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손녀(여림)와 함께 다녀온 "부평전투승전기념비"

2021. 2. 14. 12:54☎손녀여림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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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JNP8OL-Uv4

8살 손녀딸(여림)과 함께 찾은 부평전투승전기념비

 

2021년 설명절 다음날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딸(8)에게 부평에 대한 역사를 바르게 알려주기 위해, 인천시 부평구 아트센터로 168’에 위치한 부평아트센터를 찾았다. 이곳에는 "부평전투승전기념비"가 있다.

 

1950년 6.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북침이라, 얼토당치 않은 소리를 하는 일부 현정권 위정자들이 너무 괴씸하다. 그래서 8살 손녀(여림)딸 아이와 함께 "부평전투승전기념비" 를 찾아, 아이에게 올 바른 역사 교육을 시키고 왔다. 

 

"부평전투승전기념비"에는 부평지역에서 1950년 벌어졌던 전투사가, 한글과 영문으로 기념비에 쓰여있다. 손녀딸 여림이는 유치원 과정 3년간을 전문 어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여림에게 먼저 한글로 쓰여진 전투사를 읽어보라 하자, 여림이는 승전기념비 내용을 거침없이 잘 읽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문으로된 승전기념비를 읽어보라고 다시 시켰다. 그러자 여림이는 망서림없이 영문 승전기념비문을 술술 잘도 읽어냈다. 그 모습 보면서 조기 교육의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인정하며 78세 영어 까막눈 할아버지 나 자신을 돌아본다. 부평전투승전 기념비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평전투승전기념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맥아더사령관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의 최우선 과제는 서울 수복을 위한 김포비행장의 조기탈환이었다.

 

연합군은 미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를 앞세워 서울을 향해 진격을 하였고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된 한국해병 제3대대 9, 10, 11중대가 공격대열의 선봉에 섰으며 경인국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던 연합군은 부평지역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많은 아군이 전사하였다.

 

이 비는 당시 부평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 뿐만 아니라 UN의 깃발아래 조국의 수호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한국과 미국의 젊은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자 격전지였던 이 자리에 건립하여 2008년 6월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Bupyeong Battle Victory Monument

In September 1950, when the Korean War was in full swing, the top priority of the Allied forces, which succeeded in landing on Incheon under the command of Commander MacArthur, was the early recapture of Gimpo Airport to recover Seoul.

The Allies advanced toward Seoul with the 1st Marine Regiment and 5th Marine Regiment, the 3rd Marine Battalion, 9th, 10th and 11th Battalions of the 5th Marine Regiment spearheaded the attack, and the Allies, who were advancing to Seoul along the Gyeongin National Road, were killed in fierce battles.

The monument was built on 13 June 2008 to commemorate the victory of the battle in Bupyeong area, as well as to commemorate the young warriors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who sacrificed their lives generously for their country's protection and human peace under the UN flag.

 

 

1950916일 오후 맥아더 장군은 인천으로 상륙하려는 미군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Smith) 장군에게 김포 비행장을 가능한 조기에 탈취하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제107연대와 제18사단 분산 병력을 모아 4개 대대로 재편성한 후 김포-부평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하고 있었다.

 

서울을 향하여 해안교두보선을 넘어서는 한미 해병부대들 앞에는 중간목표로서 장악해야 할 김포비행장과 영등포, 그리고 자연장애물로서 극복해야 할 한강 등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김포비행장의 조기 확보였으며, 아울러 영등포 탈취를 위해 경인국도가 중요한 공격축선으로 설정되었다.

 

195091616:00시에 하달된 미 해병사단의 작전명령 5-50에 의하면, 91707:00시 군단 통제선을 향해 동시공격을 하게 될 2개 연대 중 제5연대에 김포비행장이, 1연대에 영등포 지역이 각각 목표로 설정되었고, 경인 국도를 횡단하는 소사 동쪽에 제1연대의 목표 고지가 있었다.

