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 가족 제주 여행길에 추사관 탐방 발자취

2022. 12. 3. 11:45☎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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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김 정희 추사 김정희 선생(秋史 金正喜, 1786~1856)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추사 선생이 55세가 되던 해인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유배길에 올라 약 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추사 선생은 8년 3개월 제주에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창신’하여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중략

오늘(2022.11.13.)이 제주여행 4일째 날 오후다. 오전에는 가족과 함께 비양도 섬탐방을 하고 송악산 지역에 이르니 갑자기 강풍을 동반한 세찬비가 내린다. 그바람에 송악산지역 관람 일정을 포기하고 비를 피해 실내에서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는 “추사관”을 찾았다. 

 

필자도 한 시절 서예에 심취했던 적이있다. 그러다 보니 추사관을 찾는는 것이 개인적으로 그 어떤 명소 관람보다 더 관심이 크다. 20여년전 한창 서예에 정진할 때다. 특별히 추사체에 관심을 갖고 배울때 추사 김정희 선생(秋史 金正喜, 1786~1856)에 대한 흠모정신이 남달랐었다. 

 

선생의 서체에는 강한 힘과 끊어질 듯 나약하게 이어지는 강약의 힘이 서체에 배어난다. 지금은 지나버린 그때 그시절을 회상하며 추사관 많고많은 작품들을 여행길에 시간에 쫒기며 스치듯 지나치는것이 너무 안타깝다.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하루종일 머물며 선생의 작품 세계에 빠저들어 해석도 하고 추사체 연구도 하고 싶다. 

추사김 정희

추사 김정희 선생(秋史 金正喜, 1786~1856)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추사 선생이 55세가 되던 해인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 유배길에 올라 약 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추사 선생은 8년 3개월 제주에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창신’하여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그려내었다.

 

유배지 제주에서 추사는 낯선 풍토(土)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그리고 잦은 질병으로 무척 고생하였는데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이를 달래기 위해 추사는 수없이 많은 편지를 쓰기도 했고 벗과 제자들이 추사를 방문해 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추사는 안부와 소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피력해나갔다. 한편, 추사의 유배지에는 그에게 배움을 얻으려는 제주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에게 뛰어난 유배객을 맞는다는 것은 곧 뛰어난 스승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추사 역시 제주의 인문(人文)이 깨우쳐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제자들을 적극 교육하였다. 이렇게 길러낸 제자들이 박혜백(), 이한우(비), 김구오(五), 시형) 등이었다. 이를 두고 제자 민규호(閔奎鎭, 1836~1856)는 완당김공소전(阮金公小傳)」에서 "탐라(인문이 크게 제주)에 열리어 찬란하게 서울의 기풍을 잇게 되었으니 그 황폐한 문화를 일으킨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제주 환경에 점차 적응하면서 추사는 제주의 특산물인 귤의 지조덕을 칭송하고,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또 자신의 당호(귤밭의 집, 즉 '귤중옥(中屋)'이라 지었으며, 독자적인 학문과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자였던 강위)는 유배된 추모습을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고 묘사하였다. 제주 유배 막바지에 추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신임 제주목사 장(張寅植)의 배려로 한라산(漢山)과 제주읍 경내를 답사하기도 이때가 세한(歲寒)의 시간 중 잠시나마 만끽했던 평온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