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휘날리는 백마고지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라

2024. 1. 16. 22:37☎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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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백마고지에 휘날리는 태극기

 

23년 11월말로 지속 해오던 일이 종료가 됐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출근을 안하면 좀 느긋하게 여가 시간을 보낼줄 알았는데, 바쁘기는 출근할 때 보다 더 바쁘다. 사방팔방 여기 저기서 대추나무 연걸리듯 약속된 모임에 나서다 보니 그렇게 12월 한 달은 어영부영 보낸 것 같다.

 

2024년 새해 1월 13일 오후다. 나는 자랑이 “걸으면 건강하다 걸어서 하늘까지 가자”라는 스로건을 내걸고 하루도 빼지 않고 평균 2만보 이상을 걸은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중국발 괴질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산이 보약이다 나는 산으로 보약먹으러 간다”며 수십년간 산행을 해왔다.

 

그런데 코로니 핑계, 이핑게 저핑게로 한동안 제대로된 산행을 못하다 보니 자주 산내음이 그립다. 1월 13일 오후 1970년도 현역시절 만난 전우 최명규 병장에게 전화해 백마고지, 연천 역고드름 보러 다녀 오자고 전화하니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무조건 OK다.

 

기상청 예보에 의하면 14일은 많은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철원지역은 인천이나 서울지방 보다 기온이 낮은 지역이니, 비가 와도 철원지역은 기온이 많이 낮은 지역이니 비는 아니고 눈이 내릴 것 같아, 걸망에 우비와 우산을 챙겨넣고 부평역에서 7시 연천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데 무려 2시간 30여분이 걸린다.

 

이어 연천역에서 백마고지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무려 1시간여 기다려 타고, 백마고지에 도착하니 오전 10시반이다. 일찍 떠났지만 벌써 길에서 보낸시간이 무려 3시간이 넘는다. 예전에는 신탄리역까지 열차 운행을해, 신탄리역에서 백마고지행 버스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연천까지 전철이 개통되어 연천역에 하차하여 백마고지행 버스편을 이용하면 된다. 백마고지에 하차하니 잔뜩 찌프린 하늘에 하얀눈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내린다. 비가 아니고 눈이라 천만다행이다. 야전점퍼 후드를 눌러쓰고 보무도 당당히 걷는다. 그러나 백마고지까지 왔던 더러의 사람들은 눈 때문에 백마고지행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에 신탄리역까지 운행하던 경원선 국철은 왜 무엇 때문에 운행을 안하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예전엔 신탄리 하차해 백마고지, 고대산, 연천 역고드름을 보러 갈수가 있었다. 그런데 연천역은 전철을 새로 개통하고 신탄리행 국철은 운행을 안한다. 그바람에 신탄리 지역 상권은 거의 폐점 상태다.

 

백마고지역에는 벌써 눈이 5cm는 내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그런데 나보다 한발 앞서가는 청년은 슬리퍼에 양쪽 양말 뒷꿈치가 뻥 뚫린 것을 그대로 신고 발이 시렵지도 않은지, 차 다니는 신작로위를 걷고 있다. 저 잘난맛에 살고 각자의 개성이라지만 낮설다.

 

100여m 전방에 보이는 군부대를 두고 좌회전하면 바로 우측에 ‘미래의 땅 청정의 고장’이곳 철원 대마리 백마고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라고 쓴 거대석(石) 간판을 지나 150m 직진하니 백마고지 전적비가 있는곳에 도착이다.

 

그런데 눈 보라 바람이 얼마나 세차가 부는지 눈뜨기도 힘들정도다. 그런데도 함께한 최형은 자신이 마치 무슨 종군기자라도 된양, 눈보라도 아랑곳 하지 않고 펄럭이는 태극기 사진을 찍느라 추운줄도 모르고 열심이다. 최형은 우산을 쓰고 나는 야상 후드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 풍경이 마치 “굳세어라 금순아” 촬영 현장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현인 선생님이 아닌 신세대 가수 조명섭이란 청년이 부르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나같은 늙다리 노인들에겐 더 구수하게 들린다.

 

연천역

 

 

백마고지 전투사 (白馬高地戰鬪史)

 

1952년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 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휴전회담 고착과 고지쟁탈전의 격화』(군사편찬연구소,2012)『한국전쟁』하(국방군사연구소,1997)『백마고지 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4)『육군발전사』상(육군본부,1970)

 

급수탱크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을때 경원선 다니는 열차가 이곳에 정차하여 물보충을 하던곳이라고 한다.

백마고지 명칭의 유래와 백마고지 전투개요가 적혀있는 비

 

평화의길 종합안내도

 

백마고지에서 두마리지나 백마고지 가는길 설경

사늘한 찬바람 몰아치는 백마고지 전적비 풍경과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라

백마고지 전적비와 DMZ평화길 아치와 최전방 풍경

눈보라 휘날리는 백마고지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풍경

대형 태극기 게양대 소개 글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12km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 고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 능선이가 허옇게 벗겨저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누운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시작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뒤 한국 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 · 김화 · 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五)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 113. 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 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 제213-955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었으며, 해마다10월 16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에 철원군은 백마고지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분단상황에서 분열된 우리사회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2018년 백마고지전투 승리 제 66주년을 맞아 대형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전 국민의 나라사랑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나아가 국민주권과 국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태극기의 존엄성을높이고 국민화합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6·25전쟁 당시 국군의 탁월한 전투능력과 투지를 유감없이발휘한 백마고지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백마고지 전적지에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였다.

설치위치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백마고지전적지 충혼탑 옆, 해발 215m 지점게양대 규격 : 높이 50m, 지름상면 0.4m~ 하면 1.1m태극기 규격 : 가로 18m, 세로 12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