 쉽지않은 어려운 구간이되어 안타까운 마음만 회상을 하며 그냥 지나기로 했지요

 

 

힘내세요!

 

향로봉 우회를 약속하고 그냥  치고 넘어 이번에는 설마  비봉에서는 우회를 하겠지 하고 조금은 널널한 마음으로 비봉앞에서 서니 슬쩍 우측으로 우회로를 알아 보는것처럼 모션만 취하드니 조대장 맴이 바뀌었는지 또 비봉도 정상적으로 암벽을 통과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그리고 우리들은 깩소리 한 마디 못하고 기를쓰며 엄마 젓먹던 힘까지 소진을 하며 일행들 전원 안전하게 비봉도 통과를 하지요

 

그덕에 우리 일행들은 힘은 들었지만 아니 죽을 기를쓰며 뺑빼이를 도는 힘든 암릉길 산행 묘미를 만끽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북한 비봉에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를 껴앉을 수 있는 기쁨도 맛보게 되지요 내가 조대장을 알기전엔 수도 없이 이 구간 산행을 할때면 우회를 하면서도 솔직이 난 저 위에 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는지도 모르며 지나곤 했지요

 

 

북한산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용산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이곳에 세워진 비는 모조품 진흥왕순수비지요

 

종 목 사적 228호
명 칭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遺址)
분 류 비지
면 적 1,697㎡
지정일 1972.07.24
소재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3
시 대 신라 진흥왕
소유자 국유
관리자 종로구


북한산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비의 옛 자리이다.

북한산 비봉에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는  비석을 세운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져 오다가 19세기 전반에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한산 비봉에 있는 신라진흥왕순수비 에는 진흥왕이 북한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여러 고을에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북한산비의 ‘남천’이란 글자를 통해 4개의 진흥왕비 가운데 가장 늦은 재위 29년(568)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으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오히려 북한산비를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은것 같다. 진흥왕이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다닌 것은 555년 이외에는 달리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비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553년 이후부터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 이전의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이곳에는 비석이 놓였던 자리와 비석을 꽂았던 홈이 남아 있으며, 비석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개토왕비 다음가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1934년에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고 한국전쟁시 총탄자국이 생기는 등 보존대책이 필요하여 1972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문수봉으로 가기 위하여 하산중이지요

 

 

코뿔소바위

그위에 수잔나님 마치 자기가 무시기 타이타닉 주인공이라도 된듯한 착각에 빠져 있네

요 하여간 엄청남 담력이 있는 대담성이 마음에 드네요 난 후들후들 사지가 떨리는데...

 

 

 

 

멀리에 사모바위가 보이네요 줌으로 댕겨 봤지요

 

 

 

 

사모바위 아래 아름다운 돌담터위에 모여앉아 일행들이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을 먹지요

 

 

측면에서 본 사모바위

 

 

먹었으니 이제는 또 가야지 문수봉을 향하여...

 

 

문수봉 가는길에 만나는 통천문

 

 

 

 

자! 이제 부터 한 사람씩 질서 있게 문수봉 정상을 향하여 릿지로 오르지

요 카메라맨인 난 특별히 먼저 선등하여 일행들 모습을 디카에 담지요

 

 

주변 조망

 

 

기암

 

 

급작스런 맹장으로 수술을 한 후 보름여간 산행을 접고 산행길 칼을 갈았던 조대장이 이날은 아주 작심을 한듯 일행들 전원 비봉을 릿지로 오를것을 명령하여 울덜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박박 기어서 비봉을 오르지요 심지어 어떤 산님은 울먹 거리는 모습까지 보이지만 우리 조대장 그런 사소한 감정은 애써 못 본척 넘기며 무서븐 채찍질로 일행들을 전원 무사히 비봉 정상을 오르는데 성공을 하지요

 

그리고 그 정상에서 일행들 울쌍을 짓던 아줌씨 난생처음 좋은 경험을 했다며 다소 흥분된 모습으로 이날 산행이 생애 최대의 좋은 산행 경험이었다며 생생한 비봉 난 코스 암벽구간 릿지로 오른 경험담을 털어 놓으며 기뻐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런 일행들 모습을 보면서 더욱 산행길 안전을 환기 시키는 조대장의 모습에 역시 대장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요

 

 

안전 제일!!

 

 

 

 

고무신바위라는데 내 눈엔 전혀 고무신 같지 않네요 ㅎㅎㅎ

 

 

문수사

 

 

문수봉 저곳을 오르기 위하여 우리들은 가고 있어요

 

 

 

 

암벽사이를 타고 불어오는 산 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니지요 얼마나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 오는지 아마 그 체

험을 못하여 보신분들은 이해가 쉽지 않으실껍니다 마음같아선 하산 하지 말고 이곳에 남고 싶을 정도이지요

 

 

어케 보면 쉬울듯 한데 정작 건너뛰어 반질반질한 암벽을 오르기란 정말 쉽지 않지요 이 구

간을 요령있게 오르는 실습을 개개인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실시하며 문수봉을 오르고 있지요

 

 

 

 

문수봉 정상에서 건너다 보이는 국기가 계양된곳을 문수봉 정상이라

하지요 하지만 이곳은 안전을 배려한 일환에서 만들어진 정상이지요

 

 

문수봉 하산구간 릿지코스를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 여성 산님

 

 

 

 

청수동암문에서 하산을 하기로

 

 

 

 

 

 

약수터도 지나고

 

 

어영청유영지도 지나고

 

 

 

 

계곡엔 이미 실 폭포도 보이고...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87호
명 칭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9.09.03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소유자 국유
관리자 고양시


북한산성 내의 대성암이라는 암자 아래에 놓여 있는 비로, 수비를 맡고 있던 금위영의 터를 옮긴 후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 개루왕 5년(32)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산성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자 숙종 37년(1711)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되었다. 이 산성의 수비대장은 영의정이 겸하였고,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수비하였다. 원래 금위영은 동소문(東小門)안에 있었으나 그 지대가 높아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輔國寺)아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비는 누워있는 일종의 와비(臥碑)의 형태로, 뒷면은 흙속에 묻혀있고, 비몸 한쪽으로 낙수면을 새긴 지붕돌의 일부가 보인다. 비에 새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숙종 41년(1715)에 이 비를 세웠으며, 도제조 이이명이 비문을 지었다 한다.

 

 

 

 

북한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끽 하세요

 

 

 

 

 

 

 

 

 

 

 

 

 

 

 

 

 

 

 

 

 

 

 

 

 

 

신세대 허수아비

 

 

장마 기간이라 날씨는 다행이 흐린 상태가 되어 직사광선을 피하는 산행을 하였지만 생각만 하여도 스릴 넘치며 다리가 후들 거리는 삼각산 산행길중 묘미의 등로 향로봉 비봉 문수봉을 일행들 전원 릿지의 진수를 맛보며 6시간여가 넘는 산행을 하고 나니 흐르는 북한산 계곡물에 텀벙 빠져들고 싶은 충격이 굴뚝 같았지만

 

그걸 꾹 참고 북한산 먹자 거리까지 내려와 일행들과 시원한 냉막걸리를 한 사발 따라 이날 산행을 자축하며 건배를 하고 주욱 단숨에 들이키는 산상 막걸리 맛을 아시나요? 증말이지 이 맛을 어케 그 무슨 주류에 비유 할 수 있나요? 웬만하여선 완샷으로 술을 하지 않는 나지만 이 기가막힌 냉막걸리 한 사발을 어케 단숨에 안 마실 수 있나요 크윽 조오타!!

 

 

저의 길고 긴 산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산님들에게도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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