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편] 금강산이 부른다 ...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진)

2021. 2. 2. 18:22☎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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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2003년 12월 20일 ~ 12월 22일(2박 3일간)

◐ 산 행 지 : 강원도 금강산(현재는 이북에 있음)

◐ 산행코스 : 북측에서 허용한 등산로

◐ 산행인원 : 현대아산 측 관광단 일원과 우리 일행 19명

◐ 산행시간 : 2박 3일간

 

금강산은 그 화려함과 명성에 걸맞게 이름도 많고 다양하다. 각종 문헌과 기록, 민간전설 등을 조합하면 금강산의 이름이 9가지나 된다. 금강 (金剛) 개골(皆骨) 열반(涅槃) 풍악(楓嶽) 기달(怾怛) 봉래(蓬萊) 상악(霜嶽) 선산(仙山) 중향선(衆香城)등이 그것이다. 이중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은 4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경치와 산색(山色), 정취가 다르다고 해서 계절별로 붙여진 금강, 봉래, 풍악, 개골등 4가지 이름이다.

 

봄에는 온 산이 푸른 새싹과 형형색색의 꽃에 뒤덮여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해서 “금강”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려 신록의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 “봉래”라고 한다.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이 오색의 단풍으로 곱게 물든다고 해 “풍악”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나뭇잎이 지고난 뒤 기암괴석이 뼈처럼 드러나 우람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여 “개골”이라고 한다.

 

◐ 금강의 유래

 

“금강”이란 이름은 불교와 관계가 깊다 금강이란 말은 범어의 “바이아라”(vaiara.단단하다는 뜻) “과 통한다고 한다. 화엄경에는 ”바다 동쪽 보살이 머무는 곳을 금강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그러나 佛家(불가)의 금강이 아니더라도 금강산은 이름 그대로 아이 아몬드(금강석)처럼 고귀함을 지닌,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는 의미가 있다. 중국 북송의 蘇軾(소식).1036~1101, 호는 東坡(동파) 같은 시인은 “고령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기가 소원이다(願生高麗國-見金剛山)”고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후기의 천재화가이자 기인으로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던 崔北(최북)은 금강산 구룡연에서 “비로소 죽을 곳을 찾았구나. 하고 구룡연에 뛰어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금강산이야말로 목숨을 바치고 싶은 珍景(진경)으로 일컬어져 왔다.

 

◐ 종교가 끼친 영향

 

금강산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금강산 내의 각종 산봉우리와 계곡, 약수터 등의 이름에 불교, 도교 등 종교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명소를 보면 “仙”자가 많이 발견된다. 이 같은 표현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道敎(도교) 즉, 仙敎(선교)를 도입하면서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은 데 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강산의 지명 가운데 이와 관련한 표현을 보면 四仙亭(사선정) 仙倉山(선 창산) 六仙岩(육선암) 三仙岩(삼선암) 天仙臺(천선 대) 降仙臺(강선 대)昇仙臺(승선 대) 四仙峰(사선 봉) 集仙峰(집선봉) 仙霞溪(선하계) 喚仙(환선)폭포,四仙橋(사선 교)등을 들 수 있다. 또 금강산을 지리산, 한라산과 함께 三神山(삼신산)의 하나로 지칭한 배경은 이 산을 토속신앙의 靈山(영산)으로 받아들인 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구룡폭포 상팔담코스

 

구룡폭포 코스는 금강산의 여러 관광지역 중 가장 많은 沼(소)와 폭포 등이 산재한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구룡폭포와 그 위에 유치한 상팔담 가지의 총소요 시간은 5시간 정도 가량 걸린다. 온 정리에서 신계사까지는 버스로 이동한다.

 

신계사 부근 유명 음식점인 목련 관까지는 약 3킬로의 평지다. 이후 4백~5백 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양지 대, 금수 다리, 삼록수, 만 경 다리 등을 거치면서 금강산의 대문이라 할 금강문에 이른다. 금강문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전 동문 바위가 막아서 있으며 이곳을 통과하면 계단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나온다.

 

금강문을 지나면 오르막길이 계속되면서 비로봉 동쪽에 있어 절벽과 폭포, 소 등으로 이어지는 오류동 계곡이 시작된다. 오류동 계곡 초입의 옥류 담은 금강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소로 넓이가 600여 제곱미터 수심이 5~6미터에 윗목과 아래 못이 이어져 있는 연주 담이 있으며 여기에서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인 연주폭포를 이룬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비봉폭포는 구룡폭포. 옥영폭포. 식이 폭포 등과 더불어 금강산 4대 폭포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폭포는 총 높이가 1백39미터로 하류부분이 마치 봉황의 꽁지깃 같으며, 춤추며 나는 봉황의 모습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북한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233호로 폭포주변은 잦은 안개와 비로 말미암아 완전한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비봉보포로부터 구룡폭포까지는 약 88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불법에 의해 쫓겨난 아홉 마리 용이 숨어들었다는 곳으로 개성 박연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손꼽히고 있다 구룡폭포는 높이 74미터 폭 4미터 달하는 웅장한 모습이며 폭포 밑은 깊이 13미터에 이르는 구룡연이 자리하고 있다.

