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릉 이조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무덤 역사 탐방 여행

2021. 6. 29. 16:24☎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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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KqGJTEe9ME

 

장릉 (사적 제203, 坡州 長陵)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파주 장릉은 제16대 인조(1595~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 씨의 무덤으로 조선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능원으로 평가받는다.

 

인조는 파란만장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조는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원종)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난 이유는 당시 임진왜란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에게는 광해군과 임해군을 포함해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해 얻은 첫 손자가 능양군이었다. 선조는 자신이 서자인 탓에 능양군이 서자였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했으며,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그를 더욱 귀중히 여겼다.

 

이후 역사는 드라마틱하게 변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다시 왕위에 오른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이었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인조 때 작성된 광해군실록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 때 작성된 인조실록은 광해군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광해군은 만주에서 새롭게 발흥한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로 중립 정책을 펴왔다. 당시 명은 임진왜란의 여파 등으로 광해군의 책봉을 늦추는 것은 물론 조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광해군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던 중 명과 후금과의 전투는 광해군으로 하여금 실리적인 면에서 정세를 판단하도록 했다. 무장 박엽을 평양감사로 임명해 대포를 주조하게 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던 광해군은 명이 후금 정벌을 위해 군사 파견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응서를 부원수로 삼아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파견하면서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후금과 전력을 다해 싸우지 말고 유리한 쪽에 붙어 전력을 보존하라는 것이었다. 강홍립이 현장에 나가보니 명은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후금과 전투하는 척하다가 항복한 후 조선의 참전이 자의가 아님을 설명했다.

 

후금은 명과 자신 사이에 낀 조선의 사정에 동정을 표했고,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서 광해군에게 계속 밀서를 보내 당시의 정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게 했다. 간단하게 말해 남의 전쟁에 조선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이처럼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지만 명에 대한 명분을 앞세운 친명론자들에게는 왕으로서는 낙제점이었다.

 

광해군이 축출되자 인조를 내세운 신하들은 친명배금 정책으로 전환했는데 이것이 조선에 큰 파국을 불러왔다.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 명으로 정묘호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평산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다가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를 맺고 철수한다. 하지만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청은 10만 대군으로 재침,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의 백성은 물론이고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 끝에, 인조는 결국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심하고 인조 15(1637) 삼전도(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성문을 나선 인조는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앉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궤구고두례각주1) 를 행했다. 이때 반드시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한다. 태종은 소리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했고 인조는 수십 번 머리를 부딪쳐 이마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의 첫 번째 비인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광해군 2(1610) 능양군(뒤의 인조)과 가례를 올렸다.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었으며 소현세자와 후일의 효종인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을 낳았다. 163542세 늦은 나이에 출산하다 병을 얻어 타계했다.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이라 해 인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운의 인물인 소현세자도 인조와 관련이 있다. 청이 화평 조건에 따라 인질을 요청하자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부인 강 씨와 봉림대군 부부, 주전파 대신들과 청의 수도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과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인조와는 달리 조선이 청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왕실의 지도층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청에 그만큼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 것을 철저하게 배워서 조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에 굴하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앞선 문물을 배우지 않으면 결코 청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다. 배청이 아니라 친청으로 보이는 소현세자의 행동에 청에 원한이 사무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발끈했다.

 

그런데 16452월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4월 갑자기 사망한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상당한 파장을 몰고왔다. 가장 큰 의혹은 소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을 볼 때 인조가 의관 이형익을 시켜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인조 23(1645) 627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인 인조의 처신이었다. 인조는 의관인 이형익을 국문하라는 상소를 시종일관 무시했다. 당시는 왕이나 세자가 사망하면 이를 의관의 책임으로 몰아 죄를 주는 것이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의례에 의하면 왕은 장자를 위해 참죄 3년을 입고, 신하는 왕의 부모와 아내의 장자를 위해 기년으로 종복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인조는 날짜로 달수를 바꾸어 1년을 12일로 셈하더니 그조차 7일로 감해버렸다. 그리고 원손을 제치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적자 계승의 원칙을 저버리는 조처에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인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인조의 이 같은 행동은 훗날 현종과 숙종 때 치열하게 전개된 예송의 불씨가 되었다.

 

장릉은 본래 인조가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 능을 먼저 조성하고 우측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두었다가 사망 후 묻히도록 준비한 것이다. 인조 사망 후 사전에 예정된 대로 능을 조성했는데,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며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자 영조 때 현 위치인 파주시 갈현리로 옮겨 다시 조성했다.

 

천장으로 합장하면서 규격이 맞지 않은 병풍석 등은 새로 마련했고, 일부 석물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장릉은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는 왕릉이라고 볼 수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로 병풍석을 둘렀는데, 면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 신상을 새기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모란문, 연화문 등 꽃무늬를 새겨 새로운 양식을 남겼다. 이것은 이후 사도세자의 융릉과 홍릉, 유릉으로 이어진다. 인석(왕릉의 호석이나 병풍석에 얹은 돌)에도 만개한 꽃무늬가 있는데, 중심부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장명등에도 모란 무늬와 연꽃무늬가 있는데 17세기 석물 무늬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다.

 

무인석과 병풍석의 꽃무늬는 사도세자의 융릉 것과 흡사해 융릉이 장릉을 모델로 삼아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봉분을 둘러싼 곡장 3면을 비롯해 석상, 고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양, 석호 등의 석물은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능침을 보호하는 석마, 석양, 석호는 공순영릉의 순릉 같은 형태다. 석양과 석마의 배 부분을 판으로 만들었고 석호는 앉아 있는 모습도 동일하다.

 

대부분의 정자각 기둥 하부에는 구름과 하늘을 의미하는 하얀색과 파란색 줄이 있는데 다소 예외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정자각 전면부의 원형 기둥에만 칠해져 있는데 파주 장릉에서는 정자각의 모든 기둥에 칠해져 있다.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특이하게 비각은 정자각보다 상단에 있으며 수복방은 정자각 우측 하단에 있다. 비각 안에는 1731년 이장할 때 건립한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능표가 있다. 파주 장릉은 미공개 지역이나 학술 등 답사가 필요한 경우 파주삼릉관리소에 예약하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참고문헌

이덕일 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1999).

강석경, 우주의 질서 보여주는 풍광, 생과 사 공존하는 고도, 월간중앙, 20135.

이민식, [을 만나다·38] 장릉(長陵·16대 인조·인열왕후), 경인일보, 2010624.

이창환, 反正으로 정권 잡았지만 나라 쫓다 '삼전도 굴욕', 주간동아, 20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