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74] 제3부 제1장 주제와 소재로 들어가는길 1. 풍부한 소재는...

2020. 3. 19. 16:05☎박동규교수문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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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제1장 주제와 소재로 들어가는길 1. 풍부한 소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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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님의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을 몇번 읽었지만, 읽는 당시는 이해가 되다가도 책을 놓고 나면 멍멍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교수님 저서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책 전권을 타자를 쳐, 블로그, 카페에 올려 시간, 장소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1. 풍부한 소재는 글쓰기의 바탕이 된다

 

  1) 글의 재료가 되는 소재에 대해 바른 눈을 떠야 한다

 

  중학교 때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흰 시험지를 나누어주더니 자유롭게 작문을 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멀거니 흰 종이를 보고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지나다니다가 한 자도 쓰지 않고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쓸것이 그렇게도 없니" 하였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간이 끝날 때쯤 되어서야 '그래, 우리 동네 다리 밑 움막에 살고 있는 거지가족에 대해서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거지가족을 떠올린 것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다리 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밭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굴러가서 움막 거적 앞에 멈추어 설 때도 있었고, 놀다가 지쳐서 흐르는 강물가에 앉아 있을 ㄸ면 엄마거지가 깡통에 철사로 손잡이를 단 밥통을 돌로 쌓아 만든 아궁이 위에 걸어놓고 나무토막을 모아다가 불을 지피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서움에 떨면서 이들을 훔쳐보았고, 어쩌다가 이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야, 왜 보니?" 하고 물을까 봐 겁이 났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을 글로 써보려고 하니까, 이들에 대해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가, 또 이들의 생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에대해 나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제목을 '우리 동네에 사는 거지가족' 이라고만 써놓고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국어선생님은 끝나는 종소리가 나자 교탁에서 시험지를 거둬들이다가 나처럼 제목만 써놓은 아이들을 칠판 옆에 서게 하였다. 모두 열명이 넘었다. 선생님은 운동장 철봉대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이놈들, 저편에 보이는 낡은 온실 이나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고 느낀 점을 적어내, 한 시간 내로 제출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가는 줄 알아" 하고는 교무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철봉대 밑에 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철봉대 밑의 모래밭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는데 그때는 마치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 놓인 것같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자리가 되었다. 

  한참을 낡은 온실을 보고 있노라니 유리창 너머로 노랗게 피어 있는 국화꽃들이 줄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낡은 온실의 겉만 본다면  누구도 온실 안에 국화꽃이 피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겉과 속이 다른 온실에 대해 써보려고 궁리를 하게 되었고, 결국 다리 밑에 사는 거지가족과 그들의 움막에서도 한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낡은 온실이라는 겉 속에 아름다운 국화라는 속이 있듯이 낡은 움막 속에도 따뜻한 가족이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겉만 보면서 살지 말고 속도 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작문을 썼다. 

  종례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고 아이들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시험지를 메워 교무실로 들어갔다. 국어선생님은 우리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또 무어라고 하실까 봐 마음을 졸이며 시험지를 내밀었다. 국어선생님은 내 글을 한참 동안 읽어보더니 갑자기 시험지를 담임선생님에게 내밀며 "이 글 좀 보세요. 얼마나 잘 썼어요" 하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도 내 글을 읽어 보더니 "아버지께 보여들려도 잘 써썼다고 하실 거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후 내 글은 교지에 실리기 까지 하였다. 

  무슨 그글을 쓰고자 할 때마다 나는 이 체험험에서 얻은 교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곤 한다. 

