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3. 09:00ㆍ☎순수수필작가회룸☎
[2017 문창 16]인문학적 성찰의
魔力
문광영
○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학습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벗, 스승.
→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
○ 三人行
必有我師焉(세 사람이 길을 가면 여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공자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거지든 도둑이든 사기꾼이든 다 한 가지 정도는 배울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因而學之 又基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최사이고, 배워 알게 되는 자가 그 다음이고, 어렵게 알게 되는 자가 또 그 다음이 될 것이나, 어려우믈 겪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백성을 일러 최하라 한다. (論語 季氏). -有生而知之自, 有學而知之者, 有困而知之者
○ 인간이 무엇을 터득하는 데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형, 학이지지(學而知之)형, 곤이지지(困而知之)형의 세 종류가 있다. 이를 보통 삼(三知, 生知, 學知, 困知)라고도 한다.
○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아는 경지를 말하고, 학이지지란 배움을 통하여 아는 경지를 말하고, 곤이지지는 고생고생 힘들여서 아는 경지를 말한다.
○ 三知 중에 끝자리인'곤이지지(困而知之)'라의 사전적 풀이는 '지식 등을 고생(苦生)하며 노력한 끝에 깨닫는 일'이라 정의 하였고, 이는 곧 배우고 익히고 또 되뇌면서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 지적능력을 체득한다는 듯으로 봅니다.
○ 성인(聖人) 공자께서도 스스로 '생이지지'가 아닌 '학이지지'로 謙辭)하셨고 대학자인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선생도 자신은 '곤이지지(困而知之)'라고 하였다. 물론 후생(後生)들에게 '배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 함이었을 것이다.
○ 내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학이지지형이나 곤이지지형에 속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그져 열심히 노력하는 길이다.
1. 인문학적 통찰로 지혜의 성찰, 깨달음, 발효(醱酵) 의식, 돼새김질을 하면서 살기.
○ 최근 인문학이 일반인들한테 관심과 인기의 대사잉 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만큼 각박하고 위험해졌다는 절박성의 반증(김우창), 방향 상실의 시대.
○ 인생의 정해진 길은
없다.
○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 - 체험과 앎을 섞어 발효시켜 나가는 일→인문학의 힘.
○ 언제든 공부하자. '4년제 대학'을 '100년재 대학'으로 (최재진)
"지식의 반감기가 줄어든 세상에 살고 있으니, 옛날처럼 한 번 배우고 평생 사는 게 아니라 계속 배우고 또 쓰고 해야 한다."(피터 드러커)
○ 앎, 삶이란 : 한 가지로 '사람과 세계를 보는 눈'의 깊이, 사람으로서의
눈높이.
○ 문학에서의 '앎과 삶'이란 하나의 새로운 감동, 깨달음을 통한 '省察意識'이다.
○ 소크라데스가 아네네 사람들에게 "성찰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설파한 의미, 성찰을 할
능력돠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오느날도
마찬가지.
폭양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 질러 저물녘 노을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암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이건청<소금> 《시와 시학》(20016
가을호)
● 한 인생의 삶이란 변신의 과정이다. 이 변신의 과정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바로 욕망과 꿈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 꿈이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이 허망한 것. 그러나 허망할 지라도 우리 인간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향해
줄곧 걷는다. 곧 꿈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얻으려는 대상이 없으면 사람은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대생만을 취하면 더 이상 아무런 욕망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을 쥐는 순간 그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나는 것이다. 학문, 돈, 권력, 성의 추구도 이와 같아 계속 상승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허상을 믿는다. 그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그것을 얻으려 한다. 바닷물의 결정체인 소금, 그 소금은 류시화가 말했듯이 '바다의
눈물이요, 바다의 아픔이요, 바다의 상처'이다. 그래서 소금은 쓰고 짠 맛을 내어 모든 음식, 삶의 여정에서 간을 맞출 수 있고,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제 시인은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고 한다. 모두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거리고자 하고 잇다.
해탈이다. 속세의 정점에서 완전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다. 탈속의 경지에 이른 시인 자신의 깨달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자연의 모든 사물에는
흔이 깃들여 잇다. 그래서 자연의 혼을 일궈내는 시 언어의 마법은 상처의 문학이요. 치유의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광영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
문학평론가)
○ 성찰의 인문학적 소양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 첫째, 인문학은 레고다. 둘째, 인문학은 흐르는 강물이다. 셋째, 인문학은 요리가 아니라 요리법이다. 넷째, 인문학으로 사고를 쳐라!
○ 인문학에 목말라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에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인문학은 밥이다. 배움과 통찰, 깨달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힘 있는 세사이옥, 진정한 참 인가.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천국이고 극락이다.
○ 서양 인문학(humahities) : 로마의 정치가 Marcus Tilius Ciciuso가 교육프로그램을 짤때 원칙으로 삼앗던 Humanitas에서 유래. 이말이 교양교육의 의미로 확장된 것은 2세기 무렵 로마의 수필가 Aulus Gellius에 의해서였고, 지금의 미국대학의 교양과정을 일컫는 liveral Arts와 상통, 중세 때에 리버럴 아츠는 자유학문을 의미하는 말(trivium 3학 = 3문법, 수사학, 논리학, quardrivum 4학 =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묶어 자유학문이라고 했음. 르네상스 시대에는 전신과 신체의 통합적인 완성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기족 7과목에 고어와 고문예를 더했다.
○ 동양 인문학 : 人文은 天文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文, 史, 哲로 좁은 의미로 분류하기도 한다.
○ 인문학의 열풍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맞닿아 있다. 일에 자신의 삶을 버리면서까지 일에 매달리고, 조직에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매정하고 가혹한 현실.