 

구룡폭포로부터 7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착한 나무꾼이 지상에 나온 선녀를 아내로 삼았으나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나무꾼과 선녀”전설을 담는 상팔담이 고요한 자태를 자랑한다. 상팔담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서는 비로 담을 볼 수 있으며 옥녀봉. 좋은 세 봉 등 금강산 내 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금강산이 부른다... 청파 도영할베의 갈팡질팡 금강산 여행기 2

 

금강산 여행 2일차 아침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730분까지 마치고, 750분되니 수십 대의 금강산관광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각 차량마다 담당 가이드가 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원 파악을 한다. 금강산 구역 내에서는 단 한 사람의 이탈자가 있어선 안된다. 북측의 철저한 감시 때문이다.

 

인원 점검이 끝나고 1호차 부터 순서에 따라 이동 한다. 금강산 관광 셔틀버스는 32명이 정원이다. 자동차는 현대자동차에서 제공한 버스인데 나같이 체격이 작은 사람도 버스가 조금은 협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산악지역이라 도로가 너무 협소 한데다 갈지자, 지그재그 운행구간이 많기 때문이라 한다.

 

온정각 제2집결지에 도착하니 810분이다 8:30분까지 자유시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좌측 150여 미터 전방으로 발길이 향한다. 무슨 볼거리가 있는가 의아한 생각을 하며 따라간다. 그런데 이곳에 고 정몽헌 회장 추모비현장 이정표가 보인다.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죽엄에 늘 많은 의구심을 있었다. 때문에 기회되면 언제 묘소 참배라도 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금강산에서 정몽헌 회장추모비에 묵념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이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 금강산지역에 관광 사업을 유치 했다는 것이 역사에 남을 일이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신의 고향을 향한다는데…….

 

이는 고 정몽헌회장의 아버지 고 정주영 명예 회장님께서 김일성 생존 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고향 통천 사람들 사는 생활 모습을 보고, 기업의 이윤추구 목적보다는 사회 환원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개발을 하여, 북한 주민들과 고향주민들을 도우려는 차원에서 기업에 다소 무리가 있었음에도 단행을 결단한 사업이다.

 

그러다 정주영 회장께선 당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 말 많고 탈만은 금강산 사업을 아들 정몽헌 회장이 이어받아, 부친의 유지를 이으려 노력하다 젊은 나이에 세간에 많은 잡음과 손가락질을 혼자 끌어안고 투신 자살을 택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때문에 나는 늘 이분의 죽엄에는 당시 정권의 음모 때문이란 심정을 버릴 수 없었다.

 

정몽헌 회장 추모비 앞에 눈 감고 나는 속죄하듯 기도를...

 

임은 정녕 가셨나요. 임 한 사람의 생명 던져 누가 편해지고 또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시며, 이제 한창 번영의 꽃 피울 완숙의 나이에 이렇게 차디찬, 동토의 땅에 묻히셨단 말입니까? 임은 죄인이 아닌 우리나라 역사에 위대한 전진을 앞장서서, 개척한 유공자이신데 님이 왜 먼저 가셔야만 하였나요.

 

정작 국가를 어렵고 국민을 힘들게 하는 무리는 님이 아니라 바로, 국민의 대변자로 국회에 등단하여 차떼기로 돈 해먹으면서도 버젓이 당당하게 고개 들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인데, 님이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을 잘못하여 이렇게 가셔야만 한답니까? 나는 한동안 추모비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곳 정몽헌회장 추모비에는 도울 김용욱 선생이 지은 추모글이 새겨있다. 추모비 내용을 아래에 게제한다.

 

정몽헌 1949~2003

여기 조선 땅의 숨결이

맥동치는 곳 금강에

고이 잠들다.

 

아버지 아산 정주영의

유훈을 이어

세계사의 모든 갈등을

한몸에 불사르며

남북화해의 새로운

마당을 열었다.