  나의 이 체험에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경우, 펜을 들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과정이 소상하게 들어 있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끌려나가게 된 것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제제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비록 거지가족의 생활에 대한 소재(subject matter)는 가지고 있었으나 글의 내용이 될 수 있는 소재로서의 의미를 그 속에서 찾아내지 못고 있었던 거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들을 어떻게 조직적인 하나의 글로 만드느냐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펜을 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을 하지만,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한 자도 적어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이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2) 체험만이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의 재료가 되는 것은 참으로 무한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체험에서부터 자연의 모든 현상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것과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소재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 시낭송회에 간 적이 있다. 시낭송회에 참석한 이들끼리 모여서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어느 30대 주부가 하소연을 했다. 문화센터의 수필 창작반에 다니고 있는데 요즈음에는 가기가 싫다는 것이다.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곁에서 듣고 있다가 "무엇이 자신이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부는 수업시간이면 선생님이 주부들이 써온 글을 읽게 하고 하나하나 평가를 하는데 모두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체험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대학을 졸업하고 곧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아 기르는 동안 집 안에만 있었으니 세상물정에 어두운 것을 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다섯 공주 집안의 끝에서 둘째라서 어려서도 집 안에서만 자라 다른 아이들과 놀러다녔던 일조차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또 서울서만 줄곹 살아서 자연과 교감해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주부들의 글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체험의 고백에 밀려서 무미건조한 일상만을 소재로 글을 쓰려니 자신이 없어지고,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가 없다는 강박감 때문에 창작반에 다니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백이 드러내고 있는 문제는 독자의 시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우리 집 앞에;서 문방구를 하고 있던 아지씨는 소설을 아주 좋아해서 항상 소설책을 펴놓고 읽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만 보면 우리 집에 있는 소설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나를 붙잡고, "너는 소설가 정비석을 알지?" 하고 물었다. 나는 "네, 우리 집에도 오셨구요. 후암동에 살고 계세요"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정비석 시는 여자관계가 복잡한 분이시지?" 하고 묻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그렇지 않은데요"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날 밤 아버지가 집에 오셨을 때 나는 "아버지, 정비석 선생님이 여자관계가 복잡한가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라고 하셔서 동네 문방구집 아저씨가 그러더라고 말씀드렸더니 "내일 찾아가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를 물어보라" 고 하셨다. 다음날 아저씨에게 가서 왜 정비석 씨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이놈아, 그분이 쓴 《청춘산맥》을 익어보니 체험이 없이는 도저히 그렇게 절실하게 쓸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야" 하고 대답을 하였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그대로 전해드리니까 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그 사람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았구, 소설의 내용에는 체험만 있는 것이 아나라 상상도 있는 것인 줄을 모르는 모양이야" 하셨다.

  이것은 쓰는 이나 읽는 이 모두 소재가 되는 것이 체험에만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ㅆ음을 드러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 관심을 가자고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실로 소재는 어느것이나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소재를 가지고도 막상 글을 쓰려면 막막해져서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소재를 글의 내용으로 변환시키는데 있어서 몇가지 방법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관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한 인물의 생김새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 작가의 관심이 사물 에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민우가 을지로 6가로 해서 동대문 밖 숙소로 돌아오자니까 웬 구두닦이 아이놈이 불쑥 앞을 막아 서서면서 양복 소매를 잡아 흔든다.

  그때 민우는 뭣 때문이지 마음이 좀 우울한데다 갓 지어 입은 양복을 그 때묻은 손에다 잡힌 것도 불쾌해서,

  "안 닦는다, 임마"

하고 빽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이놈은 조금도 탓하지 않고, 연방 검잡은 소매를 흘들면서,

  "아니오, 선생님 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산서요, 늘 선생님 신 닦잖았어요?"

  민우는 비로소 기억이 또렷해진다.

  "오오 인제 알겠다. 구칠이, 응 너 이놈 언제 서울 왔니?"

  "봄에 왔어요!"

  "그래, 왜 부산 재미없던?"

  구칠이는 그제서야 잡았던 소매를 놓고 입이 실쭉해지면서 발끝을 내려다본다. 그와 함께 구두코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영문을 모른 채 민우도 마음이 언잖다.

  팔꿈치에 구멍이 나고 소매 끝이 터실터실 풀린 도꾸리 샤쓰, 번들번들 윤이 나도록 때가 묻은 검정 즈봉, 이런 몰골은 이런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제 발이 한꺼번에 둘이라도 들어갈 만큼 크고, 유독 코가 뭉툭한 군화를 신은 것이 거추장스럽고 우습기도 하다. 민우는 담배를 꺼내면서,

  "그래 너 혼자만 왔냐?"

