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1. 12:29ㆍ☎청파산행과여행기☎
6·25 한국전쟁의 격전지 피의능선 DMZ 백마고지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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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격전지 피의능선 “DMZ 백마고지” 스토리텔링
얼마전 산(山)과의 인연을 통해 절친한 형,제가된 아우에게 지난 목요일 전화가 왔다.
‘형님 금요일(8월17일) 근무 끝내고 형님과 야간열차타고, 지리산 둘레길 도보여행이 하고 싶은데 어떻세요.’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1박2일 지리산 둘레길 도보여행은 17일 오후 8시 부평역에서 아우를 만났다.
야간 열차를 타기전 부평역 인근에서 식사를 겸한 반주도 서너잔씩 했다. 식사중 내가 제안한다. ‘아우 나는 장노(장기간 노는 사람)이니 상관 없지만, 아우처럼 직장 출근을 하는 사람은 1박2일 장거리 여행히 그렇게 간단친 않을 거야. 힘도 들고 일정이 빡빡해서 쉽진 않을거야.’ 그바람에 우리의 여행 계획은 변경이 된다.
우리나라는 6·25한국전쟁이래 남과 북이 총뿌리를 겨누고 대처한지 68년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돌아가는 분위기 봐선,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철의 장막이 될지 모를 DMZ 최전방 지역 탐방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거침없이, 6·25한국전쟁 당시 중공군과 최대 접전을 치러, 피의능선으로 알려지며 승리했던, 백마고지를 선택했다.
갑작스럽게 여행지 선택을 하고 나니 밤 11시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부평역 인근 찜질방에서 우리는 1박을 했다. 집에서 애초 걸망을 지고 나설 땐, 분명히 아내에게 야간열차타고 지리산 간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찜질방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입장 난처할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쁜짓한 것 아니니 당당하게 찜질방에서 1박을 하고, 토요일 아침 7시 부평역에서 전철을 갈아타며 동두천역에 도착한다. 10시발 경원선 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그런데 열차표 구입을 하다보니 열차시간이 10시 48분으로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바람에 무려 한 시간여 시간낭비를 해했다.
그 사이 동두천역 스낵 코너에서 간단하게 아침겸 점심식사를 한다. 그리고 열차를 탔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신탄리~백마고지역 사이 경원선 철도 공사로 연천까지 밖에 안간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연천역에 하차해 다시 백마고지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백마고지역에 도착했다.
정오 12시다. 그런데 이곳은 공기가 다르다. 그뿐 아니다. 하늘이 수정처럼 맑다. 하늘엔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타고 흰구름이 두둥실 백마고지를 넘어 북녘땅으로 간다. 이곳 철원 평야는 한국전쟁 휴전당시 김일성이 철원평야를 남쪽에 넘겨주고 몇날 며칠을 울분을 삼켰다는 철원평야엔 벌써 누르스럼하게 황금 들녘이 익어가고 있다.
불과 며칠사이 그렇게 무덥던 폭염도 가시웠다. 아우와 함께걷는 백마고지로 향하는 들판길이 정겹다. 올해도 풍성한 가을을 예고해도 좋을 듯 하다. 백마고지다. 벌써 오후 2시 50분이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전 모터싸이클을 타고, 백마고지를 향해 달리던 외국인들도 모여있다. 그런데 아우가 유창한 영어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한다. 부럽다.
아우덕에 외국인들과 기념사진도 찍는다. 그들이 우리가 태극기 스카프 한 것을 보고 ‘원더풀’을 외친다. 그들과 헤어져 우리는 백마고지 기념탑을 지나, 전망대에서 백마고지를 바라보며 촬영을 한다. 이곳 백마고지 전투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여일만에 중공군 1만 3,000여 명과 아군 9사단 병력 3000여명이 희생되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6·25 한국전 당시 내나이 7살였다. 부모님따라 나선 피난길에 중공군 시체가 신작로변에 즐비하게 깔려 있는 것을 넘고 넘었다. 그 어린시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6·25 한국전쟁은 나에겐 철천지 웬수다. 때문에 북한군, 중공군놈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하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자유 대한민국의 국방을 지키기 위하여 젊은이들이 최전방을 수호하고 있는데, 촛불 선동으로 통수권자가 된 주사파정권이 갑자기 최전방을 지키는 정예군 2개사단을 철수시키고 군인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런, 해병대 1개사단을 해체 시킨다는 소식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 북한과 우리나라 양측이 합의하에 서로 최전선에 군병력을 철수 시킨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북한군은 10년 복무기간을 13년으로 연장하고, 암암리 무력증강을 확충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가 먼저 자진해서 군 복무기간을 단축고 최전방 정예군을 감축하는 의도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분명히 꼼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사파정권 통수권자가 빨갱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치 않으면, 왜 상대측은 병력 증강을 하는데, 왜 우리나라가 스스로 무장해체를 한단 말인가? 의도가 의심스럽다.
정말 현역군인 복무기간을 단축하고, 병력을 감축 했을 때, 만약 북한군이 공격하다면 이건, 한마디로 두 손들고 그냥 내주겠다는 불량한 의도와 꼼수가 배경에 깔린, 통수권자의 생각이 분명한 것 같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피땀흘려 이루어낸 나라인데, 싸워보지도 못하고 북한에 항복할 수는 없다. “안되면 되게하라” 내 비록 노인이지만, 배굶으며 일으켜 세운 나라를 지키자는것이 내 의지고 각오다.
“체력은 국력”이다. 만약 유사시 나는, 당당하게 지원군으로 나서 싸울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하루 평균 17000~30000보를 걷고, 핼스 2시간, 그리고 수시로 등산으로 몸을 다진다. 이정도 체력이면 10년전 금강산갈 때 본, 빼빼마른 북한군 서너명은 육박전해도 자신있을것 같다.
백마고지를 내려서 열차 타고 귀가길에 아우와 다짐을 한다. 우리 만이라도 철저히 내부 빨갱이 주체사상 세력 물리치는데 앞장 서자고...
백마고지 전투
6·25 당시 보병 제9사단이 철원평야 북단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다음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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