 

그의 혼과 백

영원히 하나 된

민족의 동산에서 춤추리

 

이천삼 년 팔월 사일

도울 짖고 쓰다

 

아린 마음에 한동안 추모비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일행들이 출발 시간이라고 재촉을 한다. 다시 온정각 주차장으로 달려가 승차해, 10여분 정도 기다린다. 그런데 이때다. 현대아산에서 운영하는 마이크로버스 한대가 급하게 달려온다. 그러더니 차에서 10여 명의 북한군 간부인 듯한 사람들이 내려,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2명씩 타더니 버스 앞과 뒤에서 관광객 차량을 선도한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으니 관광객 입장에선 좀 더 일찍 관광일정을 시작해도 될텐데, 이곳은 북측 사람들 일정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정이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어 우리 관광객들로서는 많이 불편하실 것이라고 말을 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어제 금강산 들어올 때의 길(일명 관광객만 이용하는 관광도로)을 달려간다. 그런데 도로 양편엔 철망이 둘러 있다. 이유는 맨 처음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을 때, 북측 주민들이 남측에서 온 관광객을 향하여 차에 돌을 던지며, 심하게 반발하여 남측관광객 보호를 위하여 만들어놓은 철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북한 주민의 6~70%가 남측이 북측보다 잘 살고, 또한 남측에서 북한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어 이제는 북측 사람들이 상당히 남측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라 한다. 앞으로 이런 상태가 몇 년 더, 유지된다면 머지않은 훗날 남과북이 화해의 손을 잡을 날도 멀지 않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이해가 된다.

 

한참을 가이드 말을 주시해 듣고 있는데, 갑자기 가이드가 저기 오른쪽을 보세요. 저 바위는 금강산에서 단일 바위로는 제일 큰 바위라며 가르치는데, 그 바위에 흉직스럽게 새빨간 글씨로 천출 명장 김정일 장군(天出名將金正一 將軍)”이란 음각 글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쓴 글이 얼마나 큰지 무려 6개월이나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 상식에선 엄청난 자연훼손이며, 대대손손 두고두고 욕을 먹을 짓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 엄청난 자연훼손 행위가 아무렇 않게, 자행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상스러운 육두문자 욕설이 나온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 순리인데......,

 

그사이 우리를 태운 차는 불타버려 빈터만 남은 신계사 터를 지나고 있다. 신계사는 우리나라에서 손안에 드는 이름난 사찰이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때 전소되었다. 가이드 안내에 따르면 수년안에 우리나라 해인사에서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 한다고 한다. 신계사 지나 주차장 (북한말: 차 마당)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금강산 도보관광 시작이다. 그 첫 코스로 구룡연 상팔담 코스인데 등산으로 쳐도 빡센코스다. 그런데 일행중 연로하신분들이 계신다. 그러나 언제 다시 금강산 구경이 쉽지 않으니 어르신들에게 상팔담까지 오르자고 언약을 하고 산행을 시작을 한다. 거동이 여의치 못한 분들은 뒤에 쳐져 쉬엄쉬엄 오르시고, 나를 비롯한 몇 사람들은 앞서 오른다. 그런데 전체적인 코스는 잘 정비되어 큰 무리가 없다.

 

다만, 고산 지대에 특별히 추운곳이다 보니,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쌀쌀하다. 하지만 겨울 날씨 치고는 견딜만 하다. 오르다 보니 이따금 금강산 뉴스에 나오는 출렁다리 목련다리가 보인다. 건너편엔 그 유명하다는 금강산 냉면을 맛볼 수 있는 목련관도 보인다. 이날 점심은 목련관에 예약이 되어있다.

 

목련관 지나 김일성이 다녀가며 교시를 주신 곳이라는 대리석 안내판이, 붉은 글씨에 새겨져 관심을 끈다. 그러나 나에겐 하찮은 자연훼손이란 생각이 들어 지나쳐 풍경 사진 찍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아침햇살 역광으로 사진이 별로다. 그런데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인파가 지나다 보니 풍경이 좋은 곳에선 좀처럼 사진 촬영이 쉽지 않다.

 

양지 다리 지나 속보 산행을 하려니 등에 땀이 나 모자를 벗고, 북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색 스카프를 머리에 묶는다. 등산로 곳곳에는 북한 측 금강산 관리 요원들이 요소요소 배치되어, 미끄러운 등산로는 곡괭이로 얼음을 깨고 모래를 뿌리며 편의 제공을 한다. 그러면서 등산객 동태를 살피는 듯하다. (참고로 북한의 금강산 구역에서는 휴지를 버리거나 침을 뱉다 적발되면 가차없이 제약을 받게 되며, 그에 상응하는 벌금을 물고) 귀환 시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유분방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관광객 입장에선, 억압 당하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쓰레기 자연보호를 하자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조금 불편을 감수하면 자연보호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가 북한에 입성하기 전 들은 바로는 사진 촬영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나 통제받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뜻밖에 금강산 관광중에는 특별히 신경 안쓰고 자유롭게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금강산에 오기전 선답자들의 자료를 참고했을땐 다양한 폭포와 소()가 많았다.

