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20p] 제1장 언어의 성격을 이해하는길...1. 언어에도 색깔이 있다

2020. 3. 17. 19:51☎저작권침해신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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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언어의 성격을 이해하는길...1. 언어에도 색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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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에도 색깔이 있다


  1) 언어가 지니는 소리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낱말의 듯을 공책에 적어 오라는 숙제를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게 되면 낱말의 뜻을 공책에 적는 일은 그만두게 된다. 가끔 어려운 말을 보게 될 때나 사전을 뒤져볼 뿐이다.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나 색깔이나 정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글쓰기의 문제는 비롯된다. 명확한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 자신의 뜻과는 전혀 어긋나게 전달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태어나 자라나다 소멸하는 과정을 거친다. 또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50년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면 "공갈하지 마"라고 했다. '거짓말'이 '공갈'로 바뀐 것이다. 물론 이 바뀌게 되는 과정은 언어학적 해명을 통해 여러 가지로 밝혀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정확하게 그 시대에 맞는 언어를 골라서 사용할 수 있어야 자신의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마련하는 거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언어가 지니고 있는 속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첫째로 언어를 이루는 소리 하나하나가 그 나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 해 고요히 지는 제

머엉 산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듯 향취가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김영랑, <가늘한 내음> 중에서


  이 시는 1930년 6호호《시문학》지에 실린것이다. 벌써 60년 전에 발표된 시라서 조금은 어색한 언어들이 눈에 뛴다. '애끈히'라든가 '슬리는'등의 언어는 금방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시어를 이루는 소리 하나 하나가 부드럽게 느껴지낟.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 높은 목소리로 읽어보려고 해도 분노나 격정의 정조가 얹히게 읽을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랑 시인이 묘하게 'ㄴ'이 첫소리인 단어를 많이 씀으로써, 'ㄴ'음이 두운을 이루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잇다. 'ㄴ, ㄹ, ㅁ'등과 ㅋ, ㅌ, ㅍ' 등과를 비교하면 전자는 여성적인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언어를 쓰고자 할 대는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감각성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의성어와 의태어는 표현의 영역을 넓혀준다

  둘째로 이 소리가 서로 엉키어 만들어내는 의성어나 의태어에 대한 것이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흔히 감각어라고 부른다. 오관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을 표현하는 단어로, 그 범위가 참으로 넓다.

  의성어의 경우를 예로 하여 보면 식사할 때 입에서 나는 소리만 해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짭짭, 쩝쩝, 쭉쭉, 쪽쪽 등과 같은 의태어들은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어린아이가 맛있는 과자를 먹을 대 '짭짭' 하고 먹는다고 하면 어울려도 어른이 '짭짭' 소리를 내며 먹는다고 하면 품위가 없어 보인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내가 아는 젊은 여성이 나이가 차서 한 청년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  나는 그 여자가 고등학교를 나왔어도 인성이 착하고 진실해서 대학원을 나온 훌륭한 청년을 마나게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청년이 나에게 와서 "저는 그 여자가 좋은데, 여자쪽에서 만나려 하지 않으니 웬일인지 선생님이 좀 알아봐주셨으면"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왜 그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 여자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머뭇거리 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다그치자, "선생님, 그 청년은 진실하고 장래도 있고 나보다 훨ㅆㄴ 나은 분인데요, 그렇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먹을 대에 '쩝쩝' 소리를 얼마나 크게 내는지 집에 가서도 귀에 '쩝쩝'하던 소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혼사는 깨어지고 말았다.

  소리가 지니고 있는 감각적 세계가 얼마나 인간의 정신과 감성을 자극하는 것인지를 말해주는 한 예이다.

  의태어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소리로 모양을 형상화해 놓는다고 좋은 표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 지닌 특성은 어떻게 소리를 나타냈는가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진다.

