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1. 00:09ㆍ☎청파의사는이야기☎
윤관 장군묘 전경
문숙공 윤관 영정 사진
문숙공 윤관
호 : 문숙공
이름 : 윤 관 (尹 瓘)
관직 : 문신,무신
시대 : 1040(정종 6)~ 1111(예종 6)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되었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1월 10일(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소재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묘역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손 (500여명) 제관이 모여 "문숙공 윤관 장군님"에 대한 추향제가 봉양되었다. 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다시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추향제 실황을 촬영하여 바쁜 업무로 이곳 여충사 추향제에 참석하지 못하신 전국의 파평윤씨 후손에게 온라인을 통하여 여충사 추향제 봉양 과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열심히 취재를 하였다. 이날 필자가 찍은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추향제 봉양 과정을 소개 합니다.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가 눈길을 끓고 있다.
400년 '묘지 다툼' 끝냈다 2006년 4월 11일 (화) 05:32 중앙일보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두 문중은 2월 다시 만나 파평 윤씨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 평을 500m 정도 떨어진 청송 심씨 문중 땅 옆에 제공하기로 했다. 청송 심씨 측은 다음달 묘지를 이장할 예정이다. 두 문중 간 묘지 다툼은 조선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윤관(?~1111)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며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을 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이로 인해 두 문중 간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현대에 이르러 두 문중 후손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 1969년 9월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최근 대타협을 이루게 됐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 심종복(67)씨는 "400년 가까이 끌어온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게 돼 기쁘다"며 "두 문중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이상 원한은 없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중종비 등 조선시대 왕비 네 명을,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비 등 조선시대 왕비 세 명을 각각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이다. 파주=전익진 기자
◆ 산송(山訟)=산소, 곧 묘지(분묘)에 관한 송사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 이후 명당을 찾는 음택(陰宅)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땅의 형세나 특성을 인간의 행복.불행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특히 유행했으며, 산송은 이러한 명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펌기사]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만의 화해’ 새국면 2006년 8월 16일 (수) 20:55 경향신문
김관장은 “윤언이 묘지명의 뒷면 끝 부분에는 ‘경오년 4월14일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 기슭에 유골을 장례지내니, 아버지 시중 문숙공의 능침과 같은 경내이다’(庚午四月十四日葬骨于臨江縣龍鳳山崇福寺東麓乃王父侍中文肅公陵寢一境內)라고 적혀 있다”고 밝혔다. 김관장은 “묘지명에서 말하는 ‘임강현’(윤관과 아들 윤언이의 묘가 있는)의 위치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에 따르면 고려때는 개성의 속현이었다가 조선 태종 14년에 장임현, 이후에는 장단(長湍)으로 됐다”며 “결국 (윤관의 묘는) 임진강 아래의 지금 파주지역이 아니라 임진강 북쪽, 지금의 민통선과 북한 지역 일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묘역이 있던 ‘용봉산’ ‘숭복사’ 등의 위치에 대해선 현재로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어 아쉽다”고 덧붙였다. 윤언이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 묘지명’전에 전시 중이다.
김관장의 주장이 최종 확인될 경우 ‘400년 만의 화해’로 화제가 됐던 양 문중의 최근 합의는 새 국면을 맞게 된다. 또 사적 지정 과정에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윤언이 묘지명 등 정확한 근거나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다. 양 문중은 1614년 영의정 심지원(1593~1662)이 부친의 묘를 윤관 묘역 바로 위에 조성하면서 산송을 벌여 영조가 중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윤관 묘역과 인접해 심지원 묘(경기도 기념물 137호) 등 심씨 문중의 묘 19기가 있다.
양 문중은 지난 4월 문화재청의 중재로 윤씨 문중에서 2,500여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문중은 심지원묘 등 19기를 이장하는 것으로 화해를 했다. 이에 따라 청송 심씨 문중은 묘지 이장을 위한 현상변경안을 제출했으나 경기도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의 원형 훼손이 우려된다”며 부결됐고 문중은 이어 7월24일 경기도에 행정심판을 청구, 문화재청으로 이관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의견서를 행정심판위원회에 전달하면 9월 이전에 이장 허가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경기도문화재위원회 한 위원은 “심씨 묘역이 이장될 경우 문화재 훼손은 뻔한 일”이라면서 “개발 압력이 높은 경기지역에서 문화재 이전이라는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재기 기자〉[펌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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