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것은 그리워 지는것...빛바랜 사진을 복원하다

2020. 11. 26. 19:32☎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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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없는 나무 없고 조상없는 후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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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平尹氏太尉公派世譜 券之一

 

이 족보는 파평윤씨태위공파남양공손 우리집안 족보다. 우리집은 6.25한국전쟁으로 집은 물론 족보도 모두 불타버렸다. 그후 피난 생활 현지에서 6남매 데리고 어렵게 살아야 했던 아버지께서는 파평윤씨 대종회에서 새로운 족보편찬을 할때 족보 신청을 못하셨다.

 

그래서 늘 가문의 내력을 담은 족보를 소장하시는것이 원이셨다. 그러던중 내가 13살되던해, 1956년 당시 국민학교 4학년 1학기때, 가정형편으로 국민학교를 중퇴 하고 인조대왕릉(파주시 탄현면 갈현3리)에 위치한 일명 작은능 관리사에서, 서당을 운영하셨던 조석훈 선생님께 한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한문 지도를 하여주셨던 조석훈 선생님 아드님, 故 조임승씨(88세추정)와 故(85세추정)김영세씨에게 아버지께서 우리집안 족보 필사를 부탁 하셨다. 그래서 坡平尹氏太尉公派世譜 券之一 편은 김영세 씨가,坡平尹氏太尉公派世譜 券之貳 편은 조임승씨가 몇 개월에 걸쳐 필사를 해주셨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수고 하신 두 분 선생님께 떡 한말, 그리고 정종 한병씩을 감사의 뜻으로 전하셨었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족보에 묘소가 그려진 그림은 당시 13살였던 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 나는 77세다.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 복사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 복사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 복사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 복사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 복사

조임승 선생님께 세필 붓으로 몇 개월에 걸처 필사한 파평윤씨 태위공파 우리집안 족보 2권중 복사

아버지(故윤병학 109세옹)께서 즐겨 보시며,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新 千字文"이다. 책이 오래되어 좀도 쓸고 그러다 보니 자연 훼손상태가 심한 상태다. 그때 그시절 아버지를 그리며 빛바랜 책을 스켄해서 복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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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아버지(故윤병학 109세옹)께서 쓰셨던 우리집안 부조(扶助)기다. 보는 사람에 따라

하찮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에겐 그 어떤 유물보다 소중하고 값지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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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버지의 글이 아닌 나에 큰 형님(윤한균)께서 기장 하신 부분이다

이부분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셋째인 내가 기장한 부조기다

1952년 국민학교 입학기념 3남매 사진 바지저고리 입은 아이가 현 77세 윤도균이다

 

삼남매(윤도균 9세, 윤대균 6세, 윤희순 4세) 정면에서 왼쪽에, 조끼 입은 아이가 나다. 고등학생은 서울에서온 큰 형님 친구분들이시다. 이 시절 우리 남매는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세대가 되어, 가정 형편상 내복도 못입고 홑 바지 저고리에 버선을 신고 겨울을 났다.

 

그런데 그 시절은 왜 그렇게 겨울이 추웠는지 모른다. 삼한사온 기온인데 추운날은 보통 영하 25도를 오르내렸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때 그시절은 왜 그렇게 추웠는지 이유를 알것 같다. 그것은 바로 공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긴, 자연기후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4남매

 

남매 그림중 학생복 입은 사람은 큰형이시고, 오른쪽 아이가 나다. 가운데, 막내 여동생, 왼편 남자 아이가 내 손아래 동생이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1학기때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서당엘 다녔다. 사진에

바지저고리입은 아이가 나다. 지금 77세다. 슬하에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를 두었다.

1963년 12월 28일 파주고등농민학원 제4기생 수료식 기념

 

당시 나는 늘 배움에 굶주려 걸씬들린 사람처럼 살았다. 그래서 배우는 일이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막론하고 다니며 배우고 또 배웠다. 그러는 사이 '남자 나이 60을 지나니 자연스럽게 학력, 졸업증이 없어도 좋은 세상'을 만났다.

 

이때부터 나는 날개를 펴고 새 세상에서, 제2의 인생이모작 시대를 맞이했다. 비록 실력은 많이 모자랐지만, 무슨일이던 없이 도전했다. 서예, 문학, 사진, 영상, 등산, 인터넷, 기타등 쉼 없이 포기하지 않고 추구했다.

 

그 결과 비록 꼰대이 세대지만, 아직은 왕성한 건강을 자랑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활동을 하며 당당히 살게 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때가 기회란 말'을 난 좋아한다.

 

1963년 파주고등농민학원 제5기 졸업기념 사진이다. 친구들과 함께

1964년 경기도농촌진흥원에서 한 달간 목공훈련을마치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

1964년 동네 친구들과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소령원과 고령으로 캠핑을 갔다.

 

웃기는일은 텐트가 없어 마을에서 잔치, 또는 큰일때 사용하는 두터운 천으로 만든 차일(챌)을 천막대용으로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이 짐이 너무 무거워 길다란 작대기에 꿰어, 둘이 어깨에 메고, 들고 다녔다.

 

그리고 양은솥, 쌀, 부식류, 배구공, 라디오, 가방이 없는 아이들은 옷을 보자기에 싸들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시대를 산것 같다. 신기한것은 아이들마다 요즘의 스틱대신 노간주 나무로 만든 단장을 들고 다녔다.