  한 예로 깡충'과 '껑충' 만 비교하여보면 알 수가 있다.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왔는데 껑충하게 짧게 자른 스커트 때문인지 다리가 유난히 길어보였다" 라고 할 때 '깡충' 이라는 말은 예쁘게 보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똑같은 문장에다가 '껑충'이라는 말을 넣어보면 전혀 다른 말이 된다. '껑충'하게 자른 스커트로 해서 다라기 길게 보이는 모습이 거칠고 모양새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성어나 의태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먼저 소리가 지니고 있는 성격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대상에 맞춛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잇는 능력을 갗추어야 한다.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 별명이 '똘똘이'였다. 선생님은 아침 조회시간이나 종례시간에 들어오시면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똘똘 뭉치자"라고 따라 소리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을 '똘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국어시간에 의태어냐 의성어냐 하는 문제로 '똘똘'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는 두고두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아이는 국어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치시던 우리 담임선생님을 놀리려고 그런 문제를 냈을 거라고 했지만 믿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똘똘이라는 말을 입에 항상 담고 다녔다.

  그런데 이 똘똘이라는 말은 '돌돌'의 센말로 여러 겹으로 물건을 감은ㄴ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며서 또 물건이 가볍게 빨리 구르는 소리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우리가 선생의 별명을 '돌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날 종례시간에 우리들에게 "내가 똘똘하다고 생각하여 똘똘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하여 온 교실이 떠나갈 뻔하였다. 선생님은 '똘똘'이라는 말을 독똑하고 영리하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생각과는 달리, 작달막한 키와 시커먼 얼굴이 마치 돌이 굴러가는 것같이 보이고, 웃을 항상 꼭 조이게 입고 있어서 옷으로 몸을 감고 있는 듯이 보였기에 똘똘이가 어울리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성어나 의태어는 언어의 표현영역을 넓혀주는 것이기에, 감각의 전영역에서 어떻게 감각과 어울리는 언어를 찾아내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르르르

물결이 나의 발 밑까지 올라와서는

스르르르 밀려난다.

뒤미처 치닫는 파도가 그것을 다시 밀어 올린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하나의 파도가 풀리면 다른 파도가 재빨리 그 뒤를 대어 선가.

쉴 새가 없다.

수평선까지 파도는 이어져 있다.

그 많은 파도가 차례차례 밀려올 모양이다.

-김윤서아, <원경> 중에서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파도의 역동성과 지속성을 '우르르르'와 '스르르르' 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파도가 왔다가 물러나려고 하면 다시 다른 파도가 밀려오는 이 지속적이고도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다가설 수 없는 인간의 감회를 자아내게 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이러한 시인의 감회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르르르', '스르르르' 라는 시어이다. 시인이 파도를 찬찬히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와 모양을 딴 말을 찾아내고자 했기 때문에 얻어진 효과이다.

  의성어나 의태어의 문제를 보다 세밀하게 보기 위해서 감각의 하위분야로 다가서보면, 먼저 시각의 경우 '붉다'는 느낌을 나타내는 다양한 언어를 들 수가 있다.


  붉다-빨갛다, 뻘겋다, 벌겋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불그스럼, 빨가스럼, 불그레, 빨그레, 볼그레, 볼그스럼, 보리기례, 발그례 등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이와 같이 '붉다' 라는 표현 하나도 그 색깔의 농도나 사물이 자리잡고 있는 분위기에 다라서 쓰이는 어휘가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이 다양한 언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얼마전 길에서 해수욕을 다녀온 한 여성을 만났다. 나는 무심코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가 보기 좋다는 듯으로 "참 잘 태웠네여. 까맣게 탄 모습을 보니 건강하게 보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녀는 조금은 섭섭한 듯이 "까맣게 태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까무잡잡하게 태우려고 했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까맣다'와 '까무잡잡하다'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즉, '까맣다' 라고 하면 해변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보니 타버린 피부라는 감추어진 듯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고, '까무잡잡하다'라는 말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의도적으로 햇볕에 피부를 태운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구태여 '까무잡잡' 이라는 말을 찾아 자신을 변호했던 그녀의 세심함이 바로 시각을 통해서 얻어지는 색깔을 표현해내는 데 있어서 어떤 감각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청각의 경우도 이에 못지 않다. 우는 소리만 해도 그 느낌을 드러내는 표현은'응응, 엉엉, 앵앵, 앙앙, 흑흑, 호호, 끼륵끼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밤중에 슬피 우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울음이 어떤 소리로 들리며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흑흑' 하는 소리를 내고 우는 것과 '음음' 하고 안으로 삼키며 우는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여인의 내면에 잠겨 있는 슬픔의 질량을 표시해내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때 두우 하고 정오의 사이렌이 울렷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이상, <날개> 중에서


