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04 ]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6. 경제성 7.정직성 8. 글쓰는 상황의 고려

2020. 3. 1. 18:03☎박동규교수문학실☎

728x90

제2장 좋은 글의 이론적 요건은 무엇인가

6. 경제성 7.정직성 8. 글쓰는 상황의 고려


14010_장려상_다도해해상_다도해의석양_박윤준_D


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멍멍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 전권을 타자를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6. 경제성


  '경제적이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는 듯이다. 글의 경제성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일러 글의 경제성이라 한다. 다시 말해 의미의 전달에 불필요한 표현은 일체 배제하는 것이 발로 경제성이다.

  글의 경제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최소한의 표현이 될 때 의미의 전달과 수용은 가장 효율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끼워넣게 되면 의미의 표현에 있어 글쓰는 이가 실수할 확률은 자연 퐆아지게 된다. 독자의 경우 또한 내용의 이해와 요지의 파악이 한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글의 경제성은 의미의 명료성과 정확성에 가장 큰 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의 경제성을 위해 가장 피료한 것은 바로 간결하게 쓴 ㄴ 것이다. 간결한 문장을 쓰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들을 살표보자.


   1) 동어반복을 피해야 한다.


   ▶ 동어반복은 글을 산만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동어반복이란 표현이 같거나 의미가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어반복이 심한 글은 독자에게 산만함과 지루함을 느께게 한다.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는 데서 오는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피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동어반복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의미를 강조하거나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수사적 기교로 동어반복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1)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2) 인격은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첫째 단계인 무율(無律)의 단계를 거치고, 둘째 단계인 타율(他律)의 단계를 거치고, 셋재 단계인 자율(自律)의 단계를 거쳐 비로서 완성된다.

    (3) 친구난 벗을 사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양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한두 번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것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잘못된 생각과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약속은 더욱 정확하고 어김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4) 성공은 노력의 산물이요, 인내의 산물이요, 의지의 산물이다.

    (5) 자연권이란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권리를 의미한다. 자연권에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과 건강과 재산 등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국가는 이러한 권리를 좀더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오늘날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권리를 아주 당연한 듯이 침해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터무니 없는일이다.


    (1)의 예문에서 글쓴이가 씻는다는 표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주 의도적이다. 즐 글쓴이는 이렇한 의도적인 동어반복을 통해 신록이 우리의 심신을 맑고 깨끗하게 순화시켜준다는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보다 인상깊게 절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쓴이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 우리는 이글에서 동어반복이 주는 장황함과 단조로움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씻는다는 표현이 계속되는 데서 까닭모를 청량감을 느끼며 글쓴이의 생각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효과적으로 동어반복이 구사되고 있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처럼 적절하게 구사된 동어반복은 글의 전개에 있어 맛깔나는 양념의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적 의도가 있거나 문장을 올바로 조직하기 위해 반복을 피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은 되도록이면 없는 것이 좋다. 또한 동어반복이 수사적 효과늘 지니고 있다 해서 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좋지 못하다. 의도가 있다 해서 모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의 문맥으로 보아 또는 자신의 능력으로 보아 동어반복이 실제로 자신이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될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예문 (2)와 (3)은 좋지 못한 동어반복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2)는 '단계', '거치고', 완성된다' 등의 어휘가 쉴새없이 반복되어 글이 말할 수 없 장황하고 산만해졌다. (3) 역시 '것이다'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또한 의미가 유사한 유어의 반복이 심하다. '친구나 벗', 생각과 의식', '정확하고 어김없이' 등이 그것이다. 유어는 의미는 유사하지만 표현이 다르기 때문에 동어반복이란 생각 없이 함부로 반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유어의 반복 역시 엄밀하게는 동어반복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는 다분히 수사적 의도를 지닌 동어반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글의 인상이 강해진 반면 글이 단조로워진 측면을 무시하기 어렵다. 따라서 좋은 동어반복이라 보기는 어렵다. (5)는 전반적으로 무리가 없는 문장이나 역시 특정한 어휘나 어구가 반복되는 데서 오는 장황함을 지니고 있다.