 

미 해병대의 돌격부대는 인천-서울 가도를 중심으로, 1연대는 가도 남쪽을, 5연대는 가도 북쪽지역을 할당 받아 공격 전진하고 있었다. 상륙군의 돌격 연대는 D일에는 해안 사정으로 중장비 양륙이 늦어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적의 저항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큰 지장은 없었다.

 

이날(16) 밤 미 제5해병연대와 제1연대는 부평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까지 진출하여 부평지역의 서방 경인가도를 통제하게 되었다.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는 진지 부근으로 통과하려던 북한군 트럭 1대를 노획하고 북한군 장교 1명과 10명의 병사를 생포하였다. 2대대장 로이스 중령은 상륙군이 교두보선을 넘어 부평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몇 차례에 걸친 거센 저항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전위중대로 하여금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다음날 새벽 경인가도의 오른쪽 186고지 상에서 전초부대가 도로상에 북한군 T-34 전차 6대와 200여 명의 적이 서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적들은 미 해병대의 진지를 알지 못하였다. 적 전차는 대대 전초진지 앞을 지나 원통이고개를 내려갔다. 대대는 적의 마지막 전차가 90도로 굽은 큰 실을 돌 때 첫 포탄을 발사하여 후미 전차를 명중시켰다. 이에 대대 지원화기들이 일제히 집중되어 적을 섬멸하였다. 대대는 적을 제압한 후 급속 전진하여 17일 오후 이미 부평을 지나 김포비행장 서쪽 효성동까지 진출하였다.

 

미 해병 선두대대가 전진하고 있을 때 한국 해병 제3대대는 1706:00시경 부평역 서남고지에 진출하여 미 해병대대를 지원하였다. 그 후 국군 대대는 미해병들이 진출하기에 앞서 07:00시부터 부평지역 탐색전을 개시하였다. 대대 선두는 부평역 바로 북쪽 언덕(37고지)과 조병창 서쪽 고지(46고지)의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대대는 미 제5해병연대의 지원을 받아 즉시 적을 소탕하였다. 미 해병 대대는 09:00시 인천-서울가도에서 좌측방향 김포로 향하는 도로로 접어들었고, 국군 대대는 오전 중 소탕작전을 전개한 후 오후 늦게 진출을 재개하였다.

 

이 날 적은 육상에서뿐만 아니라 인천 앞 해상에서도 야크전투기 2대를 출동시켜 순양함 로체스터(Rochester)호와 자메이가(Jamaica)호를 폭격하여 약간의 피해를 주었다. 이들 중 1대는 아군 대공포에 격추되고 1대는 도주하였다.

 

한편 917일 이른 아침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마운트 매킨리호를 떠나 미 제1해병연대 지휘소까지 방문하였다. 맥아더 장군 외에도 스트러블 중장과 세퍼드 중장, 알몬드 소장을 비롯하여 극동미군사령부와 제10군단의 많은 장군들과 또다른 참모장교들, 신문특파원과 사진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들은 연대 지휘소로 이동 중 아군 항공기에 의해 파괴된 5대의 적 전차를 시찰하였고, 곧 원통이고개에까지 당도하여 전선을 둘러 보았다. 맥아더 장군 일행이 떠난 뒤, 미 해병들이 길가 한 도랑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적병 7명을 체포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부평전투와 관련한 지역인 인천광역시 남동구 경인로 734’에 인천보훈회관이 자리잡고 있고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인천시지부가 여기에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에게 김포 비행장을 탈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경인국도는 중요한 공격축선이었다. 공격축선에 있는 부평전투의 승리는 서울 수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부평은 인천으로부터 서울까지의 중간지점이고, 병참 및 군수와 관련된 제반 시설이 이미 충분히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주한미군 지원사령부(the Army Suppot Command Korea)를 설치하고, 이를 약칭으로 ASCOM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부평은 애스컴시티로 불리게 되었다. [부평문화원 자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