  이상의 <날개> 중에서 마지막부분에 해당하는 이곳을 읽게 되면 나는 '두우' 하고 울리던 정오의 사이렌 소리를 한참이나 듣게 된다. 정오만 되면 울리던 사이렌은 낮 시간의 중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우' 하는 소리는 12시라는 시간이 가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닭이 푸드덕거리며 일어서서 소리를 지르는 순간과도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산문에서도 소리의 표현이 지니는 의미는 운문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외에 미각이나 촉각 또는 후각에 이르기까지 감각어의 종류는 다양하고, 이 감각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야말로 '자신만이 느낀것' 을 표현해내는 좋은 자료와 도구가 될 수 있다.

  다음의 예문을 비교해보면 작가들이 어떻게 감각어를 개성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입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촌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밟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앞도 뒤도 없이 이 시구 한 토막이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침을 삼키게 했던 그 '시큼털털' 한 찹쌀탁주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명색이 도시 학생이었으나 포성이 휴전으로 멈추고 수년이 지나면서 지방 사람들이 꾀어들고 있던 무렵이라 학급의 반수 이상은 농촌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찹쌀막걸리 맛을 아는 듯이 쩝쩝 입소리를 내었고 도시 아이들은 맛을 상상하며 덩달아 끄윽 신트림을 토했던 것이다.

-김용성, <아카시아> (《탐욕이 열리는 나무》 중에서


  이 인용부분은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이 교실에서 선생이 백석의 시 한 수를 읊어주었던 일을 떠올리고 그때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글에서 '시큼털털' 한 막걸리의 맛이 주는 감각적인 연상은 끄윽 하는 신트림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는데, 이 말이 인용된 백석의 시<고향>이 지니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는 중심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와 산문이 서로 얽힌 위의 글에서 서로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고리가 바로 맛을 드러내는 '시큼털털' 이라고 하는 언어라는 점은 하나의 느낌을 드러내는 언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 만난다는 것, 그리하여 느끼고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일체를 불가에서는 별수없는 인간의 망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 망집에 대한 명상을 멈추고 말았다. 물크덩한 쇠똥을 오른발로 밟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알 것 같았다. 인도의 냄새, 그것은 소들의 천국에서 빚어지는 미세한 악취였다.

-황충상. <불의집에서> (<뼈있는 여자>) 중에서


   이 글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명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쇠똥을 밟게 하고 있다. 쇠똥이 주는 '물크덩한' 느낌은 인도로 가는길이 되고 있다. 실제로 어렸을 때 고향에서 쇠똥을 밟았을 때의 느낌은 물크덩한 것이라기보다는 철벅 하는 듯한 미끄러움이었ㄷ. 그런데 작가는 '물크덩한' 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서 어떤 느낌일까 하는 마음으로 한참이나 이 어휘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작가는 이와 같이 독자를 색다른 느낌으로 몰고 가서 조금 머뭇거리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독특한 세계를 면밀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오관을 통해서 잡혀지는 감각어들을 보다 선명하게 글 속에서 드러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어휘가 어룰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감각이 지니는 다양성을 변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능력이란 다름이 아니라 감각이 지니는 미세한 차이를 세심하게 비교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판별력인 것이다.

  젊은 여서이 도시의 화려한 상점 앞을 유행하는 옷을 입고 활기차게 걷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을 때, '야, 멋있게 걸어간다' 라고 한다면 평범한 표현이 될 뿐이다. '야, 무지개처럼 지나가네'라고 했을 대는 시각적 효과에 촛점이 맞추어져 환상적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훨훨 날아가네' 하면 도도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느끼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수한 표현기술은 이러한 세심한 표현을 통해 그 맛을 드러나게 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2) 엉어의 여러 가지 쓰임을 알아야 한다.