   ▶ 어휘의 삭제나 대체를 통해 동어반복을 피할 수 있다

   이처럼 부적절한 동어반복으로 인해 글이 장황하고 산만해지는 것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어휘를 삭제하는 방법이 있다. 우선 반복되는 어휘 중에서 없애버려도 의미전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어휘는 모두 제가 한다. 예문 (3)에서 '것이다'와 반복되는 유어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는 어휘들이다. 다음으로 반복되는 어휘가 문장 안에서 동일한 어휘와 호응하고 있을 경우 이를 하나만 남기고 모두 삭제한다. 예문 (2)에서 '거치고'는 모두 '단계를'이라는 동일한 어휘와 호응하고 있다. 따라서 이 어휘는 한번만 사용해도 글의 의미전달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둘째, 어휘를 대체하는 방법이 있다. 우선 반복되는 어휘를 비슷한 의미의 다른 표현, 곧 유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어반복 역시 엄밀하게는 동어반복의 일종이다. 따라서 예문 (3)과 같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동어반복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이릉 유어반복으로 바꾸어주는 것도 괜찮다. 글의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음은 물로 글의 인상을 강하게 하는 의외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다음으로 반복되는 어휘를 유어로 대체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이를 적절한 시시어나 접속어로 대체할 수도 있다. 예문 (5)와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상에서 말한 방법을 이용하여 위의 예문들을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다. 밑줄을 그은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떤 시으로 동어반복을 피할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인격은 무율의 단계, 타율의 단계, 자율의 단계 등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3) 친구를 사귈 때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정이 유지될 될수 있다. 한두 번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것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 많다. 그러나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약속은 더욱 어김없이 지켜져야 한다.

  (4) 성공은 노력의 결과요, 인내의 산물이요, 의지의 결절(結晶)이다.

  (5) 자연권이란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권리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과 건강과 재산 등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국가는 이러한권리를 좀더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권리를 아주 당연한 듯히 침해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터무니 없는 일이 된다.


   2) 불필요한 수식어나 완곡어법을 피해야 한다.

  불필요하게 길어진 표현 역시 글을 장황하고 산만하게 만든다. 이런 표현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쓸데없는 수식어나 완곡어법이다. 완곡어법이란 의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수식어나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주로 좀더 세련된 표현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욕심에서이다. 의미를 그냥 간단히 표현해버리는 것이 너무 재미가 없고 단조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초보자보다 오히려 글쓰기에 꽤 숙련된 사람에게서 그러한 표현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수식어나 완곡어법의 구사를 통해 좀더 노련하고 세련된 표현이란 칭찬을 듣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표현은 그 장황함과 산만함으로 인해 글의 명료성을 해치고 아울러 명쾌한 어조에서 우러나오는 글의 힘을 약하게 만들 따름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짧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조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미진한 생각이 들면 한 번 더 반복해주면 될 것이다. 특히 주장하거나 설명하는 글은 객관적이고 단호한 태도가 글의 설등력을 높이는 지름길이 된다. 따라서 이런 글에서는 불필요한 수식어나 완곡업법을 사용하여 감정적이거나 명쾌하지 못한 인상을 주는 것은 특히 피해야 한다.


⑴ 그야말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왔다.

⑵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⑶ 이번 일에는 그의 도움이 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은 불필요한 수식어로, 그리고 (2)와 (3)은 불필요한 완곡어법으로 글을 장황하게 만들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좀더 세련된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황한 표현이 오히려 의미를 흐트러 버리고 있으며 글의 힘을 앗아가버리고 있다. 

  최소한의 표현만으로 간결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다음 문장들과 비교해보자.  



(1)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왔다.

(2)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3) 이번 일에는 그의 도움이 컸다.


