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 26. 19:04ㆍ☎청파의사는이야기☎
어느날 공군 전역을 하고 어엿한 청년이 되어 나를 찿아온 윤식이[사진]
윤식이는 지금 대학교 2학년 학생이다.그는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내가 운영을 하고 있는 독서실에 결석도 하지 않고 성실하게 다니던 아이이다. 윤식이가가 중학교 일학년 때 내가 처음 본 기억의 그의 인상은 혹시 아주 강한 바람이라도 불면 바람에 날아가지나 않을까 할 정도로 아주 갸녀린 미소년의 모습이었다.항상 생글생글 웃음을 짓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찌든 도심의 사회 생활에서 모처럼 휴일이면 힘들게 등산을 하여 정상에 올라 느끼는 싱그러운 자연의 새로움과 고마움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윤식이 그 아이를 통하여 세상사는 생활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며 항상 시간만 되면 윤식이의 모습이 기다려지는 것이 내 하루 생활의 일부가 되다시피 하였다.윤식이의 중학교 일학년 생활이 지나고 2학년 때의 일이다. 이곳 인천의 대부분 독서실들은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수험준비 학생들로 항상 10 여일간 정도는 좌석이 만석이 되어 좌석이 없어 독서실에 공부를 하러 왔다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실정이다. 그냥 돌아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 볼 때면 나는 항상 마음이 아픈 것을 느껴야 했다.하지만 어쩔수가 없어 하는데 하루는 윤식이가 아저씨 하고 부르며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가는 학생을 자기 좌석에서 공부를 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안돼 그럼 넌 어떻게 하고?" 물으니 윤식이는 자기는 아저씨 붓글씨 쓰시는 서실에서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서실에는 독서대 책상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서실에 길게 만든 서예작품 활동시 사용하는 상을 펼치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나는 혹시라도 이야기가 윤식이의 부모님의 귀에라도 들리게 되면 남의 귀여운 아들 푸대접 한다는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지만 하도 그녀석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완강하게 권유하기에 못이기는 척하고 윤식이의 좌석에 다른 학생을 돈을 받고 입실을 시켰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참으로 염치 없는 일 이었다는 생각을 한다.그런데 윤식이의 행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튿날은 자신이 친구들 5-6 명에게도 이야기를 하여 그 아이들에게도 자리를 양보를 하고 자기와 같이 서실 바닥에 상을 펴고 모여 앉아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안된다고 말을 하였지만 윤식이의 끈질긴 설득에 못잊은척하고 또 나는 또 염치없이 윤식이의 권유대로윤식이 친구 5-6 명의 좌석에 더 많은 학생들을 입실을 받아 받을 수 있었다 오직 윤식이의 마음이 너무도 고맙고 아름다워서...
여느집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혹시 아저씨가 양해를 얻으려만 해도 발끈 화를 내고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 자기 부모에게 말을 하며 불평을 할텐데... 윤식이는 그렇게 마음이 다른 선한 아이였다 참고로 윤식이의 집은 62평이나 되는 아파트에서 부러움없이 살고 있는 환경인데도 그 아인 부모님에게 공부는 반듯이 독서실에서 하는 것으로 인식을 시켜 놓고 열심히 우리 독서실을 다니고 있었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야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윤식이를 매일같이 만나볼 수가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 겠습니까만.나에게는 윤식이가 더욱 열심히 독서실에 공부를 하러오면 올수록 나의 마음 한편 구석에는 무거운 중압감 같은 것이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윤식이가 고학년이 될수록 자신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내가 늘 보고 느낀 윤식이의 학습 성취도를 볼 때 또한 윤식이 학교 같은 학년 학생들에게 알아 본 윤식이의 실력은 내가 바라고 기대를 채우지 못해 늘 속이 상했다.