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보약이다…먼동회 2024년 첫 산행 남산 265.2m (목멱산)에 오르다

2024. 1. 8. 14:41☎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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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산행을 하고 2024새해를 맞았다. 한동안 산행을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 하다. ‘잠결에도 산이 날 부르는 것 같다.’ 서둘러 늘 나와 함께 산행, 둘레길 걷기 운동을 해온 먼동회 아우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렇게 정해진 먼동회 2024년 첫 산행지가 남산 265.2m (목멱산)이다. 그런데 하필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새해들어 가장 추운날 산행이다. 1월 7일 오전 10시 숭례문앞에서 일행들을 만나니 5인(독수리5형제)중 한명이 독감으로 빠지고 4명뿐이다.

 

날씨가 너무 춥다보니 잠시 어디 카페에 들어 몸이라도 녹일까 생각을 해지만, 역전의 용사들이 요정도 날씨에 몸사리고 산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자! 날씨가 추우면 추운데로 출발이다.

손을 호호불며 잠시 휴식을 취하며 따끈따끈한 커피를 한 잔하니 몸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 요며칠 북한의 똥돼지 김정은이 서해 NLL 인근에 각종 포사격을 하며 '미친개 날뛰듯 한다'는 소리가 화두에 오른다.

그러자 연장자인 내가 나선다. '나는 만약 우리나라에 북한 똥돼지 김정은이 전쟁'을 걸어온다면 내 비록 팔십대를 넘은 나이지만 선두로 나서 전장'에 나가겠다고 하니, 일행들 너도나도 한마디씩 한다.

샛파랗게 젊은이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이 전장에서 쓰러져서는 안된다. 이제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우리 세대가 나서야 할때라고 너도 나도 모두 자원입대에 동의 한다.

북한 똥돼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빨갱이 추종하는 무리들아! 들어라. 우리 5인의 역전의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가실 것이다. 개딸 주사파 일당들은 무서우면 떠나 가라 북으로···

날씨가 쌀쌀하니 사진을 찍으면 하늘이 온통 코발트색으로 청명하다. 남산 산행길에 찍은 사진 영상을 소개 합니다.

 

먼동회 다섯명중 1명이 불참을 했네요

남대문(숭례문)에서 출발

견리사의견위태명(見利思義見危授命)

안중근 의사께서 쓰신 서체

이익을 보거던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던 목숨을 주라

남산 오름길에 본 전망대

 

목면산 봉수대(木覓山 烽燧臺)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에 복원한 조선시대 봉수대 터.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목멱산 봉수대 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목멱산에 설치된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봉수대의 명칭은 현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목멱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이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릴레이식으로 중앙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서울특별시는 목멱산 봉수대 이외에도 무악동 봉수대, 아차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각각의 봉수대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각각 지정하였다. 목면산(남산) 봉수대 터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목멱산 봉수대 터 [木覓山 烽燧臺 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남산에서 본 전망

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3][4]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5]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다음백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