  짧고 명쾌한 어조가 내용에 한걸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앞서의 예문보다 휠씬 강한 인상을 주는 글이 되고 있음을 비교를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완곡어법의 사용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어 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감각을 쉽게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이다'라고 하면 될 것을 '~이라고 할 수 있다'로, '~이 가장 중요하다'를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없다', '~해야 마땅한 것이다'로 표현하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일상적인 완곡어법은 바로 이중부정의 표현이다. '~이 있다'를 '~이 없지 않다'로,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로, 그리고 '~해야 한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중부정은 물론 긍정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특별히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곳에서만 쓰여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 아무데서나 너무나 흔히 쓰이다보니 정작 강조해야 할 곳에서는 이를 써봤자 전혀 빛이 나지 않는다.

  무분별한 완곡어법의 사용이 효과적인 의미전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예라 하겠다.


7. 정직성


  글을 쓰다보면 남의 글을 빌려와야 할 때가 있다. 남의 글을 빌리는  것을 인용이라 하는데 인용을 할 때에는 그 빌려온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를 일러 정직성이라 한다.

  인용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남의 글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경우를 직접인용이라 하고, 그 요지만을 빌려와 자신의 표현으로 옮기는 경우를 간접인용이라 한다. 그리고 빌려온 곳을 분명히 밝히는 경우를 명인(明引)이라 하고 이를 밝히지 않고 그져 빌려왔다는 사실만 밝히는 경우를 암인(暗引)이라 한다.

  어느 형시을 취하든 인용은 항상 빌려온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남의 글을 빌리되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을 표절이라 한다. 표절은 글쓰는 이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이다. 글쓰기의 초보자들은 흔히 표절의 유혹을 받기 쉽다. 글쓰기의 능력은 미숙한 데 비해 좋은 글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큰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선 표절은 결국은 밝혀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표절의 유혹을 받는 글은 대개 그 내용과 표현이 아주 훌륭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글쓰기가 미숙한 사람의 경우 표절한 부분은 아무래도 전체 글 속에서 눈에 띄기 쉽다. 글쓴이가 이를 자신의 글에 맞게 소화해서 옮겨놓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글쓰기가 미숙한데 문맥에 어울리자 않는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의심할 만한 일이다.

  또한 표절의 유혹을 받을 만큼 좋은 글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그렇게 느껴진다. 따라서 그런 글은 웬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설사 많이 알려지지 않은 글이라 해도 알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표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글이 훌륭함을 되도록이면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표절은 역설적이게도 그 목적이 달성되면 달성될수록 발각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을 오래 속이거나 많은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는 편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글쓰기를 연습시키기 위해 자주 비평문을 ㅗ가제로 낸다. 제출된 과제물 하나하나 읽다보면 사실 표절한 부분을 참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화가 나기 보다는 오히려 그 학생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 학생들은 아마도 자신이 표절한 사실이 드러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잇을 것이다. 선생이 그 많을 글을 다 읽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야말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아무리 공부를 게을리하는 선생이라도 자신의 전공분야에 있는 여러 사람이 표절을 하고 싶을 만큼 좋은 내용을 모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그 글을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표절한 부분은 마치 밑줄을 그너놓은 것처럼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위에서 말했듯이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좋은 표현이기 대문이고 또 한 학생이 표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절을 하고 싶을 때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빌려온 사실을 밝히는 것이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절한 인용은 독자로 하여금 글과 글쓴이 모두에게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빌려운 사실을 정정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데서 신뢰감을 느끼게 되며 또 여러 가지 참고문헌을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서 참 많이 공부를 하고 이 글을 썼구나 하는 신뢰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용을 했다고 해서 이를 독창성이 없다거나 사고가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용은 엄연히 공인되고 있는 글쓰기의 한 방식이며 효과적인 인용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는 것은 누구라도 칭찬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까지를 잘 읽고 생각해본 사람은 이제 인용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표절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인용과 표절의 차이는 간단하다. 빌료온 사실을 밝히느냐 밝히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 사소한 차이가 한편으로는 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자아내고 또 한 편으로는 글쓴이에 대한 인격적 경멸감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8. 글쓰는 상황의 고려

 

  1) 글쓰는 상황에 어울리는 성격의 글을 써야 한다.

