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건강하다 여강길 4코스 5일장터길 12.4km역사탐방 나들이

2019. 5. 16. 12:55☎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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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건강하다 여강길 4코스 5일장터길 12.4km역사탐방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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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심회 수요산행일이다. 이번에는 산행대신 여주 5일장터길(12.4KM)를 걷기로 했다. 인천부평에서 07:30분 출발 경인전철타고 신도림(2호선)에서 다시 강남역까지 간다. 그리고 다시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으로 판교에 도착해, 판교에서 경강선을 갈아타고 종착역인 여주역에 도착하니 09:40분이다. 전철만 무려 2시간 10분을 탔다.

 

여주역에서 우리는 여주시티투어 버스로 신륵사에 하차해, 신륵사 역사탐방을 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신륵사하면 우리나라에서 내놓라 하는 전통과 역사를 품은 사찰인데, 의외로 사월 초파일 연등 길이가 외소하다. 그뿐아니다. 대웅전 외곽에 내 걸린 연등은 몇 년째 재사용해, 색이 빛바래 보인다. 더 보기 민망한것은 신륵사 범종 및 북을 몇 년이나 청소를 안했는지 먼지가 겹겹이 쌓여있다. 사찰에도 富益富 貧益貧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이날 우리일행들이 도보여행을 하기로한 코스는 5일장터길 12.4km. 신륵사 황포돗배선착장 여주도서관 연인교 영월루 여주시청 여주5일장(여주중앙로) 대로사 세종산림욕장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여주역 구간이다.

 


여주역 조형물

한글의 도시



여주는 온통 세종대왕 도시다




신륵사(神勒寺)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우왕 5) 각신·각주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현종 12)에는 계헌(戒軒), 1702(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 높이 300cm.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는 각 부재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지복석 위에 복련이 조각된 하층 기단부가 있으며, 그 중석에는 화형으로 장식된 우주가 있고 그 사이에는 파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갑석은 상하에 앙련과 복련이 있고 중간에 넓게 돌출된 띠가 있다. 상층 기단부의 중석 역시 화형의 우주가 있고 그 사이에 운룡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 갑석에는 복련만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체감률이 완만하며 옥신석은 옥개석의 두께와 비슷할 정도로 낮다. 옥신석의 각 면에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수평에 가까워 낙수면도 완만하며 합각 부분에서 매우 약한 반전이 있을 뿐이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고 철제 찰주만 남아 있다. 현재 8층의 옥개석 위에는 작아진 옥개석과 옥신석이 1개씩 남아 있어 더 많은 층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는 전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앙화·보륜·보개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 영릉의 특징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 전시유물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 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행사안내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하는 데 2002년에는 탄신 605돌이 된다. 탄신 다례행제 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 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데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또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영릉봉향회 주관으로 세종대왕 승하일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8일 정오 12시에 종친관계자 300여명의 참석으로, 소헌왕후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28일 정오 12시에 각각 개최된다.

* 세종대왕의 업적


1) 한글창제
대왕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2) 학문창달
대왕은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3) 과학의 진흥
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등 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4)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 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5) 음악의 정리
조선 초기 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 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http://sejong.cha.go.kr ]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 효종대왕릉의 형태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 대동법과 상평통보, 효종에 대하여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세종대왕릉 관람 및 통행제한 안내 : 영녕릉유적정비사업 공사구역 확대]
- 제한기간 : 2017.11.1~2018.12.31 / 14개월간
- 제한구역 : 세종대왕릉 전역(능침공간만 제한적으로 관람)
- 관람구역 : 세종대왕릉 능침, 효종대왕릉, 세종대왕역사문화관
- 관람료 : 무료입장


[참고문헌 문화재청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http://sejong.ch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