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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묵(奉默). 이 친구와 나는 1970년도 군복무 시절(25사단)에 만난 전우 사이다. 당시 우리들 세대의 인물로서 그 친구는 신세대 미남형으로 많은 전우들로부터 선망과 호감을 받는 친구였다. 친구의 고향은 충북 진천인데 일반 사회에서나 군대 사회에서나 똑같이 충청도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선입견 처럼 친구는 조금은 느린 듯 하면서도 순박한 충청도 토박이의 양반같이 남달리 심성이 착하고 우직하고 선한 마음을 간직한 친구였다.
그는 나보다 약 6-7개월 정도 군번이 느리다. 그런데도 군복무 시절 우리 둘은 남달리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진실한 전우애를 나누는 절친한 사이였다. 내가 사정으로 인하여 군대를 늦게 가서 친구보다는 다섯살 정도 위였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좋은 친구는 나를 항상 형처럼 친구처럼 대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삭막하다고 생각하는 군대 사회에서 우리는 남다른 우정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며 나름대로 신명나는 군대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1972년말 경에 내가 먼저 전역을 하였고 친구는 1973년도에 전역을 하였다. 당시 나는 전역후 농촌에서 낙농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려 나름대로 꿈을 키우며 바쁜생활을 하게되었고 친구는 대학에 복학을 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서로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편지를 통한 연락만 유지하며 살았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다 그렇고 그런 것처럼 젊어선 아무리 절친한 친구나 지인 사이들도 학교 마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그러다 보면 가정생활에 또는 직장 생활에 연관된 일들로 눈코 뜰사이 없이 바쁘게 살아야 하고 보면 언제 사람노릇 한번 하며 제대로 구색 맞추어 살기가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일정기간 동안은 친구, 의리, 무슨무슨 각종 모임들을 본의 아니게 모두 접고 은둔 아닌 잠복을 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친구와 나 사이도 사실은 그런 이유로 서로를 잊지않을 정도의 소식만을 유지하며 친구는 직장관계로 지방과 도회지를 몇 번이나 넘나들며 현실에 충실하여야 했고 나 또한 농촌에 대한 꿈을 접고 30대 중반에 도심생활을 처음 시작해야 했던 나로서는 사실 친구의 입장보다 훨씬 더 여유없이 척박하게 오직 직장과 가정만 오가는 틀에 박힌 생활에 눈 코뜰 사이없이 앞만보고 달리며 살아야 하고 보니,
마음 속에는 항상 서로를 그리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솔직히 몇 년간씩 지방근무를 하는 친구와 약속을 하고 만나는 일이 정말 쉽지않았다. 우린 그렇게 서로 각자의 길을 걸으며 "약관"의 나이 중반(23~27세)에 군에서 맺은 우정을, 그동안 서로의 처한 사정으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일년에 한 두번 정도 전화통화 연락이나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인연만 유지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어언 우리들의 자식들이 성장을 하여 군복무를 보내고 난 정도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우리들의 그리운 만남을 약속하였지만 친구는 대학졸업 이후 대기업에 취업하여 평생을 몸바쳐 한 직장에 다니던 생활을 IMF라는 거친물결에 휘말려 날개를 접고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하여 얼마동안 쉬고있을 당시였다. IMF가 터지던 97년 11월은 유난히도 을씨년스럽게 계절도 사회 분위기도 매우 가라앉은 그런 느낌의 세월이었다.
그날따라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에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길다란 바바리 코트에 옷깃을 세우고 희끗 희끗한 중년 모습의 친구가 드디어 나타났다. 그러고 보면 친구와 나는 약관의 나이에 만나서 혜어졌다가 어언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해우를 하게되는 정말 너무도 감격적인 만남이다.
친구와 나는 서로 한동안을 바라보며 너무도 오랜 세월의 흐름뒤에 서로의 변한 낯선 모습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세월의 무상함에 말없이 목이 메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푸른제복의 사나이들로 만나 땀과 의리로 맺어진 어쩌면 피붙이 보다도 더 진한 우정을 나누던 친구 였었는데. 흐르는 세월의 물결에 포말처럼 이리 저리 부딪혀 가며 순박하게 살다가 조금은 풀죽은 역전의 용사 모습이 되어 내 앞에선 친구이 모습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과 환희보다는 안타깝기 짝이 없고 허전하고 착찹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들의 푸른제복 군대시절 내가본 친구의 모습은 한마디로 요즘 신세대 스타들 배아무게 김아무게 그 이상처럼 준수한 청년의 모습이었었는데. 세월의 흐름앞에는 항우장사도 못 견디어 내는 듯 그렇게도 당당하고 활기차던 친구가 초로의 중년 신사가 되어 나의 앞에선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차라리 내가 친구의 나이를 대신 먹어 줄 수있다면. 친구의 옛 모습을 환원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진실한 우정은 인생의 산소 같은것!