윤식이도 윤식이지만 무엇보다도 6년간 나를 믿고 독서실에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주신 부모님에게 너무도 염치가 없고 몸둘 바를 몰라야 했다. 그런데도 보통집 부모님들 같았으면 독서실에 찾아와서 당장에 짐을챙겨 독서실에 발을 끊고도 남았을 텐데도 윤식이의 부모님은 아들을 신뢰하시며 전화도 거의 한번 하지 않았다.중학교 시절은 그렇게도 순진해서 말을 한번 시켜보려고 말을 걸어도 묻는 말에나 간신히 대꾸나 하던 그가 고등학교를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성격이 바뀌는듯 하더니 이제는 제법 자신의 편한 발음대로 아저씨라고도 하지 않고 아찌 아찌 하면서 나와의 대화를 오히려 유도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청소년들을 좋아하는 내 성격엔 윤식이의 그런 접촉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윤식이에게 어떤 필요한 말을 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윤식이에 자연스런 접근은 얼마나 안성맞춤 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윤식이를 잡고 공부를 해야 하는 필요성과 특히 더 소중한 것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부모가 자식에게 거는 기대와 바람에 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더 강조를 하여 들려주곤 했다.내가 생각을 해도 하도 반복해서 듣는 레파토리가 되어 싫증을 느꼈을 법한데도 윤식이는 아저씨의 말에 한번도 싫증을 내거나 거역을 하지 않고 청취를 하여 주곤 했다. 한없이 어려보이고 철부지처럼 보여 짜증을 내도 몇번은 냈을 또래들 나이인데도 윤식이는 여늬 애들과 다른 행동을 하며 아저씨를 잘 따라 주었다. 그렇게 6년이란 기간을 자의이던 타의이던 아저씨 눈가에서 알쩡거리며 사랑과 감명과 그리움을 나의 가슴에 남겨주던 그 윤식이가 어언 수능을 보는 날이 임박해왔다.나로서야 해마다 11월이 되면 수 년간 수많은 학생들을 떠나 보내는 아릿한 마음을 경험을 한바라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스산한 초겨울 날씨와 함께 떠나보내는 이별의 아픔을 예상하며 나름대로 비법도 터득을 해 두었는데도 윤식이가 수능을 보던 재작년 11월은 얼마나 한기를 느낄 정도로 마음도 가슴도 생각도 싸늘하게 괴롭고 아팠는지 모른다.매년 11월이 되면 그동안 우리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흔해빠진 찰떡을 한상자 돌리는 것보다는 10여년 이상 취미로 서예공부를 하여 익힌 내 정성이 들어있는 졸업 겸 수능을 잘보라는 의미의 자필 휘호서예 작품을 해마다 100-150 여점의 작품을 써서 기념으로 한점씩 돌리곤 했는데 그 인기가 이곳 부평지역에서는 꽤나 알려져 호응을 얻고 있었다.그런데 재작년 그해 초겨울엔 내가 그렇게도 사랑했고 그 또한 나를 유난히도 잘 따라 주었던 윤식이에게 석별을 고하며 주어야할 서예작품을 써야한다고 생각을 하니 왜 그렇게 가슴이 떨리며 작품이 잘안되는지 모른다. 우선 먼저 다른 학생들에게 줄 작품을 10여일 이상이나 걸려 완성을 하여놓고 나서 윤식이에게 줄 작품구상 생각을 하니 그 수많은 좋은 글귀의 내용들이 많은데도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그렇게 구상을 하기를 이틀이나 지나 버렸다. 이제 그와 헤어지게 되면 어쩌면 영영 다시 만나기가 그리 쉽지않은 그와 나의 인연앞에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한 추호도 후회하고 부끄럽지 않을 나의 실력으로서는 가장 기억에 오래 할 수 있는 불후의 명작을 윤식이에개 써서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당시에 심정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 붓을 잡았을 당시 보다도 몇배 떨리는 나의 손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한다.그렇게 수십 장의 작품을 썼다가 찢어버린후 드디어 한장의 글이 나에 손에 작품으로 완성이 된 것은 자그마치 시작한지 3일만에 한장의 글을 써서들고 만족을 하여야 했다. 작품 내용글은 "日 新 나날이 새롭게" 였다. 그렇게 어렵게 쓴 작품 한장을 아저씨의 선물로 받은 윤식이는 나에게 고맙습니다 하며 음료수 한 박스를 어머니가 사주셨다고 전해주곤 인사를 하고 떠나버리고 말았다.그렇게 윤식이가 떠나고 난 그해 겨울 난 독서실 개업 후 10여년만에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기다려도 그리워도 보이지 않는 윤식이가 눈에 아른거릴 때마다 난 얼마나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윤식이릏 그리며 기다리다 미워하기도 했는지 모른다. 