  ▶ 사투리를 사용하여 독특한 성격을 창조해낼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적절하게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점은 표준어와 방언, 또 외래어나 한자어의 사용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연속극을 보고 있으면 주인공이 어떤 지방 사투리로 말을 할 때 독특한 성경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농촌에 사는 이가 투박한 그 고장의 사투리를 쓸 때에는 소박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들러나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예의바른 표준어를 매끄럽게 쓰는 것을 보면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구수한 인간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오늘은 가마이 누워 계쟁쿠······."

 낮에 그 몸으로 산에 가서 풀뿌리를 캐온 것을 민망해하면서 나무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누워 있겠음. 칡뿌리래도 캐다가 아아드르 맥여얍지."

쿨룩쿨룩 시어머니의 기침이 여전했다.

"순라꾼에게 들킨 게 앰매?"

"글쎄 말이꼬망."

"꿈자리가 뒤숭숭하드랑."

"어마임께서 꿈 이얘기 듣구서 한세코 말했등이 그 고집핑이 들어얍지."

- 안수길, 《북간도》 중에서


  이 소설은 만주와 우리 땅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북간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안수길은 이들의 사투리 속에 인정 있고 선량한 우리 농민의 순박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투리를 사용하면 물론 특이한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데 효과가 있지만,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글은 특정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표준어를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것이다.

  또 표준어를 써야 하는 이유로, 언어표현의 주체가 되는 이로서 언어를 다듬고 가꾸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정확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문화창달을 일구어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표준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언ㅌ어통일의 지편을 열 수 있고 나아가서 아름답고 훌륭한 언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래어와 한자어의 남용은 좋은 글을 망친다

  언어사용에서 주의할 점으로 외래어와 한자어의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요사이 국제화시대라고 해서 쓸데없이 외래어를 섞어 쓴 글을 읽을 때가 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명동에서 숍을 가졌다. 그런데 그날 이상하게도 기븜보다는 가슴을가득 메우는 것은 공허감이었다. 다른 사람의 축하 소리를 뒤로 한 채 무작정 거리를 배회했다.

  그런데 쇼 윈도 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장과정에 관한 영화를 방여하는 거였다. 그 내용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시간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엘리자 리' 로 정하기로 햇다. 숍을 오픈하라고 스폰서도 많이 나섰다. 그녀의 숍은 얼마 가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마이 웨딩》(1994년 1월호)


   윗글에서 '숍', '쇼 윈도', '스폰서', '오픈' 등의 외래어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외래어를 사용해야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아루래도 어색하게 대답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래어를 사욜할 대에는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말끝마다 외래어를 집어넣는 버릇이 있는 이를 만날 대면 당황하게 된다. 내가 단골로 가는 이발관 아저씨가 꼭 빠뜨리지 않고 스는 말 중의 하나가 '이메이지' 이다. 사전에 나오는 발음기호를 보면 틀림없이 '이미지' 로 되어 있다. 그는 이 말을 머리를 다듬으로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사용한다. 나는 좀 일러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도 그냥 꾹 참고 있다. 한참 지나서 발음을 고칠 때쯤 되어야 쓸데없이 외래어를 쓴다는 것이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쟁 체험기를 털어놓던 우리 동네의 한 아저씨를 더올릴때면 혼자 웃게 된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우리 동네에는 라디오를 수리하는 조그마한 가게를 하고 있던 아지씨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미군 방송인 AFKN에서 흘러나오던 팝송을 한 소절쯤 외우고 다녀야 아이들끼리 아라주곤 했다. 또한 학교 교실에서는 누가 팝송 가사를 원어로 적어오면 이를 베껴 먹느라고 법석을 떨곤 했다.

