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연원사...파평윤씨 청송심씨와의 산송(山訟) 이야기

2020. 7. 3. 19:51☎파평윤씨네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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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연원사 (坡平尹氏淵源史)

어려운 한자나 한자어를 잘 모르는 젊은 후손들이 천여 년의 오랜 세월동안 우리나라를 빛내면서 면면히 이어져 낼려온 울 파평운문의 역사를 배우고 있히는데 도움을 주기 우해 석훈(奭勳) 5대 대종회장께서 1976년 7월 저술하여 발간한 『파평윤씨연윤사 坡平尹氏淵源史』를 이해하기 쉽게 재편집하여 연재 합니다.

 

※ 이 내용은 동 연원사 저술자의 견해이며 대종회의 공식 입장은 아님을 밝힙니다.

본 글은 “坡平尹氏 大宗報 (尹紀 1128年 檀紀 4353년 庚子年 陰 5月 10日 第487號)에서 발췌하여, 많은 종친(親)들이 SNS를 통해 쉽게 파평윤씨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발췌 했다.

- 靑波 尹道均 -

 

청송심씨와의 산송(山訟)

서울로 돌아온 동규(東圭)씨는 여러 종인들과 상의하여 옛날의 임강현(臨江縣)이 분수원(汾水院)이 분명하고, 문숙공(文肅公) 산소 앞에 교자총(轎子塚)이 있다고 했으니 그곳을 먼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종인 여러 사람이 다시 분수원에 가서 밭 가운데에서 썩은 나뭇 조각과 쇳조각이 나와 그곳이 교자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좌윤(左尹)이신 면교(勉敎)씨와 상의해 여러 종인들이 연명으로, 영조(英祖)에게 상소(上訴)하는 한편으로 죄의정 동도(東度)공에도 알려 그 고총(古冢)이 문숙공 산소가 맞는지 조사해 보라는 어명을 받았다. 수소문 끝에 그 지역에 사는 노인의 제보로 산소 좌측 수십 보 거리의 작은 구렁텅이 속에서 부러진 비석(碑石) 한쪽을 찾았다. 또 종인 수십 명이 고총을 파보았는데 문숙공(文肅公) 지석(誌石)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을 영조(英祖)에게 보고 했더니 처음에는 심정승(沈政丞) 묘는 이장하고, 문숙공 산소는 개복축(改封築)하라는 어명이 내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윤씨와 심씨 두 집안이 각자의 산소를 수호토록 하라고 어명이 바뀌었다. 당시 경종(景宗) 비(妃) 심씨는 승하하고 계비(繼妃)가 어씨였는데, 심씨들이 어대비(魚大妃)에게 은밀히 지원을 요청했다. 어대비(魚大妃)가 심씨들은 10여 기의 묘를 이장해야 하지만 윤씨 묘는 1기이므로 윤씨 묘를 옮기도록 해달라고 영조(英祖)에게 부탁했다.

 

혼자되신 형수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영조(英祖)는 윤씨에 왕비가 네 분이었고, 심씨도 왕비가 세분으로 두 집안 모두 선대의 외가라면서, 산은 윤씨에게 돌려주고 심씨들의 묘는 그대로 보전하도록 하라고 하교했다. 임금의 하교에도 양 문중의 산송(山訟)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

심씨네에서 정최(廷最)씨가, 그리고 윤문에서는 희복(熙復)공이 대표로 어전송소(御前訟訴)를 했다. ‘어명대로 두 가문이 동산소(同山所 : 두 집안의 산소를 한 땅에 같이 씀)로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임금이 하문하자, 희복(熙復)공은 산소가 좌우로 있으면 동산소(同山所)로 지낼 수 있으나 심정승의 3대(三代) 계장(繼葬)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동산소(同山所)로 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때 희복(熙復)공의 말씀을 대신들이 불경(不敬)으로 몰아서, 희복(熙復)공은 장살(杖殺) : 곤장을 맞아 죽음)을 당하셨다. 이후 양 문중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 사이로 내려왔는데, 윤씨들이 심씨세장비(沈氏世葬碑)를 때려 부수자 심씨들은 우리 교자총비(轎子塚碑)를 부순 일도 있었다.