졸업은 했어도 집은 아직도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마주칠 날도 있겠지 하는 공허한 마음의 기대를 하며 살다 보니, 나에겐 윤식이가 떠나던 해에 결혼을 한 장남에게서 첫 손자를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손자 아이가 태어난 후 부터 나에게 그렇게도 항상 뇌리에 그리던 윤식이의 모습이 덜해지더니 손자 아이가 눈을 마추기 시작을하고 백일이 지나고 돌이지나 이제는 어설프게 뛰기까지 하며 이따금씩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손자 아이를 바라보면 이젠 윤식이를 그리던 아린 마음의 아픔이 손자 아이를 기다리는 그리움으로 어느정도는 희석이 된듯하다.그런데 아직도 손자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손자 아이가 윤식이처럼 밝게 때묻지 않고 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 윤식이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그런데 어제 저녁 나의 앞엔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않었던 그 윤식이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도 오랫만의 만나는 반가움에 왈칵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은 내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어느덧 훌쩍 커버린 윤식이와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이 얘기 저 얘기 옛날 이야기를 하던중 어려서 그렇게도 날씬하게 미소년이었던 윤식이가 신세대 아이들 말대로 정말 꽃미남이 되어 건강한 모습의 청년이 되어 나타났는데도 아직도 체격이 날씬한 그대로 거의 180cm 정도의 키로 훌쩍 커버렸다.
대학 2학년이 된 윤식이의 병역문제를 물어보니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때 대학생 우선징집 지원 신청을 하여 겨울에 군에를 간다고 한다.내 눈에는 저렇레 가녀려 보이는 청년도 군대를 자원을 하여 가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하며 윤식이가 건전한 생각을 하는 청년으로 성장을 하여준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윤식아! 남자는 대학은 못가드라도 군대는 꼭 다녀와야 한다는 나의 지론을 장황하게 펼치며 군대는 남자들에게는 인생대학이라는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를 하니 윤식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아저씨 저 꼭 군대를 다녀올것 입니다. 약속을 한다.
그러면서 아저씨 요즈음도 붓 글씨 서예를 쓰시느냐고 묻기에 일년전에 배우기 시작한 인터넷에 나름대로 활동을 하느라 글을 쓰지못하고 있다고 하니 아저씨 절대로 붓을 놓으시지 말고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하라고 당부를 한다.그러면서 아저씨 붓 글씨 쓰시는 모습에서 아저씨를 잊을수 없으며 아저씨가 써주신 서예작품을 잊을 수가 없다고 다시 한번 꼭 붓글씨는 계속해서 쓰시고 후배들에게도 좋은글 선물을 하시라고 애원을 한다.나는 윤식이의 말을 들으며 아! 이 아이 윤식이에게도 나에 대한 추억이 머리속에 아로새겨져 있었구나 생각을 하니 한동안 절필을 하였던것이 후회가 되며 내일 부터는 당장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을 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윤식이와 한동안 못만나는 그 동안 내가 일방적으로 윤식이에게 이메일 편지를 불규칙적으로 지속하여 보낸글을 보아서인지 윤식이는 나에 컴퓨터에 오마이뉴스 사이트를 찾아 즐겨찿기에 입력을 시켜놓고 시간나실 때 마다 오마이뉴스를 보시라는 것이다. 그에 권유는 상당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저변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소질이 있는 사람은 기자로 가입을 하여 활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그렇게 오랬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윤식이가 돌아가고 난후 나는 즉시 컴퓨터에 앉아 오마이뉴스 탐방을 하니 정말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배어 있는듯한 느낌의 첫 대면 소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침 출근을 하기가 무섭게 오마이 뉴스 사이트를 클릭하여 기사를 읽다가 불현듯이 윤식이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여 첫 인사의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