 

금강문에 도착했다. 금강문은 큰 바위 사이로 자연스레 뚫린 통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여기서부터 다소 험한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1시간 정도 진행하면 험준한 계곡과 아름다운 소를 지나게 된다. 여기도 모두 꽁꽁 얼어 그 아름다운 금강산 폭포와 소를 보지 못해 아쉽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사계가 하나같이 다양한 모습,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러나 겨울엔 한 잎의 이파리도 걸치지 않은 진면의 나상,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옥류동 계곡은 비로봉 동쪽으로 절벽 아래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금강산의 대표적인 비경 지대다. 그러나 여기도 꽁꽁이다.

 

두 개의 소가 아래위로 연결된 구슬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연주 담 위쪽으로는 연주폭포가 있고 연주 담을 뒤로하고, 세존봉에서 흘러내리는 거대한 폭포도 꽁꽁 얼어붙은 채 새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다. 우리나라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룡폭포도 역시 꽁꽁얼었다. 비룡폭포는 북한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2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금강문에서 2시간여가량 지나면 개성 박연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3대 폭포라 불리는 구룡동으로 접어든다. 아홉 마리 용이 골짜기로 접어들어 푸른 연못 속에 숨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여기서 가파르게 오르면 크고 작은 여러개 폭포를 지나치게 된다. 그 중 주렴 폭포 지나 아름다운 풍치 사이로 금강산 최대 절경이라 일컫는 구룡폭포를 먼발치로 본다.

 

구룡폭포 지대 지나 10여 분 정도 더 오르면 우리나라 전설에 등장하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무대인 상팔담이다. 지상에 내려온 팔선녀 중 옷을 감춘 한 선녀를 아내로 맞아, 두 아이까지 뒀으나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 상팔담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 관광 코스의 마지막인 구령대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코스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어렵게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눈에 상팔담 전경을 본다. 주위에는 위엄을 자랑하는 바위들이 서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봉우리가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워 수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무용교 지나 삼거리에서 관폭정, 구룡연으로 발길을 돌리면, 그곳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로 변해있는 그 유명한 구룡폭포를 허울만 바라본다. 구룡연 오른쪽 절벽의 미륵불 (金剛山九龍瀑彌勒佛大刻書.금강산 구룡포 미륵불 대각서)1919년에 海岡(해강) 金奎鎭(김규진. 1868~1933) 선생이 쓴 글씨인데 '미륵불(彌勒佛' 세 글자는 우리 역 사상 가장 큰 글자이고, 예서체로 음각하였다. '미륵불'세 글자는 폭이 3.6미터로 한 획마다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울 수 있는 크기라고 한다. 자의 길게 내린 획이 13미터로 못의 깊이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저녁 마신 음주 탓인가보다. 갑자기 생리(소피) 현상이 생겨 발길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북한의 위생실)을 찿어 본다. 그런데 남자 소변은 미화 1불이고 여성은 무조건 미화 4불을 받고 있다. 왜 여자는 그렇게 값이 비싼 것이냐고 안내자에게 물으니 여자는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할 수 없어 4불을 받는다는 것이다. ㅋㅋㅋ 그냥 웃어 넘길 수만 없는 이야기다.

 

그 화장실 요금이 비싸고 싼 것 떠나서 돈 내고 용변, 보는 일에 익숙지 않아 참는 데까지 참으며 속보로 하산해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려는데, 얼마쯤 왔을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삼엄한 북측 요원들의 눈을 피해 실례를 하다 적발이 되어, 망신을 당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비우고 인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를 했다. 그러자 얼굴에 화색이 돌아 새로운 기분으로 관광을 한다.