무거운 짐보따리를 들고 아이들이 단체로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지금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당시엔 신문명을 받아드리며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사진은 일행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탄현면 법흥1리 약산골에서 12킬로 정도 걸어서 조리면 봉일천 낙머리에서 광탄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버스는 광탄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리들은 또 다시 소령원을 거쳐 고령산까지 걸었다. 그래도 힘든줄 몰랐다. 카메라는 월남에서 돌아온 친구에게 빌렸고, 라디오는 서울 친척집에서 가져왔다.

 

고령에서 캠핑중에 찍은 반나 사진이다. 9명중 3명이 없다.

5.16혁명이 나고, 마을마다 4-H구락부가 생겼다. 당시 4-H는 '잠자는 농촌을 흔들어 깨우는 역활을 했다.' 우리동네도 4-H구락부가 조직 되었다. 100여호 조금넘는 동네에 약산 4-H가 먼저 창립 했다.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비주류 사람들이 또 서광4-H를 조직했다. 그바람에 한 동네에서 쌍벽을 이루며 활동 했다. 그러다 서광 4-H는 중도 해산했다.

 

그리고 1965년 약산 4-H회원들은 낮에는 들녘에서 일학소, 저녁이면 달빛 남폿불을 밝히고, 농촌지도소에서 빌려온 흙벽돌 찍는 기계로 근, 두 달여에 걸쳐 흙벽돌을 찍어, 당시 파주군에서는 최초로 마을회관을 4-H회원들이 손수 지었다.

 

이때 우리 마을은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오지 마을이었다. 그런데 회관 낙성식에 경기도 도지사, 농촌진흥원장, 파주군수, 농촌지도소장등 기타 내빈들이 참석했다. 그 바람에 마을 주민들이 며칠을 걸려,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을길을 넓혀 내빈을 맞이했다.

 

사진은 마을 회관낙성식에 참석하신 내빈과 마을주민, 4-H회원들이 단체로 찍은 기념 사진이다

1965년 4-H회원들이 벽돌을찍어 마을회관을 짓고 낙성식하는 모습이다.

 

회관을 짓기 위해 무려 3개월 이상을 남, 녀 4-H회원들이 고생했던 생각을 하며 그날 식이 끝나고 나는 벅찬 감동을 이길 수 없어, 혼자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1965년 4-H회원들이 벽돌을찍어 마을회관을 짓고 낙성식하는 모습이다. 여자 아이들은 수줍어 머리를 돌리고 있는 모습들이 신기하다.

 

마을회관 낙성식에 참석하시는 내빈을 4-H회원들이 맞이하고 있다.

 

마을회관 낙성식에 참석하시는 내빈을 4-H회원들이 맞이하고 있다.

4-H회원들과 내빈 그리고 마을 유지분들이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이때 우리마을에 유선방송도 들어왔다. 수고하신분들 모습이다

 

1965년 당시 법흥리 마을 불방죽 뚝방 모습이다.

 

해마다 장마만 지면 한강물이 범람해 뚝방이 터지는 바람에 일년 동안 땀흘려 지은 농사를 큰 폐해를 입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자유로가 건설되었다.

 

1965년 당시 법흥리 마을 불방죽 뚝방 모습이다.

 

해마다 장마만 지면 한강물이 범람해 뚝방이 터지는 바람에 일년 동안 땀흘려 지은 농사를 큰 폐해를 입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자유로가 건설되었다.

 

야간교육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이다.

 

마을회관을 짓기전에는 남의집 사랑방을 이집저집 전전하며 4년여 동안 야간교육(중등과정)을 했다. 그런데 회관을 짓고서는 마을회관에서 야학을 했다. 그때 그 아이들과 함께 찍은 단체 기념사진이다.

 

1968년 건국대학교에서 한국농촌문화연구회 수련을 마치고 1

 

1968년 건국대학교에서 한국농촌문화연구회 수련을 마치고 2

현 법흥1리 이주단지가 생기기 전 마을 풍경이다.

통일동산조성사업으로 마을이 변화하기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1리(약산골) 마을 전경이다. 사진출처 : 노한호 제공

4-H 활동과 야간교육을 지도했던 내가 26세 늦은 나이에 입대할때, 1969년 12월 3일 나를 따르던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송별회나 아이들이 얼마나 나를 잡고 울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다.

 

1969년 11월 경기도 4-H 경진대회에서 파주군이 처음으로 우승 하고 참가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1969년 11월 경기도 4-H 경진대회에서 파주군이 처음으로 우승 하고 참가회원들이 내빈과 당시 이재현 경기도농촌진흥원장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69년 11월 경기도 4-H 경진대회에서 파주군이 처음으로 우승 하고 참가회원들이 내빈과 당시 이재현 경기도농촌진흥원장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67년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신용협동조합설립 교육에 참여한 교육실황 사진

1967년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신용협동조합설립 교육에 참여한 우리마을 사람들

1969년 10월 파주군 4-H경진대회에서 약산4-H가 우승을 하고 기념 사진을

1969년 파주군 4-H경진대회에 출전했을때 찍은 약산 4-H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