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지기 전우와 함께오른 인천의 진산 계양산 395m

2019. 9. 28. 11:02☎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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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지기 전우와 함께오른 인천의 진산 계양산 3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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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진산 계양산 395m

 

계양산은 해발 395m로 인천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桂陽山)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한 때는 아남산(阿南山), 경명산(景明山)이라고도 하였다. 계양산의 산명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은 진산 또는 안남산(安南山)이라고도 했다.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서식하여 계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으나, 이들 나무는 인천 일대에 자생하지 않는 종이어서, 실제로는 계양도호부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인천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이 산의 동쪽 능선에 있는 계양산성(桂陽山城)은 삼국 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일명 고산성(古山城)으로 불린다. 축조 형식은 지형 분류상 산정식(山頂式), 방법상 내탁식(內托式)에 안쪽은 불규칙한 할석(割石)으로 쌓았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방성곽조〉(關防成廓條)에 의하면 둘레가 1937보(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성곽이 훼손된 상태이다.

 

집수정 바닥에서 《논어》 〈공야장〉의 주요 내용이 기록된 목간이 출토 되었는데, 5각형의 각 면에 《논어》의 구절이 먹으로 쓰여 있다. 한성백제 시기의 유물로 한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간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가 관보 제13호로 계양산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였다. 1988년에 인천시 시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계양산의 높이는 395m로 초보 등산객이 오르기에 적합한 규모이다. 인천지하철 1호선 계산역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도보로 5분 거리이다. 등산로는 입구의 연무정에서 시작한다. 중간에 팔각정이 있으며, 하느재고개를 지나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에는 계양정[6]을 비롯하여 표지석 및 망원경들이 설치되어 있다.


날씨가 좋으면 정상에서 서쪽으로는 강화도-영종도, 북쪽으로 고양시, 남쪽으로 인천광역시까지 볼 수 있다. 주능선 등산로에는 그늘이 없어 더운 여름철보다는 봄철 산행지로 적합하다. [위키백과 참조]




50년지기 전우(戰友)와 함께 오른 인천의 진산 계양산 395m


6·25 한국전쟁때 7살 나이로 피난 나와 정착해 산곳이,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1리 약산골이란 마을이다. 이곳 마을은 우리 나라 대표 예언서 정감록鄭鑑錄, 피난곳(避難處)으로 기록된 문헌(文獻)이 전해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우리 엄니의 고향마을이며 나에겐 외가가 있는 교하노씨 집성촌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키가 짜리몽땅해서 열 몇살때인가 도민증 발급받을 나이가 되어, 도민증 발급을 받는데 전쟁으로 호적지 면사무소가 불타, 새로 피난처에 호적을 만들때 외삼촌께서 나이를 2살을 주려 호적 신고를 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다 군에갔다 전역을 하고 난뒤에 뒤늦게 196912(26)에 군대를 갔다.

 

논산훈련소 전반기, 금마 후반기 교육을 받고 배치받은 곳이 25사단 72연대 6중대다. 그곳에서 작대기 2개 이등병 달고 6개월여 근무할 때, 만난 전우 최명규 병장이 나에겐 평생 그리움으로 남았다. 6개월 후 나는 중대본부에서 근무를 하다 다시, 사단사령부 민사처로 발령받아 근무를 하게되는 바람에 최병장과 헤어지고 말았다.

 

전역을 하고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아 그 아들들이 다 군대를 다녀왔다. 그런데도 나는 구메구메 그때 6개월밖에 함께 근무를 했던 그 최병장이 늘 그리웠다. 아마 힘든 졸병시절 그리움이라 더 그런가보다. 그래서 어느날 육군본부 전우찾기 싸이트에 최병장 찾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이글을 본 위문열차 방송팀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에 25사단으로 위문열차 방송을 나가는데, 영상편지로 내가 최명규병장 찾는 내용을 소개 방송을 하겠다고... 그후 방송이 되었다.  http://blog.daum.net/salamstory/15861238

 

하지만 그 방송이 나오고도 최병장을 10년이나 찾지 못했다. 그러자 지난해 이젠 마지막이다란 기대를 하며 페이스북에 최병장찾는글을 올렸다. 그후 내글을 본 최병장이 연락을 해와 50여년 가까이 그리워했던 고참 최병장을 만났다. 기적같은일이다. 최병장의 고향은 경상도다. 그런데 최병장을 찾고 보니, 지금내가 사는 부평에서 10여분 거리 부천시 중동에 살고 있다.

 

이제 최병장을 만난지 불과 2년여 지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취미생활 (등산, 사진, 영상편집등)도 같아서 수시로 산에서, 둘레길에서, 사진촬영지에서 최병장과 자주만나 그동안의 못다한 우정을 돈독히 쌓으며 인생이모작 인생을 함께 나누며 즐겨 살고 있다. 이번 계양산 산행도 전날 안부전화하다 본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내일 만나 계양산 산행하고 식사나 하자해서 만난 산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