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보약이다…먼동회 2024년 남산 265.2m (목멱산) 첫 우정(友情) 산행

2024. 1. 8. 22:05☎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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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보약이다…먼동회 2024년 남산 265.2m (목멱산) 첫 우정(友情) 산행

 

2023년 12월 산행을 하고 2024새해를 맞았다. 한동안 산행을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 하다. ‘잠결에도 산이 날 부르는 것 같다.’ 서둘러 늘 나와 함께 산행, 둘레길 걷기 운동을 해온 먼동회 아우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렇게 정해진 먼동회 2024년 첫 산행지가 남산 265.2m (목멱산)이다. 그런데 하필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새해들어 가장 추운날 산행이다. 1월 7일 오전 10시 숭례문앞에서 일행들을 만나니 5인(독수리5형제)중 한명이 독감으로 빠지고 4명뿐이다.

 

날씨가 너무 춥다보니 잠시 어디 카페에 들어 몸이라도 녹일까 생각을 해지만, 역전의 용사들이 요정도 날씨에 몸사리고 산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자! 날씨가 추우면 추운데로 출발이다.

 

손을 호호불며 잠시 휴식을 취하며 따끈따끈한 커피를 한 잔하니 몸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 요며칠 북한의 똥돼지 김정은이 서해 NLL 인근에 각종 포사격을 하며 '미친개 날뛰듯 한다'는 소리가 화두에 오른다.

 

그러자 연장자인 내가 나선다. '나는 만약 우리나라에 북한 똥돼지 김정은이 전쟁'을 걸어온다면 내 비록 팔십대를 넘은 나이지만 선두로 나서 전장'에 나가겠다고 하니, 일행들 너도나도 한마디씩 한다.

 

샛파랗게 젊은이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이 전장에서 쓰러져서는 안된다. 이제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우리 세대가 나서야 할때라고 너도 나도 모두 자원입대에 동의 한다.

 

북한 똥돼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빨갱이 추종하는 무리들아! 들어라. 우리 5인의 역전의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가실 것이다. 개딸 주사파 일당들은 무서우면 떠나 가라 북으로···

 

날씨가 쌀쌀하니 사진을 찍으면 하늘이 온통 코발트색으로 청명하다. 남산 산행길에 찍은 사진 영상을 소개 합니다.

 

먼동회 다섯명중 1명이 불참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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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숭례문)에서 출발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1869~1953)

 

성재 이시영 선생동상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신 김구선생동상과 함께 남산공원 백범광장 내에 세워져 있다. 성재 이시영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바쳐 투신한 명문가의 다섯째 아들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당시, 형 건영, 석영, 철영, 회영, 동생 호영과 함께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 당하자 형제, 가족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흥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법무총장, 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1945년 해방 시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 후 환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7년 성재학원 신흥대학(현 경희대)을 설립하였다.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1951년 5월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1953년 피난지인 부산 동래에서 서거하셨다.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1869~1953)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9~1949.6.29.)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활동기 이후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다가 동학 입도 후에 창수(昌洙), 그 후 구(龜, 九)로 개명하였다. 불교 입교 시기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가, 환속 후 유랑기에는 잠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을 썼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급 서당에 가지 못하였다. 9세부터 서당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차린 서당과 이웃 동네 서당에서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 14세에 평민 출신인 훈장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 ・ 한당시(漢唐詩) ・ 대학(大學)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과거 초시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의 초시(初試)가 해주에서 열리자, 정훈장의 권고로 과거시험을 보러 해주 관풍각(觀風閣)에 갔으나, 온통 부정투성이인 시험의 실상을 확인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반상의 차별을 한탄하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수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연비(蓮臂, 신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팔봉(八峯)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는데, 황해도 ,평안도, 동학당 중에서 가장 어린 접주로 가장 많은 연비를 이끌었다고 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700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가 담당한 서문 공격은 계획대로 되었으나, 본대는 남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기병한 진사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 과 만나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하고 구월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해산한 다음,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집에 은신하였다. 안태훈의 집에서는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의 강의와 훈도를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중략>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후반기를 이끌었다. 해방 이후에는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1948년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며, 38선을 무너뜨리고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김구 선생은 여러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만원 지폐가 생길 경우 가장 적합한 초상 인물로도 꼽혔다.

견리사의견위태명(見利思義見危授命) 안중근 의사께서 쓰신 서체

이익을 보거던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던 목숨을 주라

안중근 의사 (安重根 義士) (1879~1910.3.26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개명 전 안응칠(安應七)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음역어 도마, 사도 토마에서 따옴),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1][2]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중략 다음백과 참조>

남산 오름길에 본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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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산 봉수대(木覓山 烽燧臺)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에 복원한 조선시대 봉수대 터.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목멱산 봉수대 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목멱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현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목멱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릴레이식으로 중앙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서울특별시는 목멱산 봉수대 이외에도 무악동 봉수대, 아차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각각의 봉수대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각각 지정하였다. 목면산(남산) 봉수대 터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목멱산 봉수대 터 [木覓山 烽燧臺 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남산에서 본 전망

진실한 벗은 제2의 자기이다

 

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3][4]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5]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다음백과 발췌)

 

숭례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