 

  글쓰는 상황이란 글을 스면서 글쓰는 이가 처하게 되는 입장이나 처지 같은 것을 말한다. 글쓰는 상황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글을 쓰는 목적이다. 그리고 둘째가 글을 읽게 될 독자의 성격이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어울려 글쓰는 이의 입장이나 처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글쓰는 이는 자신이 글을 쓰는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여기에 어울리는 성격의 글을 서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그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드러보자. 독자를 설득하려는 글이 지나치게 주관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면 이것은 글쓰는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 글이다. 독자는 그 글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 지나치게 어렵다면 이것은 독자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글이다. 어린이들은 아예 그 글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글쓰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글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아무리 훌륭한 표현이 담겨 있어도 독자에게 공감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글쓰는 상황에 어울리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는 상황을 형성하는 두 요소를 중심으로 이에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2) 글쓰는 목적을 고려하여야 한다.


우선 글쓰는 목적은 크게 전달의 목적과 표현의 목적, 두 가지로 나눌 수 잇다. 전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올바로 알려 독자가 이를 분명히 이해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이나 상황을 보고하는 글, 어떤 개념이이 관념을 분석하는 글 등 무엇을 설명하려는 글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은 어디까지나 독자중심의 글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독자가 정확히,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글의 명료성과 객관성이 아주 중요하다. 쓸데없는 수식은 줄여야 하며 공연히 돌려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또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주관적인 견해나 감정 등이 담겨서도 안 된다. 굳이 주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싶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정성과 타당성을 지닌 것이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 주관적인 견해임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다음은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진 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달래는 진달랫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이다. 잎은 타원형 또는 피침형인데 톱니가 없고 양면에 혹 모양의 비늘조각이 산포한다. 잎에 앞서 4월에 엷은 홍색꽃이 3~5개씩, 다섯 갈래로 깊이 찢어진 누두상으로 정생하여 피고 상과는 10월에 익는다. 산간 양지에 나는데 한국 각지 및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정원수, 관용이며 꽃은 참꽃, 진달래꼬칭라 하여 아이들이 따먹기도 한다.


  진달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글이다. 쓸데없는 숫긱이나 주관적인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객관성이 특징이다. 자기표현을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위한 글이기 때문이다. 전달의 목적으로 씌어진 글을 하나 더 들어보자.


  그러자 우정국(郵政局) 북창 밖에서 돌연 "불이야!" 소리가 나며 화광이 비치게 되었으니 김옥균(金玉均)이 자리에서 일어나 북창을 열어젖혔을 때에는 벌써 맹령한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찰나에 김 · 박 · 홍 · 서 등 독립당(獨立黨) 요인(要人)들의 얼굴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긴장의 빛이 쭉 흘렀다. 창밖의 불꽃이야말로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봉화였던 까닭이다.

  북창 밖에 충천하는 화염과 함께 우정국 안 연회석도 일시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전영대장(前營大將) 한규진(韓圭稷)이 당황히 일어나며, '책임을 띤 몸이라 속히 가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끝을 맺자, 어느 틈에 대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는 민영익(閔泳翊)이 이상한 비명과 함께 몸에 칼을 맞고 거꾸러질 듯 도로 돌아와 쓰러졌다. 내외 귀빈의 경악이야 말할 것도 없다. 문밖이 무서우니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저 앉아 있을 수도 없는지라, 피범벅으로 쓰러져 신음 하는 민영익과 수상한 독립당 요인들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볼 뿐 잠깐 동안은 말할 수 없는 처참한 공기가 그들을 지배하였다. 이 당시 여러 사람 중에서도 하필(何必) 민영익이 독립당 장사들의 최초 혈도를 맛보게 되었던가. 따져보면 누구보다 미움을 더 받기도 하였지만 이 순간에 누구보다도 먼저 의심을 품어 재빨리 도피하려더 때문이었고, 독립당 장사들은 우정국 북창 밖에 불을 지른 후, 즉시 대문 앞으로 돌아와 사대당 거두의 출문을 기다렷던 바, 첫손에 걸려든, 밍영익을 목을 똑바로 못 베고 잘못 쳐서 중상만 입힌 것이 그들의 중대한 실수였다. 여하간 이같이 하여 성혈림리(腥血淋漓)이 수라장이 되고 만 우정국 안에서 독립당 요인들이 또다시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이냐. 이에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은 몸을 날려 북창 밖으로 뚜어나와 즉시 우정국 전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지의 얼굴을 찾을 수 없는지라 입으로 그들의 암호인 "천(天)을 불러가며 재빠르게 거리를 달렸다.