  어느 날 내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팝송 가사 하나를 적어왔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치킨 하트Chicken Heart>라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그것을 노트에 적고, 방과후에 학교 뒷산 나무숲에 틀어박혀 목소리를 가다듬어가며 이 노래를 친구에게 배웠다. 며칠이 지나 겨우 가사를 다 외우게 되엇을 때였다. 한 아이가 아침에 학교에 오더니 가사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 형이 적어준 가사는 앞자리의 아이가 적어온 가사와 몇 군데가 달랐다.

  그날 저녁, 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사를 가지고 동네 아저씨네 가게로 갔다. 아저씨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팝송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저씨는 항상 부르고 있어서 나는 그가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어린 우리를 만나면 가게로 데리고 가서 팝송을 가르쳐준다고 붙들어두곤 했던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다음 두 개의 가사를 꺼내놓고 어떤 것이 옳은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가사는 별게 아냐.  틀려도 그만이야. 무드만 있으면 돼" 하였다." 나는 그냥 머쓱해서 나오고 말았다. 유행가 가사 하나쯤 틀리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저씨가 흥얼거리기만 했지 저오학하게 가사를 알고 따라 부르던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웃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후 나는 틀린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이를 볼 수 있었는데 웬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엇다. 틀린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이를 보면 아무리 잘 불러도 어색하고 듣기가 민망할 뿐 아니라 듣는 이가 부끄러워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 것은 언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과 그 의미의 팢당이 얼마나 미묘하게 마음과사고의 영역에 작용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언어는 글쓰기의 기초적 도구이면서 문장 안에서 그 자체의 독특한 세계를 담고 잇는 것이기에, 다른 언어로 바꾸어놓았을 대는 또 다른 의미로 변환되는 것이다. 의성어나 의태어의 경우, 또는 한자의 사용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 나아가서 외래어나 신조어의 사용 등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 처칠은 전선으로 나갈 때면 사람들 앞에서 손가라긍로 V자를 만들어보이곤 해서, 흔히 이것을 처칠의 특이한 몸짓으로 알고 있다. 그는 V자를 그려보임으로써 국민에게 전쟁의 승리를 믿게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의 독특한 몸짓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대통령선거 때에도 각 후보들은 자신들만의 특이한 몸짓으로 국민의 기억에 남는 후보자가 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쓸데없는 몸짓이나 너무 과격한 체스처는 오히려 사람들의 신망을 덜어뜨리는 역작용을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장에 들어 있는 독특한 언어는 바로 글쓴이의 몸짓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부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문장에서도 쓸데없는 허황한 몸짓이 드러나는 어휘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의 과장된 표현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바로 난삽한 한자어를 쓰는 경우이다. 언어는 소리뿐만 아니라 글자의 형상이 주는 느낌도 큰 것이다. 의미의 전달도 한자로 쓰는 것과 한글로 쓰는 것의 차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요사이는 한자가 줄고 한글로된 신문도 보급이 되어가고 있지만 한자의 형사이 주는 느낌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


  여기 혼미(昏迷)와 저항(抵抗)과 불만(不滿)과 모색(摸索)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늘져가는 풍경(風景)이 있다. 거기에는 넘처흐르는 새로움에의 의욕(意慾)이 있고, 새로움을 모색(摸索)하다 지친 곤비(困憊)가 있다. 거기에는 또한 원색(原色)의 짙은 색채(色彩)가 있고, 퇴색(褪色)한 엷은 색깔이 이롱지고도 있다. 이 속에서 듣는 이 없는 대화(對話)가 들려온다. 아니 대화(對話)가 아니라 무수(無數)한 독백(獨白)이 서로 엇갈려가며 들려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독백(獨白)의 소리들을 뒤엎듯이 파도(波濤)가 밀려가는 풍경(風景)이 있는 것이다.

-홍사중, <한국문학의 오늘의 과제 (《한양》), 1963년 11월호) 중에서


  위의 글은 한국문학의 위상과 전망을 위해 쓴 글의 일부이다. 이글을 먼저 한글로 읽고 나서 다시 괄호 속에 든 한자를 읽어가며 문장을 살펴보면 전혀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