  구칠이는 대답 대신 민우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이리 오이소······."

  민우는 끄는 대로 옆 골목 안으로 따라 걷는다. 어느 집 블록담 밑에다 구칠이는 그 간단한 나무의자를 놓고 민우를 앉으라고 한다. 신부터 닦자는 것이다. 민우는 연모통 위에다 한 발을 올려놓으면서,

  "네게 닦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 1년도 넘지?"

  "이신 아직도 그때신이네요?"

-오영수, <후조> 중에서

 

 

    위의 글에서 민우가 만나게 되는 구두닦이 소년의 생김새는 전형적인 구두닦이의 모습 그대로이다. 윤이 나게 닳은 바지와 소매 끝이 풀어진 털셔츠 등은 이런 형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다. 유별나게 소년의 특정이 되고 있는 것은 군화이다. 유독 코가 뭉툭한 군화는 소년의 발이 두 개나 들어갈 만큼 헐렁한 것이기에 우습고 거추장스러게 보이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년이 구두닦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군화를 신고 있는 모습의 독특함을 내세워 소년이 지니고 있는 개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요사이도 길가에 조그마한 알루미늄으로 된 칸살막이 안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소년을 보면 무릅 근처가 구두를 올려놓고 닦아서 반질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남들이 다 보는 것 가운데도서 유별나게 군화라는 독특한 신발을 소년에게 신겨줄 수 있었던 것은 다음아닌 작가의 사물에 대한 관심의 깊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길에서 구두를 닦아 신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두닦이가 어떤 옷을 입고 연모통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그릴 수 있지만 이처럼 독특한 개성으로 장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재를 선택할 때는 소재에 들어 있는 전형적인 요소와 개성적인 요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4) 사물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한다.

 

  다음의 시를 보면 소재를 갈고 닦아서 표현하려고 하는 내용에 어덯게 맞추고 잇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바라기》는

고등학교 시절

육필로 쓴 내 단권 시집

나지막한 초가지붕

그 너머로 해바라기가 있는

장정은 친구가 맡아주었다.

 

자주 이사하는 북새통에

오죽잖은 습이나마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때의 허전함

젊은 날의 꿈이

일시에 정지되는 것 같았다.

시골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그것과 마주쳤다

《해바라기》와

세상 떠난 그 친구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오늘 빈집 앞마당

키가 커서 그런지

해바라기가 수척해보였다.

-임감빈, <해바라기> 중에서

 

  이 시에서 해바라기는 두 가지의 으미망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임강빈 시인이 고등학교 대 처음으로 만들어본 단권 시집의 제목이었던 해바라기의 세계이고, 다음은 시골 어는 빈집 앞마당에 수척하게 자란 해바라기가 담고 있는 세계이다. 이 두 세계는 시인이 이 시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주제에 의해서 하나로 묶여지고 잇다. 즉 어린 날의 해바라기가 품고 잇는 세계는 청춘의 꿈이 담겨 있는 추억의 해바라기이고, 수척해 보이는 지금의 해바라기는 현실에 던져져 살아가야 하는 변해버린 현존적 해바라기인 것이다.

  시인이 해바리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지나간 추억의 먼지 속에 담겨져 있던 첫 시집인 《해바라기》를 끄집어내게 된 것은 해바라기를 앞에 놓고 상상의 꽃을 피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없이 많은 날들을 아침마다 똑같은 길로 출근을 하게 되어 그 길가에 세워진 간판들을 다 외울 수 있게 되어도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출근하는 이와 길 사이의 상관성은 조금도 발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버스가 고장이 나서 어느 지저에 쉬었다가 다시 다른 차편을 이용하였다면 기억의 창고에 쉬었다 갔다는 사실은 입력이 되는 것이다.

  해바라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해바라기라고 하면 키가 크다는 통념적 인상에 매달리게 되지만 이 시인은 키가 큰 것을 뛰어넘어 수척하다는 인사을 하나 더 갖고 잇고, 이것이 이시를 옛날과 연결하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깊이 보는 버릇을 가져야 훌륭한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