-이선근,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중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글이다. 역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객관적인 글이다. 곳곳에 주관적인 의견의 진술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분석된 의견으로서 상황의 이해를 돕는 구실을 하고 잇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관적 의견의 진술이 글의 객관성을 떨어뜨리고 잇는 것은 아니다. 

  표현이란 글쓰는 이의 감정이나 심리를 생생히 드러내어 독자가 이에 절실히 공감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심정을 고백하거나 느낌을 전달하려는 글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다음의 예문을 들어 보자.  


   (1) 배꽃과 달과의 관계를 좀 생각해보자. 배꽃은 본래 백설 같은 지라, 밤에 보더라도 그 흰 빛깔을 감출길 없을 것이어늘, 이에 휘영청 밝은 달이 비쳤다 하자. ㅅ신경을 찌를 듯이 눈이 부실 정도도 아니요,ㅡ 졸음이 퍼부어올 듯한 게슴츠레한 눈매도 아니다. 월생(月色)과 이화(梨花)는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쌓이고 쌓이었던 만단정화(萬端情話)로, 밤새는 줄 모르고 속삭이고 있는 모양이라고나 할까? 또는 엷은 사창(沙窓) 속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엎드려서, 어깨가 추이도록 흑흑 느끼어 우는 소복 입은 여인이라고나 할까? 어쨌던 달빛은 배꽃이 있어서 더욱 달빛이 있을으로 하여 더욱 측은 하다.


   (2) 북창을 등지고 그 앞에 가까이 앉았던 홍영식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창문을 활짝 얼여붙였다. 어느새 불이 붙었는지, 벌써 하늘에 닿는 불길이 우정국 바로 뒷집으로부터 붉은 혓바닥을 널름거리면서 그 근처에 있는 초가집을 장차 모조리 집어먹고는 우정국까지 집어삼킬 듯이 펄펄 뒤고 있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모든 사람의 눈 아래 내다보였다. 

"불이야! 불이야!"

그럴수록 밖에서 떠느는 고함소리는 요란하여지고, 불이 붙고 있는 집에서 일어나는 아우성소리와 좁은 전동 골목으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점점 더 시끄러웠다.

"큰일났소!"

"아이구 대감네들 이게 웬일이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이때까지 점잖게 앉아서 수작하던 순님들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길거리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방안에서 또한 갈팡질팡하였다. 미국 공사와 영국 영사는 한가지로 얼른 빠져나갈 준비를 하였다. 이같이 수선거릴 대에,

"여러분 대감네들, 나는 장병(掌兵)의 직책이 있는 몸인 고로 부득이 먼저 나가야 하겠습니다. 용서하시오."

  모든 사람을 보고서 맨 먼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영대장 한규직이엇다. 그러나 그가 미처 문밖을 나서기 전에,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한가지로 우영대장 민영익이 어느새 밖에 나가 있었는지, 어디서 칼을 받고서 왼몸에 불은 피를 뒤집어쓰고 들어와 넘어졌다.

  방안의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하여진 것같이 서로 바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조연과 목린덕이가 급히 민영익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피를 닦고 상처를 조사해보더니,

  "그러면 제발 얼른 모셔다가 좀 살려주시오!"

  밖으로 나가려다가 이 광경을 당한 한규직은 자기가 이 모양이 되지 안니한 것을 다행히 생각하는 한편, 민영익의 불행을 더욱 민망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빨리 나갈 수 없을 것 같소, 밖에는 칼 가진 사람, 아직도 있지 않습니까."