우린 이렇게 25년 이란 세월이 지난후에 새로운 감격의 해우를 하게 되었지만 친구와 나는 아직은 사회로부터 할 일을 찾아야 했기에 친구는 그렇게도 힘이든 IMF 시기에도 거뜬히 나름대로 유수의 직장에 재취업을 하여 능력을 인정 받으며 일을 하며 살고 있고, 나 또한 나름대로의 개인 사업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있다.
우리들의 재회는 이렇게 어렵게 이루어졌지만 이후에 우리들의 우정은 마치 타다만 장작불에 다시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듯 한없이 뜨겁게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는 것처럼 식을 줄 모르고 자주만나 소주도 한잔 걸치며 옛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기도 하며 그러다 지난 초봄부터는 친구와 나는 "건강은 건강할때 내가 알아서 지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산을 시작을 하였다.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이곳 부평지역에 있는 산악회에 적을 두고 전국 유명산은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산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행 초보자인 친구와 산행을 시작을 해보니 내가 내 산행 실력대로 친구와 함께 산행을 한다는 것은 초보자인 친구에게는 상당한 무리를 초래하여 오히려 산행으로 인한 역부작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내가 다니던 산악회를 휴회하고 아예 지난 초봄부터 서울 경기 근교지역의 산을 친구와 함께 개인 산행을 하고 있다.
30년지기 친구와 함께 산을 오르는 나의 그 새기쁨은 나에게 참으로 잊을수 없는 또 다른 산행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예전에 산악회를 통한 산행을 할때는 때로는 장거리 산행을 하여야 하는 특성상 어쩔수 없기도 하였지만 그 땐 산행을 시작 하게되면 스케줄 관계상 어쩔수 없었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산행이 시작이되면 앞사람 발자욱만 따르며 언제 제대로 산과 자연에 대한 감상을 하거나 음미하며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일체없어 산행이 주는 의미가 체력단련 이외에 특별한 의미가 없게 생각이 되었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산악회를 통한 산행이 마냥 즐겁게만 생각이 들지를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30년지기 친구와 함께 산행을 하기 시작을 하고 부터는 무엇보다도 산행 스케쥴에 쫓기지를 않는 여유로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친구와 나는 약 4~50분 정도 산행을 하고서는 나름대로 여유있게 쉬기도 하며 자연 과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그리고 서로 챙겨간 간식과 간단히 소주도 한잔 곁들이며 쉬염쉬염 친구와 함께 산행을 하는 그 여유로운 마음은 산행의 의미도 물론 크겠지만 우들은 서로 변치않고 지천명의 나이에 새로운 우정을 이야기 하는 즐거움이 보통사람들은 이해 할수없을 정도로 남다르고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다 또 어떤날의 산행에서는 전코스를 맨발로 등산을 하여 이튼날 발바닥이 후끈거려서 고생을 하였었던 이야기, 또 어떤때는 산행후 하산해서 산자락 입구에서 메기 매운탕에 소주 몇병을 비우고도 시간이 짧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우정은 깊어만 간다. 그러다 이제는 하산해서 소주마시는 시간도 아까워 친구와 나는 산행 시작을 하기전 아예 산에서 점식 식사를 할수있도록 김밥 몇줄싸고 집에서 적당히 준비한 간식과 포켓용 관광소주도 한병씩 배낭에 챙겨넣고 산행을 한다.
산행을 하다가 힘이들면 높다랗게 올려다보이는 바위에 다리를 걸쳐놓고 앉아, 또는 사람들이 행열이 뜸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배낭에 넣어간 점심과 소주 한잔을 나누며 우정을 이야기 하는 그 맛이란... 아마 모르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모를것이리라 혹자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우정에 대하여 바보 멍충이 같은 머저리들의 고리타분한 만남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들과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생각이고 판단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친구와 구파발 전철역 분수대 만남의 광장에서 09:30분에 만나 잠시 버스를 타고 진관사 입구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10:00시부터)시작한 산행이 오후 6시30분 정도가 되어 백운대에서 하산을 재촉 하여야했다.그러고 보면 그 쪽 방향에 있는5~ 6개의산 봉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정상을 거쳐온듯 하다. 그토록 지루하거나 힘이든줄도 모르고 우리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리한 산행을 하지 않었나 생각도 해보지만 친구와 나는 그래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요지음은 해가 벌써 많이 짧어진듯 그 시간 산속은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을 하여 우리는 더욱 빠리 발걸음을 재촉을 하여 "손기정 선생님" 의 친필인듯한 현판이 걸려있는 백운대 산장에 이르르니 오후7시가 다되었다 우리는 다음 기회에 다시만날것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백운대 대피소에서 산장직이가 부쳐주는 파전 한장에 배낭에 넣고 다니는 얼마남지 않은 소수 한잔을 나누어 마시고 도선사 까지 발길을 채촉하여 내려와
또 다시 시내로 나오는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하여 도선사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운행을 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타며 불전으로 천원한장을 집어넣고 친구와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마치 날개를 단것처럼 산뜻하고 가볍고 기쁘며 친구와 헤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추석 지난 다음의 산행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나는 맘속에 "우리들에겐 항상 인내가 필요했었어! 그 인내가 없어지는날 아마 우리들의 우정도 물거품처럼 사그러져 버리고 말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