 

심정승 묘 파굴(破堀)

1948년 4월 석훈(奭勳)은 여주 금사면 하호리 서파상공(西坡相公) 재실에서 종회장 기덕(起德), 종손 익상(翼相), 유사 태용(台鏞)씨 등과 함께 문숙공 산소에 압장(壓葬)시키지 못한 것은 영조의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장을 추진하는데 의견이 합쳐졌다. 우선 심씨(沈氏)들과 교섭해 우리가 비용을 대고 이장하는 방안을 추진해보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이전 시키자고 결의했다.

석훈(奭勳)은 서울로 올라오 수소문하여 마포에 사는 심정승의 종손 심용심(沈容植), 그리고 그의 외사촌 형인 황정연(黃正淵)과 3자 회동을 했다. 그동안은 왕명을 거역하기 어려워 우리가 자손 노릇을 못했으나 이제는 강제로라도 묘를 옮기자는 주장이 있다면서 비용은 우리가 부담 하겠으니 이장할 것을 요청했다. 심용식은 종손이라 해서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문중에서 상의 해보겠다면서 이장하는 대가로 일백만 원을 요구했다. 이장비용외에 위토(位土)와 묘막(墓幕)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포함한 것이엇다. 열흘 후 다시 만나 7춸 중 이장 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황정연을 보증인으로 하여 약조금(約條金) 10만원도 지급했다.

 

그러나 7월에 이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심용식은 지파(支派)에서 반대하고 있으므로 음력 8월 15일 추석에 지파(支派)종인들이 성묘를 다녀간 직후인 16일밤 이장을 실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장할 장소는 문숙공 산소 좌청룡 등 넘어, 자기 선조 풍덕공 묘 위로 정해 놓았다고 했다. 파묘(破墓)할 때 40만원 그리고 관(棺)을 옮길 때 나머지 50만원을 주기로 문서도 작성해 나눠 가졌다. 8월 16일 여주 하호리 문중에서 금광(金鑛)에 다니는 젊은 종인 20명이 땅파는 기구를 가지고 심용식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작업은 착수도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오후 9시부터 야간 통행을 금지하던 때라 경찰 2명이 매시간 순찰을 했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청 총무과장 우경(宇景)씨의 서신을 받아 광탄지서에 제시하고 8월 24일 다시 이장을 시도했다. 분수리 지역 주민을 동원해 파묘를 시작하고 약속대로 심용식에게 40만원도 지급했다.

새벽 3시경 벼룻돌 같은 지석(誌石 : 고인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까지 걷어 냈으나 관을 둘러싼 석회가 단단해 고심하고 있는 중 광탄지서에서 작업을 중지하라는 연락이 왔다. 인근에 사는 심씨가 신고를 한 것이다. 심씨들 50여명이 몰려온다는 소식도 전해져 부득이 작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심용식은 현장에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날 비용은 여주 하호리 문중에서 42만원, 강화 산문리 문중에서 10만원 등을 분담했다.

 

이튼날 심씨 문중에서 심정승 묘를 개봉축하고, 석훈(奭勳)과 심용식(沈容植)을 검찰에 고소했다. 각종 증거 서류와 황정인 등 증인을 내세워 그동안의 정황을 입증했으나. 심용식이 도주 했기 때문에 미결로 남았다. 이듬해 5월 강화에 숨어있던 심용식이 돌아와 검찰에 출두해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하자 검찰은 양 문중 대표 각각 5인 이상이 나와 변론할 것을 요청했다. 윤문에서는 대종회장 병호(炳皓) 부회장 세용(世鏞), 화수회 부회장 현철(顯喆), 총무 석훈(奭勳), 감사 도병(圖炳)등이 출석했고, 심씨측에서도 7명이 나왔다.