  목린덕은 이같이 대답하고서 손에 묻은 피를 상보자기에 닦아버린다. 그럴 즈음에 문밖에서는 소총소리가 탕! 탕! 두어 방 들리면서 한층 더 요란한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물 끓듯 끓기 시작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서로 눈짓을 하고 차례로 북창에서 뜰ㄹ 아래로 뛰어내려 우정국 대문밖으로 나오면서 다 각각 입으로

  "천"

  "천"

  "천"

  이같이 암호를 외우면서 달음질하였다. 어둠 가운데서 동지들이 실수를 할까 두려워함이었다.

-김기진, 《청년 김옥균》중에서


  이 글들은 위에서 인용한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진 글들과 같거나 유사한 소재를 가지고 쓴 글들이다. 그러나 이 글들이 앞서 인용한 글들과 성격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1)의 글은 배꽃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참식하고도 독창적인 비유가 글쓴이의 미묘한 정서의 흐름을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2)의 글은 상화의 보고가 중심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 상황은 결코 갑신정변 당일의 객관적인 상황 그 자체라 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 나타나는 상황의 구체적인 정경이나 사람들의 심리등은 실체가 아니라 글쓴이의 의식 속에서 창조된 것이다. 즉 이 글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주관을 거쳐 재구성된 새로운 상황인 것이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글의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 글들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은 어디까지나 글쓴이 중심의 글이 된다. 무엇보다도 글쓴이의 감정과 심리가 생생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무엇보다도 내용과 표현의 독창성이 중요하다. 상식적인 내용이나 일반적인 표현을 가지고서는 자기만의 감정과 심리를 생생히 들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감정과 심리에 부합하는 독창적인 내용과 형식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내용과 표현의 독창성이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독자의 감정과 심리를 자글할 수 있다면 그 글은 독자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독자의 성격을 고려하여야 한다.


  자신의 글이 어떤 독자를 겨냥하고 쓰여지는지 부녕히 인식하여야 한다. 독자의 성격은 물론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유형화시켜보면 독자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와 특정 소수의 독자가 바로 그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일반인으로서의 독자를 말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저널리즘의 글, 그리고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학적인 글들은 모두 불특정 다수, 즉 광범위한 일반인을 독자로 전제하고 쓰는 글들이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런 글이라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전제하는 글들은 실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보아 가장 평균적인 사람들을 가상의 독자로 전제하고 쓰여지는 수밖에 없다. 즉 평균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 그 글을 읽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특정 소수의 독자란 명확하게 범위가 한정된 몇몇 독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학게의 논문이나 각 분야의 이론서, 그리고 단체의 회칙등과 같은 글들이 여기에 속한다. 특정 소수의 독자는 그들만이 지니는 독특한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정 소수의 이론서, 그리고 단체의 회칙등과 가타은 글들이 여기에 속한다. 특정 소수의 독자는 그들만이 지니는 독특한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정 소수의 독자를 전제하고 쓰는 글들은 반드시 독자의 고특한 성격에 어울리는 내용과 형식을 얻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글들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전제하고 쓰여진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글들은 특정 소수의 독자를 전제하고 쓰여진다고 할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독자를 전제하는 글 역시 실제로는 평균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가진 사람들을 가상의 독자로 전제하고 쓰여지기 때문이다.

  글이란 결국은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목적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독자를 미리 명확하게 설정하고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즉 자신의 머릿속에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어떤 독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른 후에야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필과 같을 글을 쓴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글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전제하고 쓰는 글이다. 그러한 독자 중의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평균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지닌 어떤 사람이다. 남여도 되고 여자여도 된다. 청년이어도 되고 중년이어도 된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 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이런 사람들이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그 독자의 모습을 구체화시켜 마침내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의 모스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마음속에 떠올라야 한다. 고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가사에 힘을 쏟고 있는 중년의 한 여성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모습, 또는 이제 갓 대학에 진학한 청년이 캠퍼스의 풀밭아 앉아 자신의 글을 잃고 있는 모습이 마음의 눈에 떠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서 명확히 독자가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