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도성 3코스(남산길) ~ 2코스 (낙산길)을 걷다

2020. 5. 18. 18:40☎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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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한양도성 3코스(남산길) ~ 2코스 (낙산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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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역사

 

1392년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한양으로 옮긴 다음 종묘(宗廟)와 사진(社稷), 경복궁을 지은 후 태조 5년(1392년) 음력 1월부터 49일간 이어서 8월부터 9월까지 49일간, 모두 98일 동안에 전국에서 19만 7천 4백여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북악산(北岳山), 낙산(駱山),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능선을 따라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축성하였다. (중략)

 

도성 높이가 12m, 둘레가 약 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각각 동쪽과 서쪽에 흥인지문과 돈의문, 남쪽과 북쪽에 숭례문과 숙정문의 사대문을 냈으며, 북동쪽과 남동쪽에 혜화문과 광희문, 북서쪽과 남서쪽에 창의문과 소의문, 서소문을 냈다.

 

서울 성곽은 일제의 침략과 해방후 한국전쟁 혼란기에 많이 파괴되었으나, 서울시는 1975년부터 종합적인 서울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한양도성 남산구간 3코스 ~ 2코스 낙산구간을 걷다.

 

답사코스 : 숭례문(남대문) → 백범광장 → 안중근의사기념관 → 잠두봉포토아일랜드 → 남산팔각정 → 남산타워 → 남산고유소나무림탐방로 → 국립극장 → 장충체육관

 

서울한양도성길 낙산구간(2코스)

 

답사코스 : 장충체육관 → 광희문 → 흥인지문(동대문) → 흥인지문공원 → 이화동마을박물관 → 낙산공원놀이광장 → 한성대입구역 → 혜화문

 

 

그놈의 "Made in China 우환 코로나"인지 뭔지 하는 괴질이 3개월여 접어들며 주춤해져, 그동안 미루었던 (모임, 회의, 여행, 기타) 등을 개최하려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이태원 클럽에 다녀온 청소년들의 방종 때문에 또 다시, 전국을 무대로 코로나19 비상이 걸렸다. 이것이 자랑스런 대한민국 전교조 선생들에게 교육받은 청소년들의 오늘의 방탕생활 현주소다.

 

신천지교회가 코로나 발생을 확산시켰을땐 정부는 물론, 모든 언론들이 신천지교회 때문이라는 보도가 넘쳐났다. 그런데 이번 이태원 청소년들로 인한 코로나 2차 발생 원인은 정부도 언론도 책임문제 같은 것은 이야기도 안한다. 왜일까? 아마 지난 총선때 18세부터 피선거권을 주어, 덕본 현정권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 얼마동안을 방콩생활을 해야 할는지...... 기약이 없다. 그러다 보니 넘넘 답답하다. 옛말에 "臥死步生(걸으면 살고, 누으면 죽는다)"란 말이있다. 이 말을 새겨보면 방콕생활하다 누어 죽느니, 살아 걷는것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가벼운 걷기 운동 꿈을 꾼다.

 

서둘러 늘 나와함께 산행, 또는 둘레길 걷기를 해온 몇몇 지인들에게 연락을 한다. 517일 오전 9:30 숭례문(남대문)에서 만나 서울성곽길 3코스 남대문길과 2코스 낙산길을 걷자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517일 약속한 날 만나니 참석인원이 모두 6명이다. 우리는 트랭글 앱이 가르치는 코스를 따라 남산 성곽길을 따라 오르는데,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등을 지날 때 마다 뱃지를 받았다는 알림음이 울린다. 재미가 솔솔하다. 그러다 보니 일행들 너도 나도 죽어라 트랭글 앱 코스만 따라간다.

 

남산 팔각정, 남산타워다. 그런데 남산타워는 코로나 때문에 휴업이다. 인파도 드문드문 가문에 콩나듯 하다. 그런데 남산타워에서 한강 방향 저 아래가 이태원이다. 그러다 보니 행여 이태원에서 발생한 코로나 세균이 바람타고 올라 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서둘러 트랭글 이정표따라 남측순환로길에 들어선다.

 

싱그러운 대자연의 풍성한 활착이 마치, 뉴질랜드 여행때 가본 국립수목원 숲처럼 우거졌다. 그길을 따라 얼마쯤 걷다 보니 하늘높이 전망대 계단길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시내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흐린 날씨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풍경이 거무틱틱 회색 도시다.

 

계단을 내려서니 높게는 12m 높이로 치솟은 남산성곽길이 고풍스럽게 이어진다. 성벽따라 곳곳에 담쟁이 넝쿨이 벽을 타고 오른다. 찔래꽃, 수국꽃, 애기똥풀, 산딸나무 꽃들의 그윽한 향기가 좋다. 소나무숲길도 이어지는데, 싸이클 동호인들의 행렬이 줄지어 남산을 오른다.

 

어느사이 국립극립극장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여름철 산행길의 적 그놈의 새까만 산모기 극성에, 꽈리만한 상처를 얻고 서둘러 가던길을 나선다. 그런데 이상하다. 트랭글앱이 가르치는 코스가 도저히 방향이 왔다리 갔다리 해 감을 잡을 수 없다. 그 바람에 무려 반시간 정도 알바를 했다. 고생 끝에 겨우 신라호텔, 약수동방면 성벽길을 찾아 장충체육관에서 서울성곽길 3코스 남산길 코스를 마무리 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광희문, 흥인지문 낙산길 코스는 잠시 시내구간을 지난다. 숭인지문(동대문)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관리소에서 서울한양도성 스탬프투어 완주기념 뱃지를 받는다. 그리고 낙산코스를 오르는는데 여기도 또 해지난 5.18 타령 현수막이 눈꼴 사납다.

 

이화동마을박물관지역 오름길을 오르는데 무더위로 숨이 콱콱 막힌다. 앞서오른 일행들이 장미넝쿨 휘드러지게 핀 좌판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권한다. 단숨에 주욱 드리키니 그 맛이 꿀맛이다. 목마른 나그네에겐 최고의 음료수다.

 

다시 낙산공원놀이공원 인근에서 우리는 가던길을 돌려, 우측으로 통하는 암문을 내려서 한성대입구역 방향을 가는데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성곽이 고성(固城)의 풍치를 더한다. 간간이 우리들처럼 코로나 피해 길을 나선 시민들의 모습이 반갑다.

 

그렇게 좋은친구들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며 걷는, 서울성곽 남산길 낙산길 코스를 혜화문에서 마무리를 한다. 일행들과 함께 헤화문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몇 컷찍고 서둘러 종로5가역까지 도보로 걸어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각자의 일상으로 간다.

 

걸으면 건강하다. 걸어서 하늘까지가 나의 스로건이자 바램이다. 이날도 34,000를 걸었다.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 서울 성곽의 동쪽에 있는 대문으로,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린다.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혜화문(惠化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지붕건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육축에는 하부를 큰 장대석으로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을 불규칙하게 쌓아올렸으며 위쪽 좌우에 2개의 누조(漏槽 : 홈통)를 돌출시켰다. 그 상부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를 두었다.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