 

점심은 예약되어 있는 목련관에서 먹는다. 그런데 주문한지 40여 분 만에 냉면 일부만 나오고 안나온다. 그러더니 뒤늦게 종업원이 와서 선생님들 냉면 재료가 다 떨어져 냉면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비빔밥을 드시든지 말던지 이야기를 하라는 식이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사람들은 꿩 대신 닭으로 비빔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곳 목련관은 영업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근무 개념으로 하는 것 같다. 서비스도 엉망이고 10불짜리 음식치고는 맛도 양도 너무 형편이 없다. 냉면 맛도 우리나라 냉면 전문점에서 먹는 맛에 비하며 별것 아닌데, 신기한 것은 반찬을 얼마나 작게 내는지 너무 적어 추가하니 1불을 달라고 한다. 기막힌 상술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중이 고기맛을 알면 빈 데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북한 사람들이 그 짝이다.’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것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공동생산 배급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머리를 써서 하는 일에는 익숙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니 한 마디로 이야기해, 주는 대로 먹고 두 말 말라는 식이다.’ 그나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강산 구역에서 장사(사업)하는 것을 보고 많이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

 

점심을 먹고 금강산 온천장에 도착하니 2시다. 말은 온천은 자유라 하지만 그렇다고 오후 5시까지 혼자 어디 거닐만한 곳도 없다. 우리는 어제 예매한 온천티겟을 내고 온천을 하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샤워 정도만 하고 수면을 취한다. 그렇다고 수면실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온천장 밖에서 다음 스켓쥴을 기다린다.

 

오후 5시부터는 북한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을 관람을 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출연진 모두가 나와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공연히 시작된다. 그런데 공연초는 신비로운 교예 공연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다 공연의 심도가 깊어질수록 관객들의 입에서 탄성과 비명이 터져 나온다. 관객들 대부분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유는 신의 경지에 닿은듯한 교예단원들의 공연 예술성과 창작성, 그 이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단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연습이 따랐기에, 저 정도 신출귀몰할 정도의 교예 예술이 탄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들의 인고(忍苦) 있었을까 생각하니, 내 자식 또래들 교단원들에 동정심이 가며 측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 더 이상 교예단원들의 공연을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교예단원들 하나, 하나 어쩌면 그렇게 앳되고 미모가 걸출한지......, 그중에서 유달리 앳된 남성 단원은 신의 경지에 가까운 예술성과, 수려한 외모가 아깝다. 때문에 만에 하나 공연 중 그가 실수를 할까 2시간 내내,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 모른다.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져 마음속으로 교예단원들의 무탈안전 가호를 빌뿐이다.

 

평양 모란봉 교예단그들은 우리 남측 사람들에게 북측의 잘 훈련된 교예 예술을 자랑하려 했지만, 역으로 우리 남측 관람객들은 그들의 예술에 대한 극찬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동정을 느끼게 하는 마음 아픈 교예 공연으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교예관람을 하고 나오니 금강산의 밤은 유난히도 캄캄하다. 다행히 하늘 가득히 반짝이는 별빛이 우리 가는 길을 밝혀준다. 평양교예단 관람을 마치고 오전에 예약 해놓은 북측이 자랑하는 금강산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간다. 셔틀버스를 타고 소나무 숲이 무성한 도로를 따라 달려가니 여기가 금강원 식당이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식당 전체가 정전이 되며 칠흑 같은 어둠이다.

 

긴급조치로 셔틀버스 라이트 도움을 받으며 십여 분 기다린다. 그러자 전기가 들어왔다. 이곳 금강원은 북에서선 상당히 알려진 유명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등이 몇 개뿐이다. 오죽했으면 그 넓은 홀에 60W 백열 구 한 개를 켰다. 그러다 보니 음식이 제대로 구분도 안될 정도다. 그 아래서 그들이 자랑하는 오리와 멧돼지 구이, 그리고 몇 가지 나물,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만두 몇 개에 도루묵 요리들인데, 맛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지 담백하다.

 

교예단원 공연을 보며 너무 많이 울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목이 멘다. 서둘러 포켓용 소주에 북한산 들쭉술 (119달러) 2병을 시켜, 누가 따라 주기도 전에 한 잔을 마셨다. 그러자 다소 마음에 안정이 된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외국계 가수들이 부르는 음악이 흥겹다. 내친김에 레스토랑까지 2차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헤어지려는데 레스토랑 지배인 총각이, 아버지 어머님들 노는 모습 보니 불현듯 고향의 부모님 생각이 난다며, 자신이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다며 주병선의 칠갑산을 부른다.

 

그런데 이 청년 노래를 얼마나 구성지게 잘 부르는지, 일행들 모두 총각을 얼싸앉고 또 울었다. 총각의 노래가 끝나고 일행들이 나더러 답곡을 부르란다. 나에 18번도 노래도 칠갑산이다. 나도 총각처럼 칠갑산을 취한 김에 흐드러지게 부른다. 그러자 일행들이 총각을 끓어 안기며 아들 삼으라고 안겨준다.

 

정말 당시 마음 같아선 내가 다시 금강산에 올 수 있고, 그 때도 총각이 근무를 한다면 증표(證票) 될만한 선물이라도 전하고, 수양 아들을 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어, 3편을 다시 올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