변론에서는 주로 심용식의 증손 자격에 대해 논란이 이어졌다. 본래 심용식의 형이 있었으나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고 부인도 재가했는데, 심씨측에서는 심용식이 증손이 아니므로 심정승 묘의 이장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변론이 끝나고 검사가 석훈과 심용식만 따로 불러, 이장을 하면 사건이 종결되나 받은 돈 50만원을 반환하지 않고 이장도 하지 않으면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하니 심용식이 8월 이내로 이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나온 뒤 심용식의 태도는 돌변했다. 미안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장비를 백만원 더 내라고 요구하면서 윤가들이 굴총(掘塚)을 해 보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제창약국을 운영하는 목구(牧九)씨와 상의했더니 7만원을 내놓으며 우리가 강제로라도 이장을 해버리자고 주장했다. 석훈(奭勳)이 종인 중에서 심총(沈塚)을 파굴해서 징역을 살이를 하면 그 가족은 종중에서 보살피겠다고 했더니, 춘천에 사는 병순(炳淳)씨가 징역을 살아도 떳떳하고 명예로운 일이라며 자원했다.

서울에서 인부 20명을 모집해 내려가 아침부터 파굴을 시작했는데, 지서에서 경찰 2명이 나와 작업을 제지했다. 석훈(奭勳)도 파굴을 했다가 소골(銷骨)이 되어 신체가 없으면 우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 3시경 달용(達容)을 보내 작업을 중단 시켰다. 병순(炳淳)씨는 재실에서 자다가 체포되어 문산경찰서에 구금되고 8월 5일 개성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3차 파굴과 화해 접근

병순(炳淳)씨가 체포된 뒤 심용식을 검찰청으로 불러 8월 27일가지 이장을 완료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비용 20만원을 더 주게다는 증서까지 교환했다. 8월 22일에는 체신부장관 석구(錫龜)씨 집에서 종회를 개최해 이장 비용 70만원을 우선 은행에서 대출받아 마련하기로 상의하는 중, 심용식이 사망했다는 전갈이 왔다. 이튼날 조문을 하고 나서 심씨 종중 대표 심원정(沈遠貞)에게 편지를 보냈다. 심용식과 약속한 대로 비용 70만원을 지급하겠으니 심씨 문중에서 이장해 주던지, 그렇치 않으면 심용식에 이미 지급한 50만원을 심씨 문중에서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두세 차례 더 서신을 보내도 회답이 없으므로 심씨들이 해마다 심정승 묘에서 절사(節祀)를 올리는 9월 9일 양 문중 대표가 묘정에 모여 완만히 타협하자는 서신을 보낸 후 당일 종친 5~60명이 찾아갔다. 그러나 심씨들은 그 전날 내려와 아침에 절사(節祀)를 지내고 모두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서신에 회답도 없고 협의 요청에도 응해주지 않자 몹시 화가 난 종인들이 세 번째로 심총을 굴파했다.

 

이 소식을 듣고 9월 12일 심씨 세사람이 병호(炳皓) 회장을 찾아왔다. 병호(炳皓) 회장이 우리 윤씨들은 심정승 묘를 파고 징역 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으름장을 놓자 심씨들은 이장을 하겠다면서 양 문중 대표가 모여 화해하고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날짜를 정해 양 문중 대표가 세종로 심종섭(沈鐘燮) 대서소 2층에서 만나 협의했는데, 병호(炳皓) 회장이 화수회장 석구(錫龜)씨가 참석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유회(流會)시키고 다시 회합하기로 하여 최종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후 심씨들이 장소를 정해 이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전언이 있어 우리도 종친들에게 무례한 행동은 삼가도록 하던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정부도 부산으로 내려가고 종친들도 각자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 주 : 2005년 8월 파평윤씨대종회 소유 임야 일부를 청송심씨대종회에 기증하고, 청송심씨는 해당 선대 분묘 전체를 이장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양 문중간 400여년의 산송이 일단락되고, 동 합의에 의하여 2008년 6월까지 문숙공 묘역 뒤편에 있던 청송심씨 산소 19기가 모두 이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